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재벌
1987년 민주화운동이 성공하면서 모든 시민이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지만, 사회경제적 차원의 민주주의는 충분하게 발전하지 못했다. 정치 민주화는 상식이 되었지만, 사회경제적 민주화는 체계적인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급진 운동권의 논리는 복지국가와 노동자의 경영 참가는 개량주의에 불과하다고 외면했다. 반면에 고삐 풀린 자유시장의 논리가 득세하면서 기업권력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선출되지 않은 재벌 총수 일가가 국가를 사실상 통제하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였다. 노동시장 유연화가 확산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였고, 공정거래법이 무뎌지면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생활은 더욱 고단해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장에 갔지만 빈부격차는 더욱 커져만 갔다.
고려대 정치학과 최장집 명예교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인간적 상처들>에서 "민주화 이후 노동자들이 시장 상황에서 무력하게 휘둘리는 종속적 지위로 빠져들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다른 정부도 아니고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규모가 정규직에 맞먹을 정도로 확대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노동자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얼마나 취약해졌는지 보여준다고 비판한다. 재벌 대기업의 성과가 소수의 임원과 정규직 노동자에게만 집중되고 기업 외부의 다수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제외된다면 '내부자'와 '외부자' 사이의 경제의 이중화(dualization)는 심각해질 것이다. 이는 결국 사회의 커다란 분열을 야기할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
사회의 분열, 계급의 상처
사회의 칸막이가 높아질수록 계급의 상처는 커져간다. 미국 사회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한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가 개인의 과거를 무시한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경제의 유연화는 사회의 인간관계를 장기적 관점이 아니라 단기적 관점으로 보게 만들고,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의 잠재력만 중시하도록 만든다. 다보스포럼의 신자유주의에 정통한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환영할지도 모르지만, 세넷은 "유연한 체제 내의 하위층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자기 파괴적인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세계 최고의 자살율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보이는 한국사회가 바로 슬픈 증거이다. 지금이라도 우리는 이러한 극단적 자유시장의 논리에 지배하는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적 대안을 찾아 나서야 한다.
1961년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미국 정치를 대중의 광범위한 개인적, 집단적 참여로 이루어지는 '다두정치'(polyarchy)라고 분석한 것으로 유명하다. 단일한 파워엘리트는 없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정치체제, 즉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슈 제기에 참여하는 다원주의 정치가 존재할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6년 달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야만 했다. 그는 <경제민주주의에 관해서>에서 미국이 점점 '기업 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평등이 위협받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는 기업의 소유와 경영의 불평등을 축소하기 위해 민주주의, 정치적 평등, 자유의 가치를 조화롭게 달성하는 대안적 경제구조를 경제 민주주의 요소로 제시했다. 로버트 달의 통찰력은 한국 사회의 경제 민주화 논쟁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경제민주화 2단계 논쟁을 위해
대한민국 헌법은 2장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한다고 말하지만, 아직도 법률적 보호 장치는 부족한 점이 많다. 공정거래법의 강화와 엄격한 법 집행은 경제 민주화를 향한 첫 걸음에 불과하다. 경제 민주화를 제대로 성취하려면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회적 대화와 산업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권리를 보장하는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더욱 더 많은 참여를 보장하고, 더 많은 사회적 평등을 추구하는 경제 민주화 운동의 2단계가 필요하다. 경제 민주화는 궁극적으로 '경제적 인간'의 도구적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적 인간'의 가치를 존중하고 사회의 모든 사람이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의 변화를 요구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