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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도로명 주소, 최소 한 세대는 지나야"

전면 시행 40여일 앞…"국민에게 강요해서는 안 돼"

도로명주소 전면 시행이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시민들은 도로명주소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을까? 수년에 걸쳐 수천억 원을 들여 주소 체계를 바꾸고 꾸준히 홍보를 해왔지만 아직은 '글쎄'인 것 같다. 최근 안전행정부 조사 결과 우리집 도로명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은 32.4%에 불과했다. 우편물 주소에 도로명 주소를 표기한 경우도 전체의 16%에 불과했다. 공공기관의 사용을 제하면 일반 시민들의 사용 경험은 더 적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는 (사)인간도시컨센서스와 함께 20일 '서울 영등포구 은행로 30'에 위치한 중소기업회관에서 "길거리에 내몰린 땅주소: 도로명 주소체계의 문제점과 개선과제"라는 제목으로 월례정책포럼을 열었다.

▲ 20일 '서울시 영등포구 은행로 30'에서 열린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 월례포럼. ⓒ프레시안(김하영)


'국회대로'는 어디까지

우선 지도나 인터넷,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의 도움 없이 위의 도로명주소로 포럼이 열리는 중소기업회관을 찾아가 보자. 중소기업회관이 '서울'에 있다는 것, '영등포구'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은? '은행로'를 알아야 하는데 어딘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은행로'는 여의도 KDB산업은행 앞길이다. KDB산업은행이 '은행로 14', 그 옆의 한국정책금융공사가 '은행로 22', 그 옆의 중소기업회관이 '은행로 30'이다. KDB산업은행 쪽이 짝수, 길 건너편 건물들이 홀수 번호를 갖고 있다. '은행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찾아가기 편리하지만 은행로 자체가 어디 있는지 모르면 찾을 길이 없다. 게다가 '은행로'는 여의도에만 있는 게 아니다. 경기도 시흥시, 성남시, 전북 전주시 등에도 '은행로'를 도로명주소가 있다. 그래서 보완책으로 나온 것이 괄호를 쳐서 동을 표시하는 것이다. 중소기업회관은 '서울 영등포구 은행로 30(여의도동)' 이런 식이다. 역사문화적으로 형성된 시민들의 주소(위치) 인식 체계가 '도로'가 아닌, '동' 체계이기 때문에 최근 추가됐다. 성남시의 '은행로'만 '은행동'이라는 동 이름에서 길 이름을 따왔다.

▲ 도로명주소 안내판. ⓒ프레시안(김하영)
'은행로'처럼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길 이름으로도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도로명주소도 있다. 예를 든 은행로의 맞은편 구역의 도로명주소는 '국회대로.' 국회 앞을 지나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KBS 본관 앞길이 '국회대로 62길', 현대캐피탈 뒷길이 '국회대로 66길', 렉싱턴호텔 뒷길이 '국회대로 74길' 등 짝수 순서로 나란히 배치돼 있다. 모두 '국회 앞'이라는 지역적 특징이 반영된 이름이다.

그런데 여의도 샛강을 건너 안양천 앞 경인고속도로 입구 양평동까지 '국회대로' 주소가 설정돼 있다. 심지어 안양천을 건너 신정동 목동로데오거리까지 '국회대로 8길'이라는 주소가 부여돼 있다. 서울 지리에 캄캄한 사람은 '국회대로 8길'이라는 도로명주소를 보고 '목동 로데오거리'를 여의도 국회 근처에서 찾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양천구'라는 구 명칭과 '(신정동)'이라는 괄호 동명을 추가했지만, 사람들은 '국회'라는 위치를 먼저 인식하게 된다.

비판1: "지리 인식 체계 무시"

▲ 네이버 지도서비스에서 찾아본 '국회대로 8길.'
도로명주소가 시민들 사이에서 지리(위치) 인식 체계로 자리 잡지 못하는 이유는 기존의 역사적, 문화적 습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소 부여 방식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한반도는 전통적 산악 지역으로 길이 아니라 면적 개념의 정주성을 강조한 문화를 갖고 있다"며 "전통적 지명을 다 없애고 번호를 부여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방식"이라고 말했다.

