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국내 정치나 사회 상황은 가히 상상의 극한까지 온 듯하다. 그래도 그동안 변화하고 성숙했다고 믿었던 한국사회의 현주소를 직면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민주국가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국가정보기관의 조직적 대선 개입은 물론 경찰을 포함한 다른 국가조직의 선거 개입도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다. 관련 수사를 진행하던 검찰의 수사팀장이 경질되는 것은 물론 새 정권 등장 이후 국내 요직의 철저한 정치적 물갈이에 수반되는 특정 정치성향의 움직임, 그리고 올드 보이라 불리는 구 정치인들의 복귀를 볼 때 이제 우리사회는 유신시대로의 회귀에 직면했다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듯하다.
김일성을 교주 수준의 위대한 아버지로 개인숭배를 강요하는 북한 정권이나 히틀러를 찬양하는 스킨헤드의 과격 우익그룹에 대한 경멸어린 어리석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유신 독재통치 속에 총 맞아 숨진 박정희 전 대통령을 종교 수준에서 제사 드리고 숭배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 정부는 건강한 민주사회에 필수적인 다양한 목소리를 죽이고자 반세기 전의 매카시 선풍에 따라 국내 특정정당의 해산과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까지 없애려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고, 이는 미국 정부의 조직적 도청이나 일본의 집단자위권에 대하여 목소리 하나 내지 못하는 모습과 비교할 때 너무도 대조적이다.
이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역시 생각지도 못한 탄압을 받게 되었다. 사학법 개정 반대에 촛불을 들었던 현 대통령의 정치 이념에 발맞추듯 참교육을 표방한 전교조도 국제노동기구,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교원단체총연맹 등의 국제적 항의에도 불구하고 법외 노조로 강제 전락되었다. 교과서에는 일본 제국주의의 찬양과 더불어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물타기 진행이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현 정권의 이런 행태는 문화적 세뇌에 해당되기에 과거 이명박 정권이 미국쇠고기 졸속 협상이나 4대강 사업으로 국민과 국토에 남긴 상처보다 더 깊고 치명적일 수 있다. 지난 대선에서 나타난 단지 51.6%에 기반하고서 이미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저들의 문화를 강요하고 있다.
한편, 이런 정치 지형과 맞닿아 경제 상황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사태나 현대자동차, 재능교육, 콜트콜텍, 골든브릿지 증권 등 우리사회 속의 무수히 많은 소외된 이들의 크고 작은 아우성은 국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고 있는 삼성에 의해 지워져간다. 국제적으로 무노조, 무산업 재해의 아름다운 기업인 삼성의 기업 매출과 이익의 높은 수치는 경영진의 조직적 노조 파괴 작업과 열악한 반도체 노동 현장의 젊은 죽음과 이어져 있고, 개인 재산 12조가 넘는 이건희 삼성회장이 세계 100대 억만장자 중에 포함되었다는 소식은 삼성전자 서비스 협력업체에서 일하던 고달프고 가난한 가장이 선택한 죽음으로 상징되듯이 삼성의 하청기업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땀과 눈물로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허울 좋은 OECD 회원국이지만 삶의 질과 사회적 유대감은 하위권에서 맴도는 우리사회에서 출구 없는 양극화 속에 최소한의 사회적 보장도 허락받지 못하고 죽음을 선택해야 하는 노동자들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의 삶의 현장은 거리에 쌓인 낙엽보다 더 초라하게 변해간다. 그나마 조금 안정된 생활을 하는 계층 역시 끝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삶의 여유를 갖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행히도 이런 상황 속에 친일·친미 기득권 세력에 대응하는 야권의 모습은 처참하리만큼 힘이 없다. 과거보다 의석수를 늘린 정당이건, 다양한 운동을 하고 있는 시민세력이건 사회 현안이나 퇴행하는 사회 흐름에 무능력한 이들의 모습에 대해서 말하는 것 역시 피곤한 일이 되었다. 지식인도 예외는 아니다. 생산성과 무한 경쟁논리의 신자유주의에 물들어 상대적 소득 격차에나 관심을 지닌 지식인은 물론, 진보적이라 하는 지식인들 역시 70, 80년대의 원론적 주장으로 날을 지샌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무엇을 해야 한다는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실효성 있는 대안 제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현주소가 이렇게 낙후되어 가는 이유 중 하나는 다양한 상황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으면서 왜곡된 정치·경제의 퇴행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이를 조장하는 특정 집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집단이 바로 사회 공기로서의 역할을 져버리고 집단 이기적 행태를 일삼는 국내 주류언론사들이다. 조선일보로 상징되는 주류언론은 정치·경제 권력의 하수인이자 또 다른 사회 권력으로 군림하면서 언론사라는 특혜집단으로서의 안전망 뒤에서 이들이 보이는 오만한 만행은 열거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다.
