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일곱 번째 이야기 주제는 제3공화국의 탄생이다. <편집자>
서중석 : 제5대 대선 후보들의 지방 유세는 1963년 9월 20일에 시작됐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에 쌈판이 벌어졌다. 사상 논쟁을 도발한 건 윤보선이라고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데, 박 후보 쪽이 윤 후보 쪽을 도발했다고 볼 수 있다.
윤보선 후보는 9월 21일 목포에서 지방 유세를 시작했다. 이때 윤 후보는 '혁명 정부'가 어느 때보다도 부정부패했고 "군사 정부는 지난 2년 반 동안 기아, 부패, 실업, 불법, 분열 등 오악(五惡)의 실정을 저질렀다"면서 군정의 오악을 몰아내자고 했다. 그런데 9월 23일, 박정희 후보가 서울중앙방송국(오늘날 KBS)을 통해 10분간 정견 방송이란 걸 했다. 박정희 생애에서 처음으로 한 정견 방송이다. 참 역사적인 정견 발표를 한 것이다.
여기서 박정희는 "이번 선거는 개인과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민족적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사상의 대결"이라고 말했다. 민족적 이념을 망각했다고 한 건 주체 의식을 망각했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다. 그러면서 "이조 500년 동안의 사대주의적 근성과 일제 식민지적 근성을 일소하고 민족 주체 의식의 확립 외에 외국의 주의, 사상, 정치 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라고 얘기했다.
프레시안 : 생애 첫 정견 방송에서 아주 강한 주장을 했다.
서중석 : 앞부분이 사상 논쟁을 유발한 것이지만 뒷부분도 음미해볼 수 있다. 9월 28일 서울 유세 등 중요 유세에서 여러 번 나온 얘기다. 일제 식민주의 사상을 전파한 관학자들이 '한국인은 사대주의 근성을 가지고 있고 게으르고 당파성이 강하고 노예근성을 가졌다'는 민족성론을 주장하지 않았나. 이걸 "식민지적 근성"이라고 박정희 후보가 얘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는 이 식민지 근성이라는 걸 강변하면서 '한국인은 자주성, 자립성이 없고 따라서 일제 지배를 받는 것은 한국인의 사대주의나 식민지적 근성, 민족성을 볼 때 당연하다‘, 이런 식민 사관을 쭉 펴오지 않았나. 그런데 박정희가 여기서 또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 사관을 거의 비슷하게 역설하면서 '이게 주체 의식, 자주 의식이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연설 뒷부분을 보면 "외국의 주의, 사상, 정치 제도를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 적용, 실시하자"고 돼 있다. 전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이건 앞에서 말한 "식민지적 근성"과 함께 이미 1962년에 나온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여러 차례, 아주 자주 언급한 것이다. 1963년에 나온 <국가와 혁명과 나>에서도 언급한다. 그러고는 이 방송 연설뿐만 아니라 9.28 서울 유세 등에서도 똑같이 이 얘기를 하고 있다. 자주 의식이란 식으로 얘기하고 있는데, 여기서 얘기하는 "우리 체질과 체격에 알맞도록"은 나중에 유신 시대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로 구체화된다.
그러니까 이런 주장은 유신 체제의 '한국적 민주주의'와 닿아 있는 것 아니냐고 볼 수 있고, 일본의 황도파 청년 장교들의 쇼와 유신 주장과도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주장을 방송 연설은 물론 유세장에서 이렇게 공공연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에 그런 주장이 오늘날 역사 인식과는 다르게 먹혀들 수 있는 면이 있다는 걸 생각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박정희가 잘못된 식민 사관, 특히 대륙 침략의 첨병이던 일제의 청년 장교들이 강하게 포지하고 있던 주장 같은 것들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든다.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여순사건 관련"…박정희와 윤보선의 뜨거운 공방
프레시안 : 윤보선 등이 강하게 맞받아치면서 사상 논쟁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윤보선 측은 박정희의 경력을 문제 삼았다.
서중석 : 박정희가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이라고 몰아가니까 윤보선이나 허정이 발끈하며 치고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9월 23일 민정당이 순천, 여수에서 유세를 했는데 이때 윤보선은 "박정희가 주장하는 행정적 민주주의는 이질적인 것으로, 기어이 배격해야 한다"는 식으로 얘기를 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9월 24일 전주에 와가지고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정부에 있는 듯하다"는 중대 발언을 했다. "내가 할 말을 박 후보가 방송을 통해 했다. (…) 지금은 민주주의와 가식적·이질적 민주주의가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오히려 박 의장의 사상이나 민주주의 신봉 여부를 의심해 마지않는다. (…) 어제(23일) 여수 강연에서 느낀 바가 있다. 여순 반란 사건의 관계자가 정부 안에 있다는 걸 상기해야 한다." 윤보선이 "그렇다고 박정희 의장을 보고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는 했지만, 어쨌건 세게 치고 나간 것이다.
