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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철도 따라 대한제국을 접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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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히로부미, 철도 따라 대한제국을 접수하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1> 일본, 식민지, 그리고 철도

1905년 11월 8일 이른 아침, 이토 히로부미는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초량역 정거장에서 자신을 태우고 갈 열차를 바라보았다. 초량역 승강장에는 대한제국 황실이 특별히 준비한 궁정 열차가 한성부를 향해 달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환송을 나온 일본 영사관 관리들과 재조선 일본인 거류민 대표들의 손을 일일이 잡고 악수를 나눈 이토는 귀빈용 객차에 몸을 실었다. 이토는 초량으로부터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보면서 조선 반도를 일본의 쇠밧줄로 옭아맨 이상 대한제국이란 나라는 일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이다.

1894년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제일 서둘렀던 것이 조선 철도에 대한 부설권이었다. 1894년 8월 20일 일본은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를 앞세워 경부·경인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는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다. 조선의 내정 개혁에 관한 조관을 체결하기에 앞서 우선적으로 조선 철도에 대한 이권을 확보했다. 일본에 의한 최초의 해외 철도 장악이었다. 이후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에게 넘겨주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으나, 결국에는 제국 일본이 조선의 철도를 장악했다. 경부선은 이토에게는 특별히 더 애착이 가는 노선이었다.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었다. 이 과정에는 이토의 공이 컸다. 조선의 독립을 공표토록 하여 조선에 대한 청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했다. 일본의 조선 정벌 로드맵을 완수하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1898년 이토는 청을 방문한 후 한양으로 향했다. 이토의 목적은 경부철도 부설권을 한양의 조정으로부터 받아내는 것이었다. 한양에 있던 가토 공사는 이토의 전략에 따라 대한제국 정부를 압박했다. 조선 독립을 확실히 한 이토의 공적에 조정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것이 가토의 협박성 주장의 내용이었다. 조정이 성의를 보여야 하는 것은, 경부철도 부설권이었다. 가토는 이토가 한양에 도착하기 전 경부철도 부설권을 일본이 갖는 가시적인 성과를 얻기 위해 집요하게 대한제국 정부를 몰아붙였다. 소극적 버티기로 일관하던 대한제국 정부는 이토의 방문 전날인 8월 24일, 가토 공사에게 특사를 파견하여 경부철도 부설권을 일본에 넘겼다. 이토를 비롯한 일본의 수뇌부들은 조선 정벌과 대륙 침탈의 대로를 얻은 것에 한껏 고무되었다. 1905년 경부선 궁정 열차 안의 이토는 자신의 헌신으로 이어진 철도를 타고 고종과 담판을 지으러 가는 길이 감격스러웠으리라. 오전 7시 커다란 기적소리와 함께 초량 발 경성 행 열차는 천천히 움직였다.

11월 2일 이토는 천황의 집무실에서 메이지 천황을 알현했다. 이토는 아마도 천황의 부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천황은 추밀원 의장 이토를 특파 대사로 임명한 후 대한제국으로 가라는 명을 내렸다. 이토가 집으로 돌아와 출장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천황의 시종장과 내대신 비서관이 차례로 방문했다. 시종장은 천황이 선물로 보낸 은제 그릇과 현금 5만 엔을 가져왔고 내대신 비서관은 고종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를 가져왔다. 이 친서는 비로소 일본이 조선의 실질적 지배자가 되어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경부선을 달리면서 이토 히로부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1592년 임진년 전쟁에서 자신처럼 부산을 출발했던 일본 제1군 사령관 고니시 유키나가의 못 다 이룬 과업을 완수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을까? 바쿠후의 붕괴와 서양 세력의 쇄도 속에서 일본 제국을 지켜내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대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희망에 부풀었을까? 1905년 일본은 두려울 것 없는 사자요, 승천하는 용이었다.

