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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철도 파업 때 대노했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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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철도 파업 때 대노했던 이유는?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25> 미국과 한국의 철도, 그리고 '공공체제'

세계 최고 철도의 나라는 어디일까? 철도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의 독일, 프랑스를 꼽는다. 철도를 평가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다. 선로의 길이, 복선 노선의 비율, 전철화의 정도, 고속화 정도, 정시 운행률, 쾌적함, 수송분담률, 수익성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유럽의 철도 전문가들은 스위스철도를 우수한 철도의 하나로 꼽는다. 알프스를 품고 있는 험난한 지리적 조건을 극복하고 공공교통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 잡은 이유 때문인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모든 조건을 버리고 선로길이로만 볼 때, 최고의 철도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22만 킬로미터(km)가 넘는 선로 길이를 갖고 있다. 한국 철도 선로 용량의 62배가 훨씬 넘는 규모다. 9만 800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세계 2위의 선로 보유국 중국에 비해서도 2배가 넘는다.

하지만 미국 사람들에게 철도는 한물 간 교통수단이다. 대도시의 출퇴근용 지하철이나 근거리 통근 열차를 빼면 열차를 이용하는 것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지독한 정신수행과정이다. 한 때 미국을 통합하고 미국 자본주의를 일으켜 세웠던 역사를 갖고 있는 교통수단 치고는 초라한 얼굴이다. 미국의 철도 여행을 책임지고 있는 회사는 암트랙(Amtrak)이란 여객철도 회사다. 암트랙은 1970년 여객철도서비스법이 의회에서 통과 되면서 국영 여객철도 회사로 설립되었다. 암트랙이 설립되기 이전의 여객 서비스는 각 노선별로 여러 개의 민간회사가 운영을 맡았다. 1970년의 미국은 자동차와 항공수요의 폭발로 철도이용률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철도회사들의 도산을 피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의회는 궁여지책으로 망하는 민간회사들을 하나로 묶어 국영철도회사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건 하나만 봐도 철도가 경영부실에 빠지는 원인은 국토부가 이야기 하듯 독점에 따른 경쟁의 부재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국토부가 철도산업의 이상향으로 여기는 민영화와 경쟁체제가 효율을 가져온다면 수많은 민간회사가 경쟁했던 미국 철도는 망하지 말았어야 했다. 교통인프라는 그 인프라가 가지는 시대적 조건과 특성에 따라 부침을 겪게 되어있다. 19세기 중반 영국 런던에 철도가 놓이자 런던에서 각지로 연결되었던 350여개의 역마차 노선과 회사가 몰락했다. 자동차의 폭발로 철도가 맥을 못 추게 되거나 고속철도가 개통되면서 국내선 항공이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갑자기 경영 능력이 사라져 적자가 양산되는 게 아니라 인프라가 담고 있는 조건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세계 최장의 선로를 보유한 미국에서 그 인프라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게 되자 민간철도회사들은 두 손 들고 철도를 국가에 떠 넘겼다. 국가에 떠 넘겼다는 것은 세금을 내야할 시민들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과 같은 말이다. 공공재이더라도 수익을 발생시키면 자본은 어떻게든 자신의 품으로 빨아들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돈이 안 되면 사회의 몫으로 넘긴다. 암트랙은 여객철도 서비스 법에 따라 1971년 5월 1일 첫 운행을 시작한다. 43개주 21개 노선을 관장하는 거대 철도 공기업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암트랙은 빛나는 차세대 교통수단으로서의 철도가 아니라, 무너지는 철도를 어깨에 이고 근근이 운송서비스를 유지해야하는 철도공기업이 되었다. 제우스의 형벌을 받아 하늘을 어깨에 짊어지고 고통스러워하는 아틀라스처럼.

▲뱀처럼 휘어진 미국 화물열차의 달리는 모습. 2단으로 적재한 컨테이너 백량이상을 몰고 간다. ⓒ http://1.bp.blogspot.com/_q_WGHXnqn-Q/TO35F19S1KI/AAAAAAAABAk/SfuyqwVwKI0/s1600/BNSF%2Bfreight%2Btrain.jpg

열차 길이가 무려 5킬로미터, '몬스터'라 불리는 이 열차는?

일본국철은 1987년 민영화를 시도하면서 6개의 여객철도 회사와 하나의 화물 철도 회사로 나뉘었다. 본토의 경우, 3개의 회사가 지역을 나누어 맡았고, 본토를 둘러싸고 있는 3개의 큰 섬에도 각각의 회사가 생겼다. 이들 6개의 여객회사들은 선로도 함께 소유했다. 철도에서는 이렇게 운영회사가 선로도 소유하고 있는 형태를 상하통합형이라고 부른다. 반면 화물 철도 회사는 여객회사가 소유한 선로에 사용료를 내고 운행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철도 회사 간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까?

