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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슬프다" 이 비극의 인식 없이는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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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철학은 슬프다" 이 비극의 인식 없이는 아무 것도…!

[철학자의 서재]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미니마 모랄리아>

슬픈 시대

모두가 슬픔에 빠진, 그야말로 슬픈 시대다. 이번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한국사회에서의 집단적 멜랑콜리는 극에 달해 있었다. 세 모녀 자살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자살률 부동의 1위를 달리며 모두가 불안한 미래에 좌절하던 극한의 신자유주의 한국호는, 침몰하는 배 속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보며 다시 한 번 경악한다. 모두가 집단적 트라우마 속에서 서로의 '안녕'을 물어야 하는, 불안과 절망이 사회 구성원들의 삶을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이 슬픈 시대에, 철학은 어떤 형태로 자신의 존재의미를 표현하는가? <미니마 모랄리아>(김유동 옮김, 길 펴냄)에서 아도르노는 철학을 "슬픈 학문"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아도르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독일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1944년부터 1947년까지 작성한 잠언들을 모아 1951년 첫 출간되었다. 그에게 있어 나치의 지배와 유대인 박해, 망명생활과 세계대전 등은 "예로부터 꿈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 있던 소리 없는 소음이 이제는 잠에서 깨어나면 신문의 큰 제목들에서" 울려 퍼지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사물 안에 새겨져 있는 역사의 표현은 오직 지나간 고통"일 뿐이라고 말하는 이 망명 지식인은 철학이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으로 인한 개별자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반성적 형식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고통의 표현으로서 철학은 '부정적'이어야 하며, 현실의 모순을 남김없이 폭로하고 비판하며 그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는 점에서 '변증법적'이어야 한다.
"활짝 핀 나무조차 사람들이 그 만개 밑에 가려진 공포의 그늘을 인지하지 않는 순간 거짓말을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순진무구한 표현도 아름답지 못한 존재자를 치욕스럽게 하는 구실이 된다. 아름다움이나 위로란 더 이상 없으며, 있다면 그것은 오직 다음의 시선, 즉 공포를 직시하고 감내하며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의식 속에서도 더 나은 상태에 대한 가능성은 놓치지 않으려는 시선이다."

▲ <미니마 모랄리아 :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테오도르 아도르노 지음, 김유동 옮김, 길 펴냄). ⓒ길
철학은 이 슬픈 시대, 슬픈 사회의 이론적 반영이며, 현 시대의 "부정성"을 놓치지 않으려는 단호한 시선이다. <미니마 모랄리아>는 이러한 '부정 변증법'으로서 아도르노의 철학 기획을 사회의 가장 내밀한 영역, 사적이고 문화적인 일상의 영역 - 반항적인 청소년들과 부모들의 세대갈등, 옷차림과 유행, 결혼과 이혼, 프랑스어로 외설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 부인이 외투를 입혀주어야 하는 폭군 가부장, 선물을 고르는 아이들, 신문 부고란, 영화와 대중문화 등 - 을 배경으로 실행하고 있다. 이 책의 부제인 "상처받은 삶에서 나온 성찰"이 암시하듯, 이 책은 파시즘과 전체주의, 후기 자본주의의 시대에 상처받은 개별자들의 삶의 경험을 기록한다. 이를 통해 아도르노는 '슬픈 시대'에 걸맞은 '슬픈 학문'으로서 철학이 상처받은 개별자들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물론 철학이 '슬픈 학문'인 이유는 또 있다. 생산력의 급격한 발전이 낳은 정신문화에 대한 폄하, 그리고 경제적 효용 또는 교환가치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순수이론에 대한 조소와 같은 오늘날 만연해 있는 철학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은 이미 아도르노의 시대에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철학을 무용한 것으로 평가 절하하는 이러한 시각은 언제나 그 이면에 철학을 '불순한 것'이자 '위험한 것'으로 여기는 심리적 저항감과 공명한다. 철학이 지배적인 가치들에 도전하고 근본적인 비판의 태도를 견지하는 한, 철학은 언제나 이 사회 주류를 형성하는 관점에서는 낡은 것이자 동시에 용인할 수 없는, 추방해야 할 대상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철학의 위기 속에서, 다른 학문들과 구분되는 철학만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올바른 삶"에 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생산의 요구에 맞춰 단순한 적용 가능한 '방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철학만의 고유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철학의 출발지점은 바로 이곳이며, 여기에서 철학은 자신의 존재이유(Raison d'etre)를 찾는다.

