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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철도 요금은 왜 그렇게 비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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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철도 요금은 왜 그렇게 비쌀까?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3>일본의 근대와 철도

도쿄와 요코하마를 오가는 일본 최초의 철도는 금방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검은 쇳덩어리가 거침없이 달리는 모양을 본떠 흑룡으로 불렸던 기차는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나중에는 실용성으로 사람들을 몰려들게 했다. 동시에 전국 각지에서 철도 건설이 시작됐고, 이미 건설되고 있던 노선들은 개통을 서둘렀다. 일본 본토에 세워진 첫 노선은 영국인 기술자 브리튼 에드먼드 모렐(Briton Edmund Morell)의 감독 아래 만들어졌다. 모렐은 일본 최초의 철도 건설을 책임진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철도의 아버지로 칭송받고 있다. 이어 1880년에는 미국인 기술자 조셉 크로포드(Joseph U. Crowford)의 지휘 아래 본토 북쪽의 섬 홋카이도에서 최초의 석탄 광산 철도 노선이 건설되었다. 남쪽의 규슈 철도는 독일의 몫이었다. 헤르만 롬숏텔 (Rumschottel)이 총 책임자가 되어 철도를 건설, 1887년 첫 운행을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는 초기 도입 시기의 불가피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철도를 국가의 책임하에서 건설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일본 내의 정치·경제적 조건은 국가가 철도 건설에 매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바쿠후와 쇼군 체제가 몰락하고 천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 국가체제가 들어섰지만, 오랫동안 유지됐던 구체제의 유산은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았다. 토지는 여전히 지방의 봉건 영주인 각 번의 다이묘들이 갖고 있었다. 강력한 중앙 집권의 힘을 발휘하려면 조세의 기초인 토지를 봉건 영주로부터 빼앗아 와야 했다. 변환기에 으레 나타나기 마련인 신구 질서 간의 대립이 불거졌다. 에도의 쇼군을 몰아내고 교토의 왕을 옹립해 메이지 정부를 세운 세력의 핵심은 사마쓰번과 죠슈번이었다. 변혁의 동인은 언제나 내부에 있는 법. 바쿠후 체제의 근간이었던 번이 바쿠후 체제를 무너뜨리게 된 셈이다. 사쓰마 번과 죠슈 번은 연합하여 개국을 추진하는 바쿠후에 반기를 들고 쇄국과 존왕양이를 기치로 반란을 일으켰다. 상징적인 존재였던 왕은 군대가 없었다. 사쓰마 번과 조슈 번의 사무라이들이 천왕의 군대를 자처하며 메이지 유신의 수호자가 되었다.

사쓰마 번의 사무라이들을 지휘했던 사령관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였다. 사이고는 1871년 메이지 정부의 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요직에 중용된다. 사이고는 여러 번들을 압박,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구질서의 붕괴를 대체할 새로운 질서에 대해서는 주변의 정치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된다. 바쿠후와 쇼군의 시대는 지났지만 사이고는 사무라이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사 집단의 유지를 원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에서 진행된 일련의 개혁은 사무라이들을 역사 속에서 지워내는 것이었다. 유럽식 자유 민권 사상과 공화적 개념이 퍼지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국가의 군대는 징병제를 근간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개혁 주도파는 알고 있었다. 징병제는 시민권의 확대된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과거 왕의 근위대나 영주의 군대가 아닌, 공화국의 보편적 의무로서 군대의 개념이 정착되었는데 이것의 사상적 기초는 평등이었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지켜야 할 의무가 되려면 사회구성원 간의 형식적 차별은 철폐되어야 한다. "모든 토지와 백성은 천왕이 지배한다"는 판적봉환(版籍奉還)은 새로운 호적제도의 시행을 가속화시켰고, 이에 따라 사무라이나 농민이나 상인들은 모두 같은 천왕의 백성이 되었다. 판적봉환은 봉건제의 상징인 다이묘들의 몰락을 의미했다. 폐번치현(廃藩置県)이 실시, 번이 사라지고 중앙정부의 직접 통제를 받는 현이 설치됐다. 다이묘들의 몰락은 그들이 군대인 사무라이들의 몰락이기도 했다. 1873년 징병제가 시행되어 신분과 관계없이 만 20세 이상의 남자에게 병역 의무가 지워졌다. 전쟁은 사무라이의 몫이었는데 이제는 백성들의 것이 되었다.

