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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배상 소송, 영국 정치를 뒤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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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배상 소송, 영국 정치를 뒤흔들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26>19세기 영국, 21세기 한국

2013년 12월 철도노조는 23일간 파업을 벌였다. 철도노조 역사상 최장기 파업이었다. 이명박 정권의 철도 민영화 정책을 이어받아 추진된 수서발 KTX 분리 시도에 맞서, 노동자가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인 파업을 동원했다. 정부와 철도공사의 대응은 무더기 징계와 어마어마한 액수의 손해배상 청구였다. 불법 파업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철도공사는 손해배상 청구 외에도 철도노조의 예금 및 부동산 등에 대해 116억 원의 가압류를 법원에 신청, 노조의 돈줄을 막아버렸다. 2009년 파업에 따른 손실 39억 원과 2013년 파업에 따른 손실 77억 원을 합한 금액이다.

철도공사의 가압류로 인해 철도노조는 당장 해고된 노동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생활지원금 지급마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망한 조합원에게 노조에서 지급하는 조의금까지 압류된 상황이다. 노사가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달았을 때조차 없었던 일이다. 2009년의 철도 파업에 따른 철도공사의 손해배상 청구액은 91억 원이었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39억 원으로 줄어들었고 이마저도 명확하게 규명이 안 돼, 아직도 재판이 진행 중이다. 손해배상액이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현재 철도노조의 파업을 둘러싼 손해배상액은 227억 원에 달한다. 파업이 종료되고 철도노조 위원장은 구속됐다. 회사에 100억 원대의 손해를 끼치고 수십 억 원을 횡령했다는 혐의를 받은 이석채 전 KT 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됐는데, 노조 위원장은 업무방해 혐의로 감옥에 보내졌다. 한국에서 CEO라 불리는 신성한 불가침 영역, 그리고 노동자라는 천민 영역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노조의 존재를 부정하고 노조의 파업을 죄악시하는 전근대적인 행태가 버젓이 일어나는 나라를 민주공화국으로 부를 수 있을까?

조의 단체행동권은 헌법이 보장한 권리다. 권리는 그것을 향유할 수 있도록 권장되어야 하며 국가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 투표가 있는 날이면 노인들, 몸이 불편한 이들을 위해 선관위가 차량을 제공하는 식으로 선거권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노동자의 단체 행동권도 보호받아야 하는 게 마땅하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는 봉건적 주종관계가 아니라 근대적 계약관계다. 계약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서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개인의 힘으로는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 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조직을 구성하고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한 것이 노동법이다.


▲1945년 영국 노동당의 선거 포스터. 철도노조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에 분노한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노동당을 일으켜 세웠다. ⓒPBS(www.pbs.org)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권은 서서히 인정을 받아왔다. 14시간의 장시간 노동이나 노동자에 대한 채찍질을 금지하는 것도 한때는 사용자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비난 받았다. 선거권이라 하면 성인 여성들에게도 당연히 주어지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1838년 영국에서 차티스트 운동으로 알려진 보통선거권 쟁취 운동을 통해 보통선거권을 누리게 된 대상은 성인 남성뿐이었다. 이마저도 노동자들의 과도한 요구로 사회에 혼란을 유발시키는 불온한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근대의 역사는, 봉건적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인으로 새롭게 태어난 시민들의 권리가 더디지만 조금씩 확장돼 온 역사였다.


그 결과 우리는 현재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시민적 권리들을 누리고 있다. 노동권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자. 이 사회가 퇴보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수백 년을 거치면서 겨우 확보된 권리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있다.


노동자가 파업을 하지 않는 경우는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파업을 할 필요가 없는 사회 환경이나 노동 조건일 때이고, 또 하나는 권력이 강력한 제도적 억압과 물리력을 통해 파업을 용인하지 않을 때이다. 한국은 파업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인가?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파업을 벌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합법적 파업일지라도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일은 요원하다.


