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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 지리산이 부른다

3월의 백두대간학교

백두대간학교(교장 이철승, 백두대간 전문가) 제39강은 3월 22(토)∼23(일)일, <지리산 구간>입니다. 주제는 <지리산의 봄, 생명이 움트는 힐링의 길>. 첫날은 백두대간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지리산의 천왕봉을 오르고, 둘째날은 천왕봉을 바라보며 지리산둘레길을 따라 걷습니다. <백두대간걸작선> 제4기(백두대간 갈래치다) 네번째 산행입니다(2월 공지한 <지리산 구간> 중, 청학동-삼신봉-쌍계사 코스가 국립공원 산불방지기간으로 탐방이 통제되어 부득이 산행코스를 수정하였음을 양지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봄빛 속 지리산 능선 Ⓒ지리산국립공원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지난 3년 백두대간학교 수석가이드로 활약해주셔서 낯익은 얼굴입니다. 산행 경력 30년의 저명한 M.T.디자이너이며 국가공인 숲길체험지도사(산림청), 응급처치법 강사(대한적십자)입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배낭 하나 메고 지리산을 제집 드나들듯 들락거렸습니다. 산으로 들어가면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며 얼굴이 환해집니다. 천상 산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백두대간을 종주하고 연이어 정맥 산행을 시작했습니다. 등산학교를 졸업하고 백두대간 가이드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산악회 가이드, 기업체 가이드, 목적산악회 가이드 등으로 활약하며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가이드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지난 3년 인문학습원 백두대간학교 가이드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백두대간 교양강좌, 트레킹학교 등의 실무를 도맡아 진행했고, 아이들과 뚜르드몽블랑(TMB),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다녀왔으며, 흥덕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대 <백두대간 하늘길를 걷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아이들과 백두대간 숲길을 거닐며 바람과 햇살, 구름, 안개, 곤충과 나무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교장대행선생님의 산행지 설명]

백두산 흘러 흘러 치닿은 또하나의 백두, 지리산. 두류산(頭流山)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지리산은 백두산에서부터 흘러 내려온 산입니다.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지리산까지 하나로 이어져 있습니다. 이 땅의 근간인 백두대간입니다.

오늘날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의 마루금을 의미합니다. 선대의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한반도 전체로 생각했습니다. 백두대간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한반도 곳곳에 혈맥으로 뿌리 뻗어 하나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모든 곳이 곧 백두대간입니다.

우리의 삶은 백두대간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백두대간이 곧 흙입니다. 백두대간에서 흘러내린 물을 마시고 백두대간 자락에서 기대어 살며, 백두대간에서 자란 음식을 먹고 백두대간 자락을 뛰놀며 온갖 희로애락과 함께하다 한줌의 흙이 되어 백두대간으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삶과 함께하는 백두대간은 또 하나의 도반입니다.

생명이 움트는 봄 아름다운 도반들과 함께 또 하나의 도반인 백두대간을 오릅니다. 이번 산행은 지리산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지리산의 넓은 품을 헤아리며 생명이 움트는 어머니의 길을 걷는 일정입니다.

첫날은 지리산의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는 천왕봉을 오릅니다. 중산리탐방지원센터에서 산행의 첫발을 내디딥니다. 오늘의 코스는 천왕봉에 오르는 가장 빠른 코스 중의 하나입니다. 콘크리트 보도를 따라 걷다 다리를 건너 우측으로 오르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바닥에 깔린 바위를 디디며 산으로 들어갑니다. 조선 건국의 설화가 어린 칼바위를 지나 흔들거리는 다리를 지나면 장터목과 법계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잠시 다리쉼을 합니다.

이제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과 계단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망바위까지 오르는 길은 거친 숨이 절로 나옵니다. 체력 안배를 하고 자기 페이스를 조절하며 오릅니다. 망바위에 올라섭니다. 시원한 조망에 가슴이 후련합니다.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영신봉에서 이어진 낙남정맥을 눈에 담습니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오르막을 오르면 문창대입니다. 천왕봉이 눈 앞에 닿고 법계사가 지척입니다. 로타리대피소에서 간식으로 체력을 보충하고 법계사를 지나 개천문으로 향합니다.

천왕봉은 하늘을 여는 문인 개천문과 하늘로 통하는 문인 통천문을 지나야만 오를 수 있는, 하늘의 봉우리입니다. 하늘을 열고 오르다 보면 남강의 발원샘인 천왕샘이 보입니다.

