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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⑥
경신(庚辛) 대기근 : 조선의 인구를 줄인 자연재해
재해(災害)는 어느 시대에나 있다. 통상 재해는 자연 발생하는 천재(天災)와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나 태도에서 연유하는 인재(人災)로 나누어 보는 듯하다. 역사 속에서 재해, 재난을 살펴볼 때도 유용한 구분이라고 생각한다. 역사학은 사람의 일을 다루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자연과 무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우선 우리 몸부터 수십억 년의 지구 역사 속에서 탄생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던가. 다만, 농업을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는 자연재해가 사람들의 삶에 더 영향을 끼쳤지만, 현대사회는 문명 자체에서 재해, 재앙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기근으로 망한 명나라
하지만 자연재해라고 해도 역사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대체로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경우로 제한된다. 공룡 멸종설에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만일 기후 변화가 그 한 요인이라고 할 때 생물학사에서 그 사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인간이 포함된 생물의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재해의 근원이 자연인지 문명인지 하는 문제도 중요하고, 자연이든 문명이든 그 재해의 영향이나 강도를 결정한 데 따라 천재, 인재로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느 경우에나 마찬가지인 것은 재해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것이 이미 인간의 역사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의 재해 중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단연 기근(饑饉)이었다. 삶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기근이지만, 기근은 가뭄, 홍수, 상해(霜害 때 아닌 서리), 우박 등 농사를 망치는 기상현상이 발생한 결과이다. 가뭄, 홍수, 상해, 우박은 자연현상이지만, 기근은 그런 자연재해가 농사라는 문명의 현상에 영향을 미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구체적인 재해의 양상이다. 홍수가 다리를 끊고 범람을 가져와 주거지를 못 쓰게 만들 때 비로소 우리에게 재해로 다가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학계에서 17세기-별로 좋은 역사 용어는 아니지만-는 소빙기(小氷期)라고 하여 한랭하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되어 기근이 잦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실제 그러했는지는 데이터가 말해줄 것이고, 몇몇 큰 기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명나라의 멸망 원인을 숭정(崇禎) 13~15년(1640~1642. 1644년 청나라는 북경을 점령한다.)의 대기근에 두는 의견도 있다.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역사적 사건의 원인은 '모든 경우'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파병으로 재정이 타격을 입은 것도 원인일 것이고, 조선 사신들이 관찰하였듯이 명나라 조정의 부패와 무기력도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큰 기근이 겹치면 백성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힘들어지면 흩어져 도적질이라도 해야 하고, 도적질을 마냥 할 수는 없으니 뭔가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나라를 안정시키려는 세력이 인민들에게 설득력을 얻게 되면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게 된다. 분명한 것은 기근이 크게 발생해도 망하는 경우가 있고 아닌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새삼 깨닫는 것이다. 기근 하나에만 망한 이유를 귀착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다.
명나라와 달랐던 조선
한편 효종 때도 계갑(癸甲 효종4~5년, 1653~1654) 대기근이 있었다. 영장복설, 노비추쇄 등 효종의 군사정책은 전후 민생 안정과 배치되는 문제점을 안고 있던 터에 연이은 흉년으로 더 이상 지지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점은 전에 서술한 바 있다. 전국 곳곳에서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렸고, 1655년 봄에는 동해가 얼고 여름에는 제주에서 기르던 말 900여 필이 얼어 죽는 참사가 있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현종 1~2년(1660~1661)에는 더 큰 기근이 들었다. 한여름에 눈과 서리가 내리는 저온 현상은 이전보다 훨씬 심했다. 도승지였던 김수항(金壽恒)은 "단지 가뭄만이 혹독한 것이 아니라 눈바람의 이변까지 겹쳤습니다. 지금은 만물이 자라는 계절인데 비상한 재해가 일어나니 팔도에 기황(饑荒)이 들고 변괴가 거듭 나옵니다" 하였다. 이후 조선에는 현종 11~12년(1670~1671)의 경신(庚辛) 대기근과 숙종 21~22년(1695~1696)의 을병(乙丙) 대기근이 힘겨운 삶을 뒤흔들었는데, 이번 호에는 문곡이 살았던 경신 대기근만 살펴보기로 한다.
