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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아직도 수구의 터널에서 헤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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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한나라, 아직도 수구의 터널에서 헤매나

[기자의 눈]정체성 논쟁이 사소한 문제인가?

한나라당의 정체성 논쟁이 한창이다. 이에 대해 강재섭 대표는 5일 "이는 경선준비위원회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공식적 활동을 시작한 준비위원회를 향해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고 하더라도 후보와 관련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것을 부탁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당의 일부 대선주자들이 관련된 일이니 만큼 경선준비위에서 논의하자는 논리다. 하지만 아무리 따져 봐도 당의 정체성 문제를 '사소한 문제'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더구나 당 대표가 정당의 골수나 다름없는 '정체성'과 '이념'의 문제를 대선 후보 선출을 논의하기 위해 한시적으로 구성된 경선준비위에 떠넘긴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정체성 논쟁이 지류인가?

한나라당의 이번 논란은 건전한 논쟁이라기보다는 사실 진흙탕에 가깝다. 포문은 참정치운동본부 유석춘 본부장이 열었다. 사안마다 주류세력과 대립각을 그어 온 고진화 의원을 겨냥해 탈당을 요구했고, 대표적인 '매파'인 김용갑 의원, 전여옥 최고위원 등이 가세하면서 원희룡 의원도 대칭적인 논쟁의 한 축으로 서게 됐다.

당 내의 한 진영을 "열린우리당의 2중대 세력"으로 규정하거나 이런 논란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친북좌파"라는 색깔 공세가 어쩌면 진흙탕 논쟁의 첫 단추를 끼웠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개가 짖는 소리"라거나 "당신들이 나가서 수구보수 정당을 창당하라"는 식으로 비슷한 수준의 반응은 피해갈 수 없는 수순이었다.
▲ (왼쪽부터) 한나라당 정체성 논란의 당사자들인 참정치운동본부 유석춘 공동본부장, 김용갑 의원, 원희룡 의원, 고진화 의원. ⓒ뉴시스

결국 논란은 "좌파세력은 당을 나가라"는 '배척의 논리'와 "특정 후보의 정치공작"이라는 식의 '음모의 논리'만이 난무하는 가운데 자중지란에 빠졌다.

강 대표의 "경선준비위원회에서 논의해 달라"는 당부는 이런 가운데 나왔다. 강 대표는 이번 논란을 과열된 대선경쟁의 사소한 지류쯤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당내 이념적 스펙트럼의 양 극단에 위치한 소위 '꼴통'들끼리의 논쟁이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이번 일을 접한 많은 사람들의 의아함은 "어떻게 고진화와 김용갑이 같은 당에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6대 국회에서 원희룡-김용갑 앙숙 커플이 크고 작은 일화를 남길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같은 당에 있도록 '공천'한 당의 대표라면 최소한의 해명이라도 하는 게 옳았다.

나아가 스스로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라면 차라리 제대로 된 '링'을 만들고 치열하게 싸우도록 독려해야 했다. 금도를 넘어선 상호 비난전을 제어하고 한나라당의 제대로 된 정체성 논쟁에 불을 붙이는 계기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나라당은 우리 사회에 거의 유일한 보수정당으로서 40%가 넘는 지지를 얻고 있는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몸값에 걸맞는 자기 모색의 과정을 보고자 하는 관객이 충분히 있다는 얘기이다.

필요한 내부 충돌과 자기 검증을 겁내고 정부여당의 실정에 기댄 반사이익만을 챙기려 들면 김용갑과 고진화가 공존하는 한나라당의 정체는 끝까지 미스터리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극단에서 벌어지는 논쟁의 곁가지를 쳐내고 중심부의 논쟁으로 이끌어가는 심판의 역할이 과연 경선관리기구의 몫일까?

소장파의 몰락은 필연

물론 이 대목에선 링에 올라야 할 선수들의 보신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김용갑과 고진화가 싸울 때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했던 '다수'는 링에 올라야 할 책임을 방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개념도 애매한 '소장파'의 몰락은 한나라당이 왜 논쟁의 불모지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17대 국회 개원 직후 "한나라당의 수구적인 이미지를 탈피하고 건강한 변화를 모색하겠다"고 뭉친 '수요모임'이 2년 반 만에 문을 닫는다.

수요모임 대표인 남경필 의원은 "현재로서는 더 이상 같은 지향점을 가진 정치결사체로서의 의미가 없다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며 "오는 7일 기자회견을 통해 사실상 해체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나라당 소장파는 평소에 입바른 말을 많이 했다. 그러나 이들의 쓴 소리는 메아리가 없었다. 개혁과 패기의 이미지가 무색할 정도로 언제나 승리하는 세력에 기대 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2002년 당내 대선후보 경선에선 이회창 후보를, 2003년 대표경선에선 최병렬 전 대표를 지원했다. 2004년 탄핵정국 이후에는 박근혜 전 대표체제 출범에 기여했다. 승리가 있는 곳에는 언제나 소장파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쓴 소리'는 항상 승리 이후에만 나왔다.

또 한 번의 승리를 위해서일까. 수요모임 소속의 상당수 의원들이 부동의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시장 쪽으로, 속된 말로 줄을 섰다. 박근혜 전 대표 쪽으로 기운 사람도 있다. 저마다의 논리와 이유가 있겠지만 두 명(원희룡, 고진화)이나 되는 소장파 후보를 외면한 점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남경필 의원은 대거 '기존의 기득권'으로 몰려간 수요모임 소속 의원들에 대해 "정치인으로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현실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는 상황임을 이해해 달라"고 했다.

결국 다음 총선에서 공천을 받아 의원직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기존의 기득권과의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남 의원은 "살아남으면 우리가 주연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막연한 미래를 그렸지만 이는 16대 국회부터 참 익숙했던 말이었다.

결국 "구태정치를 청산하자"는 그들의 구호가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들이 비판한 기득권과 부단하게 손을 잡아 왔기 때문이다.

정체불명 한나라, '봉합'이 아니라 '논쟁'으로

여당의 집단탈당 사태가 현실화되면 한나라당은 제1당으로 올라서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집권의 가능성도 높다. 지방권력과 중앙권력, 의회권력을 동시에 장악한 초유의 정당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정당이 정체불명이라는 건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용갑과 고진화가 공존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들 사이의 논쟁이 발전의 맥락으로 닿지 못하고 "네가 나가라"는 식의 쳇바퀴만 굴리는 한심함이 더욱 큰 문제가 아닐까?

사람들은 과거에도 물었고 지금도 묻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강하게 물을 것이다. 너희 한나라당은 '무엇'이냐고. '안티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수사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수호라는 당연한 제도적 가치 외에 한나라당의 현재와 미래를 보여줄 '보수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이냐고. 이에 답할 때만이 한나라당은 수구의 터널을 빠져나왔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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