▲일본제 강점기 때 경인선을 달리던 기차 ⓒ박흥수

사쓰마 반란과 사쓰마 재반란

무사들이었던 사족들의 불만이 일기 시작했다. 여기에 불을 끼얹은 것은 메이지 정부가 1876년 발표한 폐도령(廃刀令)이었다. 무사들은 칼을 차고 다녔다. 칼은 당장 전쟁에 나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사무라이로서의 아이덴티티를 부정당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사족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사무라이 정체성이 강한 사람이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생각도, 앞선 기술로 군사력을 키워 약소국들을 침략하겠다는 의지가 바탕이 된 것이었다. 사이고가 갖는 강병론의 핵심은 무사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군대였다. 사이고는 무사들의 불만을 해소하지 않으면 일본에 커다란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며, 대안으로 조선을 정복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이른바 정한론이다.

천왕 설득까지 성공한 사이고의 조선 정벌 계획은 구미 사절단을 중심으로 한 인사들에 의해 폐기된다. 유럽을 돌아본 사람들의 눈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정한론을 반대한 이들 중에는 사쓰마 번과 함께 메이지 정부 수립에 절대적인 기여를 한 죠슈 번 사무라이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이토를 비롯한 구미 사절단파가 사이고의 정한론을 막은 것은 아직은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부국파에 의해 강병파의 정한론이 막힌 뒤 사이고 다카모리는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인 가고시마로 내려와 사학을 설립한다. 사이고가 설립한 사학에는 사무라이들이 몰려들었다. 사이고의 부하였던 군인들이 사이고를 따라 군대의 요직을 버리고 가고시마에 합류했다.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 사무라이들로 가고시마의 사학은 유행을 탄 프랜차이즈 음식점처럼 현 전체로 불어났다. 1877년 사학의 학생 수는 2만 명에 이르렀는데 메이지 정부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잠재적 위협이었다. 여기에 사학 출신이 지방 관직에 등용되거나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초래되자 정부가 행동에 나섰다. 메이지 정부는 최신식 스나이더 총의 제작 설비와 탄약 등을 가고시마현으로부터 무단 반출해 오사카로 옮겼다. 사쓰마 번에서 사이고 다카모리 사학의 영향력이 커지자 육군의 주력 무기인 스나이더 총을 독점 생산·공급하고 있는 설비를 가고시마에서 본토로 이전시킨 것이었다.

앞서 가고시마에서 서양의 신식 총을 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메이지 유신 이전인 1862년 사쓰마번주 아버지의 행렬이 요코하마 근처의 마을을 지났다. 앞선 연재에서 밝혔듯, 다이묘들의 행렬은 일반 백성들이 실수로라도 길을 막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강력한 권위를 가졌다. 번주 아버지의 행렬이 길을 가던 중 호위 무사가 "길을 비키라"고 외쳤다. 이때 말을 탄 영국인 네 명은 호위무사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행렬을 가로질렀다. 다이묘 행렬이 지날 때는 길가에 엎드려야 한다는 일본의 풍습을 영국인들이 알 리가 없었다. 호위를 하던 사무라이는 칼을 빼 들어 네 명의 목을 베어 버렸다.

영국 정부는 분노했고 바쿠후와 사쓰마 번에 강력한 대책을 요구했다. 바쿠후와 사쓰마 번은 호위 무사의 처형과 배상금을 요구받았지만, 영국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던 바쿠후와 달리 실제 책임이 있는 사쓰마 번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 영국은 일곱 척의 군함으로 함대를 구성해 사쓰마번 응징에 나섰다. 1863년 8월 15일 큐슈섬 남쪽 가고시마만 사쓰마 번의 코앞에 도착한 영국 동양함대가 사쓰마의 기선 3척을 나포하자 사쓰마 번의 육상 포대가 영국함대를 향해 발포했다. 영국 함대의 대응 사격으로 가고시마 성과 도시들은 불길에 휩싸였다. 사쓰에이 전쟁이라 불리는 영국과 사쓰마 번의 충돌 이후 사쓰마 번은 그동안 절대적 가치로 내세웠던 양이 정책을 버리고 개화로 돌아서게 된다. 바쿠후 체제를 버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가는 일본 근대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사건인 셈이다.