기상 이변의 속출
1670년 1월 1일, 해무리가 졌는데 안쪽이 붉은 색이고 바깥쪽이 푸른색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1월 내내 전국 각지에서 이변 보고가 이어졌다. 그 중 무지개와 햇무리가 진 보고가 많은데, 며칠 동안 계속 보인다는 것은 비가 오랫동안 내렸다는 의미이다. 지진도 있었다. 전라도에서 문과 창문이 모두 흔들릴 정도의 강한 지진이 발생했다고, 윤2월 16일에 경상도 거창, 윤2월 21일 경기도 교동, 통진, 5월 12일에는 황해도에 지진이 났으며, 7월 16일 경상도 동래에 지진이 발생했다.
전염병, 즉 역병도 발생했다. 실록에 따르면 2월 15일 충청도에서 염병이 창궐해 80여 명이 죽었고, 윤2월 평안도 역병으로 1300명이 감염되었으며, 3월 7일 경상도에 1000명 이상이 감염되었다. 4월 5일에는 제주에 역병이 돌아 역시 죽는 자가 연달았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 틈에 메뚜기 떼가 경기도, 함경도에 기승을 부렸고 딱정벌레들이 물밑으로 들어가 해를 끼쳤으며, 수많은 참새 떼 때문에 곡식은 물론 도토리와 밤도 열리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기근의 직접 원인이 되는 냉해에 대한 보고도 빠지지 않았다. 윤2월 26일, 서울에 때늦은 눈과 우박이 내렸다. 윤2월이면 일러도 3월말, 대개 4월이다. 3월에는 경상도에도 새알만한 우박이 내렸고, 평안도에 서리가 내렸는데, 4월까지 서리 우박이 내려 곡식의 싹이 죽고 목화와 삼베가 모두 피해를 입었다. 이런 상황은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강원도를 가리지 않았다.
4월, 5월까지 냉해가 든다는 말은 모내기를 해도 벼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는 뜻이다. 5월 17일에 평안 감사의 보고를 올렸는데, "우박으로 인해 벼가 상한 것은 물론, 오리알만 한 크기의 우박이 쏟아져 반 자나 쌓이고, 네 살짜리 아이가 그 우박에 맞아 죽었으며, 꿩, 토끼, 까마귀, 까치 등 짐승들이 숱하게 죽었다. 강서(江西)·중화(中和)·선천(宣川)·곽산(郭山)·증산(甑山) 등의 고을에 같은 날 우박이 내려 벼곡식이 모두 손상을 당하여 남은 것이 없었다."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1년 5월 17일)
가뭄과 홍수
가뭄과 홍수
냉해, 우박 등 기상 이변의 와중에서 가뭄이 계속되었다. 3월 20일, 예조에서 현종에게 기우제를 지낼 것을 청했고, 이때쯤 이번 가뭄과 이상기후가 심각한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4월 4일, 4월 9일, 4월 10일에 다시 기우제를 지냈는데도 효과가 없었다. 비가 너무 오지 않아 도저히 파종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대신들은 '약간이나마 비가 와서 밀이나 보리는 살 수 있다'고 말했으나, 이미 지난 한 달 동안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라 죽은 상태였다. 4월 14일에 비가 조금 오자 기우제를 중단했으나 이때 서리 우박이 내리고 있던 경상도와 전라도, 즉 양남 지방은 가뭄이 더욱 심해졌고, 특히 전라도는 보리가 마르고 모가 타는 지경에 이르렀다.