올바른 삶은 가능한가?

후기자본주의에서 삶은 "어떤 자율성이나 독자적 실체도 지니지 않은, 물질적 '생산과정'의 부속물이 됨으로써 사적 영역이나 단순한 소비의 영역"으로 전락했다. 삶은 생산에 종속되어 생산이 목적이고 삶이 (재생산과 소비 등을 통해 생산을 보조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지 오래지만, 거꾸로 대중매체는 '충만한 삶'에 대한 이미지를 퍼뜨리고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현존을 긍정하도록 유도한다.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계발서나 힐링 담론 역시 이 과정의 연속이다. "난 할 수 있어!", "그래도 삶은 아름답지 않은가?"라는 사고를 강제하는 이 과정은 삶이 궁극적으로 생산에 종속되어버린 현실을 망각하게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삶은 가상이 되었다. 이러한 삶의 쇠락은 곧 자율적으로 사고하고 행위하는 주체의 소멸을 의미한다. 나아가 주체의 소멸은 다시 윤리의 불가능성을 함축한다. 만약 자신의 자유의지대로 살아가는 자율적인 주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윤리의 물음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올바른 삶"은 오늘날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허위적인 삶 속에 올바른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허위적 삶을 강제하는 객관적인 힘, 즉 사회적 강압 속에서 개별자는 독자적으로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의 물음,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우리는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개별자들이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더 이상 제기하지 않는 순간, 사회적 억압과 지배의 메커니즘은 개별자들의 체념을 양분삼아 더욱 굳건한 토대를 이룰 것이며, 이는 사회적 자유의 완전한 말살과 특수자에 대한 보편의 지배를 완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 삶이 가상이 되고 올바른 삶이 불가능해진 것이 사회적인 메커니즘에 따른 것이라면, 오히려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삶을 불구화하고 개별자의 고유한 경험을 말살시켜버리는, 교환원칙에 입각해 삶을 교환 가능한 것, 통제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사회적 시스템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행위가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따라서 "어떻게 주체의 윤리적 삶이 가능한 객관적 관계망을 만들어낼 것인가?"의 물음으로 소급된다. 결국 아도르노는 윤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정치의 문제로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본다. "전체는 비진리다"라는 이 책의 유명한 명제는 현실의 '허위적' 전체를 변혁해야만 그 안에서 '올바른' 삶이 가능할 것이라는 진단이다. 윤리는 축소된 정치이며, 정치는 확장된 윤리다. 따라서 개별자의 고유한 삶의 가능성은 빈틈없이 총체적으로 조직된 사회적 전체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사회적인, 그러나 전체에 저항하는 개인

"올바른 삶"에 대한 물음은 또한 주체로서 개인 또는 개별자의 의미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은 언제나 개별자에 고유한 영역이며, 개별자는 바로 자신의 고유한 삶을 통해서만 적대적이고 허위적인 전체와 거리를 둠으로써 반성적이고 비판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개인이 전체에 종속되어버리는 전체주의적 사회는 물론, '대중 민주주의'와 '대중문화', '대량생산 대량소비'로 특징지어지는 후기 자본주의적인 대중사회에서도 개인은 언제나 동일한, 사회적으로 규정된 삶의 형식 속에서 그 고유한 삶의 영역을 박탈당하고 만다. "자본주의에서는 '차이'와 고유성 덕분에 지배적 교환 관계 속에 흡수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질의 유토피아'가 물신적 성격 속으로 도피한다." 이에 반해 아도르노는 '비판이론'의 지배 비판은 바로 전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개인의 문제를 제기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차이'를 녹여버리는 것을 곧바로 '의미'라고 외쳐대는 전체주의적 통일성에 직면해서 사회의 해방적 힘들 중에서 어떤 것은 잠정적으로 '개별적인 것'의 영역으로 모여질 수도 있을 것이다. '비판이론'은 (…) 이 '개인' 속에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삶의 고유성이 중요한 이유는 점점 개별성과 고유성을 잠식해 들어가는 사회적 전체의 허위적인 통일성과 총체성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할 수 있는 개인만이 이 사회적 전체의 허위를 증명하고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로 통일되어 고유성이 해체되어가는 시대에 개인은 마지막 남은 "진리의 파수꾼"이다, 개인은 전체에 저항함으로써 사회적 총체성에 대한 비동일자로 남는다.