사쓰마 번은 서양의 압도적 기술력을 일본이 감당하기 어렵다고 보고 적극적으로 서양의 기술력을 수입하기 위해 애를 쓴다. 영국 함대의 전투력에 놀란 터라 서양의 무기와 탄약 기술을 도입하는 데 힘을 쏟았고, 이 때문에 가고시마에는 병기와 탄약 공장이 세워졌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왕을 중심으로 통일이 되었지만, 과거 사쓰마 번 시절부터 유지되어온 무기와 탄약 생산 시설은 여전히 일본 육군의 무장을 책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을 옹립하고 메이지 유신을 실현시켰던 사쓰마 번이 메이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형국이 되자, 사쓰마 번이 장악하고 있는 무기제조공장을 메이지 정부가 그대로 놔둘 수 없었다.

메이지 정부의 무기와 탄약 반출을 계기로 사쓰마 번의 사학에서 수학하던 무사들은 행동에 나섰다. 결국 사이고 다카모리가 지휘하는 사쓰마 반란이 일어난다. 규슈의 가고시마에서 일어났다고 해서 세이난(西南)전쟁이라고 부르는, 근대 일본 최후의 내전이 발발한 것이다. 세이난 전쟁은 사쓰마 번이 바쿠후 체제에 반대해 봉기했던 반란과 구별, 사쓰마 재반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쓰마 번의 반란을 통해 세워졌던 메이지 정부가 이제는 사쓰마 반란군과 대립하게 되는 과정은 일본 근대사의 우여곡절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세이난 전쟁은 정예 전투 집단 사무라이와 징집된 국민 군대의 대결이었고 중세와 근대의 대결이었다. 시대적 변혁기, 또는 이행기의 전쟁은 역사의 물결을 타는 쪽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다. 사무라이 대 정부군, 칼과 총의 대결로 표현되는 것은 영화로도 나왔다. 2003년 개봉돼 흥행했던, 톰 크루즈가 주연한 헐리우드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는 이 세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산업화가 과거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동인이 된다는 것은, 마르크스가 생산력 발전에 따른 사회변화론을 통해 밝힌 바 있다. 생산력이 발전하게 되고 이에 따라 중세적 생산관계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로 진화하게 되면 이 생산관계가 규정하는 다양한 법적, 제도적, 사회적 변화가 수반된다. 전문 군사 집단 사무라이로 상징되는 중세가, 일반적인 노동 대중의 군대인 근대에 의해 제압되는 것은 과학 기술의 발달에 따른 생산력의 고도화가 가져온 숙명 같은 것이었다.

봉건 영주, 귀족이 되고 재벌이 되다

사무라이는 칼을 쓰는 집단이다. 칼은 도구이다. 도구는 숙련성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필자가 30대의 젊은 시절 50대의 회사 선배로부터 베드민턴 내기 시합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한 세트 15점을 먼저 내는 사람이 술을 사는 내기였는데 초보자인 필자는 12점에서 시작한다는 조건이었다. 선배는 서울시 동호인 베트민턴 대회에 나가 동메달까지 받은 준 프로급 실력의 소유자였다. 필자는 2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늙은이에게 설마 3점을 못 낼까 싶어 기꺼이 내기를 수락했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12-0에서 시작한 게임이 13-15로 마무리되었다. 고수가 15점을 내는 동안 필자는 단 1점을, 그것도 고수의 배려로 한 점을 얻을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탈진한 채 땀범벅이 되어 뻗어있는 필자를 향해 고수 선배는 아직 몸이 풀리지도 않았다며 "억울하면 한게임 더?"를 외쳤다. 테니스나 탁구도 아마추어는 프로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칼도 마찬가지다. 사무라이. 칼과 몸이 하나인 전사. 끊임없이 무예를 연마하는 사람들에게 쟁기를 든 분노한 농민들은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살육의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다이묘의 휘하에서 전문 집단으로 육성된 전투 기계인 사무라이들을 대적할 상대는 없었다. 그러나 근대는 이 사무라이들을 무력화시켰다. 전직이 무엇이었든 젊은 사람들을 모아 한 달 남짓 군사 훈련을 시키면 누구라도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총이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서양에서 수입된 신식 소총은 장기간의 고통스러운 수련 과정을 필요로하지 않았다. 탄약을 장전하고 조준하는 방법을 배운 뒤 방아쇠를 당기는 몇 번의 반복 훈련으로 적을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총과 탄약만 있으면 얼마든지 대군을 징집해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총과 탄약처럼, 손실분만큼 보충할 수 있는 소모품 성격을 갖는 근대적 보병의 탄생이었다. 근대적 보병 전술은 군사 전술로서도 효율적이었다. 따로 궁수부대나 창검부대를 두지 않게 되었다. 원거리에서 적을 제압할 수 있는 총은 활보다 훨씬 위력적이었다. 또 근접전이 벌어질 경우 총에 작은 검만 장착하면 훌륭한 창이 되었다. 화약을 장전한 기계 장치를 손에 쥔 근대의 보병은 궁수이면서 창병이었고 검투사였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의 클라이막스는 평원을 질주해 돌격해오는 사무라이들을 향해 언덕 위의 정부군 기관총이 불을 뿜어내는 장면이다. 사무라이들은 1894년 공주 우금치 언덕에서 동학 농민군들이 그랬듯, 일본군의 기관총에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이렇게 사무라이의 시대는 근대라는 태풍에 밀려 사라져갔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반란이 제압되자 비로소 메이지 정부는 세이난 내전의 혼란을 뒤로하고 새로운 일본 건설에 매진할 수 있었다. 이제 근대화를 가속화시킬 국가적 인프라 구축에 채찍을 가해야 했다. 무엇보다 철도망을 계획했던 대로 부설해야 했다. 그러나 세이난 전쟁 등으로 메이지 정부는 돈이 없었다. 결국 정부의 계획을 사적 자본이 수행하는 방식이 추진되었다. 사기업 니폰 철도(Nippon Railway), 간사이철도, 산요철도, 규슈철도, 홋카이도탄광철도의 '빅 5'가 그 주체였다. 이들 철도 회사는 일본 전역을 두 가닥 강철 선로로 묶어 냈다.