▲천왕봉이 부른다. Ⓒ지리산국립공원


바위틈에 졸졸 흐르는 천왕샘으로 목을 축입니다. 바로 앞에 천왕봉이 보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봉우리는 쉽게 오르기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코가 땅에 닿을 듯한 오르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무념무상 발걸음을 옮깁니다. 한숨 한숨 숨을 들이키다 보면 하늘의 봉우리에 닿습니다. 천왕봉입니다. 백두에서 흘러내린 봉우리입니다.

하늘의 봉우리에서 지리산의 속살들을 둘러봅니다.
하늘의 봉우리에서 생명이 움트는 봄을 맞이합니다.
하늘의 봉우리에서 지친 삶과 영혼을 치유합니다.

하늘 봉우리의 기를 가득 담고 고사목과 하늘이 아름다운 제석봉을 지나 장터목에서 함께한 도반들과 점심을 나눕니다. 옛날 장터의 떠들썩함을 함께 오른 도반들과 반찬 나누며 함께합니다.

이제부터 하산길입니다. 대피소 뒤쪽을 휘돌아 소지봉으로 향합니다. 지리산의 주능선이 한눈에 보이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제사 후 종이를 태웠다던 소지봉입니다. 소지봉에서 참샘으로 향하는 내리막은 경사가 심합니다. 참샘의 달콤한 샘물에 복을 축이고 하동바위를 지납니다.

백무동으로 향하는 하산길은 무척 지루합니다. 토양의 침식을 막기 위해 돌로 조성한 등산로 때문에 지루함이 더합니다. 그 지루함은 함께 걷는 도반들과 이야기 나누면 저절로 해소됩니다. 도란도란 이야기 속에 걷다보면 백무동입니다. 백무동에서 첫날 산행을 마감합니다. 버스를 타고 매동마을로 이동합니다. 숙소를 배정하고 정돈 후 저녁식사를 합니다. 저녁식사 후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 뒤 민박에서 지친 산행의 여정을 뉘입니다.

둘째날은 지리산의 넓이를 헤아리는 둘레길 걷기입니다. 매동 마을회관에서 출발합니다. 돌담길을 따라 걷기를 시작합니다. 곧바로 대숲길로 이어지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둘레길을 따라 가볍게 발걸음을 옮깁니다.

봄이 오는 남녁 지리산 자락의 마을들은 정겹습니다. 모두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논길을 따라, 산길을 따라, 밭길을 따라 내를 건너고 또 산길로 이어져 있습니다. 중간 중간 정자가 있고 우측으로 지리산 천왕봉을 보며 걷습니다.

그림 속 다락논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느티나무 아래 조그만 쉼터도 정겹습니다. 파릇파릇 돋아난 봄나물도 캐면서 느릿느릿 봄을 만끽합니다.

거북등 닮은 등구재를 지나 고갯길을 내려가면 창원마을이 보입니다. 창원마을에 내려서기 전 쉼터에서 참을 먹는 시간도 가집니다. 함께한 도반과 김치전에 막걸리잔 기울이며 다리쉼을 하는 시간입니다.

아름드리 느티나무에서 솔바람이 전하는 마을의 전설을 듣고 이 골목 저 골목 시골길을 걸으면 어느새 금계마을입니다. 금계마을에서 걷기를 마칩니다. 버스를 타고 실상사로 향합니다. 천년 고찰 실상사를 둘러본 후 인월 근처에서 손부두요리로 뒤풀이 자리를 갖습니다.

서울에 오르기 전 인월장에 들릅니다. 오늘이 인월장날입니다. 고향의 정취가 남아있는 시골장터에서 남녘의 봄을 장본 뒤 서울로 향합니다. 생명이 움트는 봄. 지리산의 속살과 지리산의 넓은 품을 걸으며 치유의 시간을 갖습니다. 함께 하셔서 생명이 움트는 소리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제석봉에서 본 운해 Ⓒ지리산국립공원


[구간소개]

-산행월일 : 2014년 3월 22(토)∼23(일)일
-산행출발 : 2014년 3월 21일(금) 오후 11시
-산행코스 : 1일차 : 중산리-칼바위-로타리대피소-법계사-천왕봉-제석봉-소지봉-참샘-
하동바위- 백무동
2일차 : 매동마을-상황마을-등구재-창원마을-금계마을
실상사-인월 오일장
-산행거리 : 1일차 - 약 13.1km
2일차 - 약 10km
-소요시간 : 1일차 - 약 10시간(충분한 휴식시간 포함)
2일차 - 약 5시간(여유로운 간식시간 포함)
-난 이 도 : 1일차 - 상하(★★☆)
2일차 - 하하(☆)