기우제를 계속 지내는 상황에서 5월 22일에 갑자기 큰 비가 내렸고, 다음날인 23일에도 비가 계속되었다. 이로써 가뭄이 끝나는 듯하였다. 하지만 이미 절기를 넘겼기 때문에 파종 시기를 놓쳐 농사를 망친 상황이었고, 살펴보았듯이 조선 팔도가 모두 흉년이 들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정도였다면 조선 정부의 대응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5월 말에 내린 비로 가뭄이 끝나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6월 1일, 전라도에 큰 비가 연일 내려 들판이 강이 될 지경이라는 전라 감사의 보고가 접수되었다. 6월 8일에는 경상도에 참혹한 홍수가 졌다는 경상 감사의 보고가 올라왔고, 이어 6월 20일에 경기도에 큰 물이 졌다는 경기 감사의 보고가 올라왔다. 식량 생산지인 호남의 피해가 특히 심했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비가 안 와서 기우제를 지냈는데, 이제는 비가 너무 쏟아져서 기청제를 지내자는 말이 나왔다. 7월에는 함경도, 황해도, 평안도의 홍수 피해가 보고되었다.
생기가 사라진 백성들
재상급 인사들마저 십여 명씩 죽어나갔다. 대표적으로 당시 병조판서 김좌명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장남이며 그의 동생이 바로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다. 또한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기근은 1671년(현종12)까지 극심한 이어졌다. 대사헌 장선징(張善徵)은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서울 내외에 굶어 죽은 시체가 도로에 이어지고 있습니다. 혹은 부모처자가 서로 베고 깔고 함께 죽은 경우도 있고, 혹은 어미는 이미 죽고 아이가 그 곁에서 엎드려 그 젖을 만지며 빨다가 곧이어 따라 죽기도 합니다. 울고불고 신음하는 소리에 지나가는 자도 흐느낍니다. 더욱이 전염병은 날로 치솟아 열풍이 불꽃을 일으키는 듯한 기세입니다. 병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드문데, 걸렸다 하면 곧 성 밖에서 죽습니다. 사방이 염병이라 온통 움막을 지어 끝없이 펼쳐지니, 참혹한 광경과 놀라운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서울 밖의 죽어가는 참상은 이미 전쟁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보리와 밀을 이미 그르쳤고 수수와 좁쌀도 다시 벌레가 먹었으니, 이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백성들은 생기가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현종개수실록> 12년 6월 4일)
장선징은 경술년(흉년이 시작된 1671년) 이전의 각도 각종 군보(軍保)와 노비의 제반 신역(身役) 및 관아 대출미 미납 등의 항목을 일체 탕감하라고 말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이 어려울 때 나라에서 제일 먼저 해줄 일은 세금을 줄이거나 면제해주고, 군대를 포함한 신역 동원을 면제해주어 편안히 모여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조선도 그렇게 했다. 어떤 학자는 조선의 효율적인 시스템이 재난의 규모에 비하여 효과적으로 작동하였다고 조사하였다. 그러나 100만의 기아자를 내서 인구 10%가 줄어든 기근의 피해를 더 줄일 수도 있었다.