▲페리 제독은 미일화친조약 체결 기념으로 일본에 증기 기관차와 객차의 모형을 선물했다 ⓒMIT(ocw.mit.edu)

철도 따라 조선에 온 이토, 대한제국을 굴복시키다

서둘러 여행 준비를 마친 이토는 천황의 명을 받은 지 3일 만에 도쿄를 출발했다. 11월 5일 일요일, 메이지 천황의 친서를 품에 안은 이토는 수행원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다. 이토의 열차가 출발하는 도쿄의 신바시(新橋) 역은 1872년 일본에서 철도가 처음 운행을 시작한 곳이었다. 서양이 이루었던 강철 혁명과 증기 혁명을 이어받아 부국강병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은 신바시-요코하마 간에 최초로 부설된 철도였다. 그러나 이제 철도는, 1번 국도인 도카이도(東海道)선을 따라서 오사카를 지나 시모노세키까지, 서일본 지역을 관통했다. 도쿄 북쪽으로는 도호쿠(東北)선이 연결되어 아오모리까지 달리게 되었다. 남쪽의 큐슈와 북쪽의 홋카이도에도 철도 노선이 경쟁적으로 생겼다. 오전 7시 신바시 역을 출발한 이토가 탄 열차는, 도카이도선을 따라 남쪽으로 달렸다. 화려하게 치장된 이토의 전용 열차는 지나치는 곳곳에서 연도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았다. 특히 이토의 고향 야마구치 현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역으로 몰려나와 이토의 열차를 향해 만세를 불렀다. 이토는 시모노세키 역에서 열차 여행을 마치고 해군 군함에 올라 조선으로 향했다.

이토는 경성 행을 서둘렀지만 마음만은 여유로웠을 것이다. 진즉에 주저앉힌 청나라는 생각할 것도 없고, 목에 걸린 가시처럼 일본을 압박해왔던 러시아를 패퇴시킨 마당에 조선을 먹는 일을 방해할 세력은 없었다. 영국과도 합의가 되었고 미국과도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의해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보장받은 마당이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지 두 달, 전쟁 뒤처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시점에서 조선에 대한 조치는 더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해가 저물 때쯤인 오후 6시 20분, 고종이 준비한 궁정 열차가 남대문 역에 도착했다. 이토 일행은 대한제국 의장대의 호위 속에 손탁(孫濯)호텔로 이동해 여장을 풀었다.

이토가 고종을 만난 것은 11월 10일이었다. 의심을 가득 품은 고종과 거칠 것 없는 이토의 대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30분 만에 끝난 접견 뒤에 이어진 오찬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음식을 먹었다. 이토는 천황의 친서를 고종에 전달하는 것으로 그날의 임무를 완수했다. 다시 고종을 만날 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11월 15일 오후 3시에 고종과 이토의 단독 회담이 열렸다. 네 시간의 긴 회담이었다. 이토의 협박과 고종의 저항 속에 긴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천황의 친서는 대한제국의 자위 능력이 없으니 일본이 대신 조선의 독립을 유지해주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대한제국의 모든 외교권은 고종이 아니라 일본 천황이 행사하겠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겠다고 윽박지르는 이토 앞에서, 고종은 인정도 거절도 못한 채 회의를 끝냈다.

11월 18일 새벽, 이토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내세워 일본 공사 하야시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시켰다. 국제적 조약임에도 최고 통치권자인 국왕의 동의가 없는 상태에서 공포된 조약이었다. 대한제국은 껍데기만 남은 채 일본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대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이토의 다음 목표는 만주였다. 1905년의 일본.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어떻게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을까?