철도는 도로처럼 차량이 마음대로 차선을 바꾸거나 추월을 할 수 없는 구조다. 열차가 선로를 점유하게 되면 절대적 독점권을 행사하게 되어있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화물 철도 회사는 자기 마음대로 운행 시간을 짤 수 없다. 선로 소유자인 여객회사는 황금시간대로 여기는 시간을 우선 점유하고, 남는 시간 중에 일부를 화물철도회사의 열차가 운행하도록 한다. 때문에 화물철도회사의 열차는 여객열차가 운행하는 낮 시간대를 피해 심야운행을 하게 되는 일이 많다. 설사 주간 시간대에 운행을 하더라도 관제실의 명령에 따라 여객 열차를 우선 통과시키는 일 때문에 장시간 역의 대피선에서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미국은 정 반대다. 여객철도 회사 암트랙은 선로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 여객 수송기능을 자동차와 항공에 빼앗긴 미국 철도는 화물철도가 철도의 주 기능이다. 선로도 화물 철도회사들의 소유다.

일반적으로 여객 철도의 속도가 빠르고 화물철도의 속도는 느리다. 만약 화물 철도가 여객 철도의 앞에서 달리게 될 경우 관제실의 임무는 여객철도의 운행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빨리 화물열차를 정거장의 옆 선로로 유도해서 정차시킨 뒤 여객열차를 통과시켜야 한다 이것을 철도에서는 열차의 대피라고 부른다. 열차가 직선의 선로를 달리다가 정거장의 옆 선로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선로 전환기에 의해 틀어진 분기기를 지나기 때문에, 시속 30~55킬로미터로 속도를 낮춰야 한다. 또 철도의 신호 체계상 대피를 하기위해 역에 들어서는 열차는 고속에서 점차 속도를 낮추도록 유도되기 때문에 상당한 거리를 속도를 줄인 채 운행해야 한다.

한국 철도의 기관사들은 일반적으로 여객열차와 화물열차를 같이 운전하는데 소속에 따라 여객열차를 많이 운전하기도 하고 화물열차를 많이 운전하기도 한다. 화물열차를 운전 할 경우, 뒤에서 여객열차가 접근하는 사실을 관제실이나 역으로부터 전달받고 정거장의 옆 선로로 들어가기 위해 속도를 줄이다 보면, 벌써 뒤에서 운전하는 여객열차 기관사의 압박성 무전이 들린다. 여객열차의 기관사가 무전으로 앞에 있는 역에 왜 신호가 나쁘냐고 물어보면 역의 신호관리자는 앞에 화물열차가 대피중이라는 사실을 통보하고 속도를 조절해서 운전할 것을 요청한다. 적지 않은 기관사는 화물열차 때문에 정상 진행신호가 안 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무전기를 들고 역을 호출한다.

이런 무전 대화는 화물 열차 기관사에게도 들리는데 그럴 때면 은근히 부아가 오른다. 규정대로 운전하는데 재촉이 심하다고 푸념한다. 그러나 간사한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화물열차를 몰 때와 달리 여객 열차를 운전 할 때에는 마음이 바뀐다. 정시운전의 압박을 받는 여객 열차의 기관사들은 자신이 모는 열차의 정차 역 사이에 오직 녹색의 진행신호만을 보고 달리길 원한다.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미국 암트랙 기관사들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짐작이 가능하다. 화물열차보다 속도가 빠른 여객 열차를 운전하면서도 선로 소유자인 화물열차회사의 관제에 따라 여객 열차를 대기 시켜야 하는 일이 다반사다. 혹은 화물열차 뒤를 따라 달리게 될 경우 화물열차의 속도에 맞추어 달려야 하는데, 이럴 경우 제시간에 열차를 운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암트랙 기관사들은 화물열차회사 기관사들이 암트랙 열차가 따라 붙기만 하면 일부러 시속 56킬로미터 이하로 속도를 낮추어 운행한다고 불만을 토해낸다. 우선권이 있는 화물열차가 정거장에서 출발하는 것을 기다리기 위해 여객 열차가 대기 하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보스턴역에 도착한 암트랙 특급열차.ⓒhttp://farm3.staticflickr.com/2180/1937021090_61ddec7cde_o.jpg

미국의 화물열차는 그 땅덩이를 닮아서 그런지 상상을 초월하는 길이를 가지고 있다. 만약 미국의 도로에서 자동차 운전을 하다가 화물열차가 지나는 철도 건널목을 만나게 된다면 옆의 운전자들이 그렇듯이 시동을 끄고 차 밖에 나와서 담배라도 한 대 피는 게 신상에 좋다. 한국의 철도 건널목처럼 잠깐 만에 휙 스쳐지나가는 열차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관광객들이 탄 차량이 철도 건널목에 설 경우 가이드는 지나가는 열차의 량수를 세지 말라고 당부한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긴 열차가 눈앞에 지나가면 뒤에 따라오는 화차의 량수가 얼마인지 자기도 모르게 세게 되는데 미국의 화물열차는 다 셀 수가 없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은 50에서 60량쯤 세다가 포기하고 만다.

