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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향기 속 문학과 철학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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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봄향기 속 문학과 철학의 향연

3월 문학과철학학교 개교

새해 새봄 문학과철학학교가 개교합니다. 문학과철학학교는 문학과 철학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재미있는 공부방입니다. 교장은 양운덕 박사입니다.

양운덕 교장선생님은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철학과 대학원에서 헤겔 연구(<해겔 철학에 나타난 개체와 공동체의 변증법>)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서구 근,현대 사회철학에서 전개된 개인과 공동체의 상관성이라는 주제를 탐구하면서, 질서와 무질서의 상관성에 주목하는 복잡성의 패러다임(모랭), 헤르메스적 인식론(세르), 자율성과 창조의 원천인 '상상적인 것'(카스토리아디스) 등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연구실 '필로소피아'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다양한 철학과 문학의 고전들을 폭넓고 깊이 있게 소화하기 위한 모임과 강의를 하고 있다. 웹진 <민연>에 사랑을 주제로 한 <사랑의 문학, 사랑의 철학>, 다양한 문학적 주제들을 다루는 <문학의 1001가지 질문들>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지은 책으로는 대학 새내기들의 철학 입문서인 '피노키오 철학 시리즈'(<피노키오는 사람인가, 인형인가>(휴머니스트)외 3권), 보르헤스 해설서인 <보르헤스의 지팡이>(민음사), 철학자들의 문학 읽기를 소개하는 <문학과 철학의 향연>(문학과 지성사) 등이 있습니다.

▲조이스, 출렁이는 바다와 같은 그의 언어적 변신 Ⓒ문학과철학학교

교장선생님은 <문학과철학학교를 열며> 이렇게 얘기합니다.

문학과 철학은 우리의 삶과 세계를 비추는 두 거울이다. 문학과 철학이 없는 삶과 세계가 공허할 뿐이라면, 삶과 세계를 제대로 담고 질문하고 형상화하지 못하는 문학과 철학은 맹목적인 노력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철학은 배타적으로 맞서지 않는다. 서로가 삶과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고 풍성하게 하는 (타원의 두 초점처럼) 두 개의 중심을 마련하고 서로 배우고 가르치면서 새로운 합성을 추구할 수 있다.

문학과 철학의 합성은 서로가 자신의 개별성만을 고수하여 기계적으로 병존하거나 화학적으로 뒤섞여서 서로의 개별성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 없다. 양자가 서로의 개별성을 살리면서 새로운 포괄성을 마련하는 유기적 결합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철학이 없는 문학은 전체에 대한 객관적 이해 없이 개별적인 경험과 특수성의 혼란을 벗어나기 어려워서 차이들의 바다에서 길을 잃기 쉽고, 문학이 없는 철학은 고정된 본질로 모든 것을 단조로운 반복의 틀에 집어넣을 것이다. 이런 철학에서 나와 너, 기쁨과 슬픔, 이성과 감성, 삶과 세계의 다양한 차이들은 그저 동일한 것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철학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철학의 역사는 앞선 질문과 답에 대해서 다르게 질문하고 새롭게 묻는 과정이다. 질문은 사고의 지향을 세우고 사고할 만한 것을 찾고 사고의 윤곽을 마련한다. 좋거나 나쁜 답들은 질문이 구성하는 공간에 거주하는 주민들이다.
우리는 세계를 일정한 관점에 따라서 해석한다. 관점에 세계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어떤 관점이 필요할까? 어떤 것이 보다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을 제공하고 어떤 것이 구체적이고 흥미롭고 풍성한 관점들을 선물할까? 기쁨과 능력을 주는 관점이 있고 슬픔과 무기력을 조장하는 관점이 있다. 삶을 긍정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삶을 견디기 어렵게 하는 것도 있다. 값싼 희망과 행복으로 치장하거나 손쉬운 치유를 권하는 것이 있는가 하면 고통과 허무를 감당하는 건강한 것도 있다. 어떤 관점이 기쁨을 자아내고 삶의 고통을 껴안으면서 잘 사는 권리와 능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줄까?

