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피해자들과 함께하며 활동하고 있는 환경보건시민센터가 <프레시안>과 공동으로 '끝나지 않은 고통, 가습기 살균제의 비극'을 기획했다. 이 기획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끝나지 않은 고통, 사건의 배경과 원인, 가해 기업들의 태도와 피해자들이 벌이는 소송, 이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진 과제와 교훈 등에 대해 함께 고민해본다. 편집자 주
시험관 시술로 얻은 쌍둥이, 세상을 떠나다
정말 어렵사리 낳은 아이, 그것도 아기를 가지지 못해 크나큰 고통을 겪다 시험관 시술 끝에 낳은 쌍둥이를 잃는다면 당신은 어떤 상태가 되겠는가. 그 뼈저린 고통은 결코 말과 글로는-아무리 말을 잘하는 사람과 빼어난 글솜씨를 지닌 사람이라도-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가습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고통을 직접 전해 들을 때 종종 마음이 너무나 먹먹해 그들이 한 말을 잘 듣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어머니와 아이가 한꺼번에 죽었거나 여러 명의 아이가 죽은 경우는 더욱 그렇다.
저출산 시대를 맞이한 요즘, 쌍둥이는 낳으면 그 자체가 최고의 축복이다. 그 쌍둥이를 모두 가습기 살균제의 제물로 바친 비운의 부부들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대전에 사는 김창명(가명) 씨 부부는 지난 10월 16일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간호사로부터 아이를 받아 안아보는 순간 아기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올해 봄, 그리고 2010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쌍둥이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기 때문이다.
박사 과정 학생과 학교 교사로 있던 이들 부부는 결혼 후 5년 만인 2008년 6월 이란성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 이들은 이제 이 두 아이만 잘 키우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가습기는 결혼 직후인 2003년부터 사용했다. 대형마트에서 장보기를 하던 중 자체상표(PB)상품으로 팔던 가습기 살균제가 눈에 들어왔다. 가습기 내에 번식할 수 있는 세균 번식을 근원적으로 막아주고 인체에 안전한 성분이 들어 있다고 표기돼 있어 2009년 가을부터 정말 안심하고 열심히 가습기에 이 살균제를 넣어 사용했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었다. 아기가 감기에 걸려 고생할까 봐 사용한 가습기와 그 가습기 속에 혹 못된 폐렴균이라도 서식할까 봐 염려돼 사용한 살균제는 건강지킴이가 아니었다. 이것들이 인체에 치명적인 무기가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 화근이라면 화근이었다.
아이들이 두 살도 채 되지 않은 2010년 3월, 가습기와 가장 가까이서 잠을 자던 첫째가 먼저 청색증이 생기고 호흡이 가빠져 대전을지대병원에 입원했다.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간질성 폐렴 진단이 나왔다. 상태가 갈수록 나빠져 서울삼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둘째도 4월 30일 의사 회진 중에 형과 비슷한 이상을 발견해 형 방에 입원했다.
2007년부터 광주에 있는 한 대학에서 전임강사로 있던 김 씨는 2010년 조교수가 됐다. 승진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바로 그 때 학생 수업 중에 아들의 응급 상황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업도 마치지 못한 채 황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후 중환자실에서 사경을 헤매는 아이들을 보살피느라 강단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의 삶의 중심은 아이들이었다. 그는 복도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며 두 아들을 돌봤다. 하지만 이런 지극정성도 허사였다. 정말 하늘도 무심했다. 큰아들은 그해 9월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래도 한 아들은 살아 있었다. 첫째 아이의 사망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2010년 12월 교수직을 그만두면서까지 둘째 살리기에 매달렸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과 소파에서 매일 잠자며 아이에게 쏟아 붓는 애틋한 부정에 감복한 기독교 원목은 그에게 원목실에서 먹고 자도록 배려했다. 병원 쪽도 보통 중환자실 입원환자 가족에게 하루 30분간 환자 면회 시간을 주는데 반해 그에게는 의사나 중환자실 간호사처럼 24시간 언제 어느 때고 아이를 면회할 수 있도록 특별대우를 해주었다. 김 씨는 어느덧 병원 의료진과 한가족이 됐다.
하지만 억대를 넘어가는 엄청난 병원비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2011년 6월부터 대전의 한 연구소에 연구원으로 재취업했다. 그때부터 아내가 아이 곁을 지키고 자신은 주말마다 가서 마지막 희망인 둘째 아이를 보살폈다. 하지만 둘째도 한날한시에 태어난 첫째를 따라 올해 1월 하늘나라로 갔다. 3년에 가까운 가습기 살균제와의 전쟁은 이렇게 허망하게 패배로 막을 내렸다. 김 씨 부부에게 가습기 살균제와 이를 제조·판매한 회사는 악마나 다름없었다. 김 씨 부부뿐 아니라 누구라도, 자신들이 낳은 쌍둥이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을 악마라고 불렀을 것이다.
지난 여름 필자가 만난 이들은 그래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사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힘든 내색을 하거나 말을 하면 묻기도, 대화하기도 힘들어진다. 인터뷰하는 동안, 그리고 그 뒤 한참이 지난 뒤에도 나의 가슴 한구석이 먹먹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나를 반가운 손님처럼 대했다. 곧 새롭게 기댈 수 있는 아이가 태어난다는 희망도 한몫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희망이 그들 앞에 기적처럼 다시 찾아왔다. 그들은 이 희망을 통해 고통을 잊으려 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되기를 바라본다.