한번은 뉴욕에서 렌트한 자동차를 몰고 필라델피아 시내에 접어들었을 때, 다리위에서 신호대기에 걸렸고 마침 아래로 화물열차가 지나갔다. 직업정신을 발휘하여 화물열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는데 꼬리를 보기 전에 신호가 바뀌어 차를 움직여야 했다. 오후의 러시아워가 시작될 즈음 제법 긴 신호대기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계속 지나갔다. 한국의 화물열차는 20량이 보통이고 최대 35량을 넘는 경우가 드물다. 그러나 제대로 연결한 미국 화물철도회사의 열차는 300량의 화차를 뒤에 매달고 달린다. <기네스북>에 따르면 2001년 6월 호주에서 8대의 기관차가 682량의 화차를 연결하고 운행한 것이 세계 최고 기록이다.

<기네스북> 기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몬스터라 불리는 미국의 화물열차 운행도 만만치 않다. 9대에서 10대의 기관차가 선두에서부터 중간과 마지막에 연결되어 300량에 이르는 평판화차위에 2단으로 컨테이너를 싣고 달리는 광경은 실로 엄청나다. 컨테이너 화차 1량의 길이를 약 17미터로 잡아도 300량에다 9대의 견인용 기관차 까지 합하면 전체 길이가 5.3킬로미터에 이른다. 서울역을 기점으로 한다면 용산역을 지나 한강다리까지 하나의 열차가 이어진 셈이다. 이런 열차가 역으로 들어가거나 나가기 위해 선로 전환기의 제한 속도에 맞추어 서행을 하게 되면 뒤따르는 열차의 기관사는 마음을 비워야 한다.

<기차를 타고 아메리카의 일상을 관찰하다>의 저자 돈 왓슨(Don Watson)이 책에 쓴 경험담을 따라가 보자. 오클라호마시티에서 포트워스를 향하던 돈 왓슨이 탄 암트랙 열차가 가다 서다를 반복하더니, 포트워스를 2킬로미터 남겨 놓고 그대로 멈췄다. 30분쯤 서 있다가 열차가 왜 정차했는지 알게 되었는데 역에 정차한 화물열차의 기관사가 집으로 가버린 탓이었다. 열두 시간 근무 후 교대를 하는데 12시간이 지나자 교대 근무 기관사가 도착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이 운전한 화물열차로 여객열차가 들어갈 선로를 점유한 채 집으로 간 것이었다. 잠시 후 차내 방송이 나왔다.

“승객 여러분께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그런데 저희 회사로서는 앞에 있는 화물열차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 열차가 움직이는 건 저 화물열차에 달려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이 암트랙에 전화를 해서 이 사태를 항의하면 문제가 빨리 해결될 수 있습니다.”

두 시간을 넘게 기다려서야 열차는 목적지인 포트워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웃기는 일은 선로를 소유한 회사의 화물열차 교대 기관사는 불만이 가득 찬 승객들과 함께 태연하게 암트랙 열차를 함께 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여객열차가 제시간에 다니는 것이 기적에 가까운 일이 라는 것은 미국 철도의 이런 특수한 사정 때문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철도 파업 때 대노한 이유는?

화물 철도우선의 미국 철도를 빗대어, 옥수수와 파인애플의 가치가 시민보다 높게 책정된 나라가 미국이라고 조롱하기도 한다. 세계의 거의 모든 철도 회사는 여객철도를 최우선으로 취급한다. 또 여객 철도 중에서도 고속이나 특급 등, 열차 등급에 따라 개통 우선권을 준다. 한국에서도 열차가 한 선로에서 경합하게 될 상황이 발생할 경우, 고속열차인 KTX가 최우선권을 갖고 새마을호, 무궁화호가 뒤를 잇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화물열차는 여객열차를 모두 보낸 뒤에 운행을 한다. 만약 화물열차의 운행으로 뒤에 오는 열차가 지장을 받게 될 것이 예상되면 오래 동안 여러 대의 여객열차를 보내고 난 뒤에야 출발을 시킨다.