우리가 먹기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고 살기 위해서 먹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면, 먹거리 자체를 누리고 즐길 수 있다. 성공하거나 유식해지기 위해서 철학을 이용하거나 철학 진리를 위해서 삶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능력으로 즐거움을 만끽하고, 스스로 사고의 수레를 이끈다면 (헤라클레이토스가 지적하듯이) 삶과 고통을 긍정하는 어린이처럼 철학의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영원히 놀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이 모든 문제의 답을 줄 수는 없지만, 삶과 세계의 문제들 앞에서 불확실성과 모순, 역설과 우연들을 마주해서 혼란스러운 현상들에 질서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 질서의 부작용과 위험을 살피고 새로운 사고를 모색한다면 좋은 친구이자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문학은 어떤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가?
문학은 현실을 모방하거나 재현하는가? 문학은 다른 현실을 창조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문학은 진리와 도덕이 제시한 정해진 길에 만족하는가?
문학은 새로운 길, 길 없는 길, 갈 수 없는 길을 가고자 한다. 문학은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새로운 가능성과 실험을 통해서 불가능한 것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언어로 포착하고자 한다. 문학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고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불)가능성을 풍요롭게 하고자 한다.

문학은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문학은 현명하고 절대적인 답을 앞세워 군림하거나 가르치려고 하는가? 문학은 질문 앞에 나서고, 거듭 새롭게 질문한다. 문학은 어떤 구체성을 구하는가? 문학은 가장 구체적인 존재의 경험을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런 문학적 '하나'는 하나에 그치지 않고 '모두'의 경험이 될 수 있다. 문학은 단 하나의 사건, 존재의 사소한 고통, 가벼운 슬픔, 작은 질문을 크고 중요하게 여긴다.

문학은 자기를 위한 것인가, 타자 앞에 서는 것인가? 문학은 타자에게 열리고 타자를 중심에 두려고 하고 자기를 내던지는 시도를 우회해서 자기에게 관심을 갖는다. 타자 없는 자기보다는 자기 없는 타자를 앞세운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자기와 타자가 공존하는 체제"이고, "다수자가 소수자들에게 권리를 부여"하고, "강한 적뿐만 아니라 약한 적과 공존"하는 역설적인 것이라면, "적과 공존하기convivir el enmigo! 반대파를 포용하는 정치gobernar con la opposicción!"는 문학적이다.

▲웃고 즐기면서 카프카를 읽을 수는 없을까? Ⓒ문학과철학학교

문학과철학학교 2014년 봄학기 강의 주제는 <문학에서 길 찾기, 문학에서 삶 읽기>입니다. 강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는 진리를 여인에 비유하면서 딱딱하고 멋없는 보편개념으로 무장한 철학자들의 서투른 솜씨로는 그녀를 유혹할 수 없으리라고 비웃는다. 우리는 철학자들이 얼마나 투박하고 거칠게, 하지만 너무 진지하고 틀에 박힌 표정으로 사랑에 대해서 설교하고 논증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런 방식으로는 사랑은커녕 미움을 받기도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찾는 철학은 보편 개념을 도구로 사용하는데, 그런 개념이 그릇으로 구체적인 삶과 사건들을 담을 수 있을까? 이런 보편과 필연성은 추상과 공허한 도식을 강요하는데 그치는 것은 아닌가? 문학은 철학이 보듬고 싶어 하는 '구체성'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문학은 구체적인 사건과 체험으로 얘기한다. 문학에서는 사랑이나 고통이 아니라 '이' 사랑과 '저' 고통에 주목한다. '이' 사랑은 사랑의 법칙에 따른 사례가 아니며 '저' 고통은 교환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고통 일반이 아니다. 어린 왕자는 자신이 물을 주고 자신에게 토라지는 장미를 그리워하고, 자신이 길들인 그 장미만을 사랑한다.
이런 문학의 용광로는 수많은 사건과 체험들을 녹여서 구체적인 상황들에 '가능성의 문제 틀'로 쓸 수 있는 형상들을 빚어낸다. 그리고 이런 개별성으로 보편성의 차원에 이르고자 한다. 곧 구체적인 보편을 추구한다.

문학과철학학교 2014년 봄학기 강의는 3, 4월 매주 월요일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총 8강으로 열립니다. 강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강[3월3일]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 : 나는 누구인가?
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합한 오이디푸스라는 수수께끼를 내세운다. 누가 살인자인가? 이 질문은 극이 진행되면서 오이디푸스의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질문한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범인 찾기는 오이디푸스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살인자는 누구인가?'가 '나는 누구인가'로 바뀐다. 살인자를 찾는 과정에서 과거와 현재, 무지와 지식이 결합되는데, 가장 높은 지혜를 지닌 자는 자기를 보지 못한다. 우리는 이 비극을 보면서 '오이디푸스'보다는 '오이디푸스를 얘기하는 나'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질문하고, 나는 (답을 알 수 없으면서도) "나는 누구인가"라고 나에게 묻는다.
(소포클레스 : <오이디푸스 왕>, 참고자료 : <문학과 철학의 향연>)

