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이가 남긴 유서를 몇 번이고 되뇌어 읽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고파 못 살았고 다들 너무 힘들어서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어요"라는 그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고, "부디 도움이 되기" 위해 전태일 열사의 길을 따라간 종범이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동료들과 함께 휴가를 내고 빈소를 지키던 김배성 씨는 종범이가 떠난 지 일주일만인 지난 6일 별이 엄마, 종범이 작은형과 함께 서울 서초동 삼성 본관에서 수많은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큰 용기를 낸 별이 엄마 옆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종범이의 이야기를 하던 그의 눈가는 금세 촉촉이 젖어들었습니다. 흩날리던 빗방울에 슬픔이 더욱 북받쳤습니다.
종범이가 떠난 후 열흘 만인 11월 9~10일, 1000여 명의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삼성 본관에 모였습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온몸이 젖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서글펐던 건 거대한 삼성의 본사 건물을 수천 명의 경찰들이 꽁꽁 에워싸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게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마치 삼성 이건희 왕국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최종범을 보내고 혼이 빠진 사람처럼 보낸 열흘
김배성 씨는 삼성전자 천안서비스센터에서 2008년부터 6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 두 아들을 키우는 그의 살림살이는 정말 눈물겹습니다. 성수기인 7~9월 그의 통장에는 월 300만 원가량 들어오지만 수리에 필요한 자재, 차량 연료·유지비, 식대, 휴대전화 사용료 같은 모든 비용을 빼면 실수입은 200만 원 남짓입니다. 성수기가 지나면 실수입이 100~150만 원으로 떨어집니다.
그나마 다른 지역에 비하면 천안은 나은 편입니다. 천안은 동서남북이 전국에서 가장 짧은 지역이기 때문에 콜을 받아 이동하는 시간이 짧습니다. 또 삼성전자 탕정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들이 주로 천안에 살고 있고 인구가 많아 수리 요청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산서비스센터에 비해 천안 기사들의 수입은 20% 정도 많습니다.
입에 거미줄을 치지 않으려면 휴일도, 명절도 없이 일해야 합니다. 김배성 씨는 입사해서 3년 동안 월차 한 번 쓰지 못하고 근무를 했습니다. 평점을 잘 받아야 하는 을의 입장에서 수리비를 깎아달라는 고객들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수리비를 입금하지 않으면 고스란히 기사들이 물어내야 합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주말과 휴일, 명절도 없이 일해도 생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성수기에 저축해놓은 돈이 떨어지면 카드를 돌려막고 빚으로 살아갑니다. 종범이는 작은 형에게 "형,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데 왜 살기가 점점 힘들어지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6~70년대 농민들에게 가장 힘들었던 보릿고개는 5, 6월 두 달 뿐이었지만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춘궁기는 거의 아홉 달에 달합니다. '건당 수수료'라는 가장 악질적인 임금제도 때문에 배고파서 못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 삼성전자서비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고(故) 최종범 씨의 유족이 6일 서울 서초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삼성이 노조 탄압을 멈추고 진심으로 사과할 때까지 장례를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밝혔다. 마이크를 잡고 있는 사람이 최종범 씨의 작은형이고, 그 오른쪽이 부인이다. 최 씨의 부인은 이날 회견이 진행되는 내내 오열했다. ⓒ연합뉴스 |
가장 악질적인 임금제도 '건당 수수료'
표적 감사도 종범이와 동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기사들이 방문 출장을 나가 에어컨이나 냉장고를 수리하다 보면 회로의 전선이 끊어진 경우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연결하면 되는 일은 출장비 1만 원만 받고 고쳐주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감사를 하면 배선비 2만5000원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저공수'라고 적발되어 징계를 받게 됩니다.
심지어 데이터를 잘못 입력해도 징계 대상이 됩니다. 삼성과 바지사장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노조에 열성적인 조합원들을 상대로 '표적 감사'가 시작되고, 일감 빼가기로 생계를 압박하자, 인천의 한 서비스센터는 조합원 전원이 노조를 탈퇴했습니다. 전국적으로 1600명이던 노조 조합원이 1300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김배성 씨가 4년 동안 지켜본 종범이는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근무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근로기준법 교육을 받고 노조가 생기면서 직원들이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고, 건당 수수료와 표적 감사 때문에 힘들어하는 동료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옆에서 보는 것도 힘들었던 종범이가 선택한 것은 43년 전 전태일 열사가 여공들을 생각하며 했던 결단이었습니다.
건당 수수료와 표적 감사
종범이가 그의 아내와 연애하던 천년나무 아래서 목숨을 끊은 다음 날인 11월 1일은 삼성전자 44주년 창립기념일이었습니다. 지난 44년 동안 삼성전자의 임직원 수는 20명에서 20만 명으로, 연 매출액은 3700만 원에서 200조 원으로 늘었습니다. 지난해엔 순이익만 29조 원이었고, 올해는 34조 원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은 올해 주식배당금만으로 699억7000여만 원을, 부인 홍라희 씨는 151억6300여만 원을, 아들 이재용 부회장은 117억6500여만 원을 챙겨가게 됩니다. 이건희 일가의 삼성전자 배당금은 총 968억9900여만 원으로 1000억 원에 육박하게 됩니다.
