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찍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명박보다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경제 민주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고, "국민 모두가 골고루 잘 살기 위해 해결돼야 할 여러 문제 중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비정규직 문제"라고 강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1년 전인 12월 26일, 박근혜 당선인은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앞으로 경영의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해서 구조 조정이라든가 정리 해고부터 시작할 게 아니라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지혜와 고통 분담에 나서주실 것을 부탁드린다"고 말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대기업이 중소기업의 영역이나 골목 상권까지 파고들어 소상공인들의 삶의 터전을 침범하는 일도 자제되었으면 한다"며 "서민들이 하고 있는 업종까지 재벌 2·3세들이 뛰어들거나 땅이나 부동산을 과도하게 사들이는 것은 기업 본연의 역할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이 있었고 국가 지원도 많았기 때문에 국민 기업의 성격도 크다며 "대기업도 좀 변화해주시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대통령 당선인의 말에 대기업들은 납작 엎드렸고, 언론은 '중소기업 대통령'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진보적인 언론들도 적지 않은 기대를 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
박근혜, 1년 전 정리해고 자제-대기업 변화 촉구
국가정보원이 주축이 되어 군대와 행정부를 동원해 부정 선거를 했다며 사퇴 요구를 받고 있는 박근혜 씨는 1년 만에 다시 전경련을 찾았습니다. 신축회관 준공식에 참석한 그는 "세계 곳곳에서 우리 기업인들을 만나고, 한국 기업을 소개하는 간판과 첨단 국산 제품을 볼 때마다 자부심과 함께 여러분이 자랑스러웠다"고 칭찬했습니다.
이어 "정부도 여러분과 함께 우리 기업들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하고 기업 가치와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힘껏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의 축사 어느 곳에도 탐욕의 재벌이 벌여온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골목 상권 침해에 대한 우려나 대기업의 책임에 대한 요구는 없었습니다.
<서울경제>는 "간담회 시간도 당초 계획한 50분에서 1시간 20분으로 늘었고 박 대통령이 간담회 도중 '(기업인들의 노력에 대해) 감사합니다. 수고하십니다'라는 말을 여러 번 했을 정도로 분위기가 좋았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이라며 "경제 민주화에 대한 언급도 찾아볼 수 없었다"고 보도했습니다.
1년 전 대기업도 변해야 한다며 비판했던 박근혜 씨는 재벌의 손을 잡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기업이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힘껏 뒷받침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재벌 총수들은 '알바 일자리'라고 놀림 받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를 비롯해 신규 일자리를 더욱 확대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박근혜 당선 1년 후, "자랑스러운 대기업, 힘껏 뒷받침"
한 재벌 관계자는 "대통령이 약속한 투자 활성화 의지가 입법 등에 적극 반영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생산성을 높이고 일자리를 확대하고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입법은 무엇일까요?
재벌들이 간절히 원하는 입법은 지난 13일 정부가 발표한 '제4차 투자활성화 대책'에 있습니다. 정부는 내년에 근로자파견법을 개정해 55세 이상 고령자의 파견 가능 업종을 현행 32개 업종에서 전체 업종으로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정은보 기획재정부 차관보는 "고령자의 파견을 일부 업종으로 제한하고 있는 현행 규제를 완화해 고령자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노후 안정을 도모하는 동시에 고용 시장에서 청년층과 마찰을 빚던 부분을 다소 해소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대책"이라고 설명했습니다.
55세 이상에 대해 파견 제한을 푸는 것이 고령자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노후안정을 도모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정규직 중심의 일자리 체계를 무너뜨리는 저임금과 고용 불안에 시달려야 하는 파견 노동자를 대규모로 양산하는 것일까요?