철도와 같은 거대 인프라를 책임질 민간 자본은 어떤 세력들이었을까? 바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바쿠한 체제를 지탱했던 지방 영주들 다이묘들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번을 해체하면서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다이묘들에게 귀족의 지위를 부여했다. 이들 귀족들에게는 지역의 광산 채굴권이나 공장 설립 등의 특혜가 주어지기도 했다. 자이바쓰(財閥), 재벌의 탄생이었다. 특히 천왕과 바쿠후의 대립 시기에 천왕 쪽에 붙었던 번의 직속 상인 그룹 미쓰이는 메이지 정부가 탄생하자 큰 특혜를 받아 성장했다. 메이지 유신에 기여했던 번(藩)들을 특히 한바쓰(藩閥)라 불리는데, 바쿠한 체제에서 메이지 정부의 재벌로 재탄생한 신흥 자본가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영국의 철도는 수익을 노린 자본가들의 무분별한 투자로 급속히 확대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수익을 올리지 못한 노선이 몰락하는 현상을 겪었다. 그러나 일본은 정부의 계획을 민간 자본이 수행하는 형식을 갖게 되었다. 이런 사정은 일본 자본주의가 갖는 특수한 성격 중의 하나이다.

현대 일본의 철도 요금은 일본인들의 소득 수준을 생각하더라도 비싼 편이다. 일본 철도는 민영화가 진행된 지 27년이나 되었다. 공기업이 아니기에 국가 정책적 요금 할인을 수행할 의무도 없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높은 철도 요금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크게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유는 생산 활동에 필요한 교통 요금을 기업이 책임지기 때문이다. 공무원을 비롯해 대기업, 중소기업 할 것 없이 출퇴근에 소요되는 교통비를 기업이 책임진다. 복지 수준이 높은 일부 기업만 그런 것이 아니라 편의점 아르바이트 직원에게도 출퇴근 비용이 지불된다. 원거리에서 출근하는 일부 아르바이트 직원의 경우 시급보다 더 많은 교통비를 지급받기도 한다. 시민에 대한 이동권 보장과 교통 복지의 차원에서 국가가 일부 부담해야 하는 교통비 지원을 기업이 책임지는 시스템은, 국가의 공공적 역할을 기업이 일정 부분 부담하는 일본 사회의 특징이다. 이것은 에도 시대 바쿠후 체제의 문화가 자본주의와 결합된 일본식 자본주의의 한 단면이다.