▲미 동부권 철도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는 새로 도입된 고속전철 아셀라가 보스턴역에 정차해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6/61/Acela_Regional_in_Boston_South_Station.jpg

지금은 지연이 과거 보다 심하진 않지만 화물열차를 운전하는 날에는 기관사들이 약속을 잡지 않는다. 특히 고참 기관사들은 열애에 빠진 신입 부기관사들에게 화물열차 타는 날은 절대 데이트 약속을 잡지 말라고 충고한다. 예정된 사업 종료 시간을 훌쩍 넘겨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 애인을 무작정 기다리게 하면 얼마 못가 연애전선에 위기가 닥칠 게 뻔하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의 파업이 예정될 때에도 정부와 철도공사의 비상 수송 대책은 여객열차의 운송률을 얼마나 유지하느냐에 사활을 걸었다. 철도파업이 시작되면 화물열차를 대부분 운행중지 시키고 여객열차에 집중적으로 비조합원과 관리직 직원 등 대체인력을 투입한다. 그런데 이런 관행을 이명박 전임 대통령이 깼다. 2009년 철도노조는 철도공사가 노사 협상에 나서주기를 간곡히 요청했다. 그러나 노조를 끔찍한 사회악으로 여기는 경찰 출신 사장은 단체협상 만료 기간까지 노사협상을 거부하고 노조에 백기 투항을 요구했다. 참을 만큼 참았던 철도노조가 파업에 돌입했다. 이때 서울역 비상 상황실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철도공사 비상대책반으로부터 현황설명을 듣고 대노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나름대로 여객열차 운행률을 높게 유지해서 치하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책반은 봉변을 당했다. 기업가 정신으로, 다른 말로는 돈이 최우선이라는 신념으로 무장된 대통령께서는 나라경제를 걱정하시어 물류를 우선하는 열차 운행계획을 짜라고 지시했다. 경제가 어렵고 철도 파업으로 당장 기업들의 물류난이 가중 될 텐데, 어째서 여객열차 우선의 파업대책을 세웠느냐는 호통 속에 바로 다음 날부터 운행중지 되었던 화물열차들의 운행이 재개됐다. “사람이 좀 늦으면 어때? 경제가 우선이지”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는 그동안 지속되었던 철도 파업 대책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드디어 한국도 미국처럼 시멘트나 철판의 가치가 시민보다 우위에 선 나라가 된 것이다.

2006년 미국정부가 암트랙에 배정한 예산은 0달러였다. 암트랙 CEO 데이비드 건(David L. Gunn)은 새해 예산에 정부의 지원이 없는 걸 확인하자 “정부의 계획은 암트랙을 파산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시 행정부의 암트랙 정책은 쓸데없이 연방정부 예산만 축내는 암트랙을 서서히 안락사 시키는 것이었는데, 데이비드 건은 사사건건 이에 반발했다. 부시 행정부는 데이비드 건의 사임을 요구했다가 그가 버티자 바로 해고를 해버렸다.

세계의 대부분 철도가 그렇듯 암트랙도 정부 보조금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미국 철도는 암트랙 뿐만 아니라 화물 철도조차도 기관차며 선로나 역이 낡을 대로 낡아있다. 보스톤과 뉴욕, 워싱턴을 잇는 동부의 황금노선이 아닌 거의 모든 미국 철도노선은 막대한 적자를 감수하며 운행되고 있다. 정부 보조금이 없이는 미국철도가 유지 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 보조금이란 것이 유독 철도에 적용될 때에는 끔찍한 악으로 간주된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기업에 지원되는 수출 장려금이나 각종 보조금은 경제를 위해서 꼭 필요하고 농업보조금도 농촌을 살리기 위해서는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망해가는 기업이나 은행을 위해 서민들 장롱의 금반지 까지 모아서 만든 공적자금은 죽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특단의 노력으로 치하된다. 전국의 도로나 항만, 공항을 위해 들어가는 보조금 또한 사회기반시설을 위한 꼭 필요한 자금이다. 그런데 오직 철도에 들어가는 보조금만큼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부시 행정부가 동부의 일부 철도 노선을 제외하고 적자투성이 암트랙을 자연사 시키고 싶었던 것처럼 한국의 국토부도 지방 적자선의 폐선을 바라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암트랙 CEO 데이비드 건이 말을 안 듣자 바로 해고시켰듯, 일본 정부도 국철 민영화에 반대하는 사장을 해임한 뒤 민영화를 추진했다. 보통 철도공사 사장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정부의 정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사가 선택된다. 특히 한국에서는 공기업 인사의 특징인 낙하산 인사가 정착된 지 오래다. 이들 낙하산 인사들은 군사독재시절의 군 출신부터 국토부 관료출신, 정치인, CEO 대통령시절의 경찰출신까지 다양한 면면을 갖고 있다. 철도청, 혹은 철도공사의 수장이 된 사람들은 하나의 공통된 미션을 부여 받는데 그것은 철도를 효율화 시키라는 지상명령이다. 이 명령을 받아든 사장들은 하나의 선입견을 갖게 되는데 철도공사와 철도 노동자들이 방만하고 무능한 존재라는 것이다. 더구나 상당수 사장들은 철도의 ‘철’자도 모르다가 덜컥 사장자리를 꿰찼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주입된 고정 관념을 교정시킬 틈도 없이 철도에 발을 디딘다.

이렇게 철도에 들어온 사장들은 대략 두 가지 유형으로 전화하는데 하나는 “때려잡자 빨갱이 노조!”라는 기치로 불도저처럼 현장의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유형, 다른 하나는 철도의 실상을 조금씩 배워나가며 문제점들을 개선하고자 노력하는 유형이다. 안타깝게도 전자가 압도적이고 후자의 경우에도 막상 무슨 일을 하려고 나서면 의외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현실이 문제다.