조명래 단국대 교수는 "서울의 경우 도로는 '종로통' 밖에 없었다. 길은 주로 남산과 북악산의 물길을 따라 만들어졌을 뿐, 대부분의 길은 집터와 집터를 잇는 수단이었을 뿐"이라며 "도로 이름만 갖고 어디에 사는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조 교수는 "우리는 위치를 찾거나 설명할 때도 길 중심이 아니라, 느티나무에서 얼마만큼, 큰 바위에서 어디쯤으로 설명을 해왔다"며 "새 도로명주소 체계는 역사문화적 인식과도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요즘도 위치를 설명할 때는 아파트 단지나 지하철역 이름 등 도로가 아닌 눈에 띄는 '장소'를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은 마찬가지.

조 교수는 또한 "영국은 도로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됐고 도로명주소를 사용하지만, 도로명이 부여된 도로의 길이가 짧은데 비해 우리나라 도로명주소의 도로는 너무 길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런던의 '킹스트리트'라고 하더라도 길이가 길지 않아 킹스트리트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크리스마스 파티를 함께 하는 등 지리적 공동체성을 갖는다. 사실상 '스트리트'가 우리나라의 '동'처럼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양천구 신정동 주민에게 '국회대로'라는 주소를 부여하면 지리적 정체성을 갖겠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어디에 사느냐?'고 질문을 받으면 '신정동', '목동', '마포', '일산' 등 도로명이 아니라 지역명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하다.

비판2: "역사성 무시, 단절"

지역명을 바꾸게 되면 지역의 역사적 정체성이 단절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로버트 파우져 서울대 교수는 "필라델피아 같은 도시는 벤저민 프랭클린과 같은 땅 소유주의 이름을 따 거리(주소)의 이름을 지었고, 워싱턴DC는 국회의사당이나 백악관과 같은 주요 건물이나 장소 이름을 사용하기도 했다"며 "종로구의 체부동, 누하동, 통인동, 옥인동, 청운동 등의 이름은 조선 시대부터 사용돼 이어져 온 것인데 지명을 바꾸면 역사도 사라지는 것 아닌가"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국어교육과 교수인 파우져 교수는 현재 체부동에 거주하고 있다.

황평우 소장은 "도로명주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꾸 종로구의 동 이름이 복잡하다고 언급하는데, 동 이름의 유래를 알면 도시가 진행된 역사를 알 수 있다"며 "지명을 바꾸면 역사, 지리, 민속, 민담, 문화사 등을 다 바꿔야 하는 것은 물론,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은 모두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종로구는 80개가 넘는 동명으로 '복잡하다'는 비판을 받아, '청운동'과 '효자동'을 '청운효자동'으로 바꾸는 등 행정동을 17개로 줄였으나 도로명주소는 오히려 50개가 넘는다.

황 소장은 또한 "일본 강점기에 왜곡된 동 이름이 문제라면, 양수리를 '두물머리', 신촌을 '새터'와 같이 이름을 바꿔 전통적 지명을 복원해야지 길을 중심으로 사는 곳을 표기하는 것은 전통문화 관점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황 소장은 이어 "국보에 번호를 매기는 나라는 북한과 남한밖에 없다"며 "가장 폭력적인 것이 동 이름 하나 갖고 1동부터 13동 이런 식으로 번호를 매기는 것"이라고 번호 중심의 도로명 주소 체제 역시 비판했다. 최근에는 봉천동, 신림동, 신당동 등 번호식 동이름의 동네들이 주민들의 주도로 새로운 동명을 지었으나, 도로명주소가 시행되면 이러한 노력도 사실상 '헛수고'가 된다.

"스마트폰 시대 길찾기는"

'길 찾기'를 중심에 둔 도로명주소 도입은 시대에 뒤쳐진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차량 네비게이션과 스마트폰 지도 어플리케이션 보급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도로명주소의 '길 찾기' 기능이 기대만큼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다.

