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남재준 국정원장이 주재한 국가정보원 간부 송년회가 시중의 화제가 되고 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서로 술이나 한 잔 하는 여느 망년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것으로 전해진다. 독립군가 합창으로 시작해서 애국가 제창으로 끝난 것도 그렇거니와, 내용에서도 애국심을 다짐하는 열정적인 결의대회와 같아서 주목받았다고 했다.
특히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 마무리보다, 시작하면서부터 중간에 여러 차례 불렀다는 독립군가에 참석자들은 감동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 독립군가는 남재준 원장의 애창곡이라고 했다. 일제 강점기에 '빼앗긴 나라를 목숨 바쳐서 라도 살려내자' 는 비장한 가사와 곡이 요 근래 어려워진 나라 사정과 비교되면서 참석자들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인생에 목숨은 초로(草露)와 같고/ 이씨조선 오백년 양양하도다/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기꺼이 죽으리이다〉로 알려진 가사였다. 중국 당대(唐代)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양양가(襄陽歌)를 조선시대에 개사한 것으로, 훗날 곡을 붙여 일제 강점(强占) 전에는 대한제국의 군가로, 강점 후에는 독립군가로 불렀다고 했다.
일제의 입김 때문이었겠지만 '조선 오백년'이 '이씨조선 오백년'으로 잘못된 가사가 굳어진 것은 물론 아쉬움이지만, 1940~1950년대, 초등학생이던 필자도 어른들 사이에서 불리우던 이 군가를 '그저 좋아서' 흥얼거리곤 했다. 가사 마지막 부분 '기꺼이 죽으리이다'는 '죽겠노라'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따라서 '이이 몸이 주욱어서 나라가 산다면 아아 이슬같이 주욱겠노라'하는 대목은 어린 마음에도 가사와 곡의 넘치는 비장함 때문에 가슴이 뜨거워지던 기억이 있다.
이 노래는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던 여러 개의 독립군가 가운데 하나이지만, 지금 소개한 마지막 부분 가사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던 것 같다. 그런 노래의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송년회에서 남재준 국정원장은 "국가보안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조국통일을 위한 구체적 플랜도 논의했다"며 "조국을 2015년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통일시키기 위해 다 같이 죽자"는 비장한 각오를 거침없이 쏟아냈고, 남 원장과 참석자들은 독립군가를 계속 불러댔다고 했다.
4성 장군으로서의 다소 과도하다할 기백을 모를 바 아니지만 한 나라의 정보책임자란 막중한 자리에 있는 국가의 핵심인사가 전후좌우 사정을 살피지도 않고 아무 자리에서나 하고 싶은 말을 마구 '방출'해 댄 것을 놓고는 '말'들도 있다. 남재준 원장은 취임하면서도 애창곡인 독립군가를 연상했던지 "나는 전사(戰士)가 될 각오가 되어있다. 여러분도 전사가 될 각오를 가져달라"고 국정원 직원들에게 당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 같은 '독립군가 결기'를 과연 애국심의 발로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남재준 원장의 애창곡인 독립군가가 전하는 메시지는 한마디로 '나라가 산다면 목숨 내 놓겠다'는 것이다. 나라 사랑이다. 바로 그런 애국심 철철 넘치는 노래를 다른 사람도 아닌 '현재의 국정원장인 남재준 씨'가 그토록 좋아하고, 온 몸으로 그 정신 실천하고자 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대목이 '의외'라고 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남재준 씨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다 알다시피 지금 이 나라는 바로 국가정보원이 주도한 대선 부정사건으로, 박근혜 정권 출범이후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그 중심에 남재준 원장이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남재준 씨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국정원이 전임 원장 때 저질렀던 선거부정을 투명하게 밝혀내 가래를 타고, 재발방지 대책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며 '나라를 살리는' 역할을 해 낼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기대를 사정없이 저버렸다. 부임한 첫 날부터 그랬다. 대선 부정사건을 덮고 축소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다. 그가 좋아하는 노랫말처럼 '나라가 사는' 조치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대선 부정사건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국가기밀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NLL논쟁을 유발했다. 검찰에 연행된 국정원 직원에게 진실을 진술하지 말라고 따로 지시하기까지 했다.
나라가 살 수 없게 한 부정행위였다. 나라를 살리기 보다는 오히려 나라의 숨통을 조인 셈이었다. 결국 남재준 씨가 '죽음을 무릅쓰고라도 살리고자 한 것'은 적어도 번뜻한 모습의 나라 대한민국은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애국심과도 거리가 너무 멀었다. 그런데도 '이른바 언론'들은 그날 밤 송년 모임이 진정어린 애국심을 다지는 결의대회와 같은 비장함이 넘친 자리였다고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남재준 씨가 살리고자 한 나라가 어떤 모습의 나라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자기 나름으로는, 특정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특정인이나 특정정권을 곧 '국가'라고 착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남재준 애국심'의 현주소는 아마도 거기쯤이 아니었나 싶다. 공(公)과 사(私)가 다르듯이 나라와 개인은 다르다. '국가'와 '특정인'은 달라도 한참 다르다.
