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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는 애' 같았던 북핵 대응, 해결은 미국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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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쓰는 애' 같았던 북핵 대응, 해결은 미국 몫?

[김기협의 냉전 이후]<38>미국 정책 거스르는 한국, 이것이 '자주성'인가?

소련과 공산권의 몰락이 '체제경쟁'의 패배에 기인한 것이라고 흔히 말하는데, 체제경쟁의 초점은 경제력의 경쟁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의 세계는 호황을 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오랜 전쟁기간 동안 기술은 크게 발전해 있었던 반면 그 기술을 이용한 자원 개발이 부진했기 때문에 미개발 자원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든 자본주의 체제든 경제체제를 운용하는 데 어려움이 적은 조건이었다.

1970년대 들어 대결을 완화하는 군비축소 등 '데탕트' 국면이 나타난 중요한 하나의 이유가 자원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소모적 경쟁을 지양할 필요에 있었다. 그런데 불황이 길어지며 1980년대로 접어들자 자본주의 진영에서 신자유주의 노선이 일어났다. 경쟁 완화를 통한 공생을 포기하고 경쟁 격화를 통해 '승자의 싹쓸이'를 노린 노선이었다.

그 결과 이뤄진 '냉전 종식'의 경제적 의미는 공산권의 해체로 그 지역의 자원(인적-물적)을 고도화한 자본주의적 착취 대상으로 재편하는 데 있었다. 소련과 동구권 국가들은 이 재편 과정을 겪었다. 반면 중국, 베트남, 쿠바 등 소련 중심 경제체제에서 비교적 벗어나 있던 공산국들은 이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북한도 이 그룹에 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 중 개혁개방 정책을 궤도에 올려놓고 있던 중국과 베트남에 비해 북한은 훨씬 더 큰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그 어려움의 중심에 있던 것이 에너지문제였다. 경제 발전은커녕 체제 유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에너지 공급의 전망이 막막했다.

원자로 건설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는데, 기술도 자금도 부족했다. 우선 기술 획득을 위해서라도 NPT에 가입해서 IAEA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IAEA가 도와주기는커녕 적대적 태도만 보이다가 1993년 2월에 이르러서는 종래 발동한 적이 없던 '특별사찰'을 요구하고 나섰다. 북한 입장에서는 불공정한 주권 침해였다. 그래서 NPT 탈퇴를 선언했다.

북한에 대한 IAEA의 엄격한 태도는 미국이 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에게 압박을 가하는 단계에서 IAEA의 태도를 그렇게 유도해 놓은 것이 얼마 후 북한과 대화를 해야 할 단계에 와서는 스스로에게 족쇄가 되었다. IAEA에게는 일관성을 지킬 필요가 있었고 미국은 IAEA의 독립성을 형식적으로라도 존중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미 정부 관리들은 사석에서 IAEA의 고지식한 태도에 반감을 표출했다. 애초와는 달리 이것이 지역, 정치적 측면이 더욱 부각된 분쟁으로 번졌다고 판단한 갈루치는 지난 5월 IAEA의 태도를 "중세적, 혹은 탈무드적인 매우 경직된 자세"라고 묘사했다. 그리고 북한의 행동에 블릭스(IAEA 사무총장)가 어떻게 대응할지 미 행정부로서도 모르는 실정이라고 덧붙였다. 갈루치로서는 블릭스에게 이렇다 할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미국이 전세계가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비핵화에 간섭하는 것으로 비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마침 필자가 그 무렵 어떤 모임에서 만난 국방부 고위관리는 블릭스를 가리켜 총체적인 결과는 안중에도 없이 IAEA의 위상 보호에만 혈안이 돼 있는 '광신자'라고 평했다. 이어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IAEA 사찰단을 일컬어 "북한에 어떠한 혜택도 제공하지 않은 채 고통스러운 조사만 강행하려 드는 꽉 막힌 항문병 전문의들"이라고 몰아붙일 정도였다. (돈 오버도퍼, <두 개의 한국> 457쪽)

1993년 7월 제2차 북미회담을 끝낼 때 미국은 제3차 회담 전에 북한이 IAEA 및 남한과 관계를 먼저 풀어 나갈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 IAEA의 요구에 불공정한 면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은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 국제기구로서 권위를 지켜야 하는 IAEA 입장에서는 자기 조치의 불공정성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한과 IAEA 사이의 관계는 잘 풀려 나가기 어려웠고, 제3차 북미회담이 늦어지는 하나의 조건이 되었다.