(윤보선의 여순사건 관련 발언은 '박정희 후보가 야당 지도자들에 대해 가식적 민주주의자라고 말했다'는 기자의 물음에 답하면서 나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사상 논쟁 문제와 관련, 윤보선은 1989년 <동아일보>에 연재한 회고에서 이렇게 밝혔다. "처음부터 그(박정희)를 그렇게 심한 말로 공격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먼저 나를 자극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렇게는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편집자>)
그러자 민주공화당은 윤보선을 허위 사실 유포, 후보자 비방 금지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다. 박 의장은 계속해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와 강력한 민족적 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의 싸움이라고 얘기했고 그것을 이후락 최고회의 대변인이 9월 26일 다시 잘 설명해줬다. 이게 뭘 의미한다는 것을 이후락에게 설명하게 한 것이다. "박 의장은 4.19혁명, 5.16혁명을 유발한 책임이 있었던 모든 구정치인 그리고 특히 5.16혁명 직전 남북 협상론이 횡행하고 공산 세력의 간접 침략으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방관·좌시했던 모든 정치인들을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신봉자라고 규정해왔다", 이렇게 몰아세웠다. 장면뿐만 아니라 윤보선도 그렇다는 것이다.
프레시안 : 5.16쿠데타 후 박정희 쪽에서 반공 성향이 강한 장면을 용공 세력으로 몰아세우려 한 것의 연장선 위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서중석 : 그렇다. 장면이나 윤보선은 박정희보다 더 세면 셌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골수 반공 세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박정희가 이 세력들에게 가식의 자유민주주의라고 하니 윤보선 쪽은 더 발끈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황태성 사건까지 허정 쪽이건 윤보선 쪽이건 물고 늘어지기 시작한다. 9월 25일에는 서울에서 구국청년동지회 명의로 '박정희 씨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삐라가 뿌려졌다. 황태성과 관련된 여러 의혹을 박정희가 밝혀야 한다는 내용인데, 거기에는 "황태성은 대구 10.1 폭동 사건 당시 박정희 씨의 실형(實兄)과 같이 활약했다는데 그에 대한 진상을 밝혀라"라고 물은 것도 있다. 실형은 박상희를 가리킨다. 사실 당연한 것들을 물었더라. 그러면서 사상 논쟁이 계속해서 치열하게 됐다.
9월 28일, 예전엔 야당 도시로 유명했던 대구에서 윤보선은 전에 한 말을 더 치고 나간다. "여순 반란 사건에 공화당 후보 박정희 씨가 관련됐다고 볼 수 있다"고 하면서 박정희를 이질적 사상의 소유자로 막 몰아붙였다. 그러자 그날 바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여순 반란 사건 관련자가 정부 내에 있다는 건 터무니없는 소리다", 이렇게 받아쳤다.
박정희 좌익 전력 문제 삼은 건 잘못?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프레시안 : 윤보선 쪽에서 박정희가 걸어온 길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여기서도 드러난다.
서중석 : 이 사상 논쟁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볼 수 있다. 하나는 윤보선 쪽에 정보가 너무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 이 한마디만 하면 정곡을 찌르는 것인데 그걸 모른 것이다. 사실 박정희가 남로당 프락치였다는 걸 얘기해줄 수 있는 군인들이 있었지만, 요즘과 달리 어느 누구도 윤보선 후보한테 찌르지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박정희 쪽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고 받아쳐도 윤보선 쪽은 '여순사건에 관련된 것 아니냐', 계속 이렇게만 몰아붙였다.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현대사 전체가 알려지지 않거나 왜곡된 게 너무나 많았다. 그렇지만 쿠데타를 일으켜 일국을 장악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 대해서조차 그 사람이 무엇을 했는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았는가를 모르고 있었다는 건 큰 문제다. 박정희 일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건데 그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을 하나 생각해볼 수가 있다.
프레시안 : 윤보선 쪽은 1963년 대선 때뿐만 아니라, 대선 한 달 후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이념 공세를 펼쳤다. 이것이 적절했는지 의문을 품는 시각도 있다.