다이묘가 재벌로 등장한 후, 민간 기업이 공적 기능을 담당하게 된 사례 가운데 하나가 에도 시대의 소방 활동이었다. 에도 시대의 생활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는 쇼군 권력조차 손을 쓸 수 없는 일이 있었는데 바로 화재였다. 도시 전체가 목조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 데다 서민들의 주거 지역은 골목이 좁았다. 화재가 한번 발생하면, 엄청난 재난을 초래했다. 화재는 '에도의 꽃'이라 불릴 만큼 빈번히 발생했다. 2차 대전 당시 도쿄대공습에 나선 미군의 B-29폭격기들은 목재 건물이 잘 타오를 수 있도록 소이탄을 다량 준비해 폭격에 사용했다. 도쿠가와 시대 268년 동안 에도의 도시 곳곳에서는 수 십 차례의 화재가 발생했으며 이 중 네 차례는 에도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던 대화재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대화재로 5만 채 이상의 서민 가옥이 불타고 10만 명 이상이 숨진 경우도 있었다. 사무라이 도시 에도의 넓은 공간에서 소방 활동은 무사의 특권이었다. 지역 총수 역할을 하는 다이묘는 자신의 저택을 책임졌고, 바쿠후의 가신 역시 자신의 거주지를 책임졌다. 그러나 불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관할 구역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므로 다이묘들은 그들의 주거지가 화재의 위험에 노출되기 전에 불길을 잡을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청원을 바쿠후에 제출했다. 18세기 초 바쿠후는 지역별 책임제를 확립하고 전체를 총괄하는 기구를 준비했다.

당시의 소방 기술은 물을 퍼다 붓는 방법이 아니었다. 불길의 예상 진로에 자리 잡고 있는 집들을 미리 무너뜨리는 방법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런 소방 활동은 권위주의와 민영화의 결합을 가져왔다. 서민들은 사무라이들에 의해 소방 활동에 강제 징집되었고 상인들은 돈을 주고 사람을 사서 내보냈다. 돈이 더 많은 사람들은 화재 시 자신의 집이 철거 대상이 되지 않도록 손을 쓰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업적인 소방대가 생겨났다. 매년 각지에서 열리는 소방대로 분한 이들의 힘 자랑은 현재까지 지역 전통 축제로 남아있다. 소방대가 최고의 신랑감이라는 일본 사회의 속설을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원래 방범이나 소방과 같은 일은 중앙정부의 몫이 당연한데, 에도 시대에는 사무라이들의 지휘 하에 직업적인 민간 소방대가 결성되었다. 이들은 불길을 잡기 위해 집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권한과 장비를 갖추고 있는 권위적 집단이기도 하면서, 불을 진압함으로써 백성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공익적 집단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일본에서 기업이 공공 부문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맡을 수밖에 없는 것은, 일본 사회의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일 수도 있다. 일본 사회의 특성으로 인하여 정부와 기업이 사회적 역할을 분담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정부가 사회적 복지에 관한 책임을 방기했다는 것도 된다. 높은 저축률, 열심히 일하는 풍조 등은, 자식 부양과 교육, 의료에 대한 비용, 그리고 노후 보장을 위해서였다. 종신 고용은 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몰아치기 직전까지 일본의 기업 문화는 '가족과 같은 직장'이었다. 사용자는 고용을 책임지고 노동자는 사용자를 아버지로 여긴다. 다이묘들이 자신의 번에 속한 백성들을 책임진다는 주종 관계의 흔적이 기업 문화에도 스며들었던 셈이다. 사장의 미덕은 노동자들을 자식처럼 돌보는 것이고 노동자는 고용주를 위해 충성을 바친다.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받기 위해 만든 노조조차도 산업 내의 연대를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기업별 형태로 자리 잡았다. 노조가 얼마든지 자주성을 잃고 사용자들의 관리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일본 노동 운동의 몰락과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부채질한 이유 중의 하나도 바쿠후 시대의 문화가 근대를 관통해 녹아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백성'들의 자유로운 이동, 근대를 만들다

메이지 정부 입장에서 철도는 일본을 재탄생시키는 유력한 도구였다. 중앙의 권력이 철도를 타고 집행되었으며 각 지역의 문화도 활발하게 교류되었다. 무엇보다 철도를 통해 전달되는 신문 뉴스의 등장은 전국을 단일한 의제로 묶어내는 역할을 했다. 산업화에 필수적인 대규모 인구의 이동도 가능해졌는데 이것은 익명성을 특징으로 이동하는 대중의 탄생을 낳았다. 바쿠후 시대에 평민의 장거리 이동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행자들은 다이묘의 발급 증명이 있는 여행 증서를 소지해야 했고 길목마다 설치되어 있던 세키쇼(검문소)에서 철저히 조사를 받아야 했다. 에도 시대의 여행자들이 남긴 글들 중에는 검문소의 횡포를 고발하는 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특히 여성 여행자들은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있는 유력 집안의 사람이라도 검문소의 여성 담당 검사원에게 치욕적인 몸수색을 당해야 했다.