ⓒ(주)방송차량서비스 홈페이지 갈무리 |
제4차 투자활성화 대책을 주목하는 이유
이향복 씨는 김대중 정권에서 근로자파견법이 만들어진 후 2003년 '휴먼링크'라는 파견 업체를 통해 한국방송공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는 보도 제작차를 운전하며 주로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같은 방송 촬영을 위한 운전을 했습니다. 하루에 일이 끝날 때도 있지만 방송의 특성상 지방에 내려가 일주일씩 집에 들어오지 못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러데 방송국에서 5년, 10년씩 일해 왔던 선배들이 파견법 때문에 2년이 되면 다른 방송국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2년 이상 근무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규정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다른 방송국에서 일하던 노동자를 쓰면 길을 새로 알려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방송사 파견 노동자들이 2년마다 팔려나가는 인생을 거부하고 노동조합을 만들어 싸웠습니다. 노동자들은 한국방송공사의 자회사인 KBS비지니스에서 100% 출자한 (주)방송차량서비스라는 회사로 고용이 됐고, KBS의 2차 하청회사지만 2년마다 쫓겨나는 일은 피하게 됐습니다. 매년 노사교섭으로 임금도 조금 올랐습니다.(☞관련 기사 보기 : "난 KBS 운전사, 월급은 10년째 제자리")
55세 이상 고령자 파견업종 전면 확대
현재 2차 하청 회사에는 315명이 일하고 있고, 언론노조 방송사비정규지부 KBS분회에 180명의 조합원이 가입해 있습니다. 회사는 부족한 운전기사를 늘리지 않고 매일 2~30명의 대리 기사와 렌트카 기사를 대기시켜 일당제로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말이 되면서 회사로부터 이상한 얘기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KBS의 '스마트 추진단'에서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정년 퇴직으로 인한 자연 감소 인원을 채용하지 않고 다시 파견업체로부터 파견을 받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지방 방송국을 중심으로 전체 인원을 200명 이상 줄이겠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여기에 정부가 파견 허용 업종을 전 산업으로 확대하고 기업들이 너도나도 파견직을 사용하게 되면 KBS도 덩달아 파견을 확대할 게 뻔합니다. 방송사비정규직노조가 만들어진 2000년부터 14년 동안 어렵게 싸워서 만들어놓은 최소한의 임금과 근로 조건도 순식간에 날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14년 동안 싸워온 성과가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1998년 김대중 정부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 고용 유연화'가 불가피하다며 민주노총이 포함된 노사정 합의를 통해 근로기준법의 정리해고 조항과 '파견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전교조 합법화와 복수노조 허용 등과 맞바꾼 '노사정 대타협'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집행부는 총사퇴했지만 법안은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이 법은 근로기준법 제 9조 "누구든지 법률에 따르지 아니하고는 영리로 다른 사람의 취업에 개입하거나 중간인으로서 이익을 취득하지 못한다"는 '중간착취의 배제'에 커다란 구멍을 냈습니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요구로 어쩔 수 없었고, 파견허용 업종을 26개로 제한했으며,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전환하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파견 노동자를 보호하는 조항이라고 강변했습니다.
하지만 1998년 7월 1일 파견법이 시행되고 2년이 지나 정규직으로 전환되기 직전인 2000년 5월 30일에 KBS 227명, MBC가 160명, SBS가 432명, YTN 90명 등 방송국에서만 900여명의 파견노동자가 해고됐습니다. 방송사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이 없었으면 파견법으로 해고된 노동자의 숫자는 파악조차 되지 않았을 겁니다.
ⓒ박점규 |
전경련과 사용자들은 1998년 파견법 제정 이후부터 파견 허용 업무를 법률에 명시하는 '포지티브 방식'에서 파견 금지 업무를 명시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변경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해왔습니다. 즉, 소수의 산업과 업종만 법률에 나열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2006년 12월 1일 노무현 정권은 비정규직법을 날치기 통과시키면서 파견법을 개악해 파견허용업종을 32개로 늘렸습니다.
무엇보다 '사용사업주가 2년을 초과하여 계속적으로 파견 근로자를 사용하는 경우에는 2년의 기간이 만료된 날의 다음날부터 파견 근로자를 고용한 것으로 본다'는 고용의제 조항이 '해당 파견 근로자를 직접 고용하여야 한다'는 고용의무로 바뀌었습니다.
고용의무 조항이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하는지, 계약직으로 고용해도 되는지에 대해 아직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원자력연구원 등 공공기관에서조차 '직접 고용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간제 계약직 노동자로 직접 고용해도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 파견 허용 대상 32개로 확대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4월 노동부는 파견 대상 업무를 대폭 확대하는 것을 추진했습니다. 노동부는 '파견대상 업무 및 파견근로자 활용실태조사' 보고서를 만들어 "최대 17개 업무에서 추가로 파견을 허용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노동부는 △홍보 도우미 및 판촉원 △제조 관련 단순 종사원 △택시 운전원 △전기전자 부품 및 제품 조립원 △건설 및 광업 단순 종사원 △자동차 부품 조립원 △생산 및 품질관리 사무원 △건축가 및 건축공학 기술자 △제품 및 광고 영업원 △경리사무원 등 17개 업종에 파견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행법상 금지된 제조업과 건설업, 운수업 등 전 산업을 망라한 17개 파견 적합업종 선정에 대해 노동자들과 야당이 강력히 반발했고, 정부는 파견법 개악을 강행하지 못했습니다.