서중석 : '윤보선 쪽이 사상 논쟁을 일으킨 건 잘못 아니냐. 그건 공정한 것이 아니지 않느냐', 요새 이런 주장들이 좀 있더라. 박정희, 전두환 쪽에서 그런 색깔론으로 민주화 운동 세력을 비롯한 국민들을 그렇게 몰아붙였는데, 야당 쪽은 그래선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
1960∼1970년대, 특히 유신 체제에서 반대 세력 또는 노동 운동을 비롯해 진지한 사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다 좌경, 용공으로 몰아붙이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하지 않았나. 민청학련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포함해 그런 사건이 참 많았다. 또 김대중 같은 경우 1970년대에 권력 쪽에서 유언비어를 유포했고, 전두환 신군부도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나. 심지어 김대중이 1990년대에 대선 후보로 나왔을 때 어느 신문에서는 사상 검증, 정견 검증까지 하겠다고 나오지 않았나.
프레시안 : 이른바 사상 검증의 압권은 제15대 대선을 두 달 앞둔 1997년 10월 8일 극우 성향 잡지인 <한국논단>이 주최한 '대통령 후보 사상 검증 대토론회'였다. <한국논단>은 "최소한의 확인도 없이 우리나라 지식인과 시민, 종교 단체를 좌익으로 몰았던 극우 월간지"라는 비판을 받던 곳이었다. 그런 <한국논단>이 주최한 이 행사의 핵심 표적은 김대중 후보였다. 이런 행사였는데도 방송 3사(KBS, MBC, SBS)가 생중계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한편으로는 분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인 기억이 생생하다.
서중석 : 그렇다. 그런 식으로 김대중 후보에 대해 모모 언론 등에서 몰아쳤다. 이렇게 민주화 운동을 좌경, 용공으로 몰아가고 수많은 사건을 조작한 그 세력이 지금도 자신들과 대립하고 자신들을 비판하는 세력을 막 '종북'으로 몰아세우지 않나.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참 나쁘다는 생각이, 1963년 대선에서 윤보선도 너무한 것 아니었느냐는 시각의 밑바탕에 강하게 깔려 있다. 그런데 당시는 극우 반공적인 모습을 누가 더 잘 보이느냐 하는 걸 경쟁하는 사회였다. 그래서 박정희는 장면조차 용공 세력으로 몰아가면서 자신의 쿠데타를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았나. 미국에 잘 보이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혁신계 대부분이 반공적인 우파 또는 반공적인 중도 우파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세력까지도 다 체포, 투옥하고 반국가 사범으로 몰아 중형에 처하고 그랬다.
그랬는데 '대통령 후보인 박정희가 남로당에 깊숙이 관여했다', 이걸 당시 윤보선 측이 잘 모르긴 했지만 하여튼 사실 아닌가. 남로당 프락치로서 이재복을 비롯한 남로당 중요 간부를 만난 것도 사실 아닌가. 적어도 박정희에게 석연치 않은 과거, 그리고 이상한 행위를 한 게 있었다고 할 때 그건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본다. 이것조차 색깔 논쟁이라는 식으로 얘기한다는 것은 그 당시의 상황이나 윤보선 쪽에서 어떤 식으로 치고 나갔는가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본다.
지금 야당이나 언론이라고 하더라도, 또 청문회 같은 게 열린다고 할 때 이런 문제에 대해 '사실이 뭐냐. 진상이 뭐냐'를 강하게 파고드는 건 나는 당연하다고 본다. 예컨대 2012년 대선에서 야당이나 언론이 박근혜 후보와 유신 체제의 관련성을 제대로 비판했나? 그렇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비판할 것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조차 안 하는 것은 중국 고사에 나오는 송양지인(宋襄之仁)과 같은 짓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다만 1963년 대선에서 너무 대통령 싸움에 몰두해 윤 후보건 박 후보건 사상 논쟁에만 매달려 서로 공격하고, 그래서 윤 후보 쪽에서 신선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것, 이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건 얼마든지 비판해야 하는 것이다.
좌익 전력엔 쌍심지, 친일 문제엔 침묵
프레시안 : 사상 논쟁이 전개된 과정을 돌아보면, 박정희의 좌익 전력은 들추면서도 친일 여부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는다. 윤보선이 한민당 출신인 것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런 면에서 해방 후 한국 정치의 특징을 드러내는 풍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중석 : 박정희와 남로당의 관계 문제를 보더라도, 박정희가 일제 때 창씨개명을 한 이름조차 과연 윤보선이 알고 있었느냐. 난 이것도 몰랐을 거라고 본다. 하여튼 한민당은 한 번도 친일파를 숙청하자고 한 적이 없다. 해방 직후에 그랬다. 그렇지 않나. 그리고 이 당시 군 수뇌부가 친일 군인으로 돼 있었으니, 군을 건드리는 게 될 수도 있었다. 내가 예전에 고 리영희 선생한테 개인적으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구상에서 식민 국가 그러니까 식민지를 통치한 나라의 군인이 독립 후 국가 원수가 된 경우는 박정희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더라.