[산행계획]

여유있는 산행을 위해 일찍 출발합니다. 모든 산행은 전문산악가이드와 동행하며 '안전제일'로 진행합니다. 공인 등산가이드이신 이철승 교장선생님과 엄재용 선생님이 선두와 후미에서 함께 하며 평안하고 안전한 산행을 진행합니다.

<버스운행>

출발 10분 전에 도착하여 다은고속관광 <백두대간학교> 버스에 탑승하세요. 김종선 기사님 전화번호는 010-3350-1055입니다.

[3월 21일(금)]
23:00 덕수궁 대한문 앞 출발(지하철 1,2호선 시청 2번 출구)
23:30 사당역 공영주차장 앞 출발(지하철 2,4호선 1번 출구)
23:40 양재역 서초구청 폭포 앞 출발(지하철 3호선 12번 출구)
23:50 경부고속도로 죽전(하행) 버스 승차장
24:00 경부고속도로 신갈(하행) 버스 스차장

<산행일정>
[1일차(3월 22일 토요일)]
05:00 중산리 도착. 식당에서 아침식사
06:10 중산리. 스트레칭 산행 준비
06:30 중산리 출발. 산행 시작
07:40 칼바위
09:20 로터리대피소
10:40 천왕봉
12:00 장터목대피소. 점심식사
13:00 장터목대피소 출발
14:30 소지봉
15:00 참샘
15:20 하동바위
16:30 백무동. 산행 마감. 스트레칭 후 버스 탑승
17:20 매동마을 도착. 숙소 배정(다인실) 및 세면
18:30 저녁식사. 매동마을 민박식. 식사 후 자유시간
22:00 취침

[2일차(3월 23일 일요일)]
05:00 기상. 산책 및 세면
06:30 아침식사. 매동마을 민박식
07:30 매동 마을회관 앞 출발. 지리산 둘레길 출발
08:00 서진암 삼거리
10:00 등구재
10:30 창원마을. 마을주민이 판매하는 휴게소에서 간식
12:30 금계마을. 둘레길 트레킹 마감. 스트레칭 후 차량 이동
13:00 실상사
14:00 뒤풀이. 청솔회관. 손두부전골과 막걸리로 뒤풀이
15:30 인월 오일장 장보기
16:30 인월 출발
19:30 서울 도착 예정
*상기 일정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식단]
22일 조식 : 매식. 중산리 해장국
중식 : 도시락과 라면
석식 : 매식. 매동마을 토속음식과 삼겹살
23일 조식 : 매식. 매동마을 토속음식
간식 : 매식. 창원마을 부추전과 막걸리
중식 : 매식. 청솔회관 손두부전골 등

▲<지리산 구간> 산행도 Ⓒ백두대간학교


[산행준비물]
-등산복, 장갑, 등산모, 방풍의, 우의, 스틱, 물통,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스패츠, 아이젠, 버프(얼굴가리개). 그리고 꼭 점심도시락을 싸오세요.


<백두대간걸작선> 제39강 <지리산 구간> 참가비는 20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 겸 뒤풀이, 1회 간식비. 가이드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백두대간학교 홈피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십시오(산행에 관한 문의는 이철승 교장선생님에게 해주세요. 010-8727-0202). 아울러 백두대간학교 카페에도 많이 놀러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http://cafe.naver.com/baekdudaeganschool)^^. 백두대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4월 산행 안내]
-산행일 : 2014년 4월 26일(토)
-산행지 : 호남정맥 조계산
-산행코스 : 송광사주차장-불일암-송광사-문구재-천자암-보리밥집-큰굴목재-
선암사-승선교-선암사주차장
-출발시각 : 4월 25일(금) 오후 11시 덕수궁 출발
-참가비 : 10만원
-거리 : 약 10km
-산행시간 : 약 7시간(휴식 및 식사시간 포함)
-난이도 : 중하(★☆)

▲지리산 양털구름 Ⓒ지리산국립공원

[산행자료]