입으로는 '나라를 살린다'면서 속셈으로는 나라 살리는 것을 외면한 채 '특정인의 특정 이익을 살리고 지켜주기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다면 그건 착각을 넘는 속임수일 뿐이다. 단순한 아첨일 수도 있다. 결단코 애국심일 수는 없다. 그런 속임수가 진실인 것처럼 인정되고 예찬까지 받는 나라는 건강한 국가가 아니다. 남 원장이 단순히 가락이나 가사가 좋아서 개인적으로 독립군가를 좋아하는 것도, 나라를 사랑하는 것으로 오해돼서는 안 된다. 애국심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국정원의 대선 부정과 관련한 남재준 원장의 언행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권의 일부일지라도 혹시, 민주주의나 선거는 대수롭지도 않고, 멋대로 요리할 수도 있다는 오해들이 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을 느낀다. 옳고 그름에 대한 오해들이 있지 않나하는 의구심도 있다. 야권도 아닌 자기들 내부에서 쉽게 친위 쿠데타 이야기가 나오고, 그동안 한없는 '근혜 사랑'을 표시하던 '이른바 보수인사'까지 재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새로 뽑자는 소리를 스스럼없이 토해 내는 게 작금의 풍토다. 혼란스럽다.
지난해 대선 때 새누리당 부산 선대본부 조직에서 일한 것으로 알려진 한 친박 대학교수가 쿠데타를 촉구하고 나섰다. "50년 전의 군사 쿠데타가 필요한 상황이 재연되고 있다"면서 "조국 근대화의 위업을 달성했던 자랑스러운 국군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고 했다. 종북 세력들로부터 조국의 안위를 지켜내기 위해 박근혜 대통령을 귀찮게 하는 세력을 쓸어내는 친위 쿠데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을 후보 이전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해 온 한 '유명한' '이른바 보수논객'은 재선거로 대통령을 갈아치우자고 목청을 높였다. 도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쿠데타가 일어나면 헌정 중단과 함께 민주주의 소멸상태가 온다. 제대로 된 선거는 자취를 감출 것이고, ('이른바 언론'들이 판치고 있는 언론 풍토야 지금과 별 차이 없겠지만) 바로 유신 같은 독재체제가 들어서면서 긴급조치도 발동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도 아버지처럼 한 18년쯤 권좌에 앉아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소리가 자기들 진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오는 게 희한할 따름이다. 이들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키거나 재선거를 하자는 명분을 들여다본다. 친박 교수는 DJ·참여정부 10년 동안 종북 문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국가 정체성이 붕괴되었다고 했다. 요컨대 그 종북 세력이 박근혜 대통령을 방해하고 있어 쿠데타로 밀어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쯤 된다.
'유명한' '이른바 보수논객'의 재선거 주장 이유는 그동안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고통 받고 전과자가 되기까지 한 지지자(자신의 이야기인 듯하다)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은 대통령이 '괘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선거를 하고 대통령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의 이유 모두 맨 정신으로 들어줘야 할 정도는 못되는 듯하다.
그러나 나라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여권의 열성 지지자들 눈높이와 애정의 깊이를 어림할 수 있을 듯싶어 씁쓸하기 그지없다. 비록 일부에서 일망정 공통점이 배어 나오는 듯해서 그렇다. 국가정보원이 대선 부정사건을 저지르고 다루는 데서도 보여주듯이, 나라나 민주주의나 선거나 국민 여론은 모두 자기들 멋대로 주무르고 조작해낼 수도 있다고 보는 시각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정신 바짝 차리고 분명히 하면서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그동안 그토록 많은 목숨과 피와 눈물을 흘리며 지켜온 것 이상으로 소중하고 엄중한 가치다. 결코 가볍게 보고 다룰 일이 아니다. 물론 선거나 언론자유도 옷깃을 여미고 무릎 꿇고 고개 숙여야 할 만큼 엄숙하게 떠받들어져야 한다.
입에는 사이비 애국심 타령을 매달고 다니면서 나라나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무서워하지도 않는 행태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국민 우습게 안다는 이야기다. 문제는 국민들이 속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바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속임 당해서는 안 된다. 두 눈을 감고 '이 몸이 죽어서 나라가 산다면'하는 절실하고 비장한 심정을 한번쯤 어림해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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