또 다른 집단은 이타적 삶을 강조하는 종교집단이다. 세속적 가치를 멀리하고 삶의 의미를 제시해야 할 종교집단의 왜곡된 행태도 퇴행하는 우리사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세계 어디 내놓아도 인상적인, 서울 시내 가득히 메우고 있는 십자가 행렬은 결코 영적 충만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화합과 용서의 가치와는 거리가 먼 우리사회에서 나날이 번창하고 있는 초대형 교회는 오직 인적 마피아 조직의 터전이 되어 정치·경제·언론의 완고한 권력 유착을 공고히 하는 암묵적 권력집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런 문화 속에서 한국의 도시는 종종 하나님께 봉헌되고 그런 발언과 행동을 통해 우리사회 나름의 안전장치를 확보한 정치가는 언제고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한다. 지난 정권에서 유명 목사가 자신들이 대통령을 만들었다고 하는 오만방자한 발언이 가능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초대형 교회에서 한 주의 헌금이 억 단위가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기에 세금 추적이 없는 국내 초대형 교회가 막대한 정치 자금이나 검은 돈의 세탁 장소라는 소문이 결코 헛소문처럼 들리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긍정적 역할을 해야 할 두 집단이 권력과 재물을 위해 본연의 역할을 저버린 것은 우리사회가 자정능력과 회복력을 상실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경제 집단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사회를 지키는 공정한 언론기능과 사회의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해야 할 종교집단은 사라지고 오직 정치권력 선전 대행업체로 변질되고, 권력과 재물 축적 집단으로 거듭 태어나면서 오히려 사회악을 공고히 하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이런 사회의 퇴행적 상황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끝없는 대립과 갈등을 멈추라는 일부 지식인들의 듣기 좋은, 그러나 상황개선에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말장난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가. 물론 폭압적 정권과 더불어 구조적 개선의 여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 현 상황에서 정답은 없다. 아니 원론적 정답은 있지만 현실적인 답은 보이지 않는다. 지금처럼 정치·경제·언론·종교라는 커다란 집단 간의 권력 동맹으로 인한, 조직적인 부정부패와 구조적 모순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개인이나 소규모 집단이 이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기란 쉽지 않다. 더욱이 각기 미국과 중국의 후견을 받고 있는 남북분단 상황 속에서 이 땅에는 언제고 매카시의 망령이 되살아나 사회 다양성을 짓밟아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있다. 거대한 담장도 작은 물구멍 하나로 무너진다는 점이다. 사회변화를 위해 관념적인 구호와 주장을 하기보다는 각자의 위치에서 일상의 작은 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어느 하나 가볍게 볼 수 없는 대형 사회 이슈에만 집중하면서 해법 없는 원론적인 주장 속에 스스로 지쳐 쓰러지기보다는, 커다란 의제를 기억하되 일상 속 행동과 연대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국가권력의 횡포라는 시끄러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너무 큰 것에만 시선을 돌리게 되고, 점차 일상 속의 작은 부당함에 대하여 신경 쓰기는커녕 오히려 용납까지 하게 된다.
종종 사회나 권력조직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지적을 잘 하면서도 일상 속의 작은 상황에 대해서는 작으니까, 저 정도는 괜찮겠지 등등의 합리화로 타협하면서 그냥 넘어가는 경우를 본다. 정권이나 거대언론의 부당함에 대해서 지적하고 필요하면 언제고 당당히 다투는 이들도 생활 속의 지극히 작은 문제로 갈등이나 다툼이 생겼을 때, 상대의 부당함에 대하여 적당히 타협하면서 적당히 마무리하고 지나친다. 이는 커다란 부당함에 길들여져 작은 것은 보이지도 않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이 있듯이 아무리 귀찮고 번거로워도 일상의 작은 부당함이나 폭력에 대해서 타협하지 않을 필요가 있다. 우리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원론만 지닌 채 거대담론에만 머물지 말고 일상의 사소함으로 작은 목소리를 하나 둘 내면서 부당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 일상의 문화를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마음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효율을 따지는 이에게는 너무 느리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민족의 남북 단절 상황을 악용하는 기득권 세력에 의한 공정하지 못한 행태와 문화가 더 이상 통용되지 못하는 새로운 문화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부분이다.
그런 작은 목소리로 일상의 부당한 상황이나 집단에 대해서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싸우지 않는 관계란 매우 권위적인 수직적 관계이거나 무관심으로 인해 단절된 관계이기에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있는 사회에서 그런 관계는 위선에 가깝다. 물론 싸우되 잊지 말아야할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서로의 관계를 존중하면서 싸우는 것이다. 관계의 단절과 왜곡을 폭력이라고 정의하는 입장에서 볼 때 왜곡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한 행위야말로 의견이 다른 상대에 대한 배려와 상호 존중이 선행된다면 비록 그 외형이 싸움일지라도 전형적인 비폭력의 모습이다.
다양한 개인과 집단이 있는 사회에서 건강한 문화를 바란다면 서로 싸우지 말라고 호도해서는 안 된다. 증오 속에 싸우는 것만을 아는 이들은 정쟁을 그치라면서 기득세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고,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즉시 적으로 간주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찔러야 할 적으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서로의 관계를 끊어가며 이전투구의 모습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를 인정하고 상대를 존중하면서 싸운다면 치열하게 싸울수록 매우 건강한 관계이자 이런 문화는 바람직하다.
그런 면에서 사회에서 정쟁이 심하다는 말보다는 국민에 대한 거짓과 사기 행위를 통해 상대방을 무조건 없애야할 적으로 몰아가는 행태를 멈추고, 정정당당하고 투명한 다툼이 하루 빨리 사회에 자리 잡도록 하는 것과 일상의 사소함에 있어서도 타협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문화가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다. 생활 속 작은 악에 타협하면서 국가권력의 남용이라는 거대악을 어찌 바로 잡을 것이며, 서로 다른 다양한 집단 간의 갈등 해결이 싸우지 않고 말로만 다될 것처럼 이야기하는 자들에게 속아 스스로 침묵하며 자기 검열해서 어찌할 것인가. 다만 일상의 사소함으로 호시우보(虎視牛步)의 자세로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목소리를 높여 잡초처럼 싸워야 한다. 너와 나,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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