일본,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흡수하다

대항해시대라고 불리는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유럽의 배들은 아시아를 목표로 삼았다. 콜럼버스가 닻을 내린 아메리카도 인도를 찾아 나선 끝에 만난 대륙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발달된 기술로 먼 바다로 항해할 능력이 생기자 육로로는 따라잡을 수 없는 해상 교역의 이점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서양의 배들이 원한 땅은 중국이었다. 엄청난 인구와 자원이 있는 중국 시장을 통해 짭짤한 수익을 챙기려는 서양의 배들이 동쪽으로 키를 돌렸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접한 조선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에도 서양인들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동쪽 끝 섬나라인 일본은 서양의 배들이 갈 수 있는 마지막 도착지이면서 새로운 출발지였다. 일본에 도착한 서양의 배들은 동쪽으로 더 나아가 봤자 태평양의 망망대해밖에 없는 현실에서 일본을 기점으로 교역을 하고 싶어 했다. 서양의 입장에서 일본은, 자국의 물건을 팔고 동양의 진기한 물품을 사들이며 부서진 배를 수리한 뒤 다음 항해를 준비하는 동쪽 끝의 해상 교역 기점인 셈이었다. 당시 아시아 원양 항해를 했던 나라들은 해상 왕국인 영국과 무적 함대로 유명한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네덜란드였다.

일본은 무사들의 최고위직인 쇼군을 권력의 수장으로 하는 바쿠후(막부, 幕府)와 지방 영주가 통치하는 번(藩)으로 연결된 막번(幕藩) 체제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내전을 평정한 후 1603년 에도(도쿄)에 세운 세 번째 바쿠후는 메이지 유신으로 무너질 때까지 260여 년을 유지했다. 번은 영주인 다이묘(大名)가 지배했는데 바쿠후는 다이묘의 등급을 신판, 후다이, 도지마 세 등급으로 나누어 막번 체제를 유지했다. 바쿠후는 통치 기간 내내 밀려오는 여러 나라 서양인들에 대한 처리를 고심했다. 바쿠후는 서양과 접촉을 막는 쇄국 정책을 취했다. 서양의 동양 진출 과정에서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교역과 기독교 선교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조총과 화약 등 선진 무기, 상품 등에 매혹된 다이묘들이 서양인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기독교의 교세가 확장되자 바쿠후는 사회 불안정을 이유로 서양과 통상하는 것을 막았다. 바쿠후는 평등 사상을 담고 있는 기독교를 체제의 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바쿠후는 1622년 나가사키에서 선교사와 신자 55명을 처형함으로서 그 의지를 전국에 알렸다. 그중 유일하게 바쿠후의 선택을 받은 나라가 네덜란드였다.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공공연하게 기독교 전파를 내세웠고 영국은 중국에 눈독을 들이느라 일본과 교역하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바쿠후에게 "위험한 기독교 사상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는 서양과 무역을 중단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바쿠후는 전국의 다이묘들에게 명령을 내려 에도 바쿠후의 허락 없이는 외국과 교역을 할 수 없다고 공표했다. 바쿠후의 명령을 어긴 다이묘에게는 사형이라는 극형이 처해졌다. 바쿠후가 교역을 허락한 나라는 중국, 조선, 현재 일본으로 편입된 오키나와를 뜻하는 류큐 왕국, 그리고 네덜란드였다. 결국 일본과 교역하는 유일한 서양 국가는 네덜란드가 되었다.

바쿠후는 나가사키 항에 부채꼴 모양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를 만들어 네덜란드와 무역하는 창구로 삼았다. 네덜란드인들은 데지마를 벗어날 수 없었다.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는 일본인들도 막부 관리나 상인, 접대부로 제한되었다. 바쿠후는 서양인들의 일본인 접촉을 강력하게 차단했지만 네덜란드를 통한 서양 문물의 수입에는 개방적인 입장을 가졌다. 조선은 강력한 쇄국 정책으로 팽창하던 서양의 문화와 과학 기술을 차단했다. 반면 일본은 네덜란드라는 창을 통해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상의 변화를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에도 바쿠후 말기, 메이지 유신 전까지 바쿠후는 네덜란드가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풍설서(風說書)라는 세계 정세 보고서를 받았다. 특별한 사건이 터지면 별단풍설서(別段風說書)라는 긴급 보고서를 받아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탓에 아편전쟁에서 중국의 패배, 그리고 그 원인이 된 서구의 막강한 군사력에 대해서도 바쿠후는 알고 있었다.