[칼바위] 조선 태조 이성계가 등극한 후 자신을 노리는 사람이 지리산 중턱 큰 바위 밑에서 은신 중이라는 소문을 듣고 한 장수에게 그를 찾아 목을 베어오라고 명령했다. 명령을 받은 장수가 지리산을 헤매다 이곳에서 2km 떨어진 곳에 이르러 큰 바위 밑에서 공부하는 사람을 발견하여 칼로 치니 바위는 갈라져 홈바위가 되고 칼날은 부러지며 이곳까지 날아와 꽂히면서 하늘을 찌를 듯한 형상의 바위로 변하였다고 하여 칼바위라 부른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망바위] 1,068m. 마치 경계병처럼 망을 보고 있는 듯한 모습 때문에 이름이 지어졌다 한다. 조망이 그만큼 좋다는 의미라고도 한다. 망바위에 오르면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산줄기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법계사] 1,450m.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인 쌍계사의 말사이다.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턱, 해발 1,450m에 있는 남한에서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절이다. 서기 544년(신라 진흥왕 5년)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부처님 진신사리를 봉안하면서 창건했고, 1405년 정심선사(正心禪師)가 중창하였다. 그 뒤부터 수도처로 알려져 고승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6.25전쟁 때 불에 탔지만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재건을 못하고 토굴로 명맥을 이어오다 최근에야 법당이 세워졌다. 고려시대에 만든 것으로 보이는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법당 왼쪽에 거대한 암석을 기단으로 세워져 있다. 지리산 7대 사찰로 꼽히며 사찰 뒤로 암봉과 문창대가 보인다.

법계사는 전란 때마다 수난을 겪었다. 그 첫번째가 고려 무왕 6년 9월에 남원의 황산벌에서 이성계에게 크게 패한 왜구들이 황급히 도망가면서 지리산으로 들어가 불태운 것(법계사가 흥하면 일본의 기운이 쇠퇴한다는 전설 때문에 고려말 왜적 아지발도에 의해 소실). 두번째가 조선시대 재건돼 많은 불자들의 기도처로 이용되던 중 1908년 지리산이 항일의병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박동의의 의병부대가 덕산에서 패한 뒤 법계사로 후퇴, 계속 항일전을 벌일 당시 일본군의 방화로 화마에 휩싸였다. 세번째는 1948년 여수반란사건을 겪으면서 지리산이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토벌군이 대원사와 함께 불태워버린 것이라 한다.

[개천문(개선문)] 천왕봉 남서쪽의 통천문과 함께 천왕봉을 오르는 관문으로 여겨진다. 통천문처럼 신비스럽고 위용을 갖춘 모습은 아니지만, 마치 개선하는 기분이 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과거에는 왼쪽은 물론 오른쪽에도 비슷한 높이의 바위기둥이 서 있었지만, 지금은 오른쪽의 기둥은 붕괴되어 없어지고 왼쪽에만 높이 10m의 문설주가 있다. 통천문이 ‘하늘을 오르는 문’이라는 의미라는 점을 보면, 개선문보다는 개천문이 ‘하늘을 여는 문’이라는 의미에서 타당해 보임.

[천왕샘] 1,800m. 남강의 발원지. 여기에서 솟구친 물은 덕천강을 따라 흘러, 남덕유산 참샘을 발원지로 하는 경호강과 남강댐에서 합류하여 남강을 이루어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6m 정도의 바위 밑에서 방울방울 흘러 모인 샘물로, 1977년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해 물이 고일 수 있도록 홈을 파놓았지만 가물 때는 쉽게 말라버리기 일쑤다. 깍쟁이처럼 바위에 졸졸 흐르는 정도의 양이지만, 남강의 첫물, 강이 되고 바다가 될 그 시초다.

▲다랭이논 Ⓒ지리산국립공원


[천왕봉] 1,915.4m. 남한 내륙의 최고봉. 3대가 덕을 쌓아야 천왕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속설과 더불어, 반드시 관문을 거쳐 들어오도록 하고 있다. 동쪽으로 개천문, 남서쪽으로는 통천문을 두어 이들 관문을 경건한 마음으로 거쳐 들어오게 하고 있다.
거대한 암괴(岩塊)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으니, 서쪽 암벽에는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는 의미의 '천주'라는 음각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천왕봉에 지금의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시작되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기 전에는 '경남인의 기상'이 있었고, 그전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하늘이 울어도 산은 울리지 않는다‘는 뜻의 '만고천왕봉 천명유불명(萬古天王峰 天鳴猶不鳴)'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서산대사는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과 더불어 지리산을 평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엄한 산이라 했다.