아도르노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급진적으로 재구성한 마르크시스트 철학자였지만, 개인과 전체, 특수와 보편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서는 마르크스주의적 사고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집단주의에 갇혀 개인의 역사적 역할을 부정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은 "개인에겐 두 개의 눈이 있지만, 당에는 천 개의 눈이 있다"는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당과 계급 같은 집단적 주체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에 대한 반감 때문에 집단을 구성하는 개인 자신의 삶의 고유성과 개인의 의식에 관한 물음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한술 더 떠 '반동적'이라고 비난한다. 이 때문에 개별자의 삶과 경험, 그리고 고통에 주목하는 아도르노는 흔히 '부르주아 개인주의자'로 매도된다. 물론 개인에 대한 관념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와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과 긴밀한 관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아도르노는 개인을 실체로 규정하는 자유주의적인 개인주의는 오히려 개인에 대한 전체의 예속을 강화하는 무기력한 이념이라고 비난한다.

왜냐하면 개인은 본질적으로 사회적인 존재이며, 사회적으로 규정된 개별자이기 때문이다. "사회화의 압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서조차 개인은 사회화의 가장 고유한 생산물"인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고유한 삶과 자율성은 그러한 고유한 삶을 보장하는 객관적인 사회적 관계망을 전제로 한다. "사회 해방 없이는 아무런 해방도 없다." 반면 '실체로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가상'에 불과하다. 나아가 개인을 실체로 보고 사회를 원자화된 개인의 총합으로 보는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전제가 되는, 개인을 넘어선 사회의 보편적인 상태에 대한 물음을 기각함으로써 오히려 개인을 예속시키는, 현존하는 사회적 억압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개인을 무장 해제시킨 자리에는 언제나 전체주의적인 지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20세기 역사의 경험은 이를 말해준다.

이러한 아도르노의 개인에 대한 관점을 '사회적인, 그러나 전체에 저항하는 개인'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개별자들은 그렇다면 어떠한 방식으로 지배질서에 포섭되지 않으면서도 '차이'를 넘어선 '연대'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유성의 유토피아는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구원의 시선: 현실과 그 넘어섬

"절망에 직면해 있는 철학이 아직도 책임져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사물들을 구원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한다. 인식이란 구원으로부터 지상에 비추어지는 빛 외에는 어떠한 빛도 가지고 있지 않다."

벤야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아도르노는 이 책의 결말을 "메시아의 빛 속에서 드러날 세상"을 고대하는 "구원의 관점" 또는 "메시아적 관점"에 대한 서술로 마무리하고 있다. 이는 사유가 현존의 해방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미시적인 일상의 영역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사유'에 남겨진 마지막 기회는 외떨어진 것에 대한 시선, 진부한 것에 대한 증오심, 닳아빠지지 않은 것, 즉 보편적 개념의 틀에 의해 아직 파악되지 않은 것에 대한 추구에 있다." 아도르노는 전통적 철학이론이 다루지 않았던 한 사회의 일상적이고 사적인 영역, 문화적인 소비의 영역 속에서 개별자들의 경험을 다양한 형태로 다루며, 그 안에서 그러한 일상 속에서마저 그 흔적이 감지되는 지배적 전체의 "객관적 힘"을 발견하려 시도한다.