미국 경제전문지 블룸버그가 집계하는 '세계 100대 억만장자 순위'에 이건희 회장은 11월 4일 기준 12조 4000억 원으로 97위를 차지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지금 전국의 서비스센터에서 창립 44주년 이벤트를 열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이건희 일가를 위한 축제 현장에서 고 최종범 열사의 분향소를 세우고, 그의 넋을 기리고 있습니다.
올해 삼성전자 이건희 일가 주식배당금 1000억
김배성 씨와 동료들은 노조를 만들면서 세상에 눈을 떴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삼성의 또 하나의 가족'이 아니라 삼성에서 버림받은 가족이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기사들의 고통스러운 노동과 가난의 굴레가 삼성의 위장 도급과 불법 파견, 악질적인 건당 수수료 제도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10조1600억 원이었고, 올해 32조에 이르는 순이익을 낼 예정이지만, "서비스는 역시 삼성입니다"라는 명함을 내밀고 삼성전자 제품을 수리하는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월급으로 내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삼성은 삼성 옷을 입히고, 삼성의 경영 이념과 기술을 교육하고, 삼성의 지시에 따라 일을 시켰지만 삼성의 노동자가 아니라 하청 노동자로 부려 먹었습니다. 분노한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자, 노조와해 문건에 나온 그대로 노조를 와해 고사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종범이를 죽음으로 벼랑으로 내몬 주범은 바로 삼성입니다.
공범은 박근혜와 고용노동부입니다. 노동자들이 어렵게 모은 위장 도급과 불법 파견의 명백한 자료들이 공개되고 특별근로감독을 요구하자 고용노동부는 지난 9월 16일 근로감독 결과 불법파견이 아니라며 삼성에 면죄부를 줬습니다.
고용노동부는 "협력업체 근로자들이 원청이 제공한 전산시스템과 업무매뉴얼에 따라 업무를 수행하고, 원청에서 협력업체 근로자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 인센티브를 지급하고 있으며, 원청에서 실적독려 등을 위해 일부 협력업체 근로자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발송하는 등 논란의 여지는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불법 파견이 아니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습니다.
비정규직 정규직화 공약을 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근혜 씨는 삼성이 무상으로 사무실과 기자재를 제공하고, 고객의 수리비용이 원청 계좌에 입금되고, 삼성서비스 노동자의 취업, 기술훈련, 수리, 출장 등 모든 업무에 대해 삼성전자서비스가 지휘명령을 하고 전산시스템과 업무 매뉴얼대로 일을 시키고, 노동의 결과까지 삼성이 평가하는데 하청업체가 독립성이 있고, 원청의 지휘감독을 받지 않는다며 삼성의 불법을 비호했습니다.
▲ 10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앞에서 열린 고 최종범 열사 추모 결의 대회에서 참가자들이 '또 하나의 가족 삼성' 깃발을 불태우고 있다. ⓒ프레시안(최하얀) |
최종범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범과 공범
김배성 씨는 삼성이 천안센터 이제근 하청 사장의 편지를 언론사에 뿌린 것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종범이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욕설을 퍼부은 녹취 파일을 사장이 다칠 것을 염려해 공개하지 않았는데, 종범이의 죽음을 능멸하는 편지를, 그것도 허위사실을 언론에 유포한 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습니다.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쓰는 천안센터 바지사장을 바꾼다고 이 지긋지긋한 고통스러운 노동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몽둥이 폭력 테러가 벌어진 영등포센터 바지사장을 바꾼다고 이 절망스런 가난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삼성이 두려워하는 것은 제2, 제3의 최종범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성은 표적 감사를 중단하고 일부 바지사장을 날리고 건당 수수료 제도를 일부 보완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삼성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유족을 회유하려고 할 것입니다. 장례식장의 인적이 뜸해지고 언론의 관심이 멀어질 때쯤 삼성의 작업은 시작될 것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번민과 고민이 이어질 것입니다.
병환 중이신 종범이의 어머니는 아직도 이 사실을 모릅니다. 어머니는 종범이가 삼성전자서비스에 다닌다고 너무나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삼성이 교섭에 나와 유족 앞에 사과하고, 종범이의 영전에 삼성의 사원증을 바칠 수 있다면 종범이는 편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장례식장 인적이 뜸해지고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질 때
삼성이 1만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필리핀의 수재민을 돕기 위해 총 1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11억 원을 지원한다는 소식이 언론을 장식합니다. 삼성전자 필리핀 법인이 서비스 엔지니어 등으로 구성된 20명 규모의 구호팀을 피해 지역에 긴급 파견해 가전제품을 수리한다는 소식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절규가 언론에 보도되지 않고 삼성의 소식들이 포털사이트를 장식하는 일은 국내 최대 재벌인 삼성에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빛이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성의 추악한 얼굴이 하나씩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삼성을 사랑하고, 삼성 제품을 아끼고, 삼성이 만든 전자제품을 최선을 다해 수리해왔던 삼성서비스 노동자들이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쓰인 삼성의 깃발을 불살랐습니다.
김배성 씨는 더 이상 동료들이 목숨을 잃지 않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끊어야 할 것은 노동자의 목숨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의 탐욕이고, 불살라야 할 것은 노동자의 육신이 아니라 삼성의 불법입니다.
이제야 세상에 눈을 뜬 삼성서비스 노동자들이 또다시 절망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당당하게 싸워나갈 수 있도록 아름다운 사람들의 연대의 손길이 절실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