제2강[3월10일] 부정하는 자유와 유쾌한 긍정 : '지하생활자'와 니체적인 어린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는 예외적인 개인, 부정적인 주인공이다. 스스로를 병들고 비열한 자라고 밝히는 그는 이성, 과학을 앞세우는 '지상의 사고'에 의문을 품는다. '아무 것도 아닌' 그는 지하의 '다른' 사고를 제안하고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하는 시도, '아름답고 숭고한' 것을 추구하는 '수정궁'의 논리에 맞선다. 근대 이성과 과학의 지지자들은 유용하고 안락한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는 법칙과 이성의 도식으로 개인을 사회-역사의 피아노 건반이나 나사못으로 여긴다. 지하생활자는 이런 방정식과 합리적 의미 체계 대신에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욕망свобóдное хотѐнье"을 원하고, 수정궁에서 혀를 내밀 수 있는 '자유'를 제안한다. 그는 이성의 폭력, 숭고한 이상을 지향하는 행진을 거부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첫머리에 인간을 넘어서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낙타의 (수동적) 긍정과 사자의 부정과 자유를 넘어서는 어린이의 신성하고 창조적인 긍정을 제안한다.
(도스토예프스키 : <지하로부터의 수기> 1부, 니체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

제3강[3월17일] '나'와 상이한 '나들'의 갈등 : 변증법적 긍정인가 파국인가? (차페크와 피란델로)
은퇴한 철도 공무원이 자신의 평범한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 삶의 궤적을 기록하다가 자신의 삶에 평범한 나뿐만 아니라 억척스럽고 성공을 추구하는 나, 우울증환자인 나, 시인이었던 나, 공상가이자 모험가인 나 등등의 수많은 상이한 나들이 자기 안에 있었음을 힘겹게 깨닫는다. 내 속에는 얼마나 많은 '나들'이 있는가? 이 가운데 '하나의 나'만이 '참된 나'이고 '다른 나들'은 모두 무의미한가? 아니면 상이한 나들이 갈등하면서 공존하는 관계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들의 변증법.
내가 보는 나와 타인들이 보는 나는 같은 나인가? 나의 나와 '그들의 나'가 다르다면 이 상이한 '나들'은 어떻게 관계 맺는가? 내가 보는 나이고 동시에 그들이 보는 나이기도 한 나는 과연 종합되거나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의 다툼 때문에 파국에 이르거나 미치지 않을까? 나는 어디에 있고, 나는 누구인가?
(차페크 : <평범한 인생>, 피란델로 :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 만 명인 어떤 사람>)

제4강[3월24일] 혼돈과 허무 앞에서 길 찾기 : 카프카의 주인공들 곁에서
<변신>에서 '벌레'는 무엇을 어떻게 얘기하기 위한 장치인가? 내가 만약 벌레로 변한다면 가족들은 나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말하지도 못하고 들을 수 있지만, 일은커녕 제대로 기어 다니지도 못하면서 음악을 듣고 싶어 하는 X라면? 이런 검은 거울에 비친 나의 실존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소송>에서 '카K'는 아무런 잘못도 없이 체포되고, 기이한 심리 절차를 받아들이고 변호인까지 동원하지만 '완전한' 무죄를 증명하는 길이 막혀 있다. 이런 역설적이고 무의미한 상황은 '카'만의 것인가? 이런 카프카적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과정과 절차이다. 어떤 과정은 나름의 행로를 따르는데 각 단계가 다른 단계와 필연적 관계를 맺지도 합리적 연관을 지니지 않는다. 각 절차는 서로 무관하고 다른 절차와 우연적으로 이어질 뿐이다. 각 절차는 그 나름의 의미를 갖지만 그것들 전체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카프카의 작품들을 검고 어두운 빛을 배경으로 삼아서 읽어왔다. 그의 작품들에게 고독과 소외의 굴레를 씌운 채 회색 지대로 끌고 다녀도 좋을까? 그의 작품은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보고이고, 죄와 암흑 안에서의 몸부림일 뿐인가? 웃고 즐기면서 카프카를 읽을 수는 없을까? 삶의 고난은 그것을 주제화하는 기쁨과 긍정을 누리는 힘마저 앗아가는가? 왜 카프카의 친구들은 <소송>의 체포 장면을 보면서 배꼽이 빠지게 웃었을까?
(카프카 : <변신>, <법 앞에서>, <만리장성 쌓기>, <소송>)