그 결과 아도르노적인 시간 개념 속에서 "가장 최근의 과거사는 항상 카타스트로프(재앙)에 의해 파괴된 것인 양 나타난다." 진보하는 역사는 동시에 개별자들의 고통의 역사였을 뿐이다. 석기 시대에 돌을 던져 소유물을 놓고 다툼을 벌이던 인류가 핵무기와 가스실을 만들어 수백만 명을 대량 학살한 것은 진보이면서 동시에 파국의 역사인 셈이다. 철학은 이러한 역사적인 재앙이 낳는 사회적 고통을 자신의 언어로 표현한다. 그러한 고통의 표현 속에는 그러나 절망적인 슬픔과 체념을 넘어서, 이 고통이 반복되어선 안 된다는, 해방과 초월에 대한 사유의 갈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구원을 향한 사유의 시선은 결국 부정적인 현실에 대한 응시를 통해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은 유토피아에 대한 사유를 함축한다. 사유는 언제나 현존을 넘어선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을 자기 내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각 개별자들은 생산에 종속되어 자신의 고유한 삶을 박탈당하는 일 없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노동한 대가로 주어지는 돈을 공허함을 채워주지도 못하는 쾌락적 소비에 소모하는 생활을 중단하고, 존재 그 자체가 의미를 갖는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짐승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물 위에 누워 평화롭게 하늘을 바라보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 그 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 더 어떻게 규정할 것이나 실현할 것도 없이…….'" 그러나 그 유토피아가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모습으로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유토피아란 애초부터 어디엔가 있을 것 같지만 손에 잡히지는 않는 희뿌연 형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이론적으로는 증명이 불가능하지만 우리의 윤리적, 정치적 삶을 위해 실천적으로 요청되는 일종의 "규제적 이념"(칸트)인 셈이다.

"우리가 구원을 희망할 경우 희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음성이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한순간이나마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것은 무기력하기 그지없지만 그러한 희망인 것이다."

아마도 이 책에서 아도르노가 음울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이나 방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기적도 바라기 어려울 만큼 전망이 어두웠던 1940년대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일 것이다. 아도르노의 대안적인 성찰들은 이후 그의 철학적 주저인 <부정 변증법>에서야 그 어렴풋한 윤곽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 그는 "비동일자"에 대한 강조를 통해 그가 겪어야 했던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동일성 논리"를 넘어서는 철학적 구상을 서술한다. 나아가 사유의 비판적 무기로서 변증법의 역할이 강조된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여전히 신학적인 문제틀이 개념적인 분석과 공존하고 있으며, 현재의 억압적 상황을 넘어선 대안적 상태에 대해서는 언제나 가정법(접속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결국 아도르노에게 있어서 유토피아적 상태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보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슬픈 시대의 슬픈 학문으로서 철학이 부정적 현실에 대해 단호하게 맞서려는 '비판적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슬픈 학문'이라는 표현은 원래 <즐거운 학문>(기쁜 학문, Fröhliche Wissenschaft)이라는 니체의 철학적 모토를 패러디한 것이다. '즐거운(기쁜) 학문'을 '슬픈 학문'으로 대체하는 것은 슬픔 속에서 비관하라는 메시지처럼 오해를 사기도 한다. 그러나 '기쁨과 긍정의 철학'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슬픈 학문'이라는 출발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헤겔, <정신현상학>)는 오늘날처럼 모두가 슬픔에 잠긴 '슬픈 시대'를 이겨내기 위한 철학적 출발이다. 이러한 비판으로서의 철학은 '슬픈 학문'으로만 남지 않는다. 철학은 슬픈 시대의 고통을 표현하면서, 그 부정성에 대한 단호한 자세 속에서 유토피아의 희망을 보존하려는, '긍정'(현존에 대한 무비판적인 자세라는 의미의 긍정이 아니라, 부정적인 자세를 통해 현존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낸다는 의미에서의 진정한 긍정)을 향해 나아가는 '부정의 힘'으로 이어져야 한다.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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