바쿠후 말기 이동권 제약은 서서히 무력화됐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세키쇼가 폐지되어 이동의 자유가 보장되었다. 보장된 이동의 자유를 실현시킨 것은 당연히 철도였다.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돈을 지불하고 표를 사야 했다. 열차 승차권이 에도 시대의 여행 증명서를 대신했다. 사람들은 주소와 여행 목적, 신분, 이름을 일일이 기재하고 권력 기관의 허락을 받은 커다란 여행증명서 대신, 가로 4cm 세로 6cm 크기 직사각형 종잇조각을 손에 쥐었다. 한 칸에 수십 명이 탈수 있게 된 열차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지 않고 각자의 사연을 안은 채 여행을 할 수 있게 됐다. 근대는 이동의 자유를 전제로 일어나는 문명이었다.

철도가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철도 회사들은 저마다 열차표를 만들었다. 기록되는 내용이나 양식, 크기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회사라도 역에 따라 손으로 기입해야 하는 내용이 달랐다. 그다 보니 승객이 많이 몰리는 역에서는 표를 구하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이 되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한 것은 영국인 토머스 에드먼슨(Thomas Edmondson)이었다. 1839년 에드먼슨은 뉴캐슬-칼라일 철도회사에서 밀턴역의 역장으로 재직하던 중 새로운 형태의 열차표를 구상한다. 그가 케비넷과 서랍 만드는 일을 했던 것이 주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카드를 만들 때 사용하는 약간 두꺼운 재질의 종이 위에 필요한 사항을 미리 인쇄한 직사각형의 표를 만들었다. 이 표에는 출발역과 도착역, 운임, 할인 대상, 일련번호 등이 찍혀 있었는데 작은 종잇조각 위에 열차 이용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효과적으로 담을 수 있었다. 발매할 때에는 유효한 당일 날짜만 적거나 매표창구에 설치된 작은 박스 모양의 자동 날자 인쇄기에 표의 끝 부분을 통과시키면 되었다.

매표창구에는 한약방의 약재 서랍처럼, 층층이 고정된 서랍(캐비넷)이 설치되었다. 서랍은 책장처럼 한쪽 면이 열려있는 형태였다. 수십 개에 이르는 칸막이 밑에는 행선지가 표시된 종이가 붙여졌고 칸마다 미리 도착역이 인쇄된 표들이 채워져 있게 된다. 여행자가 매표창구로 다가와 맨체스터든, 요코하마든, 노량진이든 행선지를 요구하면, 매표원은 각각의 서랍장 밑에 붙어있는 역명을 보고 그 안에 든 표를 집어 들어 날짜를 찍은 후 여행자에게 내주게 된다. 숙련된 매표원은 여행자가 요구하는 행선지의 표를 눈길을 주지도 않고 손만 뻗어 캐비넷에서 빼 주기도 했다. 맨체스터-리즈 철도에서 처음 선보인 종잇조각 열차표의 편리함이 증명되자 발명자의 이름을 딴 에드먼드의 티켓 시스템은 전 세계 철도에 보급된다. 이는 1990년대까지 주력으로 쓰였고 일부 국가와 지역에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열차표는 여행 증명서를 대체하기도 했지만 운임을 지불했다는 증거도 됐다. 도착역까지 유효한 유가 증권의 역할을 한 것이다. 당연히 이 증서를 잃어버리는 것은 정당한 여행자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철도 여행자들은 열차표 분실의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인파가 몰리고 열차 시간에 쫓기게 되거나, 여러 혼란스러운 일에 휘말려 열차표를 잃어버려 낭패를 보는 일들이 심심치 않게 생겼기 때문이다. 양복 안주머니에 열차표용 작은 주머니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다른 물건과 섞이지 않게 승차권을 담아두는 공간이 따로 있는 여성용 지갑도 생겼다. 철도 여행은 의복과 생활용품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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