사실 그 당시에 친일파 문제는 꺼낼 수조차 없었다. 친일파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강성한 때가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에 걸쳐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난 한다. 이승만 정권에서 장차관의 친일파 비율이 말기로 갈수록 심해진다. 그건 통계로 얘기할 수 있다. 자유당 간부도 마찬가지다. 말기로 갈수록 자유당 간부 중에서 친일파가 더 많아진다. 1950~1960년대엔 정치계, 관계, 경찰, 군에만 친일파가 쫙 깔려 있는 게 아니었다. 경제계도 그렇고 문화계도 친일파가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1950년대 중반에 언론인 최석채는 '친일파 문제를 거론하는 건 계란을 갖고 바위를 치는 격이다', 이런 얘기를 했다. (1955년 8월 29일 최석채는 이렇게 썼다. "모든 사회의 지배 계급이 일제 통치하의 인적 구성과 과연 얼마나 달라졌는지 눈을 흘겨보면 기막힌 상태요, 오늘날 그 세력에 대항하자면 마치 계란을 가지고 바위를 깨뜨리는 격의 바보짓이라고 세상 사람은 조소하리다. 그러나 이 민족에 손톱만 한 자주성이 있고 본능적인 설분(雪憤)이 있다면 전 민족의 가슴속에 말하지 못할 그 무엇이 울부짖어 있음을 역력히 알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편집자>) 1950년대 후반이나 1960년대엔 그야말로 친일파 세상이다시피 하니까 한민당 출신인 윤 후보가 아니라 하더라도 친일파 문제를 누가 거론할 수 있었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선거가 뜨겁게 달아오르면서, 박정희가 지면 쿠데타가 다시 일어날 수도 있다는 협박성 발언이 민주공화당 쪽에서 나온다.
서중석 : 선거 말이 되면서 싸움은 상당히 복잡하게 돌아갔다. 윤보선이 9월 28일 대구에서 강경 발언을 한 다음 날(29일), 당시 공화당 의장이자 박 후보 선거 사무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던 윤치영이 광주에서 이런 말을 한다. "썩은 인간들이 정권을 다시 쥔다면 혁명이 또 일어날 것이다." 윤보선 후보나 허정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쿠데타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얘기다. 그렇게 되면 "내가 앞장을 서서라도 혁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윤치영은 부연 설명까지 한다. "썩은 정치인이란 (박정희의 민정 불참과 군의 중립화 등을 수락한) 2.27 선서에 참가했던 모든 정치인을 말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김재춘, 송요찬을 총살해야 한다"고 했다. 김재춘이 자기 회고에서 분노하더라. 사건이 막 커지니까 박 후보는 윤치영한테 지방 유세를 그만하고 즉각 귀경하라고 지시하고 당에서는 막 변명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초대 내무부 장관으로서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윤치영은 박정희 정권 때는 박정희와 밀착했다. 3선 개헌에 앞장섰고 유신 쿠데타도 적극 지지한다. 3선 개헌 한 해 전인 1968년 "단군 할아버지 이래 위대한 지도자이신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한껏 치켜세우는 등 낯 뜨거운 발언을 많이 남겼다. 이 때문에 야권에서는 윤치영이야말로 단군 이래 아첨꾼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한편 윤치영과 윤보선은 한집안 식구다. 윤치영이 윤보선의 삼촌인데, 나이는 조카 윤보선보다 한 살 어렸다. <편집자>)
프레시안 : 10월 들어 야권 후보가 연이어 사퇴하면서 박정희와 윤보선의 일대일 구도가 만들어진다.
서중석 : 10월 2일, 허정이 대선 후보에서 사퇴했다. 10월 7일엔 옥중에서 송요찬이 사퇴했다. 박정희 대 윤보선 양자 대결 구도가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아주 강한 분위기 쪽으로 가버린다. 10월 9일 안동에서 윤보선 후보는 "공화당은 공산당의 돈을 가지고 공산당의 간첩이 와서 공산당 식으로 조직한 정당이다", 이렇게 주장했다. 이것도 과한 소리를 한 것이다. 이렇게까지 막 열을 냈다.