19세기 영국과 21세기 한국, 닮았다


산업혁명의 선두국가답게 눈이 부시게 발전하던 영국은 1870년대 대불황을 겪게 된다. 불황은 노동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겨우 조직되었던 노동조합들이 무력화되거나 아예 와해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무력화된 노동조합들은 비숙련 노동자를 중심으로 조직된 것들이었다. 호황기에 안정적인 지위를 누렸던 숙련공 노동조합은 쉽게 보수화되었다. 호황에 힘입어 조직됐던 비숙련공 노동자들은 불황이 시작되자마자 해변의 모래성처럼 무너져버렸다. 전에 볼 수 없던 불황 속에서 숙련공 중심의 노조운동 역시 극도로 무력했다.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길거리를 덮고 있는 상황에서,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뛰어넘는 일에 매달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체 노동 계급 중에서 극빈 가정이 40% 이상을 차지했고 400만~500만 명의 노동자들이 만성빈곤이나 기아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가난한 노동자들의 최고 목표는 하루를 무사히 살아내는 것이었다.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에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덮치면서 경제위기를 타개할 여러 대안들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노동의 유연화였다. 노동의 유연화란 말은 거창한 경제이론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체를 보면 다르다. 자본이 자기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얼마든지 노동력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게 하자는 말과 같다. 노동의 유연화는 한국 사회의 노동자들을 안정적인 정규직과 불안한 비정규직의 두 그룹으로 나누는 데 성공했다. 상대적 풍요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보수화를 이끌었다. 정규직 노조를 자신들의 하위 파트너로 만들려는 자본의 집요한 공세가 그런 현상을 더욱 가속화했다. 결국 정규직 노조의 상당수가 노사 화합이라는 미명 아래 사측에 순치됐다. 반면 비정규직은 노동조합을 통한 최소한의 권리 확보를 추구하는 순간, 가혹하게 내동댕이처졌다. 계약을 연장하지 않는 합법적인 방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권을 분쇄해버렸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현장의 운동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 되었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노동의 유연화가 국가와 자본의 확고한 정책 목표가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코엑스 같은 거대한 회의장에서 대통령이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미소를 머금은 채 "앞으로 우리 사회는 전통적인 제조업 기반을 벗어나 서비스 산업과 IT 산업 같은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바탕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천명하는 것의 이면에는, 시간제로 부릴 수 있는 관광 안내원이나, 편의점 직원, 이벤트 행사 도우미나 프로젝트가 끝나면 계약이 해지될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넘치고 있다. 노동 유연화가 확실히 자리 잡은 지금은 정규직이더라도 경영상의 위급함을 들어 얼마든지 정리할 수 있는 조건이 됐다. 이제 안정적인 일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대단히 불순한 행위가 되어 버렸다.


정규직이나 비정규직 할 것 없이 공포에 사로잡힌 채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은, 19세기 말 숙련공이나 비숙련공이 불황에 내몰려 비참한 일상을 살아야 했던 영국의 모습과 닮았다.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지만 도시의 뒷골목에는 영양실조에 걸린 노인과 아이들이 넘쳐나는 끔찍한 곳이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은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과거의 무력한 노조주의를 극복하고자 신노조주의를 일으킨 영국의 급진적인 단체들은 비숙련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1888년 파업투쟁에 나선 성냥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모습. ⓒTUC(www.tuc.org.uk)

이 운동의 발단이 된 것은 1888년 브라이언트앤메이(Bryant & May co.) 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정부가 보편적 복지를 통해 시민들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입장을 가진 페이비언협회의 베잔트(Annie Besant) 여사가 성냥공장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폭로하면서 시작된 이 파업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남성 노동자들에게조차 멸시받고 무기력했던 여성 노동자들 700명이 파업에 가담했다. 이들의 끔찍한 노동 현실에 분노한 시민들은 파업기금에 써달라며 성금을 보내왔다. 철도노조의 파업 때 일어난 시민들의 성금 보내기 운동, 쌍용차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4만7000원을 보내는 노란 봉투 운동 등의 원조 격인 셈이다. 결국 런던노동위원회가 여성 노동자들의 편에 서면서 파업은 노동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이런 여세를 몰아 일어난 파업이 바로 "위대한 런던 부두 파업(Great London Dock Strike)"이었다. 숙련공 중심의 폐쇄적 부두 노조의 벽을 뚫고, 부두 노동의 거의 모든 일을 수행하는 비숙련공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3만 명에 이르는 비숙련 노동자들이 부두를 점거한 무노조 파업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3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세하면서 숙련공과 비숙련공, 조직과 비조직 노동자의 경계가 무너졌다. 50마일에 이르는 템즈 강변에는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내건 피켓과 현수막이 물결쳤고, 밴드 공연이 펼쳐졌다. 파업을 지지하는 성금이 미국과 호주에서까지 답지했다. 그 액수는 5만 파운드에 달했다. 5주가량의 파업기간 동안, 파업 승리에 대한 희망이 사라지고 파업 참가자들의 굶주림도 극에 달한 적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호주에서 보내온 3만 파운드의 연대 성금은 파업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 커다란 힘이 됐다.


영국의 철도노조는 이미 1871년에 결성되어 있었지만 새로운 노동운동 물결 속에 1886년 새 노조(British Steel Smelters' Amalgamated Association)를 결성한다. 노조는 집행부에 단독적인 전국 파업 선포권을 부여하고 10시간 노동제와 하도급에 대한 전면적 반대 투쟁에 나섰다. 1880년에는 조합원 수가 3배로 늘면서 철도노조는 더욱 강력한 노조로 거듭났다. 신노조주의 운동은 평화적이고 점진적으로 진행됐다. 반면 이에 대응한 사용자와 국가의 공세는 무자비했으며 결과적으로 신노조주의 운동의 소멸을 촉진했다.