미국과 불평등 조약 체결하고 받은 선물, 철도

1853년 6월 3일 오후 에도만에 검은 배 4척이 닻을 내렸다.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 해군 함대였다. 4척의 배 중 2척은 증기선이었는데, 일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최신예 대형 전투함이었다. 일본은 외국 함정의 입항을 허용할 수 있는 나가사키로 회항할 것을 요구했지만, 폐리 제독은 에도만 깊숙이 함대를 이동시켰다. 바쿠후 측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미국 함대가 에도만 한가운데로 접근하자 바쿠후 병사들은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페리는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일본의 통치자인 쇼군에게 전달하겠다며 해상 무력 시위를 벌였고, 에도만을 측량하겠다며 해병대를 태운 보트를 띄웠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 함포의 엄호를 받은 페리의 측량선은 바쿠후의 턱밑인 에도만을 누볐다. 일본에서 가장 큰 배라고 해봤자 100톤 정도에 불과했던 실정에서, 2450톤에 달하는 증기선 군함은 일본 수비대의 기선을 제압했다. 미국 함대의 함포 사정거리는 일본 해안 포대의 두 배 이상이었고 파괴력도 훨씬 컸다. 바쿠후는 자신의 궁궐 앞마당에 미국 군함의 포탄이 떨어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바쿠후는 페리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 대통령의 친서를 수령했다. 일본은 1875년 미국에 당한 방식 그대로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통해 충돌을 유도하고 이를 빌미로 이듬해 강화도 협정이라고도 불리는 한일수호조약을 맺는다.

페리는 쇄국 정책을 고수하는 바쿠후를 압박하며 일본의 개방을 요구했지만 1차 에도만 방문 때는 미 대통령의 친서만을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1854년 1월 14일, 8개월이 채 못 돼 페리는 에도만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지난번 방문 때보다 더 많은 7척의 군함으로 이루어진 함대를 동원했다. 일본 측은 에도 만으로의 북상을 막았으나, 페리의 군함은 이를 무시하고 에도만 깊숙이 들어갔다. 1월 25일에는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생일을 기념한다며 군함들이 함포를 발사, 에도의 일본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바쿠후는 하야시 후쿠사이를 교섭 대표로 페리와 협상에 나섰고 결국에는 미일화친조약을 체결하면서 쇄국의 빗장을 풀게 된다. 일본 측의 기록에 따르면 페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시 미국 군함 100척을 동원해 에도를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다. 페리의 허풍이었지만 거대 군함을 본 일본의 바쿠후 정권은 전쟁에 패하는 것보다는 개방을 하는 것이 낫다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페리 함대의 두 번째 에도만 진격 두 달 만인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은 일본과의 국교를 성사시켜 태평양에서 안정적인 해양 활동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아시아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도 확보했다. 미국에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꼬리를 내린 일본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미일 교섭이 끝난 뒤 이를 축하하기 위한 미국 측의 선물 증정식이 열렸다. 여러 잡다한 선물이 있었지만 이 중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은 바로 철도였다. 페리의 특별 주문으로 만들어진 증기 기관차와 객차의 모형과 100미터의 레일은 일본 사람들의 호기심을 폭발시켰다. 모형 기관차라고는 하지만 장난감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운행이 가능하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크기도 객차의 길이가 3.2미터, 폭이 2.2미터에 달했다. 현대의 놀이 공원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제법 큰 모형이었다. 페리는 미국의 선진 기술을 자랑하고 서양의 우월함을 증명하는 장치로 철도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군사력과 철도를 이용한 제국을 꿈꾸다