그런데 사상 논쟁에서 윤보선 후보 쪽한테 결정타를 먹인 발언이 나오고 말았다. 이것도 2류, 3류 급밖에 안 되는 찬조 연사가 그다음 날인 10월 10일에 해버린 것이다. 김사만이 영주에서 윤보선 쪽 찬조 연설자로 나섰는데 "부산과 대구는 빨갱이가 많은 곳", "김일성을 보면 만세 부를 사람이 많다"고 해버렸다. 아주 무시무시한 소리다. 지금 인민군이 쳐들어오면 이 지역 사람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고 해버린 것이다. 이걸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겠나. 바로 서울 민정당사 습격 사건이 일어났다. 이 발언 때문에 민정당은 국민한테 사과하고 그랬다. 너무나 잘못된 발언을 해버린 것이다. (김사만은 1961년 5월 13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러나 5.16쿠데타 직후 국회가 해산되면서 김사만이 당선의 기쁨을 누린 건 이틀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48시간 국회의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48시간 국회의원'은 5명인데, 그중 한 사람이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대중이다. <편집자>)
윤보선 측의 마지막 승부수, <동아일보> 호외
프레시안 : 김사만은 대선 패배 후인 10월 20일 민정당에서 제명된다. 어쨌건 김사만의 망언은 윤보선 쪽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중석 : 이걸 만회하기라고 할 것처럼 10월 13일엔 <동아일보> 호외가 나와 버렸다. 여순사건에 박정희가 관련됐다는 내용이었는데 이 호외에는 아주 구체적인 사실이 열거돼 있었다. 1949년 2월 17일 자 <경향신문>, 2월 18일 자 <서울신문>에 난 것을 <동아일보> 호외에서 요약한 것이다. 박정희에 대한 군사 재판 내용을 쓴 기사였는데, 당시 박정희와 관련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썼다. 그런데 이 <경향신문> 보도에, 재판과 관련해 남로당 프락치란 말은 안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여튼 재판 당시 상황을 썼고, 그러면서 박정희에게 무기 징역이 언도됐다고까지 써 놨다. 이건 당시 신문에 난 내용이니 부정하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런데 그 호외 바로 아래에 민주공화당 반박문도 실어줬다. '이건 조작된 인신공격이다'라고 하면서 '박정희는 재판 받은 일도 없고 관제 공산당원으로 몰린 사실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승만 정권 때 헌병 총사령관을 했던 원용덕, 참 치사한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사상 논쟁에서 이런 식으로 박정희를 옹호했다. 민주공화당이 그 얘기를 또 꺼낸 것이다.
막판이니까 사람들이 판단할 뭣도 없었다. 어쨌든 이 호외를 200만 부나 찍었다고 한다. <동아일보>가 판세를 엎으려고 엄청나게 찍은 모양인데 상당수는 기관원이 압수해버렸다. 당시엔 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야 했는데, 기차역에서 대부분 압수했다고 한다. 그러니 이걸 본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는 얘기를 하고 그런다. (1963년 10월 14일 자 <동아일보>에는 '본보 호외 각지서 피탈·도난'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전국 곳곳에서 군복 차림의 괴한들에게 호외를 강탈당하고 여러 기차역에서 수천 부씩 도난당했다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격렬한 사상 논쟁 와중에 박정희는 연좌제 폐지 공약을 내걸었다.
서중석 : 선거를 며칠 앞두고 박정희는 사상 논쟁과 관련해 좋은 소리를 했다. 이때 연좌제 문제도 거론하고 그랬다. 현재 사상이 온건한 자의 과거는 일체 불문에 부치고 연좌적 신원 조사 제도를 지양하며 극좌 분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하고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는 구정치인도 이를 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극좌 분자를 이야기한 대목은 혁신계 정치범을 가리키는 것 같다. 선거 전날인 10월 14일에도 연좌적 신원 조사 제도를 지양하고 본인 중심, 인물 본위의 인사 정책을 펴겠다고 밝혔다.
실행은 안 했다. 연좌제는 박정희 정권 때 엄연히, 그것도 1970년대까지 살아 있었다. 법적으로 없어지는 건 전두환 정권 때다. 그리고 극좌 분자를 제외한 모든 정치범을 석방했나? 안 그랬다. 정치활동정화법에 묶여 있는 구정치인을 해제했나? 여전히 여러 사람이 묶여 있었다. 어쨌든 코앞에 다가온 선거를 생각하면서 이걸 얘기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15일 선거로 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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