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수원 화성(華城) 축성 당시 조선의 대왕 정조(재위 1776∽1800)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름다운 세계문화유산 화성(華城)과 화성행궁을 여유롭게 돌아보며 그 깊은 뜻을 공부하는 화성학교 제2강이 오는 5월 31일(토) 열립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의 과거와 현재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화성박사’인 김준혁 교수(한신대)입니다.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 할 만큼 성을 많이 쌓았죠. 그중에서도 수원 화성은 ‘성곽의 꽃’이라 불릴 정도로 아름답고 우수한 기능을 갖춘 조선시대 성곽입니다. 유네스코는 1997년에 수원 화성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습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은 우리 역사상 최고의 개혁군주라고 평가받는 정조가 세운 ‘수원신도시’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정조가 조선의 농업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자 만든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습니다. 훗날 정조를 공부하면서 정조가 대유평이란 이름을 지은 의미를 알고, 미리 알지 못했음을 한탄하기도 하였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초등학교 교사이셨던 아버지가 아들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함께 등교할 때 힘들게 페달을 밟으면서도 하루에 한 꼭지씩 역사 이야기를 해준 것이 가슴에 남아 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하기로 하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하여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정조를 전공하였고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7년 화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된 이후 수원시가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을 추진할 때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임용되어 화성의 복원과 컨텐츠 개발에 참여하였고, 이후 화성박물관 건립을 주도하여 학예팀장으로 재직하였습니다. 이후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하다가 한신대학교에서 정조교양대학을 설립하면서 이 대학의 교수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천명이 바로 정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늘 이야기하고 있고, 화성을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화성의 우수성과 아름다움,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정조시대 개혁과 민본정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화성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최근 대한민국 역사교사 100명에게 우리 역사에서 가장 기억해야 할 인물 100명을 추천받았습니다. 그중 첫 번째 인물이 조선의 개혁군주 정조였습니다. 2위가 다산 정약용 선생이었고 3위가 이순신이었습니다.
그만큼 정조가 만들고자 했던 백성의 나라, 그가 추진하였던 소통의 정책이 오늘 이 사회에서 다시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가 과대 포장되어 그가 추진했던 모든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전근대 그 어떤 국가지도자들보다 백성을 위해 헌신한 그 같은 국왕은 없을 것이라 단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세운 개혁기반도시 화성은 이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찾는 역사문화도시가 된 것입니다. 화성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탁 트입니다. 성곽의 웅혼함과 더불어 아름다움이 가득합니다. 아름다움이 곧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는 정조의 표현대로 화성의 아름다움은 놀랍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움 속에 더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민본주의입니다. 정조는 화성 축성 당시 참여한 기술자와 날품팔이들 모두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였습니다. 그리고 여름 더위를 막기 위한 척서단(滌暑丹)과 오늘날의 영양제인 제중단(濟衆丹)을 하사하고 겨울에 솜옷과 털모자를 주었습니다. 당시 털모자는 정3품 당상관 이상 되는 고위직들이나 썼던 신분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것을 축성에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하사하였으니 이들의 기쁨은 그 무엇보다 컸을 것이고 국왕의 따스한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화성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습니다. 정조의 모친인 혜경궁 홍씨 회갑진찬연은 단순한 회갑잔치가 아니라 조선 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의식 혁명이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남녀가 함께 잔치를 하고, 여성이 상위에 남성이 하위에 자리하며, 조선의 악기만을 사용하고, 백성들이 잔치에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은 근대화로 나가는 시대의 변화였습니다. 그러한 것이 모두 화성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화성 안에는 국방 개혁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조선 최강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 군사들이 주둔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와 정조가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예24기를 익히고 그 무예를 토대로 중국의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주적인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화약 신무기를 개발하고 그것을 성공시켰습니다. 중국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약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역사의 흔적이 지금 화성에 오롯이 남아 무예24기를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화성을 찾아가기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정조가 꿈꾼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주적인 나라만들기의 모든 것을 현장에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정조시대 역사의 길을 걸으며 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고 진정한 민주국가, 통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찾기를 기원합니다.