지난해 말 철도노조가 파업을 하고 민영화 문제로 한국사회가 한 창 떠들 석 할 때 전임 사장 중의 한 명 이었던 이철 전 국회의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박근혜 정부의 수서발 KTX 분리 정책이 민영화가 아니면 무엇이냐며 철도 민영화를 반대했던 이철 전 의원으로부터 철도 현안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제안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전 내내 건국대학교 근처의 세미나 룸을 빌려 철도 문제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점심식사를 위해 중국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몇 가지를 물었다. 그 중 첫 질문은 이철 전 의원 역시 낙하산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낙하산이 맞다고 했다. 이어서 철도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철도 직원들의 무사 안일과 방만함을 수술하려 했는데, 실제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만난 철도 노동자들이 하나 같이 순진할 정도로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고백했다.

허준영 사장 후임으로 철도 공사 사장으로 온 정창영 전 사장 역시 철도와 무관한 감사원 출신으로 낙하산 인사의 전형이었다. 정창영 전 사장은 철도 사고가 계속되자 근본적 원인을 분석하고 대책을 세우고자 노력했고 노사와 학계의 전문가가 참여하는 ‘휴먼에러 연구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노동조합은 ‘휴먼에러’라는 명칭자체가 철도사고의 원인을 인적 요인으로 규정하여 결국 모든 사고 책임을 노동자에 전가시키려는 게 아니냐고 반발했다. 정창영 전 사장은 “휴먼에러를 일으키게 하는 시스템적 요소를 찾고 사고의 책임추궁이 아니라 원인규명으로 사고율을 줄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조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요지로 노조를 설득했고 노조도 한 번 믿어 보자며 연구팀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후 8개월에 이르는 연구가 진행되었고 기관사에 대한 충분한 휴식시간 보장과 소음과 진동으로부터 차단된 숙소 설치, 사고 유발 시설의 개선, 사고 경험자에 대한 심리치료 등 여러 가지 의미 있는 대안이 제시되었다. 정창영 전 사장이 수서발 KTX 분리정책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임기도 못 채운 채 쫓겨났고 ‘휴먼에러연구위원회’가 권고한 사안들은 철도공사 고위 경영진들의 무관심과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이철 전 사장은 KTX 여승무원 집단 해고 사태에 대해 자회사의 일이라며 철도공사 정규직 채용을 외면했고 정창영 전 사장은 이명박 정권의 낙하산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다. 하지만 최소한 국토부의 앞잡이 노릇은 안했던 사장으로는 기억될 것이다.

왜 공영 교통 체제여야 하는가?

밀레니엄의 새 시대가 열린다고 환호했던 2000년 3월, 나는 미국 동부를 헤맸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기운으로 가득 찬 뉴욕은 국제도시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성능 좋은 컴퓨터 압축 프로그램으로 세계를 모아놓은 것 같았다. 흑인, 아시아계, 히스패닉 계, 아랍 계,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거리를 가득 채웠다. 자본주의 세계의 핵, 미국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수박 겉핥기라도 할 모양으로 뉴욕 JFK 국제공항에 발을 디딘 나는 현미경을 가져다 대는 심정으로 눈앞에 보이는 뉴욕의 모습을 관찰했다.

뉴욕은 영화 배트맨의 고담시 모델답게 범죄와 각종 사고로 악명 높은 도시였다. 범죄가 높은 이유는 실업 때문이었다. 특히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과 직업선택의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흑인 사회는 빈곤을 탈출할 방법이 없었다. 일자리가 없으면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구걸을 하거나 범죄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다. 당시 뉴욕시장은 재선에 성공해 임기 말을 향하는 공화당 소속의 루돌프 줄리아니였다. 민주당 성향이 강한 동부에서, 그것도 미국을 상징하는 뉴욕이란 도시에 보수성향의 공화당 후보가 연임한다는 것은 이변에 속하는 일이었다.

줄리아니는 시장임기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평가속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반열까지 올라섰다. 줄리아니는 임기 내내 범죄율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고 그 대안으로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세금 확보, 그리고 기업들의 동참 요구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일자리가 없어 범죄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들을 위해 만드는 교도소 설립과 운영비용, 또 범죄예방과 해결 등, 사건 처리 과정에 소요되는 경찰 비용이 더 큰 부담”이라며 설득했다. 사회적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이 넘쳐나 묻지 마 범죄가 횡행할 경우 부자들과 그들의 자식들도 안전하지 못한 사회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뉴욕의 버스와 지하철은 뉴욕 교통국(MTA) 이 운영하는 공영체제이다.ⓒ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0/05/Nyctbus-nyctsubway.jpg

JFK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워낙 큰 공항이라 시내로 향하는 간선도로로 진입하기 전 공항을 순회하며 여러 곳의 정류장에 정차하는데, 그때 마다 흑인 검표원이 올라타 버스표를 확인했다. 이미 차안에는 차장도 있었고, 버스에 승차하기 전 버스표를 확인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표를 확인했다. 한국은 이미 버스에 차장이 사라진지 오래였기 때문에 신기한 광경으로 보였다. 자본주의 최고 선진국이 이런 비효율적인 방식이라니.