최인욱 좋은예산센터 사무국장은 "IT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네이버에 찍어' 길을 찾는 일이 다반사"라며 "새로운 기술 환경에서는 도로명이든 지번주소든 어떤 것을 사용해도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유종일 KDI 교수는 "나이가 많은 세대에게는 여전히 'OO 정류장에 내려서 뒷편의 △△ 부동산에서 좌회전해 몇 미터 올라오면 파란 대문집이다'는 식의 장소 위주의 설명이 사용되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주소를 불러주고 '스마트폰에 찍어서 찾아와'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이어 "집의 위치를 설명하는 가장 많은 경우인 택배 및 우편물 주문/수령, 재가 서비스를 신청 시에는 이미 그들이 길 찾기 프로여서 지번이든 도로명이든 주소만 알려주면 된다"며 "주소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지만 길찾기 기능이 절대적인 것인지는 의문"이라고 말했다.

파우져 교수는 "외국인이 길을 찾기 쉽게 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지만, 내가 교토에 살 때 주소가 온통 한자여서 주소를 찾기 어려웠다"며 "'손님' 대접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그 곳에 사는 외국인이 적응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반론: "과학적 주소 체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로명주소 체계가 기존 지번 체계보다 우월하다는 반론도 제기됐다. 위금숙 위기관리연구소장은 "도로명주소에는 과학적 원리가 담겨져 있어, 주소 자체가 원하는 장소를 찾아가는 네비게이션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위 소장은 "예를 들어 종로구 체부동 '118-10번지'라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종로구 자하문로 5가길 21-3'이라는 도로명주소를 알면, 일단 자하문로 5가길을 찾은 뒤 입구부터 오름차순으로 번호가 지정돼 있고 왼쪽은 홀수, 오른쪽은 짝수이기 때문에 번호를 따라 길을 거슬러 올라가면 21-3번 건물을 쉽게 찾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위 소장은 '역사성 단절'에 대해서는 "오히려 도로명 주소를 부여하기 위해 옛지명을 찾아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스마트폰 네비게이션의 보급'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에게 정보화 기기를 지급한다면 상관없겠지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도로명 주소가 필요하다"고 반박했다.

위 소장은 "국민들이 사용하지 않아서 도로명 주소를 잘 모르는 것이지, 불편해서 모르는 것이 아니다"라며 "지금까지 유예 기간을 두다가 본격적인 시행을 앞두고 있는데, 일단 시행을 하면서 일부 불편한 점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대안은: "국민에게 강요해선 안 돼. 한 세대는 지나야"

반면 대부분의 포럼 참가자들은 현재 상태에서 무조건적으로 도로명 주소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나타냈다.

파우져 교수는 유럽의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및 일본의 교토 등의 예를 들며 기존 지번 주소와 새 도로명 주소를 병기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파우저 교수는 "선진국의 제도라고 해서 우리 것을 버리고 도입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서울은 뉴욕이 아니다. 자기의 문화적 기둥을 지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파우져 교수는 "미국도 1975년 미터법을 제정해 의회도 통과하고 포드 대통령이 승인도 했으나 결국 국민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자리 잡지 못 했다"고 덧붙였다.

▲ 중부유럽 지방의 토지명, 도로명 주소 병행 표기 방식. ⓒ로버트 파우져


지번 주소가 처음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지지부진하던 논의는 1995년 청와대 국가경쟁력강화기획단의 정책추진과제로 채택되면서 다시 본격 논의가 시작됐고, 1996년 '도로명 주소'가 처음 등장했다. 2006년 '도로명 주소 등 표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된 이후 투입된 예산만 4000억 원.

최인욱 사무국장은 "안전행정부의 성과 목표를 보면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 이후에도 사용률을 전국민의 45%로 설정해 놨다"며 "정부에서도 이미 전 국민의 절반도 안 쓸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로명 주소를 사용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줄 것처럼 강압적으로 밀어 붙여선 안 된다"고 했다.

조명래 교수는 "전문가들 머리 속에서 나온 안을 고집할 게 아니라, 시민들의 눈높이와 생활에 맞는 체계를 다시 고민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조 교수는 "일단 지역별로 주민검토위원회를 만들어 지역민 중심의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이렇게 해서 새로운 주소 체계를 마련해도 한 세대는 지나야 정착되지 않겠냐"고 상향식 제도 개선을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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