김준혁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인 아름다운 화성에 대해 자세히 들어봅니다.
화성은 왜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요?
세계문화유산 화성은 그리 크지도 않은 지방 성곽인데 왜 세계의 쟁쟁한 문화유산들과 동등한 문화유산이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조가 왜 화성을 쌓았는지 역시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4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화성은 18세기 만들어진 군사건축물의 모범이다.
둘째, 화성은 군사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하나도 없다. 즉 아름답게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셋째, 화성은 한국전쟁 기간 중 상당수가 파괴되어 원형의 모습을 잃었지만,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탁월한 기록이 존재하여 원형대로 복원할 수 있었다.
넷째, 조선의 국왕 정조의 위민정신(爲民精神)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와! 대단하죠. 특히 넷째항, 조선 국왕 정조의 위민정신과 개혁정신이 화성에 담겨 있어 세계문화유산이 되었다는 것은 화성이 지니고 있는 가치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성에 무엇이 있기에 국왕 정조의 위민정신이 담겨 있다고 유네스코의 전문가들은 판단한 것일까요?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 눈으로 보아야 쏙쏙 들어올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 모두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들입니다. 첫째, 화성은 18세기에 만들어진 수많은 동서양의 성곽 중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미주, 유럽, 중국, 일본 등 많은 나라들이 18세기에도 성곽을 쌓았습니다. 아마도 전체 목록을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성(城)들이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많은 성들 중에서 화성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이 유네스코의 결정이었습니다. 참 대단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크레인 기법까지 동원
화성은 연구자들이 이미 이야기하듯 조선의 축성법을 기반으로 중국과 일본의 축성법을 접목시켰고 거기에 더해 서양의 축성 문화를 이용하였습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이 만든 거중기가 실제로 세계적인 물리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의 크레인 기법이 원천이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하다못해 화성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너무 대단한 내용이라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공과대학인 아헨공대와 반베륵대학에서 수학한 연구자가 오랫동안 화성의 특수성을 공부하다가 이 사실로 박사학위 논문을 썼답니다. 이러한 내용을 실제로 학인하고 싶다면 현장을 한번 보셔야 합니다.
둘째, 화성이 군사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누구나 수원을 방문해서 화성을 보는 순간 그 아름다움에 푹 빠집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볼수록 감탄하죠. 전 거의 매일같이 화성을 본답니다. 사계절이 변하는 모습 속에서 화성이 같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죠. 그때마다 찬탄을 한답니다.
화성은 유네스코의 표현대로 똑같이 생긴 건물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21세기의 오늘날도 대형 아파트를 지을 때 똑같이 생긴 건물이 너무도 많은데, 200여년 전 화성 축성을 진행했던 이들에게 동일한 건물을 만드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각 건물의 디자인을 모두 지형과 성곽의 기능에 따라 독특한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정조의 도시 디자인관을 구현하다
정조는 화성 축성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정말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200여년 전 디자인과 도시경관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똑같은 비용으로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기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이 말을 생각할 때마다 정조가 두렵고 당시 기술자들이 무섭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생각을 한 그분들이 너무도 고맙고 소중합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각종 디자인이 발전하는 것도 이러한 정신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정조는 자신의 디자인관을 화성이라는 독특한 건축물에 투영하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화성을 찾아와 보실 아름다운 건축물들 대부분은 다산 정약용의 기본 설계에 실려있는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런 건물들의 대다수는 바로 정조의 특별지시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이 건물들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없는, 아니 가장 우수한 건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거론한 이유가 바로 <화성성역의궤>입니다. 사실 한국전쟁 기간에 화성은 많이 파괴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50배가 넘는 포탄이 한반도에 떨어졌다고 하니 수원지역이라고 별 다를 리 있겠습니까? 한국전쟁 휴전에 서명한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이 “한반도는 신석기시대로 돌아갔다”는 그 유명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우리 강토는 폐허가 되었습니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럼에도 화성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성벽이 온전히 남아있고 팔달문과 화서문 그리고 방화수류정과 연무대 등 주요 건축물 등이 그대로 보존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화성이 파고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1975년부터 79년까지 화성을 복원할 때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을 토대로 복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화성 축성 전 과정을 기록한 이 책은 세계기록유산의 보배 중의 보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성성역의궤>는 나머지 <조선왕조의궤>와 더불어 2007년 7월 1일에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쾌거가 있었습니다.