정부가 할 일
문곡은 현종 11년 병으로 사직하고 물러나 있었다. 문곡이 보기에 현종은 별 문제가 없는 군주였다. "안으로는 음악, 여색, 재물, 이익 따위에 유혹되지 않고 밖으로는 재미 삼아 토목공사를 일으키거나 사냥을 즐기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하늘의 경계를 삼가고 백성들의 고통을 돌보고 유현을 예우하는 등 제왕의 거룩한 덕과 아름다운 일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린 지 1기(紀 12년)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의 효과는 더욱 아득해져서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심해지고 백성의 원망이 날로 불어나고 나라의 형세가 날로 위축되어 급속도로 나날이 망해 가는 길로 나아가고 있으니, 이것이 신이 이해할 수 없는 첫 번째 일입니다." 문곡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대책을 구하고 죄수들을 심리하는 일은 단지 한때의 형식적인 조치일 뿐이라 재변이 지나가면 두려운 마음이 풀려서 한 달도 지속되지 않으니, 하늘의 경계를 신중히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택이 아래에까지 이르지 못하여 그나마 베푸는 조그만 은혜가 산적한 민폐를 없애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고, 신뢰가 먼저 쌓이지 않아서 일을 할 때에는 걸핏하면 사람들의 정서를 거스르니, 백성들의 고통을 돌본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번에 흉년이 들자 백성을 진휼하기 위한 모든 방책을 강구하여, 여러 관사의 저축과 뭇 관원의 녹봉을 줄이고 또 줄였으며 심지어는 정규의 부세와 공물도 감축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각종 군병은 벼슬아치에게 주는 녹봉의 몇 갑절이나 소비하여 모두 밑 빠진 독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끝내 변통하지 않았으니, 국가 재정이 바닥나 재용이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훈련도감(訓鍊都監)과 금위영(禁衛營)의 군병은 그 유래가 이미 오래되어 비록 함부로 논의할 수 없습니다만, 지금 별대(別隊)의 정원을 채우고 정초청(精抄廳)을 설치하는 일까지도 그만둘 수 없단 말입니까. 그리고 호위 군관들의 경우는 그대로 두어도 일에 유익하지 않고 없애도 나라에 손해될 것이 없는데도 혁파할 수 없단 말입니까. (김창협, <농암집(農巖集)> '선부군행장(先府君行狀)')
경술년 봄에 올린 문곡의 상소였다. 적어도 나라에서 실질적인 대책과 재정, 군역 정책을 폈다면 좀 더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당시 허적(許積)이 국정을 독단하면서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총애를 공고히 하느라 애쓰다 보니, 정책과 법령이 구차해져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도적이 없던 이유
문곡은 8월에 청나라 사신을 의주(義州)까지 수행하여 전송하고 돌아와 서로(西路 평안도)의 백성 상황을 자세히 진달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미 진휼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여러 관사에서는 한결같이 평년처럼 포(布)를 거두고 있습니다. 부질없이 백성의 원망만 사고 끝내 거두지도 못할 바에는 차라리 미리 덕스러운 윤음을 내려 백성을 위로하고 어루만지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언제 주검이 되어 골짜기를 메울지 모를 백성들로 하여금 덕스러운 뜻이 자신들에게도 미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안착하여 서로 도와가며 살 수 있게 해야 하니, 이것이 실로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문곡은 신해년(1671, 현종12)에 재차 문형(文衡 대제학)을 맡았다. 봄에 기근이 크게 들어 사방의 굶주린 백성 수십 만 명이 한양으로 모여들었다. 문곡은 김좌명(金佐明 이때 역병으로 사망), 민정중(閔鼎重 현종비 명성왕후의 큰아버지), 조복양(趙復陽)과 함께 진휼하는 일을 나누어 맡고 밤낮으로 마음을 기울이느라 쉴 틈이 없었다.
여름에 또 보리가 흉작이었고 여역(癘疫)이 크게 돌아 사망하는 백성이 더욱 많았는데도 끝내 도적이 되거나 유랑하여 흩어지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현종이 애를 쓴 덕도 있지만, 여러 어진 신하가 좌우에서 부지런히 애쓴 공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 이 점은 중요하다. 도적이 되고 싶은 백성, 유랑하고 싶은 백성은 아무도 없다. 편안히 가족과 모여서 살고 싶다. 이런 재해를 넘기면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백성은 도적이 되지도 유랑을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런 전망이 없으면 백성은 달라진다. 그런 전망을 주는 것, 그것이 관료, 정치가의 책임임을 문곡과 그의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
사람 사는 세상에 재해나 사고를 피할 수 없다고 해도 민심이 재해 때문에 돌아서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재해나 사고에는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을 때 민심은 차가워진다. 재해에 대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정부에 맡겨진 일이고, 정부는 그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라 정부의 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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