1854년 8월에는 영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12월에는 러일화친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 개방 러시가 이루어졌다.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다. 바쿠한 체제의 쇼군 권력 아래 체결된 미일수호통상조약은 천황의 반대와 불승인, 쇄국파의 반대 폭동 등으로 얼룩졌지만 압도적인 서양의 무력 앞에서 개방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바쿠후 체제의 일본은 개방을 가속화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방을 반대하는 세력과 찬성하는 세력의 대립으로 대 혼란기를 거친다. 개방을 거부하는 존왕양이(尊王壤夷)파가 그동안 권력을 행사하지 못해왔던 상징적 존재인 천황을 내세워 바쿠후 체제를 무너뜨렸다. 아이러니한 것은 쇄국 정책을 고수했던 존왕양이파의 의도와는 다르게 역사가 전개되었다. 1868년 천황을 권력의 중심으로 세워 추진한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서구적 개혁과 개방을 더욱 강력하게 촉진한다. 이와 같은 대격변기에 미일화친조약의 선물로 들어왔던 모형 기관차는 서서히 일본을 재탄생시키는 실체로 거듭나고 있었다.

개방 과정에서 일본인들의 눈에 비친 서구는 앞선 문명을 누리는 인류였다. 증기와 강철, 근대의 법률 체계를 비롯, 선진 과학 기술이 뒷받침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이상적 세계였다. 일본의 권력층은 서양 세계를 복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유럽과 미국으로 보냈다. 그 방문자들의 하나가 1871년 11월 요코하마 항을 떠난 이와쿠라 사절단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역사와 문화를 일본에 소개하는 활동은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중에서도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여러 저작들은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구미 각국을 돌아보고 쓴 <서양사정(西洋事情)>은 초판이 15만 부 넘게 팔릴 정도로 서양 문명에 대한 지식을 광범위하게 보급했다. 이 시기를 전후해 일본은 서양을 축으로 한 문명의 진보와 산업적 발전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게 된다. 일본의 개화파는 몇 년만 노력하면 일본이 서양을 따라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요코하마를 떠날 때만 해도 요코하마에서 에도, 그러니까 도쿄 중심부로 향하는 철도 건설이 한창이었다. 페리 제독이 선물로 전해준 철도 모형을 뛰어넘는 근대 교통 수단인 철도가 부설되고 있는 마당에, 일본 지식인들은 조금만 더 힘을 쓰면 서양에 필적하는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와쿠라 사절단이 눈으로 본 서양 세계는 일본이 만만하게 볼 대상이 아니었다. 1872년 요코하마 항을 떠난 후 11개월 만에 런던에 도착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런던에서 영국 각지로 달리는 철도를 본 후에야 서양 근대 산업의 기초가 얼마나 든든하게 자리 잡았는지 깨닫게 된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이오쿠라 도모미 전권대사를 대표로 기도 다카요시와 오쿠보 도시미치 등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바쿠한 말기의 개화파 인사들과 46명의 유학생들을 포함, 총 107명에 이르는 대규모 방문단이었다. 이 사절단에 전권대사를 보필하는 부사(副使)로 참여했던 이토 히로부미는 33세의 젊은 청년이었다. 이토는 근대 기계 공업을 바탕으로 한 국가 산업의 개조, 그리고 강력한 군사력과 광대한 철도망이 일본의 새 시대를 열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국한 뒤에 나온 것은 통렬한 반성이었다. 서양에 대한 표면적이고 피상적인 접근을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서양 세계에 대한 견학과 연구가 봇물을 이루었고 서양의 문화와 기술을 일본 사회에 확산하는 일이 진행됐다. 그러나 일본인들에 눈에 비친 서양은 "약육강식"의 피라미드 위에 존재하는 포식자였다. 이 때문에 일본이 부국강병을 꾀하는 목적은 더 큰 무력을 확보해 아시아를 발 아래 두는 것이었다. 서구 열강들이 아프리카와 인도와 중국에 했던 것처럼.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의 일원이 되겠다는 탈아입구, 열등감과 우월감이 뭉친 일본의 목표는 이웃 국가들에게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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