이 기록에는 국왕의 명령, 관리들의 답변, 축성의 진행과정 등 조정의 일정만이 아니라 축성에 참여한 기술자와 일용 노동자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어 있고, 이들이 받은 임금까지도 적어놓고 있습니다. 거기에 더해 재료의 출처와 이동경로 등 아주 세밀한 부분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시설물들의 도면과 축성 과정, 공간 구조에 대한 아주 상세한 내용이 적혀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록을 토대로 복원을 하였기 때문에 화성은 사실 200여년 전의 모습과 다름이 없습니다.
<화성성역의궤>를 아십니까
그래서 유네스코 이사회는 이 부분을 높이 산 것이죠. 유네스코 이사회가 <화성성역의궤>를 보고 감탄한 내용은 문화재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그 상세한 뒷이야기는 아마도 대단민국에서 제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구요? 제가 당시 유네스코 이사들을 만나 화성의 세계유산 등재를 역설하신 고(故) 심재덕 수원시장으로부터 아주 자세히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분이 돌아가신지 5년이 되어 그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화성의 시설물들 중에서 한국전쟁 기간에 파괴된 건물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복원된 것인지를 현장에서 실감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정조의 위민정신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정조의 위민정신이 어디에 담겨 있는 것일까요? 참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입니다.
아주 간단한 이야기하나 해보죠.
원래 화성은 4km로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다산 선생의 설계안이죠. 다산이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성곽이 4km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5.74km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당시 계산대로 하면 3,600보로 설계했으나 1,000보가 늘어나 4,600보가 된 것입니다. 설계 원안이 아니라 늘어난 성곽 공사이니 물자조달이나 경비도 더 많이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성곽을 늘린 것은 바로 성곽을 쌓을 터에 살고 있는 백성들의 집을 허물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위민정신의 하나이겠지요.
화성이 설계안보다 늘어난 까닭
이보다 더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한 여름에 기술자들이 더위 먹지 말라고 척서단을 주고, 겨울에 털모자와 솜옷을 주어 기술자들을 배려하고, 축성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노동에 대한 대가, 즉 임금을 지불한 것은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축성 과정에서 정조의 위민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정조가 화성을 만든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백성들의 삶을 발전시키기 위한 위민정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저 단순하게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도시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화성 안에 담긴 정조의 위민정신 역시 화성을 답사하면서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5월 화성학교는 하루 내내 화성만을 온전히 답사할 것입니다. 지난 3월의 화성학교(제1강)는 정조의 전반적인 행차를 따라가는 기행이었습니다. 화성과 함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융릉과 정조의 묘소인 건릉을 보고, 사도세자의 원찰인 용주사까지 답사하는 일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제2강은 화성을 속속들이 둘러보는 <화성 완전답사>로 준비했습니다. 정조가 화성을 축성할 때 전체적인 조망을 하고 진두지휘를 했던 작은 언덕도 가볼 예정입니다. 정조가 화성 축성을 지휘할 때 팔달산 정상에 올라가서 한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화성행궁 북쪽에 작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올라 정조는 축성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오늘 그 공간은 건설회사 소유로 되어 있지만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화성에는 3곳의 연못이 있었습니다. 남쪽에 있는 연못은 무려 6천 평이나 되는 대형 연못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모두 없어졌죠. 그 3곳의 연못이 있던 자리도 볼 생각입니다. 연못이 복원되면 정말 좋겠지요.