공항에서 일하는 상당수 사람들의 노동은 한국적 관점에서 보면 쓸데없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에게 일이 있다는 자부심으로 이전의 부랑자적 생활과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뉴욕시의 프로그램에 따라 여러 가지 일들이 진행되었는데 낙서지우기 같은 일자리를 일부러 만들어 세금을 투입했다. 범죄와의 전쟁은 범인들을 잡아들여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는 사회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새로운 전담부서를 만들거나 특별기간을 설정해 캠페인을 벌인다. 또 이에 따른 경찰력 강화를 위한 예산을 증액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데, 이런 것으로는 죽어도 범죄율을 낮출 수 없다.

한국에서는 국가나 지자체 혹은 공기업의 경영을 기업가적 마인드로 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스스로를 CEO형으로 자처하면서 공적인 체제의 대표를 하겠다고 나서는 이 대담한 용기를 볼 때 마다 한국사회의 천박한 모습을 확인하는 것 같아 곤혹스럽다. 효율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업가 정신으로 공적인 체제를 포맷하면, 결과적으로 평범한 서민들을 악성 바이러스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뉴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공영 교통체제였다. 당시만 해도 서울은 버스 준공영제가 실시되기 전이어서 버스를 탈 때는 마음의 각오를 해야만 했다. 한 밤중이나 새벽시간의, 그것도 추운 겨울 버스 정류장에서 속도를 줄이지 않고 통과하는 버스를 볼 때면 그동안 배웠던 모든 욕들을 뱉어내게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차안에서 버스 기사들은 급가속이나 급정거를 통해 사람들을 적절히 이동시켰다. 난폭운전과 불친절은 기본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버스 준공영제가 실현되면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버스 기사들의 인간성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이 변화를 준 것이었다. 하루에 몇 탕을 뛰어야만 월급과 수당이 보전되는 체제에서 과속과 난폭 운전 없이는 먹고 살수가 없다. 버스회사 돈벌이를 위해서 그리고 운전기사의 생존을 위해서 버스교통체제가 유지됐던 것이다.

뉴욕의 버스 정류장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장애인이 버스를 탈 의사를 비치면 버스가 정차 후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린다. 휠체어를 리프트를 이용해 버스 안으로 이동시키고 안전하게 고정 장치에 결합시킨 후에야 운전석으로 돌아가 운전을 시작한다. 이 시간이 제법 걸리는데 그 누구도 항의하거나 불쾌해 하지 않는다. 운전자는 게으름이라도 부리듯이 아주 천천히 장애인을 돕는다. 장애인을 보면 인상을 찌푸린 채 문을 걸어 닫고 출발해 버렸던 서울 버스와는 천지차이였다.

뉴욕의 운전기사는 선하고 서울의 운전기사는 악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시스템이었다. 공무원 대접을 받는 뉴욕시 버스 운전기사의 임무는, 하루 몇 탕 이상의 왕복운행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었다. 적절한 버스 서비스를 시민들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뉴욕시 버스기사와 지하철공사 직원들은 ‘공무원 신변 보호법‘까지 적용된다. 강력한 처벌조항으로 만취한 승객들이나 부당한 시비를 거는 사람들로부터 보호받는 법까지 마련되어 있다.

서울의 버스 공영제는 경기도 및 다른 시도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나는 가끔 경기도 고양시 쪽으로 가는 직행버스를 이용하거나 그 지역에서 시내버스를 탄다. 공영제가 적용되지 않고 사업주의 압박을 받는 OO교통이나 OO운수 등, 일부 회사의 차들은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된 차를 탄 기분까지 들게 한다. 한번은 서울 광화문에서 일산까지 총알처럼 공간이동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얼마나 좌석 손잡이를 꽉 쥐었던지 버스에서 내린 뒤 한 참 동안 손목의 근육을 풀어줘야 했다.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라면, 공적 체제가 답이다.