▲ 대전에 거주하던 임영식·김옥희(가명) 씨 부부의 쌍둥이 형제.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형(오른쪽)은 동생을 잃고 혼자가 됐다. ⓒ환경보건시민센터 |
임신·출산박람회에서 받은 가습기 살균제, 두 아이를 데려가다
경기도 성남시에 살던 김길수(가명) 씨도 가습기 살균제에 쌍둥이를 모두 잃었다. 이번에는 아들과 딸, 이란성 오누이였다. 공무원과 고등학교 교사였던 이들 부부는 지난 2009년 5월 쌍둥이를 낳았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였다. 이들은 아기를 낳기 몇 달 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종합전시장에서 열린 임신·출산박람회에 갔다. 그곳에서 세퓨 가습기 살균제 일회용 샘플을 무료로 받아 왔다. 이 제품에는 안심하고 사용해도 되는 성분이 들어 있다고 했다. '박람회만 가지 않았더라면', '그 박람회장에서 그 살균제를 보지만 않았더라면' 하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종종 떠올리곤 한다.
김 씨 부부는 아이들이 태어난 그해 늦가을부터 이른 봄까지 종일 가습기를 틀었다. 첫해는 아이들에게 큰 탈이 없었다. 그래서 2010년에도 11월부터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하지만 2011년 1월말부터 두 아이 모두 아침에 마른기침을 서너 차례 해댔다. 이전에는 순식간에 음식을 먹어치웠으나 반도 채 먹지 못했다. 열도 나기 시작했다. 소아청소년과를 찾았다.
단순 감기라고 했다. 감기 시럽을 몇 차례 먹였다. 3월이 되어 첫째가 밤에 호흡곤란 증세로 구르고 토했다. 분당서울대병원 응급실로 갔다. 폐렴 같다는 진단이 나왔다. 아이들을 입원시켰다. 차도가 없었다. 상태가 날이 갈수록 악화하자 4월에는 서울중앙아산병원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 독한 화학물질을 들이마신 아이들은 한 달을 채 버텨 내지 못했다. 쌍둥이는 한 달 간격을 두고 차례로 이들 부부 곁을 그렇게 떠났다.
애지중지하던 오누이 쌍둥이가 없는 집은 황량하기만 했다. 아이 엄마는 아이들이 죽자마자 정신과 상담치료를 일주일에 두 차례 받아야 할 정도로 정신건강이 극도로 나빠졌다. 아이들의 죽음만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두려움과 분노, 슬픔과 아이들에 대한 죄책감이 그녀를 엄습했다. 심지어는 자살까지 생각했다. 자살 생각이 하루에도 여러 차례나 떠올랐다.
다행히 그해 여름 새로운 생명이 들어섰다. 다시금 마음의 안정을 서서히 찾기 시작했다. 그래 살아야지. 악착같이 살아야 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 그래서 먼저 간 남매의 못다 한 삶을 이어가도록 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신경정신과 치료를 더는 받지 않아도 됐다. 그리고 마침내 2012년 3월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었다. 지금은 이 아이에게 모든 것을 쏟으며 이들 부부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쌍둥이 형제를 모두 잃을 뻔했다가 다행히 한 명은 운 좋게도 목숨을 건진 부부도 있다. 두 아들 쌍둥이를 잃은 김 씨 부부처럼 대전에 거주하던 임영식·김옥희(가명) 씨는 결혼 7년이 되도록 아기 소식이 없자 시험관 아기를 갖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4년 3월 꿈에 그리던 이란성 쌍둥이 형제를 얻었다. 이들 부부에게는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복덩이들이었다.
건강하게 키우기 위해 이들 부부는 아기를 가진 여느 집처럼 가습기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텔레비전 광고도 하고 가장 잘 팔리던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 당번'을 골랐다. 하지만 2007년 봄 어느 날 둘째 아이가 먼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전을지대병원으로 아이를 데려갔다. 그곳에서 상태가 나빠져 지인을 통해 신촌세브란스병원으로 급히 데려갔다. 엑스선과 시티 촬영을 한 결과 간질성 폐렴이란 진단이 나왔다.
첫째 아이도 검진을 해보자는 의료진의 말에 따라 검사한 결과 첫째 아이에게도 폐에 이상이 나타났다. 다행히 둘째와 비교해서는 비교적 나은 편이었다. 둘째가 심하게 앓은 덕분에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단계에서 일찍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병원에서 한 달도 채 버티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갔다. 동생 덕분에 살아남은 형은 요즘 정기적으로 병원에서 건강 상태를 점검받으며 형제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제 열 살이 된 그는 옛날의 동생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김 씨 부부는 두 달여 전 피해 신고 뒤 국립의료원에서 아이가 각종 검사를 받을 때 동생이 왜 죽었는지를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아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가습기 살균제는 대한민국 가정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분탕질했다. 이 악마의 물질은 아이 한 명의 목숨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쌍둥이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갔다. 어떤 경우는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들이 세상에서 꽃을 한 번 피워보기도 전에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놓았다. 그것은 결코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다. 티 없이 맑고 맑은 어린 영혼들을 향해, 어른들이 저지른 살인이었다.
기업들이, 우리 사회가, 국가가 조금만 더 생명의 소중함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이들은 절대로 죽을 수 없는, 대한민국의 아이들이었다. 쌍둥이 피해자들의 한 맺힌 사연을 우리들의 가슴에 새겨야만 제2의 가습기 살균제 재앙이 더는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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