또 화성에는 장용영의 중영(中營)이 있었습니다. 그 건물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제 강점기 군청이 되었다가 해방 이후 다시 수원군청으로, 그리고 이제는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죠. 정조시대 백성을 위한 건물로 만들어진 다양한 시설물들이 지금은 그 용도와 다르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흔적들을 찾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입니다.
더불어 화성 내의 문화공간도 만나러 갑니다. 화성 내의 작은 미술관과 갤러리들이 존재하고 인사동보다 더 아름답고 정겨운 문화공간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시민들의 손으로 조성한 것입니다.
하이라이트-화성 밖에서 화성을 본다
또다른 하이라이트가 있습니다. 바로 화성 밖에서 화성을 보는 것입니다. 화성의 동쪽에 만들어진 연못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동(池洞’에 새로운 문화공간이 탄생하였습니다. 대시인 고은 선생님이 수원으로 이사오셨는데, 그 분이 수원지역의 시인들과 함께 마을 담장에 시를 쓰셨습니다. 일반적인 벽화와 달리 시가 있는 벽화 골목을 찾고 그곳에 있는 높이 50여 미터의 교회 첨탑에 올라 화성을 바라 볼 것입니다.
이렇듯 이번 화성 답사는 바로 화성행궁과 화성 전체를 둘러 볼 것입니다. 그리고 화성 내의 놓치고 싶지 않은 문화공간과 에피소드가 담긴 곳들까지 모두 찾아가 볼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답사 코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이번 답사는 그래서 정조와 화성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을 정겹게 만나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올 봄이 만개한 5월 말, 기대하셔도 좋을 화성학교입니다.
2014년 5월 31일 토요일, 화성학교 제2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08:40 수원 화성행궁 정문 앞 모임. 수원 답사 현장에서 모입니다. 정시에 시작합니다.
*교통체증이 있을 수 있으니 여유있게 출발해주시기 바랍니다^^
-서울 강남역 5번 7번 출구/나라빌딩 앞 정거장/직행 3000번/2,100원/수원 팔달문 정류장 하차/1시간 20분 소요
-서울 잠실역 6번 출구/직행 1007번/2,200원/화성행궁, 여민각 정류장 하차/1시간 10분 소요
-서울 사당역 4번 출구/직행 7770번/2,000원/장안공원 정류장 하차 후 도보 10분/1시간 10분소요
-수원역(지하철 1호선)에서 20여분 소요
*수원역 4번 출구(북측광장) 일반시내버스 11, 13, 13-3, 36, 39번 환승/화성행궁, 수원성지 정류장 하차
*수원역 건너편(지하도 이동)/일반시내버스 60, 660, 700-2, 7, 7-2번 환승/화성 행궁 정류장 하차
08:40-09:00 제2강 여는 모임
09:00-11:00 화성행궁, 화령전 답사
11:00-11:30 무예24기 시연 관람
11:30-12:00 화성유수부 이아(貳衙), 무고(武庫), 강무당(講武堂)터, 정조의 축성 지휘터 답사
12:00-13:00 점심식사 겸 뒤풀이(수원의 소문난 묵은지요리)
13:00-13:30 화성 내 문화공간 답사(<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촬영 한옥, 민속촌 99칸 한옥터)
13:30-16:00 화성 답사
팔달문, 화양루, 서장대, 서북공심돈, 화서문, 장안문, 화홍문, 방화수류정, 동장대, 창룡문, 봉돈, 동남각루, 남수문.
16:00-17:00 지동의 고은 시인 벽시화 골목, 지동 제일교회 첨탑 탐방. 제2강 마무리모임
*방과 후 희망자에 한해 지동 순대골목에서 뒤풀이 있습니다(비용은 참가자 N분의 1).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의, 따뜻한 여벌옷, 충분한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화성학교 제2강 참가비는 6만원입니다(강의비, 관람료, 1회 식사 겸 뒤풀이,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사이트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십시오. 화성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