-천왕봉의 성모상
아득한 옛날부터 지리산 신령을 봉안했던 성모사가 자리해 있었으나 속인들의 끊임없는 욕심으로 자취를 감추고 빈 자리만 덩그렇게 남아있다. 성모상은 훼손된 채 사라졌다가 다행히 한 스님에 의해 찾아진 후 중산리 천왕사에 모셔져 있으나 제자리로 돌아오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1489년 이곳을 오른 김일손의 <속두류록>에 의하면. 성모사는 “천왕봉 정상에 한 칸 정도의 돌담벽이 있고 담 안의 너와집에 성상이 안치돼 있었다”고 전한다. 이 사당은 빨치산에 의해 허물어진 뒤 오늘날까지 노천암대만 남아 처량하게 수십여 성상을 보내고 있는 처지에 놓여있다.

[제석봉] 1,808m. 천왕봉 서쪽에 있다.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정상 부근은 느슨하고 봉긋한 형태다. 과거에는 고사목이 즐비하여 별난 경치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그 수도 많이 줄었다. ‘제왕이 자리했다’는 의미이다.

[장터목] 천왕봉의 자매봉인 제석봉의 남쪽 능선 고갯마루를 장터목이라 부른다. 장터목은 옛날에 천왕봉 남쪽 기슭의 시천 주민과 북쪽 기슭의 마천 주민들이 매년 봄가을 이곳에 모여 장(場)을 세우고 서로의 생산품을 물물교환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소지봉] 종이를 태우는 봉우리란 뜻으로, 백무동계곡의 백무(百巫), 즉 많은 무당들이 제를 지낸 뒤 소지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하동바위] 높이 10m 정도의 바위벽. 바위 중간에 작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함양에 있는 하동바위에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지리산 장터목에 장이 서던 날이었다. 함양고을 원님과 하동고을 원님이 지리산을 둘러보기 위해 장터목으로 향했다. 풍류를 즐겼던 두 원님은 우연한 만남에 내기 장기를 두었는데 하동 원님이 이겼다. 내기에 진 함양 원님은 놀려줄 요량으로 눈앞에 우뚝 서 있는 바위를 가져가라고 했다. 하동 원님은 후일 사람들을 동원해서 가져가기로 하고, 우선 바위 이름을 하동사람들의 바위란 뜻으로 ‘하동바위’라고 명명하였는데 그 이름이 굳어져 하동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백무동] 함양군 마천면에 위치. 예전부터 천왕봉에 기도를 올리려는 무당들이 모여드는 골짜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백무동이란 이름도 백명의 무당이 살았다는 백무(百巫)에서 전주이씨가 들어오면서 백무(百武)로 그 뜻이 바뀌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안개가 많이 껴서 백무라고도 한다.

[지리산(智異山)]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첫 국립공원으로 지정. 금강산, 한라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이라고도 한다.
지리산이란 지명에 대해 현재 남아있는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은 통일신라시대(887년) 최치원 선생의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에 등장하는 ‘智異山’이다. 다만,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흥덕왕조 828년 “당에 들어갔다가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나무 씨앗을 가지고 오니,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하였다”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타 기사에도 ‘地理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오늘날과 같이 ‘智異山’으로 표기되어있다. 고려시대 이후 지리산은 또 다른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으로 개인문집이나 유람기 등에 등장한다. 또한 조선시대 영남학파들에 의해 ‘두류산’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호칭이 있는데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덕산(德山),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다.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마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경 지리산 자락에서 최후를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 입지하고 있다.
지리산의 험난한 역사는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지대로 싸움터의 무대였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다. 근대엔 동학민중운동,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쟁터였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사건에서 시작해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의 생명이 스러진 곳이다.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은 <청학동변증설>에서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말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과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 금강산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진 배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 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태동하였던 것이다.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과 의로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제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다.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 모성적 장소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일출 Ⓒ지리산국립공원


