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멋과 맛의 본향(本鄕) 통영(統營). 통영은 맛있습니다. 맛에 관한 한 통영은 '경상도의 전주'입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여행자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도시 통영. 봄이 오는 길목에 통영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여행자) 제6강이 열립니다. 통영의 봄. 통영 식담에 '한 그릇만 먹어도 일 년 내내 무병한다'는 도다리쑥국 맛도 보고 남풍을 타고 올라오는 삼칭이 해안 십리길의 봄기운도 느끼러 갑니다.
또 통영보다 더 남녘인 거제도로 가서 서이말등대에 이르는 숲길을 걷고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지였던 공곶이의 수선화와 동백꽃도 만납니다. 거제 팔경 중 으뜸인 신선대와 바람의언덕에서 살랑이는 봄바람도 쐬고 옵니다. 통영학교 제6강은 3월 15(토)∼16(일)일 1박2일로 통영과 거제 일대에서 열립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9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통영의 섬들>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봄맞이 답사지인 통영과 거제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도다리쑥국 끓이는 향기로 시작되는 통영의 봄
통영은 사철 맛있습니다. 통영의 봄맛은 도다리쑥국 끓이는 냄새와 함께 찾아옵니다. 통영 사람들은 계절마다 통과의례처럼 꼭 먹어야 하는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여름은 하모회나 장어구이, 겨울은 물메기국과 대구탕이고 봄은 단연 도다리쑥국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여름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통영 사람들은 마치 제철 음식을 챙겨먹지 못하면 그 계절을 날 수 없기라도 할 것처럼 안달입니다.
육상의 먹거리처럼 해산물도 제철이 있습니다. 봄 도다리, 가을 전어라는 말이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봄에는 도다리가 맛있고 가을에는 전어의 맛이 뛰어납니다. 참돔은 여름에 맛있고 감성돔은 겨울에 맛있습니다. 농어는 6∼7월이 제철입니다. 도다리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광어(넙치)는 가을, 겨울이 제철입니다. 봄 광어는 맛이 없습니다. 그래서 '3월 넙치(광어)는 개도 안 먹는다'는 식담이 생겼습니다. 산란 직후라 영양분이 다 빠져나가 맛이 없는 때문입니다.
통영의 봄은 도다리쑥국 끓이는 냄새와 함께 찾아옵니다. 이른 봄 통영 바다에는 도다리들이 많이 잡힙니다. 아직 살이 물러 회로 먹기엔 적당하지 않은 어린 도다리에 쑥을 넣고 국을 끓여 먹는 것이 도다리쑥국입니다. 쑥은 혈액 순환을 촉진하여 따뜻한 피가 돌게 해 주고 면역력을 증가시켜주는 약초이니 도다리쑥국은 그대로 음식이 곧 약인 약선 음식입니다. 가자미의 일종인 도다리는 지방이 적고 단백질이 다른 생선보다 많아 맛이 담백합니다. <동의보감>에도 가자미는 기력을 더해준다고 했으니 겨우내 웅크렸던 몸에 봄 도다리쑥국 한 그릇 먹고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 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겨울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바닷길 4km, 삼칭이 해안길
평지가 드문 통영에서 삼칭이 해안길은 더없이 걷기 좋은 길입니다. 미륵도 마리나리조트 옆에서 영운리까지 4km를 내내 바다만 보며 걸을 수 있으니 흔치않은 해안길이지요. 이 길은 자전거 도로인 까닭에 시멘트 포장인 것이 조금 아쉽지만 시리도록 푸른 바다는 그 정도 아쉬움이나 불편쯤 잊게 해주기에 충분합니다. 무엇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으니 안전하게 걸을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삼칭이란 이름은 삼천진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길의 끝자락 마을인 지금의 영운리에 삼도수군통제영의 수군진인 삼천진이 있었습니다. 진장은 종9품의 권관이었습니다. 삼천진은 본래 삼천포에 있었으나 1619년(광해군 11년) 영운리로 옮겨오며 삼천진이란 이름도 함께 왔습니다. 과거에는 진이 옮겨가면서 이름도 옮겨갔습니다. 선유도에 있던 군산진이 지금의 군산시 땅으로 옮겨가면서 군산이란 이름도 따라갔고 남양에 있던 영종진이 영종도 땅으로 옮겨가면서 이름도 따라갔습니다. 삼천포란 이름은 고려시대 개경에서 뱃길로 삼천리 거리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이 길에는 수륙리 마을이 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 시대 죽은 군인들의 원혼을 달래던 수륙제를 행하던 장소라 해서 수륙리입니다. 이 바다는 얼마나 많은 영혼들의 거처인가요. 임진왜란으로 죽은 수천, 수만 적과 아의 영혼들, 무고한 백성들의 영혼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훈련 중 많은 수군이 목숨을 잃었을 것입니다. 공납을 하기 위해 물질하다 숨을 거둔 백성들의 원혼 또한 부지기수겠지요. 이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극락으로 천도하던 곳, 수륙리. 그 바다가 오늘은 더없이 평화롭고 무심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 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제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서호시장 뒤편, 도천동 윤이상 생가 터에 윤이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윤이상기념관이란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기념관 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원 입구 표지석에는 도천테마파크란 이름만 눈에 띌 뿐이지요. 도천테마파크는 원래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계획되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없는 주장으로 선생을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이상기념관은 유품 전시실과 실내 공연장과 실외 공연장인 경사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에는 윤이상이 살던 독일의 집 정원에서 가져온 가문비나무가 기념 식수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2층입니다. 전시관 안에는 윤이상의 어머니가 쓰던 함지박과 호리병, 독일유학 시절 쓰던 바이올린, 친필악보, 그가 입던 옷들과 중절모,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요강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왜구들의 영혼을 떠받들기 위해 해저터널을 팠다?