추상적 권위를 지켜야 하는 IAEA와 달리 남한은 북핵 문제 해결에 누구 못지않게 큰 이해가 걸려 있는 당사자 입장이었다. 세계의 다른 나라들이 핵 비확산을 더 중시하더라도 남한은 한반도 평화를 더 중시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북한에 대한 IAEA의 조치에 불공정 문제가 있으면 앞장서서 지적해야 할 입장이었다. '민족의 대의' 같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라, 남한 5천만 주민이 '불바다'의 공포를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 미국이 북한과의 대화에 더 성의를 보이도록 다그쳐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김영삼은 1993년 6월 4일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핵 가진 자와는 악수도 하지 않겠다"는 대북 강경노선으로 나왔다. 두 가지 측면에서 대결주의적인 태도였다.

북한이 "핵 가진 자"였나?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북한의 공식 입장이었는데 미국이 이것을 믿지 못하겠다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장면이었다. 김영삼은 아무런 증거 없이 이 의혹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을 보인 것이다. 의혹을 제기한 미국 관리들도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돈 오버도퍼는 정리했다.

원자로 밀폐용기에서 나오는 증기를 위성 감시망으로 관찰한 CIA는 북한의 원자로가 89년에 최장 110일간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정도면 연료봉 8000개 중 절반가량을 교체, 충분히 플루토늄을 추출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그러나 북한은 원자로 가동 중지 기간이 고작해야 60일이며 제거한 연료봉은 손상된 몇 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 이러한 CIA의 추정을 근거로 93년 12월 국가정보평가서는 북한이 이미 폭탄 제조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가 나오자 국방장관과 CIA국장을 비롯한 고위관리들에게서도 같은 기조의 발언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훗날 북한의 핵위기가 해소된 후 CIA는 자체 관측을 재평가한 뒤, 북한이 주장한 60일이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을 수정했다. 만일 그렇다면 이론상 북한이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훨씬 낮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일각에서는 원자력과학자협회 자료집에 실렸던 표현 그대로 미국의 정보평가를 그저 '겁주기용 시나리오'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북한이 그만한 수의 연료봉을 인출하기에는 시일이 너무 촉박했을 뿐만 아니라 (…) 재처리 공정이 원활히 이루어졌을 리도 만무하다고 확신했다. (…) 행정부 내에서도 논란이 분분했고, 앤서니 레이크 미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에 의하면 대통령에게 같은 날 전달된 CIA와 국무부의 평가 보고서가 서로 극과 극을 달린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두 개의 한국> 452-453쪽)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었다고 치자. 그 이유로 악수를 하지 않겠다는 것은 김영삼 발언이 국가 안보를 위험하게 하는 또 하나 대결주의적 측면이었다. 다른 나라들은 '세계평화'를 위해 북한 핵사업의 비판에 중점을 두더라도, 남한만은 악수가 아니라 포옹까지 하겠다고 달려들어 북한을 누그러트리는 노력을 해야 했다. 때리는 시어머니 옆에서 말리는 척하는 시누이 노릇을 해야 했다. 북한이 정말로 핵무기를 갖고 있었고 그것을 써야 할 입장에 몰린다면 첫 번째로 '불바다'를 걱정해야 하는 것이 남한 아니었는가.

▲ 1993년 2월 25일 취임식장에 선 김영삼 대통령. ⓒ연합뉴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았음을 김영삼은 확신하고 있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핵무기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모험적 태도로 나간 것이라면 정말 나쁜 대통령이다. 이완용도 울고 갈 그런 나쁜 대통령의 존재를 믿고 싶지 않다.

김영삼의 이 발언 방침을 알게 된 한완상은 이런 걱정들을 했다고 한다.