대법원의 판결을 반영해 지난해 불법 파견에 대해서는 즉시 직접 고용해야한다는 조항을 개정한 것을 빼면 김대중 정권에서부터 이명박 정권까지 15년 동안 정부는 파견 허용 대상을 확대하고, 정규직 전환 규정을 약화시켜 파견 노동자를 양산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해왔던 것입니다.
15년 동안 계속되어 온 파견법 개악 시도
파견 대상을 확대하려는 계획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새누리당이 '사내하도급법'이라는 '필살기'를 내놓았습니다. 100석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민생 공약을 전면에 내세워 제 1당이 된 새누리당은 지난해 6월, 19대 국회 민생법안 1호로 '사내하도급법'안을 제출하며 '비정규직 차별해소 법안'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인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사내하도급이라는 이름으로 사내하청 제도를 합법화시켜 불법 파견을 은폐하는 법이라고 비판했습니다. 불법파견 사내하청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을 규정한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왜곡하고 무시하는 법이라고 강력 반발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이 법을 불법 파견을 은폐하는 '정몽구 보호법'이라고 불렀습니다. 인권에서 멀어져갔다는 국가인권위원회조차 이 법안이 불법적인 노동을 양산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내하도급법안을 강행 처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노동부가 55세 이상 파견 허용대상 전면 확대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사내하도급법 지연되자 파견법 개정으로
고용노동부가 지난 6월 발표한 '2012 고용형태별근로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정규직 노동자의 월 급여는 252만 원이고, 파견·용역 노동자는 136만 원이었습니다. 파견 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54.6%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단체 협약이나 취업 규칙에 명시된 성과금이나 학자금 등을 포함하면 정규직 임금 총액의 40% 수준입니다. 2년이 지나면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쫓겨나야 하니 노조는 꿈도 못 꿉니다.
정부는 '제조업 직접생산업무'와 '절대 파견금지 업무'는 계속 파견허용 업종에서 제외한다고 하지만 믿을 수가 없습니다. 2010년 이명박이 제조관련 단순종사원, 자동차 부품 조립원을 파견허용 업종으로 추진했기 때문입니다.
설령 제조업 직접생산업무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비스, 일반사무직, 생산관리, 품질관리 등 고용 규모가 크고 상시·지속적인 업무였던 수많은 일자리가 파견으로 전환됩니다.
지금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에서는 한 해에만 1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정년 퇴직을 하고 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정년 퇴직이 시작되고 있고, 구조조정과 정리 해고로 조기에 은퇴한 노동자들이 쏟아져 나와 저임금의 나쁜 일자리인 파견노동자로 일하게 됩니다.
기술과 경험이 풍부한 55세 이상 노동자들은 저임금 파견 노동자로, 젊은 청년노동자는 '시간선택제 일자리'라는 저임금 알바 노동자로 회사에 들어오게 됩니다. 회사는 3~40대의 고임금 노동자를 사용할 이유가 없어지게 됩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심각한 고용불안을 겪게 되고, 임금 인상과 근로 조건 개선을 억제하게 합니다.
바로 이것이 박근혜 씨와 재벌 총수들이 원하는 '생산성을 높이고 일자리를 확대하고 투자를 활성화할 수 있는 입법'입니다.
정규직 생태계 파괴할 파견 허용 대상 확대
방송사 비정규직 이향복 씨는 올해 39일 동안 파업을 했습니다. 만약 정부가 파견 대상을 전면 허용하고, 방송사에서 다시 파견제로 일하게 한다면 목숨을 걸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기획재정부는 "고령자의 실업 문제를 해결하고 노후 안정을 도모"한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는 "재계에서는 전체 노동자에 대해 파견 제한을 일괄적으로 풀어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 노동계 반발 등 현실적인 어려움이 크기 때문에 일단 수요가 많은 고령자의 파견 제한을 해제하는 것"이라고 시인합니다.
파견 전면 허용에 대한 저항이 크니까 55세 이상 허용이라는 꼼수를 들고 나온 것은 대운하에 대한 반발이 크니까 4대강 사업을 추진하고, 철도 민영화에 대한 반대가 높으니까 자회사를 설립하는 것과 판박이입니다.
대자연의 생태계를 난도질한 4대강 사업에 이어 공공철도의 생태계를 무너뜨리는 철도 민영화와 정규직 일자리의 생태계를 파괴할 파견 대상 확대가 목전에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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