해저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운하입니다. 통영의 야경은 어느 항구도시보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야경은 상당부분 통영운하에서 비롯됩니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 바다가 통영운하입니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습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는데 뱃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습니다. 충남 안면도와 같은 경우입니다.
통영운하 아래에 뚫린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만인 1932년 11월20일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야담이 전해집니다.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입니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팠다고 합니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지요.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동피랑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지난해 10월 동피랑마을에 당시 안철수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습니다. 경남 순방 길에 들른 통영에서 오로지 동피랑마을만을 방문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안 후보는 주민들과 간담회에서 동피랑을 "공동체 복원의 모범사례"로 꼽으며 "진즉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들에게는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보는 공동체 삶이 더 시급하다"며 "동피랑 마을가꾸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대선 후보들에게도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지요.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습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그토록 애지중지 하며 아끼던 꽃, 수선화. 수선화는 초봄의 전령입니다. 한반도 남쪽 끝 섬, 거제의 끝자락에는 수선화 천국이 있습니다. 팔순의 노부부가 평생을 가꾸어서 만든 낙원, 공곶이가 그곳입니다. 외도처럼 입장료를 받지도 않고 무상으로 꽃을 좋아하는 누구에게나 개방하는 낙원. 거제시 일운면 와현리, 공곶이는 원시림의 섬 내도와 이마를 맞대고 와현 해변에서 서이말 등대로 가는 길목에 있습니다. 공곶이는 영화 <종려나무숲>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탔습니다. 공곶(鞏串)이 끝에 서면 내도뿐만 아니라 외도와 해금강의 풍경이 선경처럼 펼쳐집니다. 땅이 바다로 튀어 나온 곳이 곶(串)입니다.
강명식(84), 지상악(80) 부부가 이 낙원의 주인입니다. 공곶이는 수선화뿐만 아니라 동백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330개의 돌계단을 따라 이어지는 200m의 동백 터널은 환상 그 자체입니다. 공곶이는 조선시대 말인 1868년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 신자 윤사우 일가의 은신처이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병인 박해를 피해 양산 대정에 숨어 살던 윤시우 일가는 신앙이 자유로운 대마도로 피신하기 위해 거제도에 왔다가 공곶이에 숨어 산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산등성이에는 천주교인 묘지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공곶이는 거제도의 천주교 전래지이기도 합니다.
공곶이 수목원은 1957년 진주의 총각인 강명식이 공곶이 근처 예구마을의 23살 지씨 처녀를 만나 결혼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결혼식 후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친 공곶이 풍경에 반한 새 신랑은 공곶이에 자신들만의 낙원을 일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12년 뒤인 69년 4월, 강씨 부부는 기어이 꿈을 이루기 위해 공곶이로 들어와 정착했습니다. 결혼 후 어렵게 모은 돈으로 전답과 임야를 구입한 부부는 밤낮으로 농장을 가꾸기 시작합니다. 현재 4만여 평의 공곶이 농원은 동백나무, 종려나무, 조팝나무, 팔손이 등 수많은 ,나무들과 수선화, 설유화 등 500여 종의 꽃들이 어울어진 낙토가 되었습니다. 특히 초봄이면 수선화와 동백이 만개해 천상의 화원을 방불케 합니다. 지상에 마련된 천상의 화원이 농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부부의 근력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곡괭이와 삽, 호미만으로 일구었으니 공곶이는 자연의 원형이 파괴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외도처럼 상업화되지 않고 무상으로 천상의 화원을 모두가 누릴 수 있게 해주니 두 분 주인장의 공덕이 넘치도록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맙고도 고마운 분들이십니다.