▲1963년 까지 사용됐던 펜 역(Penn Station)의 옛모습. 철도의 몰락과 함께 웅장하고 아름다운 역은 사라졌다.ⓒhttp://flavorwire.files.wordpress.com/2012/12/nyp-hst1d.jpeg

한 철도광의 워싱턴, 뉴욕 여행기

2000년 3월 28일 화요일 아침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전날 까지 렌터카로 동부의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면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보스턴을 가기위해 뉴욕의 펜(Penn) 역으로 향했다. 뉴욕에는 두 개의 큰 역이 있는데, 뉴욕 중앙역(Grand Central Station)과 펜 역으로 줄여 부르는 펜실베니아역(Pennsylvania Station)이다. 펜 역은 암트랙이 운영하는 미국의 기차역 중에서 가장 많은 이용자가 몰리는 역이다. 민영 펜실베니아 철도회사가 망하고 나서 암트랙에 넘겨진 역으로 1971년 5월 1일 0시 05분 공영철도 암트랙의 첫 열차인 필라델피아행 235 열차가 출발한 역이기도 하다. 상당기간 김치 결핍증으로 인한 무기력증에 시달렸던 나는 한인 타운에서 설렁탕과 김치 깍두기로 겨우 기운을 차리고 펜 역의 매표소앞에 늘어진 줄 뒤에 섰다. 줄이 하나씩 줄어 들 자 영어 울렁증이 솟아났다. 얼른 배낭안의 “여행자를 위한 실전영어”라는 식의 제목이 달린 책을 꺼내 “기차역에서 표사는 법” 부분을 찾았다. 서울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주말이면 서점입구 노천에서 60% 할인 등의 행사를 하는데 미국 방문을 앞두고 싼 맛에 덥석 집어 들었던 작은 책이었다.

책에 써있는 영어 구문을 열심히 외우기 시작했다. “아이 원트 투 고우 투 보스턴…어쩌고 저쩌고….” 한국말로 하자면 “나는 보스턴에 가기를 원합니다. 가능하면 부디 보스턴 가는 기차표를 주실 수 있습니까?”였다. 이렇게 물으면 매표원은 나에게 편도요? 왕복이요? 라고 물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책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까. 또 그래야 내가 다음 대답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줄 앞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니 창구에서 “뉴해븐”, “보스턴 텐 서티” 이러는 거였다.

한국의 기차역을 생각해봤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교통카드 같은 게 없던 시절이라 지하철을 탈 때도 매표창구에서 표를 샀었는데 그때마다 “제가 신도림에 가려고 하는 데요 가능하면 부디 신도림행 차표를 하나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표창구에서 당당하게 유창한 영어로 “to Boston!” 이라고 말했다. 매표원은 몇 시 차냐고 물었고 나는 “텐 서티”라고 혀도 안 굴리고 말했다. 매표창구 앞에서 말한 영어는 표 값을 지불하기 위한 “트래블러스 체크 오케이?(여행자 수표 되요?)”가 전부였다. 편도 50달러라는 거금에 손이 떨리긴 했지만 ‘철도광’으로서는 충분히 지불할 대가가 있는 금액이었다. 승강장으로 내려가면서 실전 영어 어쩌구 하는 책을 집어 던져 버리려다 배낭 깊은 곳에 쑤셔 넣어두고는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워싱턴발 보스턴행 암트랙 172 급행열차는 북동부 노선인 관계로 5분밖에 지연되지 않았다. 한국의 새마을호 수준의 안락함을 가진 암트랙 열차는 디젤 기관차가 끄는 것으로, 한국에서 사용되고 있던 7000형 계의 기관차와 유사했다. 172열차는 펜 역을 출발한 뒤 허드슨 강변을 따라 뉴욕 시내를 달렸다. 당시까지만 해도 굳건히 서있던 쌍둥이 빌딩, 세계 무역센터 건물이 창밖에 보였다. 열차가 출발한 뒤 15분이 지나자 우피 골드버그를 닮은 여자 차장이 표를 검사하고 펀칭으로 구멍을 뚫은 뒤에 표를 돌려주고 따로 목적지가 인쇄된 좌석용 티켓을 머리 위 선반의 좌석 번호표에 끼워 넣었다.

이렇게 하면 차장이 지나가면서 그 좌석에 앉은 승객이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하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정차역이 가까워지면 안내방송이외에도 차장이 지나가면서 반복적으로 다음 정차역이 어디인지 말해주며 통로를 지나갔다. 차장중의 한명은 통로를 지나가며 햄버거를 우적우적 베어 먹으며 걸었는데 한국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만약 한국의 여객전무가 열차 객실을 돌아다니며 알루미늄 호일에 싼 김밥을 씹어 먹었다면 당장 철도공사 감사관실의 경고감이다. 문화의 차이는 철도 객실 안에서도 다른 풍경을 연출한다.

뉴욕을 출발한 뒤 한 시간 반쯤 달린 뒤에 뉴헤븐 역에 도착했다. 여기에서는 보스턴행과 스피링필드 행으로 열차를 분리하여 운행했다. 식당칸의 이용이 잠시 중지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모든 객차의 불이 나가자 옆자리에 앉은 거구의 독일 할머니에게 양해를 구하고 승강장으로 나가 새로운 기관차가 연결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송원의 유도에 의해 새 기관차가 연결되고 공기호스를 이어주는 작업이 한국에서와 똑같이 진행됐다. 뉴욕발 보스턴행 172 열차는 대서양을 끼고 동부 해안을 달렸다. 기차를 타고 달리면서 보는 바다는 그곳이 어디든 철도 여행자를 들뜨게 한다. 바다 열차만 생각하면 지난해 신선 건설로 운행이 중지된 동해남부선 해운대-송정 구간이 떠오른다. 아쉽고도 아쉽다.