[지리산둘레길]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 3개 도(전북, 전남, 경남)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21개 읍면 120여개 마을을 잇는 274km의 장거리 도보길. 각종 자원 조사와 정비를 통해 지리산 곳곳에 걸쳐 있는 옛길, 고갯길, 숲길, 강변길, 논둑길, 농로길, 마을길 등을 둥근 모습으로 연결하고 있다.
지리산길(둘레길)은 지리산 둘레를 잇는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이다. 한땀 한땀 수놓듯 이어가는 지리산둘레길을 통해 만나는 사람,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모든 생명들의 속삭임을 귀기우려 들어보자.
외따로 떨어져 지내며 이제나 저제나 사람의 체취를 느끼고 싶어 동구 밖을 하염없이 바라 보시는 할머니. 소로 이랑을 갈며 한 해, 한 철 농사를 이어가는 농부. 한 때는 좌, 우로 나뉘어 낮과 밤을 달리 살아야 했던 아픈 상처도 지리산길은 품고 있다.
지리산길의 시발은 순례길. 2004년 '생명평화'를 이 땅에 뿌리고자 길을 나선 순례자들의 입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지리산순례길이 있으면 좋겠단 제안이 나왔다. 그 제안이 다듬어지고 구체화된 게 지리산길(둘레길)이다. 지리산길은 소외된 지역의 마을에 활기를 불어넣고, 이 길 위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평온함과 평안, 공존과 화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다. 참 바쁜 세상살이. 살붙이마저 마주 대할 시간이 자주 없다.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지만 마음은 허허롭기만 하다. 지리산길(둘레길)에 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웃과 정을 나누는 시공의 길을 느껴보자. 처음과 같이 앞으로도 지리산길(둘레길)은 나눔과 되돌아봄의 길이어야 한다.
지리산길(둘레길) 대부분은 이곳에 사시는 주민들의 도움과 양해로 열렸다. 지리산길(둘레길)이 열리고 우리사회가 유행을 쫓듯 많은 사람들이 오기 시작했다. 때론 관광버스를 타고 오기도 한다. 관광이란 이름의 여행이 이뤄지는 곳에서는 경쟁과 자본의 논리만 있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할 짬도 없고, 여유와 성찰은 더욱 불가능하다. 내 주장과 내 권리만 쫓아가다 보니, 힘겹게 일하는 지역 분들의 농작물에 손을 대기도 하고 먹다 버린 쓰레기들이 나뒹굴고, 서로 많은 사람을 재우려는 지역의 욕심도 보인다. 지리산길(둘레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물이든, 동등한 인격체라는 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리산둘레길은 옛길은 최대한 원형으로 복원하고 원래 있던 다양한 길(숲길, 임도, 강길, 제방길, 마을길)을 적극 활용하여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했다. 차량 통행이 많은 아스팔트 길, 안전이 우려되는 위험한 길, 해발 고도가 너무 높은 길 등은 연결을 위한 최소한의 구간을 빼고는 제외시켰다. 사계절 내내 변화하는 지리산과 지리산을 아우르며 흐르는 강, 들녘, 마을을 보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다. 길을 중심으로 자연자원, 고유한 역사, 문화자원이 잘 보존된 지역을 중심으로 연결하고 있다.

[매동마을] 고려 말과 조선 초, 중기에 걸쳐 네 개의 성씨(서, 김, 박, 오) 일가들이 들어와 일군 씨족마을이다. 마을 형국이 매화꽃을 닮은 명당이라서 매동(梅洞)이란 이름을 갖게 된 이 마을은, 각 성씨의 오래된 가문과 가력을 말해주듯 네 개의 재각과 각 문중 소유의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만수천변에는 조선 후기 공조참판을 지낸 매천(梅川) 박치기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지은 퇴수정(退修亭)과 그 후손이 지은 밀양박씨 시제를 모시는 관선재(觀善齋)가 있는데, 우거진 소나무들을 뒤로 두르고 앞으로는 만수천이 흐르며 발밑에는 흰 너럭바위들이 어우러져 뛰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박치기의 생존 당대에는 정기적으로 일 년에 한 번씩 시인묵객들이 이 정자 밑 너럭바위, 세진대(洗塵臺)에 모여 풍유를 즐겼다고 하는데, 그 숫자가 족히 백 명에 달했다고 한다. 불과 삼사십 년 전만 해도 저녁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맑은 물 위에 달이 떴다 지도록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산내면의 대표적인 생태농촌 시범마을로 지정돼 전통과 개발이라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는 마을이다.