신선대(神仙臺)와 바람의언덕
신선대는 거제 팔경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힐 만큼 풍광이 빼어난 명승지입니다. 거제시 남부면 갈곶리 도장포마을 바닷가에 있는 큰 바위인데 신선이 놀던 자리라 하여 신선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머리에 쓰는 갓처럼 보이기도 해 갓바위라고도 불립니다. 그래서 옛날 벼슬을 원하는 사람이 이 바위에 득관제(得官祭)를 올리면 소원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드라마 속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이름을 얻은 바람의언덕은 신선대 부근 도장포 포구 옆에 있는 언덕입니다. 도장포 포구에서는 해금강 유람선이 출항합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도장포 포구에서 언덕을 오르면 갑자기 거센 바람이 몰아칩니다. 늘 바람이 지나가는 통로인 까닭에 언덕의 주인은 바람입니다. 온통 초원으로 이루어진 언덕을 거닐다보면 먼 이방의 땅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이국적인 풍광입니다.
쥐의 귀를 닮았다 해서 지명이 서이말입니다. '쥐귀끝'에 등대가 있어서 서이말등대인 것입니다. 1944년 1월 5일에 점등한 서이말등대는 등대원 3명이 근무하는 거제 유일의 유인등대입니다. 서이말에서 대마도까지는 직선거리 51km에 불과할 정도로 지척입니다. 서이말 등대는 거제도 동남부 해상과 일본, 태평양 등지를 항해하는 선박에게 항로를 알려주는 막중한 역할을 합니다. 서이말등대에서 보는 남해 바다와 해금강, 내도, 외도 등의 풍경은 숨막힐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통영학교 제6강 <맛있는 통영&수선화 피는 거제>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15일(토)>
06:3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11:00 통영 도착
11:00-12:00 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
12:00-13:00 버스 이동
13:00-15:30 거제도 서이말등대길과 공곶이 걷기(6.5km, 간단한 간식 준비)
누우래재(와현고개)→초소→와현봉수대 입구→석유비축기지→서이말등대→공곶이→예구마을
16:00-17:30 신선대와 바람의언덕 탐방
18:30-20:30 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
20:40 숙소(여객터미널 앞 <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 도착 및 자유시간 후 취침
<3월 16일(일)>
07:00 기상
08:00-08:40 아침식사(통영 최고의 봄맛 도다리쑥국)
09:00-10:30 삼칭이 해안길 걷기(4km)
마리나리조트→수륙마을→영운리
10:40-11:10 해저터널 걸어서 건너기
11:20-11:50 윤이상기념관 탐방
12:00-13:00 동피랑마을, 세병관 탐방
13:10-14:00 점심식사(제철 생선구이정식)
14:00-14:30 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책
14:30 서울 향발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따뜻한 여벌옷,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스틱, 식수,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강제윤 글, 이상희 사진 <통영은 맛있다>를 참고하시면 통영 답사의 의미가 더욱 깊을 것입니다.
☞<통영은 맛있다> 바로가기
통영학교 제6강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4만원입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 www.huschool.com 문의는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 통영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통영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짜장면도 맛없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속설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입니다. 통영은 맛있습니다. 왜 유독 통영만 맛있을까요. 통영은 경상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행정구역은 경상도지만 맛의 유전자는 경상도 혈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통영(통제영)이라는 군사 도시가 생긴 1605년부터 통제영이 폐지된 1895년까지 300년 가까이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라 삼도수군 통제영 소속이었습니다. 삼도수군통제영은 경상, 전라, 충청 해안 지방과 섬들의 군사기지가 하나로 묶인 '특별자치구역'이었고 통영은 그 중심 도시(본영)였습니다.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 말입니다.
통영이 경상도가 아니었으니 맛의 유전자도 경상도 혈통이 아닌 것은 당연합니다. 통영의 맛은 전라, 충청, 경상도의 맛이 한데 어울어져 만들어진 아주 보편적이면서도 특별한 맛이었습니다. 그러니 행정구역이 경상도로 편입된 지금까지도 유독 통영의 음식이 맛있는 것입니다. 입맛 까다로운 전라도 사람들도 통영에 와서는 음식이 맛있다고 감탄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통영은 또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統營) 사람들의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항구란 뜻이지요. 통영은 예향(藝鄕)입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통영은 300년 가까이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지요.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됩니다.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지요. 본래 통영은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습니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지요. 면적 234.8㎢, 인구 14만. 바다의 땅, 통영은 250여 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여 개라고도 합니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가 두룡포란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 백화당 등 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을 지으면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군사도시 통영이 생기면서 살림을 뒷받침 해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년 가까이 존재했지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통영은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멋은 맛에서 왔다 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습니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합니다. 계절을 타는 동해나 서해와 달리 남해바다는 어느 계절이나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납니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해산물들이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을 걸으며 통영의 맛있는 해산물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맛보고 느낄 것입니다. 통영학교는 그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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