19세기 말 영국은 더 이상 찬란한 국가가 아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절정기를 벗어나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고 새롭게 부상하는 미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 서 있어야 했다. 통일을 이루고 강력한 경쟁자로 나선 독일도 무시 못할 존재였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조의 권리를 무력화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논리를 펼쳤다. 노조 때문에 경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주력 언론과 의회에서 쏟아져 나왔다. 미국은 연방정부군이나 주방위군을 동원, 파업을 강력하게 진압했고, 그 결과 미국 상품이 영국보다 높은 경쟁력을 갖게 되었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왔다.


특히 보수당은 이 같은 주장을 앞장서 이끌었다. 반면 자유당은 노조 문제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자유당은 거물 정치인인 글래드스톤(William Ewart Gladstone)을 중심으로 아일랜드 자치 문제에 몰두했는데 사실 먹고사는 문제에 치인 영국시민들에게 자치 문제는 중요한 이슈가 아니었다. 1886년에는 자유당 내의 급진주의자 그룹이 글래드스톤에 대한 항의 탈당을 감행, 자유당은 더욱 개혁 입법의 과제를 멀리했다. 또 이런 사태는 자유당이 국내 문제를 더욱 등한시하게 하는 핑계를 대게 만들기도 했다. 결국 무력한 자유당과 자본가를 대변하는 보수당이 장악한 영국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대변할 어떤 정치세력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내몰렸고 곧이어 대대적인 반격을 받아야만 했다.


철도노조, 영국 정치를 바꿔놓다


가장 먼저 시도된 것은 파업권에 대한 공세였다. 1870년대 노동조합법은 노조가 법인이 아니므로 파업으로 발생한 손실을 배상할 책임이 없었다. 그러나 잇따른 법원의 판결에 의해 노조의 책임이 인정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IT혁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느끼는 오늘날만큼, 19세기 말의 영국인들에게도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어지러운 곳이었다. 신기술이 도입되면서 타격을 받는 곳은 숙련공 노동자들이었다. 전통적인 숙련공 노조인 기계노조가 무너졌다. 강력한 노조였던 기계노조는 신기술이 도입되자 힘을 잃었다. 숙련공이 실업자 신세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파업조차 성공시키지 못한 기계노조의 협상력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기계 산업 분야 자본가들의 공세는 거칠 것이 없었다. 1892년 미국 피츠버그 공장에서 기계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참히 분쇄해버린 카네기의 성공 사례는 영국의 자본가들에게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사용자들의 노조에 대한 공세는 한층 치밀하고 세련되게 진행됐으며 무자비했다. 노동자들은 고립되었으며 특히 정치적으로 자신들을 대변할 세력이 없다는 것에 무력감을 가졌다. 노동자들은 자유당과 보수적 광부노조 중심으로 의석수 몇 개를 얻는 '자-로 연대'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길이 없다고 생각했다.


노동자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자고 적극적으로 나선 노조는 철도노조였다. 1899년 영국노동조합 총연맹(TUC) 총회에서 철도노조 대표로 나선 홈즈(James Holmes)는 새로운 결의안을 제출했다. TUC가 "다음 의회에 더 많은 숫자의 노동대표를 보낼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 협동조합, 사회주의 단체, 노동조합, 그리고 여러 노동단체가 참가하는 특별회의를 개최한다"는 홈즈의 결의안은 영국 노동당 출범의 계기가 되었다. 이미 1895년 총선에서 패배해 재집권에 실패한 자유당은 노동자들이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총선 패배보다 개혁에 대한 전망도 실천도 없는 무능한 정치집단으로 전락해버린 자유당을 통해 노동자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이런 사정 속에 1900년 노동당이 출범하게 되었는데 기존의 정당들과 비교해서 재정도, 조직도, 정책도 취약한 작은 정당에 불과했다. 내부의 노선 투쟁에 따른 참여세력의 이탈도 일어났다. 사회주의적 강령을 노동당의 정강정책으로 채택할 것을 주장하던 사회민주연맹은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탈퇴했다. 1900년 노동당이 참가한 첫 총선에서 얻은 결과는 참담했다. 134석의 과반수 의석을 차지한 보수당의 압승 속에 노동당은 철도노조 위원장인 리차드 벨(Richard Bell)을 포함한 두 명의 당선자만 배출했다. 총 의석 수의 0.3%에 불과한 세력으로 노동당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노동당에 대한 비난과 비관 속에 노동당의 생존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가끔씩 놀라운 대전환을 보여준다. 노동당이라는 흔들리는 촛불이 들불로 전화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00년 8월, 총선을 코앞에 두고 태프-베일(Taff-Vale) 철도회사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보어전쟁으로 인한 석탄 특수로 최고의 호황을 누리던 태프-베일 철도의 노동자들이 노조를 인정하지 않고 강제 전출을 보내는 등 인사전횡을 일삼는 회사에 대응해 파업을 일으킨 것이었다. 사측은 사용자들이 조직한 전국자유노동협회(NFLA)에 대체인력을 요청했고, 이로 인해 노사 갈등은 더 악화되었다. 그러나 노조의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9월에 철도 운행을 재개할 것을 합의하고 노동자들은 현장으로 복귀했다. 문제는 철도파업이 끝나고 나서 벌어졌다. 회사측이 노조를 상대로 파업에 대한 손실을 보상하라며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했다.