[상황소지류쉼터] 상황마을의 다랑논이 한눈에 들어오고 지리산 주능선을 볼 수 있다.
[등구재] 거북등을 닮아 붙여진 이름 등구재. 서쪽 지리산 만복대에 노을이 깔릴 때, 동쪽 법화산 마루엔 달이 떠올라 노을과 달빛이 어울어지는 고개다. 창원마을과 상황마을의 경계가 되고, 인월장 보러 가던 길이기도 하다. 지금은 이곳을 찾는 이 드물지만 되살아난 고갯길이 마을과 마을, 그리고 사람을 이어줄 것이다.

[창원마을] 넉넉한 곳간 마을, 창원. 조선시대 마천면 내의 각종 세로 거둔 물품들을 보관한 창고가 있었다는 유래에서 ‘창말(창고마을)’이었다가 이웃 원정마을과 합쳐져 현재 창원이 되었다. 창고마을이었던 유래처럼 현재도 경제적 자립도가 높은 농산촌 마을이다. 다랑이논과 장작담, 마을골목, 집집마다 호두나무와 감나무가 줄지어 있고 아직도 닥종이 뜨는 집이 있다. 함양으로 가는 오도재 길목마을로 마을 어귀 당산에는 300여 년 수령의 너덧 그루 느티나무와 참나무가 둥그렇고 널찍한 당산 터를 이루어 재 넘어가는 길손들의 안녕을 빌고 쉼터를 제공하는 풍요롭고 넉넉한 농심의 지리산촌마을이다.

[금계마을] 금계(金鷄)마을로 개명되기 전 마을 이름은 ‘노디목’이었다. 노디는 징검다리라는 이 지방 사투리로 칠선계곡에 있는 마을(추성, 의중, 의탄, 의평) 사람들이 엄천강 징검다리(노디)를 건너는 물목마을이라 부른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산촌사람들의 정을 징검징검 날랐을 노디가 세월에 씻겨 나가고 지금은 그 위에 의탄교가 들어서 있다.

[실상사] 지리산 자락이 감싸 안은 듯 평화롭고 풍요로운 고을 남원시 산내면에 천년 고찰 실상사(實相寺)가 있다. 지리산의 북쪽 관문인 인월에서 심원, 달궁, 뱀사골 방면으로 향하다 보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왼쪽 마천 방면으로 가다 보면 만수천(萬壽川)변에 호국 사찰로 천 년의 세월을 버티고 지내온 실상사가 나타난다.
만수천과 뱀사골 방면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만나는 지점이 산내면 면소재지, 즉 인월에서 뱀사골 방면으로 가다 보면 나타나는 삼거리 부근이다. 이 삼거리에서 동쪽을 향해보면 천왕봉이 손에 닿을 듯 눈앞에 선하다. 그 발아래 산내면 입석리 들판이 넓게 펼쳐지는데 그 곳에 실상사가 자리 잡고 있다.
실상사는 지리산 깊은 계곡에서 흐르는 만수천을 끼고 풍성한 들판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동으로는 천왕봉과 마주하면서 남쪽에는 반야봉, 서쪽은 심원 달궁, 북쪽은 덕유산맥의 수청산 등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채 천년 세월을 지내오고 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사찰이 깊은 산중에 자리잡고 있는데 비해 지리산 자락의 실상사는 들판 한가운데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지리산 사찰 중 평지에 자리한 절은 이 곳 실상사와 단속사가 있는데 단속사는 폐허가 된 채 석탑만 남겨져 있는데 비해 실상사는 여전히 사찰 구실을 하고 있다.
천년 사찰, 호국 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 때(1468)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 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 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 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 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 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치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를 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스님들이 이 속설에 따라 범종의 일본지도를 많이 두드린 탓에 범종에 그려진 일본지도 중 홋카이도와 규슈지방만 제 모양으로 남아 있을 뿐 나머지 열도는 희미해져 가고 있다. 독도 영유권에 대한 일본의 망언이 계속되는 오늘날 한일관계를 두고 볼 때 보광전의 범종에 얽힌 사연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많은 점을 일깨워준다. 이 같은 전설과 구전들을 살펴볼 때 실상사는 일본에 대한 호국 사찰이며 불교문화의 큰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곳에는 신라시대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산재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삼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기도 하다. 실상사의 문화유적 중 보물로는 수철화상능가보월탑(33호, 905),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34호), 석등(35호, 개산당시), 부도(36호, 고려), 삼층쌍탑(37호, 887년), 증각대사응료탑(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응료탑비(39호), 백장암석등(40호, 9세기 중엽), 철제여래좌상(41호, 개산당시), 청동은입사향로(420호, 1584년), 약수암목조탱화(421호, 1782년) 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45호,1684년), 위토개량성책(88호, 토지대장), 보광전범종(138호, 1694년), 백장암보살좌상(166호,고려), 백장암범종(211호, 1743년) 등 5점이다.
중요민속자료는 실상사 입구의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세워져 있는 석장승 3기(15호)가 그것이다. 장승은 벅수라고도 하는데 보통 한 쌍으로 세워져 있으나 이 곳의 장승은 남녀를 판별할 수 없으며 만수천 양쪽에 원래는 4기가 세워져 있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 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 때 떠내려가고 없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은 창을 든 것 같은 모습이며 대장군(大將軍)은 뒤에 만들어진 듯 이렇다 할 특징은 없다.
실상사에는 이렇듯 호국의 정신이 흐르며 찬란한 신라불교문화의 숱한 문화재가 잘 보존돼 있는 천년 고찰이다.