첫째, 대통령이 이런 발언을 하는 순간 북한 당국은 더 강경한 대남전술을 쓰고 싶은 유혹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
둘째, 취임사에서 천명한 민족 당사자 원칙과 민족 상호존중 원칙이 휴지가 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스스로 폐기하겠다는 우스운 꼴이 되고 만다. (…)
셋째, 대통령은 주변 냉전 수구 세력의 손에서 앞으로 더 벗어나기 어렵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새 정부와 마찰을 빚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넷째, 이미 핵무기를 엄청나게 많이 가진 강대국들에는 침묵하면서 유독 같은 민족인 북한의 핵에 대해서만 반대한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 북한이 핵무기를 갖고 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시점에서,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갖고 있다고 속단하는 대통령의 발언은 감정적이고 신중치 못한 경솔한 발언으로 오해받기 쉽다.
다섯째, 지난 반세기 남북 관계의 악화는 곧 국내정치의 반민주적 성향 강화로 이어졌다. (…) 스스로 문민정부를 자임하는 현 정부가 반공의 강경 깃발을 내세운다면 심각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는 아프다> 104-105쪽)

퀴노네스의 관점에서는 민주화의 자부심을 가진 김영삼 정부가 한미관계의 종속성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것도 상황을 어렵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었다.

수십 년 동안 미국 관리들, 특히 국방부 관리들은 서울의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상대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서울로 하여금 미국 정책의 관점을 받아들이게 하고 싶으면 백악관이나 국무부, 또는 국방부에서 고위급 대표를 서울에 보내 한국 고위층 인사와 슬슬 잡담이나 하면 됐다. 대부분의 경우 각료급 인사가 몇 번 왔다 갔다 하고 나면 서울은 워싱턴의 뜻에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한국 대통령은 해당 장관과 여당 책임자들을 불러 새로운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그들로 하여금 새 정책노선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게끔 했다.

1992년 한국은 이런 종류의 자문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60년 이래 최초의 문민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한국은 1980년대 이후부터 새로운 자신감을 갖췄다. (…) 이런 이유로 김영삼 대통령은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정상적인 정치라는 유권자의 요구에 부응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그러나 워싱턴 관료사회는 서울의 이런 새로운 현실을 무시했다. 미국 인터 에이전시 중 일부는 김 대통령의 여론에 대한 과민반응에 정치적 이기주의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늘 하던 대로 하자고 우겼다. 다시 말해서 한국 정부는 그냥 전에 하던 대로 워싱턴의 현명한 충고에 따르면 된다는 식이었다. (<한반도 운명> 261쪽)

1993년 11월 23일 백악관을 방문한 김영삼이 미국이 추진해 온 포괄적 타결안에 제동을 걸어 클린턴을 당황하게 한 것이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거부하는 가장 극적인 제스처였다. 민족자주성을 앙양한 훌륭한 일로 볼 수 있을까? 자주성을 내세우는 데도 적당한 방법과 방향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하는 고려 후기 몽골간섭기의 한 가지 일, 개혁을 추진하던 원나라 관리의 소환을 획책한 일을 지난 31회에 소개했다.

몽골간섭기의 현상 또 하나를 이 대목에서 생각한다. 고려 지배층의 '안전불감증'이다. 토지와 노비의 소유가 권력자에게 집중되는 것이 국가구조에 심각한 위협이라는 문제는 일찍부터 인식되고 있었다. 그래서 새 왕이 즉위할 때마다 '전민변정(田民辨正)'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얼마 후 토지와 노비가 옛 권력집단으로부터 새 권력집단으로 옮겨지고 나면 개혁이 흐지부지 실종되는 일이 거듭됐다. 나라가 망할까봐 걱정하는 기색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공민왕에 이르러서야 개혁다운 개혁이 추진되었다.

안보를 외부세력에게 맡겨놓은 사회의 종속성이 안전불감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외적의 위협도, 민심의 불안도 종주국의 힘이 다 틀어막아 줄 것이므로 지배층은 안보에 대한 책임에 얽매일 필요 없이 특권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한국사회의 안전불감증은 심각한 문제다. 온 사회를 충격과 비통에 몰아넣은 세월호 사태의 원인에도 모든 층위에서 안전불감증이 작용했다. 이 문제를 종속성의 관점에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일본과 미국에 대한 종속성을 갖고 살아온 20세기 백년간의 경험이 안전에 무관심한 사회 분위기를 키워온 것 아닌가.

1993~94년의 '제1차 북핵위기'에서 한국 정부는 갈등을 증폭하는 역할을 맡았다. 1993년 11월의 정상회담에서 보인 것처럼 미국 정책에 대한 한국의 도전은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방향이었다. 미국이 결국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확고히 믿기 때문에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미국이 나를 존중해 주는 것밖에는 아무런 다른 생각이 없었다. 현실의 어려움은 어른들 몫이니까, 마음 놓고 떼를 쓰는 어린애와 같은 정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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