1년 가까이 전개된 재판에서 상원은 회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1870년 노조법 개혁 이후 수십 년간 유지되어온 당연한 권리가 일시에 박탈되었다. 노조 기금은 배상금으로 바닥날 수밖에 없었고 파업권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영국 자본가들의 완전한 승리요 노동자 권리의 종말을 알리는 판결이었다. 경제 위기를 노조의 책임으로 물었던 <더타임>과 자본가들은 행복한 승리에 도취했다. 그러나 이 판결이 엄청난 사회적 불씨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몰랐다. 태프-베일 판결을 본 노동자들은 분노했고 노동당은 이 분노의 물결에 앞장섰다. 맥도날드(McDonald) 노동당 위원장은 전국의 노조에 노동당 가입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의회에서 노동정당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은 억울함을 가슴속 가득 담고 있던 노동자들을 움직였다.


태프-베일 판결 이후 몇 개월 만에 노동당에 가입한 조합원 수는 10만 명이 넘었고 1년 후에는 20만이 넘었다. 1903년에는 85만 명의 당원을 거느린 거대 정당이 되었다. 노조 단위 가입도 봇물을 이루었다. 1902년 65개였던 가입 노조가 1904년 165개로 크게 늘어났다. 무엇보다 노동당과 거리를 두었던 기계노조와 섬유노조 등 전통적 노조들의 노동당 가입은 영국 노조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예고했다. 노동당을 중심으로 노동자가 뭉치자 의회에서도 노동자들의 압박을 반영하는 일이 일어났다. 1905년 자유당 의원 존 번스(John Burns)는 태프-베일 판결의 원상회복을 내용으로 하는 노동조합법안을 제안하고 전체 회의에 열람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1906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노동당의 이름이 아니라 "100만 노조원의 이름으로" 지지를 호소했다. 많은 지역구에서 노동당과 자유당은 연합하거나 상대당의 취약지구에 힘을 몰아줌으로써 보수당을 견제했다.


노동당은 태프-베일 판결의 원상회복과 더불어 학생들을 위한 무상급식, 노년연금, 노동계급주택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 사회보장 정책을 제기하면서 선거판의 의제를 바꾸어냈다. 보수당의 선거 전략은 국가 안보와 애국이었다. 자유당 후보가 영국 국기를 끌어내리는 보수당의 선거 포스터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강조한 보수당의 선거 전략은 계급과 민중을 앞세운 노동당과 자유당의 공세를 넘을 수 없었다. 선거결과는 보수당의 대패로 결정 났다. 자유당은 377석의 의석을 얻어 압도적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자는 노동당이었다. 창당 6년 만에 29명의 의원을 당선시킨 노동당은 영국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1906년 노동당이 등원하자마자 발의해 통과시킨 법안은 '학교급식에 관한 교육법'이었다. 보수당 의원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사회주의 '빨갱이법'이라고 호통 치는 가운데, 가난한 노동자들의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따뜻한 밥 한 끼를 먹이자는 법안은 통과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업분쟁법안이 통과되었다. 노동당의 최대 과제였던 테프-베일 법을 무효화하는 법안도 보수당의 강력한 반대를 뚫고 통과됐다. 산업분쟁법안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게 만들었고, 노동운동의 정치화까지도 수용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초기에 노동당과 우호적 연대의 관계를 유지했지만 자유당 우파 의원들은 달랐다. 이들을 중심으로 "노동당의 급진 개혁 정책이 사회주의적"이라며 노동당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1880년대 고용노동자 4%, 50만 명의 조직노동자가 있던 시절의 노동단체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1914년 노조 조직률 25%에 400만명의 조합원을 배경으로 하는 거대 정당으로 거듭났고 보수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영국 노동당의 놀라운 성장과정에 비례해서 자유당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소멸하게 된다. 영국에서 100년 전에 사라진 악법인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이 땅 대한민국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존재하는가?


본 글에 소개된 영국 노동당 관련 내용과 각종 수치는 고세훈 고려대 교수의 <영국노동당사>(나남출판사)을 기초로 했습니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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