172열차가 종착역인 보스턴 남역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된 시간을 20분이나 앞당긴, 오후 3시 10분이었다. 연착을 밥 먹듯이 하는 암트랙에서 동부 노선에만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역 전광판에는 시카고에서 오는 열차의 지연시간이 6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암트랙이야.

매표창구에 가서 뉴욕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열차를 예매했다. 보스턴에서 뉴욕행 막차는 밤 8시에 출발하는 67열차였다. 보스턴에서 출발하는 마지막 열차인 67열차는 뉴욕과 필라델피아, 워싱턴을 거쳐 리치먼드까지 달린다(2000년 3월 암트랙 시간표 기준). 이민자의 첫 도착지이자 동부의 부흥을 이끈 도시였던 보스턴과 뉴욕, 미국 독립혁명의 중심지였으며 최초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 그리고 워싱턴과 과거 남북전쟁 때 남부연합의 수도였던 리치먼드까지 67열차가 달리는 노선은 미국이 걸어온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길이다.

보스톤에서 주어진 시간은 다섯 시간. 어디를 딱히 가려고 온 것이 아니라 열차를 타는 게 목적이었기에 정처 없이 보스턴 시내를 걸었고 우연히 보스턴 메트로에서 일하는 아저씨를 만나 여기 저기 안내를 받으며 같은 ‘철도맨’으로서의 우정을 나눴다.

저녁 7시 15분 하버드 역에서 시내로 향하는 인바운드 노선을 타고 보스턴 남역에 도착한 시간은 7시 30분. 맥도널드에서 빅맥 슈퍼사이즈 플러스와 오렌지 주스로 주린 배를 채웠다. 열차 출발 10분전 역 매점에서 50센트짜리 <유에스에이투데이> 신문을 샀다. 매표소 앞에서도 단 세 마디로 표를 구하는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인해, 읽을 일은 없지만 기념 선물 포장이라도 할 요량이었다. 막차에는 거의 사람이 없었다. 내가 들어간 칸에는 앞쪽 두세 명 외에는 승객이 없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옆 칸에서 한 사람이 건너 왔는데 그 많은 자리를 놔두고 하필이면 통로를 사이에 둔 건너편 좌석에 앉았다. 왕년에 미식축구 같은 걸 한 사람처럼 키도 190센티미터(cm)가 넘는 것 같았고 몸집도 거구인 흑인 아저씨가 알 듯 말 듯 미소를 보내고는 이어폰을 끼었다.

나는 옆자리에 배낭을 놓고 바리케이트를 쳤다. 배낭 안에는 필름이 몇 장 안남은 SLR카메라, 캠코더, 하버드대 구내 서점에서 산 미술책, 여행기 작성용 수첩, 생수통이 전부여서, 누군가 야음을 틈타 급습을 한다면 쉽게 무너져 버릴 테지만 그냥 그렇게 뒀다. 열차가 속력을 내자 갑자기 객차의 불이 꺼졌다. 야간열차라 승객의 숙면을 돕기 위해서 였는데, 건너편에 앉은 아저씨의 하얗게 반짝이는 눈자위가 비행접시처럼 날아다니는 듯 했다. 공포를 이긴 것은 피로 때문이었다. 겁에 질려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눈을 감았고 잠들었다가 차장의 정차역 안내 소리에 눈을 떴다. 어느새 열차는 뉴욕시내로 돌아오고 있었다. 창밖으로 부르클린 다리의 야경이 보였다.

새벽 2시가 가까워 온 시간 무사히 펜 역에 내린 나는 역사 밖으로 나왔다. 사방 천지가 적막 속에 잠들어있고 가끔씩 과속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의 주행음이 들릴 뿐이었다. 하수구에서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디선가 배트맨이 나와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숙소인 호텔 쪽 골목으로 돌아선 순간 두 명의 청년이 있었고 눈이 마주쳤다. 가로등에 비쳐 길게 늘여진 내 그림자를 그들이 밟고 있었다. 순간 겁이 났지만 대로였고 얼마 남지 않은 호텔까지는 달리기도 자신 있었기에 “하이!”하고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가려고 했다. 그 순간 두 청년은 돌아서더니 전력 질주로 달아났다. 미국 도시들의 어둠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모르는 이에게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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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펜 역의 현재 모습. 하루 이용객 60만 명이 몰리는 미국에서 가장 붐비는 역이다.ⓒhttp://cdn.archinect.net/images/514x/d6/d66886f54be0f104a60ab7405d9ed81f.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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