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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선생에 대한 기사 내용을 바로 잡습니다(11월 20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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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선생에 대한 기사 내용을 바로 잡습니다(11월 20일자 기사)

지난 11월 20일자 [김경민의 도시이야기]<18>의 내용 가운데 손병희 선생께서 말년에 친일행위를 하신 것으로 기술된 문장이 있었습니다만, 이는 필자의 사실(史實) 오인에서 비롯된 잘못임이 판명되어 아래와 같이 바로 잡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님은 민족대표 33인의 지도자로서 1919년에 삼일독립선언을 이끄신 후에 자진해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셨고,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1920년 11월 28일에 뇌출혈로 쓰러지셨다가 옥중에서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1921년 10월 30일에 병보석으로 풀려나셨습니다만 1922년 5월 19일에 순국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손병희 선생께서 말년에 친일행위를 하셨다는 건 사실(事實)과 다른 친일 식민사학자 및 위정자들의 왜곡에 의한 조작에 불과합니다.

혹자는 동학이 지하에서 활동하던 시기이자 1904년 러일전쟁으로부터 1905년의 을사늑약에 이르는 격동기에 국내에서 진보회를 이끌던 동학교도의 대장 중 하나인 이용구의 친일ㆍ배교 행위가 당시 동학의 교주이셨던 손병희 선생에게까지 먹물을 튀게 만들었다고 오해를 합니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이상헌이란 가명으로 활동하셨던 일본에서 귀국하시자마자 을사늑약의 울분을 삼키면서 동학을 천도교로 대고천하 하셨고, 친일파로 변질한 이용구를 따라 천도교 내부에 들어와 있던 일진회 인물들을 완전히 쫒아내셨을 뿐만 아니라, 우이동에 봉황각을 세워 10년 동안 483명의 인재를 육성하셨습니다. 이들이 1919년 3월 1일을 전후하여 손병희선생님의 일관된 지시에 의해 천도교 교구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조직적으로 삼일만세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삼일독립선언이 민주적인 대한민국 건립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헌법전문에 나와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史實)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사실(事實)에 기초한 올바른 역사인식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병희 선생께서 말년에 친일행위를 하셨다는 말은 위정자 및 친일파들에 의한 왜곡으로 조작된 허구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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