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수요시위가 14일로 1000차를 맞았다. 1992년 1월 8일 미야자와 일본총리의 방한을 계기로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된 수요시위는 같은 자리에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0년을 이어왔다.
스무 해 동안 일본 정부는 공식적인 사과나 배상을 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 역시 여전히 이 문제에 미온적이다. 크게 달라진 것 없이 60대의 노인이 80대가 됐을 뿐이다. 이미 끝났어야 할, 아니 시작되지 말았어야 할 수요시위가 1000차를 맞은 오늘이 잔칫날이 아닌 이 사회의 자성을 다그치는 시간이 돼야 하는 이유다.
이 겨울, 위안부 피해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의 오늘을 찾아가 봤다.
평균 나이 86세, 올해만 16명 사망
13일 오후 5시, 영등포 신화병원 장례식장. 김요지 할머니는 영정 사진 속에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말해줄 수 없다는듯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이었다. 할머니는 이날 아침 요양병원에서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향년 87세.
할머니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았다. 위안부에 끌려갔다는 수치심이 이유였다. 그래서 장례식의 상주는 동생이었다. 김 할머니는 1924년 전주에서 태어나 18살에 중국으로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해방 후 일본과 부산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혼자 지냈다. 할머니는 전주에서 살다 2010년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의 쉼터로 거처를 옮겼다.
이른 저녁, 김요지 할머니의 빈소에는 찾아오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유가족과 정대협 활동가들 몇 명이 전부였다. 빈소는 작고 초라했다. 밥통은 비어있었고, 식사를 준비하고 대접하는 사람도 없었다. 화환은 3개가 전부였다. 늦은 저녁 트위터에 이런 풍경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이 빈소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았으면 누구 하나 찾아주지 않는 쓸쓸한 장례가 될 것이었다. 할머니가 평생 얼마나 외롭게 살다 떠났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풍경이었다.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는 234명. 이 중 생존자는 63명이다. 외국에 있는 피해자를 제외하면 국내에는 57명이 남아 있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6세. 올 한 해만 16명의 위안부 피해자가 눈을 감았다. 어느덧 죽음은 이들의 가장 중요한 근황이 돼 버렸다.
끔찍한 기억 되살리며 살아야 하는 운명
아픈 기억을 안고 쓸쓸하고 조용히 살아가는 경우와 달리 그 기억을 애써 되살리며 힘든 삶을 자초하는 피해자도 있다.
11일 오후 1시.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 박옥선(88) 할머니를 만났다. 안락한 요양시설에서 지내고는 있지만 이 곳 할머니들의 생활에는 좀 더 특별한 데가 있다. 아픈 과거를 알리는 데 적극적이다보니 언론사의 취재요청은 물론, 학생들이 제작하는 기록물 촬영까지 외부인을 만나 증언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인터뷰의 숫자는 끔찍한 기억을 되살리는 횟수와 일치한다. 괴로운 기억은 잊히게 마련이지만, 박 할머니는 그것을 잊지 않고 매번 되살려낸다. 마치 잊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그것을 내뱉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는듯이. 수치스런 과거를 세상에 알린 이상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멍에다. 기자의 손을 붙들고 방으로 들어가 쉬지 않고 옛날 얘기를 쏟아내는 할머니는 연거푸 "잘 적고 있느냐"고 물었다.
박옥선 할머니는 밀양에서 태어났다. 15살에 친구와 물 길러 나갔다가 붙잡혀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 일대 일본군 부대로 보내졌다. 4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고 강제노역에도 동원됐다. 어느 날 부대 전체에 폭발이 일어나 불바다가 되더니 일본군이 모두 도망가 버렸다. 해방이었다. 먹을 것이 없어 산으로 올라가 연명하다 흑룡강성 목릉현에서 조선 사람을 만나 아들 둘 딸 하나 낳고 살았다. 그러다 2001년 한국에 오게 됐다. 할머니는 가족의 연락처를 큼지막하게 벽에 붙여놓고 있었다.
"나를 납치한 두 남자 중 하나는 한국인"
나눔의 집에서 이옥선 할머니(85)를 만났다. 다음 날인 12일 아침 미국으로 나간다고 했다. 미국에서 다른 나라 위안부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증언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할머니는 몸이 좋지 않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증언대회에 참석해 왔다.
할머니는 한국 정부와 한국 사람의 얘기를 하고 싶어 했다. "일본 사람만 나쁜게 아니라, 한국 사람도 나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할머니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5살에 식모살이하던 집주인의 심부름을 나갔다가 큰길가에서 제복도 입지 않은 두 남자에게 납치됐다. 1942년 7월 29일 오후 5시. 똑똑히 기억한다. 그런데 두 팔을 붙잡은 남자 중 한 남자는 일본 사람이었고, 다른 한 남자는 한국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그날로 기차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가 비행장 닦는 노동을 했다. 집에 보내달라고 항의하자 위안부로 넘겨졌다. 그렇게 3년. 해방되고 나서도 한국에 들어올 수 없었다. 돈 한 푼 없이 버려져 당장의 끼니를 걱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중국인의 괄시를 받으며 밥을 구걸하고 다니다 그대로 중국에 눌러 앉았다. "위안부 간판으로 어떻게 한국에 갈 수 있나. 중국에서 죽자"는 게 할머니는 물론, 같이 있던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60년을 보내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고향엔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사망신고가 돼 있어 국적도 없었다. 국적을 회복하는 일은 법정공방 끝에 1년 8개월이나 걸렸다. "우리는 당하면 몇 번을 당해야 합니까"라는 말에는 서운함이 깊게 배어 있었다. "우리가 일본을 나쁘다 나쁘다 하는데 일본만 나쁜 게 아닙니다"라는 말을 잊지 않는 할머니는 "한국 정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인데 못하니까 우리 늙은이들이 대사관 앞에 나가서 만날 주먹질 하는 거 아니겠어요"라며 답답함을 내비쳤다.
심장과 신장이 안 좋아 꼬박 꼬박 약을 챙겨먹지 않으면 안되는 할머니는 깊은 잠에 들 수 없다.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지낸다'는 할머니는 그러나 수요집회에는 빠지지 않아왔다. "수요집회 1000차까지는 채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일본에서 말 한마디를 안하니까..." 할머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길원옥 할머니, "젊은이들의 응원이 보람"
11일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청진동의 한 식당. 길원옥(84) 할머니는 정대협의 1000차 수요시위 기념행사에 참석해 있었다. 시종 맨 앞자리를 지키며 이날 행사의 중심을 잡았다. 며칠 사이 수많은 인터뷰에 응해 다소 피곤한 기색도 보였지만 현장에서 접근하는 기자들을 가볍게 응대할만큼 여유도 보였다. 길 할머니는 김복동 할머니와 함께 정대협의 쉼터에 머물고 있다.
그는 부지런한 활동 속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있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위안부 문제의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 앞장 서 왔다. 최근에는 국제엠네스티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여성 5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날 길 할머니는 "젊은이들이 '할머니 건강하세요. 위안부 문제 꼭 해결할게요'라고 말하면 살아온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조용히 덮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의 무기는 '시간'임이 분명해 보인다. 물론, 계속 쌓이는 생존자의 증언과 그 기록이 있다면 그렇게 쉽게 덮일 수 있는 역사는 아닐테지만 시간은 무섭게 흐르고 있다.
60년 전 이옥선 할머니의 한 쪽 팔을 붙잡은 것은 '한국' 사람이었다. 지금, 그 한 쪽 팔을 잡고 있는 것은 여전히 '한국'일지 모른다. 정부의 과감하고 단호한 결단이 시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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