제5강[3월31일] 보르헤스와 단테의 만남 : 전체를 담은 '알렙'과 새로운 <신곡>
단테의 <신곡>을 새롭게 쓰는 보르헤스. 불멸의 연인, 베아트리체의 사랑에 이끌려 지옥과 연옥을 거쳐서 천국에 이르는 사랑의 숭고한 이념은 <신곡>을 통해서 불멸의 사랑과 영원한 문학으로 구현된다. 죽은 연인 베아트리스를 잊지 못하는 보르헤스는 불가능한 전체와 망각의 유한성을 통해서 새로운 <신곡>을 쓰고자 한다. 그는 연인의 이미지가 들어있는 알렙Aleph을 보게 된다.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하나'인 알렙은 전체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구슬이다. 과연 이런 알렙은 존재하고 유일한 것인가? 보르헤스는 전체를 형상화하려는 문학적 실험과 사랑의 기억을 결합시킨 새로운 문학적 공간을 제안한다.
(보르헤스 : <알렙> , 단테 : <신곡>)

제6강[4월7일] 새로운 오뒷세우스와 조이스의 모험
조이스는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20세기 초 더블린에 살고 있는 오뒷세우스(블룸)와 텔레마코스(스티븐)의 모험과 방황을 현대의 세속적 삶으로 다르게 재현한다. 출렁이는 바다와 같은 그의 언어적 변신들은 혼란과 무의미의 조각들을 새롭고 넉넉하게 담을 예술적 관점의 힘으로 새로운 혼돈-질서를 빚어낸다. 조이스가 초대하는 새로운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고립, 정신적 공허함, 소통의 부재, 자기상실에 빠진 일상 한가운데에서 신성함과 세속적인 세계, 진리와 비진리가 혼재하는 세계를 새로운 언어와 관점으로 총체화하려는 작업이 빚어낸 흥미로운 표정들을 일부분이나마 감상해보자.
(조이스 : <율리시즈>)

제7강[4월14일] "나는 사랑한다. 나는 존재한다" : 셰익스피어 또는 프루스트
사랑의 문학을 대표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과 죽음의 테마로 사랑의 존재론을 제시한다. 사랑의 두 화신은 불가능한 사랑을 사랑의 모험으로, 사랑의 비극을 비극적인 사랑으로 바꾼다. 죽음으로 하나가 되는 사랑을 통해서 또렷하게 선언한다. "나는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사랑과 존재가 하나라고 믿는 이런 태도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사랑을 모든 것에 앞세우고,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바탕에서 다시 세우고, 모든 것을 사랑을 지향점으로 삼아서 자리매김하는 이런 '사랑'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랑은 너와 나, 사랑하는 우리의 '존재 이유'인가?
질투는 사랑의 진리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리'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사랑의 진리는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어떤 경험과 능력이 필요한가? 예를 들어서, 사랑의 진리는 피치 못할 사정에 이끌려 연인이 숨기는 '무엇'을 탐색하도록 강요받는다. 또한 사랑의 진리는 연인의 모든 행위와 말들을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그리고 사랑에서 질투는 어떤 작용을 하는가?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 수 있는가? 아니면 질투는 사랑에 본질적인 것인가? 질투가 사랑의 고갱이라면 질투할 때에만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랑은 어떤 점에서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어떻게 그 시간을 되찾을 수 있는가? (셰익스피어 : <로미오와 줄리엣>,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부, <스완네 집 쪽으로> 2)

제8강[4월21일] 필경사 바틀비는 왜 글쓰기를 멈추었을까? : 비잠재성의 사건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는 "I would prefer not to(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라는 독특한 구절을 되풀이하면서 변호사를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는 긍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으면서 '글쓰기를 멈춘' 존재로서 진리와 선에 바탕을 둔 세계를 의혹에 빠뜨린다. 그의 정체불명의 구절은 거절이나 저항의 선언, 곧 수동적인 저항도 '비 결정의 결정'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긍정과 부정, 결정과 비결정이 만나고 나뉘는 어두운 영역을 드러낸다. (바틀비라는 반 주인공anti-hero이 멜빌의 분신, 글 쓰지 않은 작가의 상징, 인간, 또는 근대인을 대변하는 존재, 새로운 예수 또는 메시아라고 보는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아감벤은 '비 잠재성'의 틀로 바틀비라는 '텅 빈 글쓰기 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잠재성이 '~할 잠재성'이면서 동시에 '~하지 않을 잠재성potenza di non'이라는 틀로 이 특이한 사건을 해석한다.
(멜빌 : <필경사 바틀비>, 아감벤 : <바틀비, 또는 우발성에 관하여>)

강의는 인문학습원 강북강의실(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 아래 약도 참조)에서 열리며 참가비는 22만원입니다. 자세한 문의와 참가신청은 인문학습원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을 이용해주세요. 문학과철학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바로가기

▲강의실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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