[인월] 인월(引月)은 형상이 금거북이 진흙 속에 묻혀 있는 형국의 금구몰니(金龜沒泥) 형국의 길지라 전해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인월리 월평(月坪)마을은 처음에는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동네라 하였다가 마을의 형국이 반월형이라 월평(月坪)이라 불렀다. 또 마을 터가 동쪽을 향하고 있어 달이 뜨면 정면으로 달빛을 받는다 하여 ‘달이 뜨면 바로 보이는 언덕’이란 뜻으로 월평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이 밖에도 마을 앞이 넓은 평지인 관당들이 있어 ‘인월에서 제일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월평이라고 불렀다는 설 등 유래가 분분하지만 내용은 비슷하다.
인월이라는 지명 유래를 낳게 한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과 관련하여, 달을 끌어올린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영월정이란 정자를 마을 북쪽 남천변에 세우고 매년 인월제(引月祭)를 지낸다. 또한 이 마을과 하우마을 경계의 냇물인 남천에 <흥부전> 사설에 나오는 화초장바위와 옥사정터, 옥독거리가 있고, 달빛이 산언덕을 넘어서면 용계마을에서 새벽닭이 운다는 말이 있으며, 마을 뒷산이 죽은 뱀의 형국[蛇頭穴]이기 때문에 마을에 부자가 나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자료 출처 : 실상사, 지리산 둘레길, 지리산국립공원 등)

이철승 교장선생님은 백두대간학교 제4기를 열며 얘기합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강이나 계곡을 건너지 않고 이어진 산줄기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이어진 분수령 산줄기입니다. 백두대간에서 1정간 13정맥이 갈래치고 또 기맥, 지맥으로 뻗어 한반도의 구석구석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 산줄기에서 모든 강들이 시원하고 그 강줄기에 기대어 마을이 생기고 문화가 일구어졌습니다. 우리는 한평생 그 산줄기와 강줄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우리가 기대어 사는 이 땅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대간입니다. 낙동정맥, 호남정맥, 땅끝기맥 등 정맥과 지맥, 기맥을 모두 아우른 백두대간입니다.

지난 3년에 이어 앞으로의 백두대간학교는 이 땅 곳곳으로 갈래친 백두대간을 찾아갑니다. 앞으로 백두대간학교는 다음과 같이 진행합니다.

하나, 백두대간학교의 원래 취지대로 백두대간 걸작 구간 산행을 계속합니다.
둘, 백두대간에서 갈래친 정맥, 기맥의 걸작 구간도 찾아갑니다.
셋, 월별, 계절별로 특별히 아름다운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넷, 산행과 문화유적 탐방을 아울러서 인문학적 소양도 풍부하도록 합니다.
다섯, 참가자들이 희망하시는 산줄기를 추가할 수 있도록 합니다(전체 일정은 유지하지만, 꼭 고수하지는 않습니다).
여섯, 산행 후 계절별, 지역별 특색 있는 먹거리로 뒤풀이 자리를 마련합니다.
일곱, 멤버십 강화를 위해 정기 산행 이외에 비정기 산행(번개산행, 종주산행, 번개모임 등)도 추진합니다.
여덟, 참석하시는 모든 분들이 중심이 되는 산행을 이어갑니다.
아홉, 백두대간학교가 지향하는 산행문화가 정착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 땅 여러 갈래로 백두대간의 아름답고 소중한 산줄기를 찾아갑니다. 그 아름다운 산줄기를 늘 함께 걸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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