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진보-보수 양쪽 모두 그의 탁월한 정치력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1987년 정치민주화 이후 야권의 의제였던 경제민주화를, 그는 단 1년 만에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그의 변신이 '선거용'이라는 비판도 나왔지만, 희망 섞인 기대도 있었다. 그런 유권자들의 기대가 그를 18대 대통령으로 만들었고, 25일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을 올린다.
그런데 '대통령 박근혜'를 만든 경제민주화가 위태롭다. 박 대통령이 당선 이후 보인 행보만으로도 "경제민주화는 이미 용도폐기 됐다"는 평이 나온다. 그의 변신은 과연 '혁신'이었을까? 한 때 '신뢰의 아이콘'이었던 새 대통령은 자신의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취임하면서 5년간의 '박근혜 시대'가 개막했다. 관심은 박 대통령이 지난 총선과 대선 기간 대대적으로 약속한 경제민주화의 추진 여부에 쏠린다. 그의 '변신'은 '혁신'이었을까? 아니면 야권의 주장대로 대선을 앞둔 '쇼'였을 뿐일까? ⓒ뉴시스 |
박근혜가 '공화의 시대'의 대변자?
박성민 '정치컨설팅 민' 대표는 지난해 2월 펴낸 책 <정치의 몰락>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시대정신을 '공화(共和)'로 규정한다.
전쟁 후인 1950~1960년대가 극한 가난으로 생존에 대한 회의가 지배했던 '실존의 시대'였고, 군부독재·유신체제 등 국가권력에 대한 회의가 지배했던 '민주의 시대'(1970~1980년대), 사회주의 몰락과 세계화의 여파로 진보에 대한 회의가 지배했던 '자유의 시대'(1990~2000년대)를 거쳐, 이제 '시장에 대한 회의'가 지배하는 '공화의 시대'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그는 '시장 보수'가 권력의 정점에 오른 것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7년 대선이었지만, 이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국제 금융위기, 심화되는 양극화로 '시장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졌다고 지적한다. 반(反)월가 시위 등으로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고, 자연스럽게 공공성과 정의, 타인과의 공생 등의 가치가 화두가 되는 '공화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공(反共) 보수의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대중의 욕구를 발 빠르게 흡수하며 '공화의 시대의 대변자'를 자임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지난 14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간사단 회의에서 안상훈 고용복지분과 인수위원이 한 말은 박 대통령의 이런 변화를 보여준다.
"창조경제라는 개념이 (박근혜 당선인의) 공약에도 들어가 있는데, 주로 시장경제만 이야기했던 것에서 사회적 경제까지 개념을 확장하려고 한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 자활 기업, 마을 기업 등 공동체적인 경제 주체들을 활성화 시키는 두 번째 새마을운동을 제안하려고 한다."
하필 '두 번째 새마을운동'이란 표현을 붙여 불필요한 논란을 야기했지만, 내용만 따져본다면 '보수의 지각 변동' 수준의 사상 전환이다. 한국의 보수가 그간 시장경제를 유일한 대안으로 맹신해온 것과 달리, '사회적 경제'를 언급하며 최근 진보진영에서 대안경제 모델로 논의 중인 협동조합이나 마을기업까지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이 과거 국가보안법이나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했던 소위 '꼴보수'의 이미지를 넘어, 경제민주화와 복지는 물론 진보진영의 대안까지 자유롭게 차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셈이다.
안보와 성장 밖에 모르는 보수? '2012년의 박근혜'는 달랐다
박성민 대표는 책에서 "한국의 보수는 안보와 성장, 즉 북한과 돈 외에는 세상을 보는 다른 프레임을 갖고 있지 못하다"며 '공화의 시대'의 대변자로 시장보수가 아닌 사회진보 세력을 꼽지만, 이런 예측은 지난 총선과 대선을 거치며 빗나갔다. 유권자가 2012년의 시대정신이라던 '공화'의 대변자로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선택한 것이다.
박 대통령 스스로의 '환골탈태' 과정도 있었다. 총선 전 경제민주화 조항인 헌법 119조의 입안자 김종인 전 보건사회부 장관을 영입하며 대대적인 '보수색 빼기'에 나섰고, 당의 정강정책은 물론 총·대선의 간판 공약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내걸었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지난 19일 열린 '박근혜 정부 5년 경제정책 전망 토론회'에서 "'가난한 민주주의'에 대한 민심의 표출이 바로 복지와 경제민주화"라며 "결국 '같이 좀 살자'라는 뜻인데, 이런 분노의 흐름에 박근혜 후보는 적극적으로 대응해 경제민주화의 소유권 전취에 성공했다"고 평했다.
박 대통령의 당시 행보가 표를 얻기 위한 '쇼'가 아니었다면, 안보·성장 외에 다른 프레임을 갖지 못했던 보수의 변화를 '안보 보수의 적자'라 할 수 있는 그가 이끈 셈이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실패에 기인한 불가피한 선로 변경이기도 했지만, '국가주도의 (경제) 운용'이라는 그의 정서적 뿌리가 '온정적 보수주의'와 결합한 결과이기도 했다. 극단적인 양극화를 경험한 국민들은 "권력은 이미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조적인 고백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시장에 강한 고삐를 채우는 국가 권력과 이를 강하게 추진할 지도자를 원했던 것이다.
박 대통령 역시 선거 기간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라며 이런 대중의 기대에 적극 호응했다. 결과는 빗발친 정권심판론을 뚫고 달성한 '과반수 득표의 승리'란 쾌거였다.
보수 진영의 '내부 투쟁'…누가 박근혜의 발목을 잡았나
그러나 이런 '박근혜의 변화', 더 나아가 '보수진영의 변화'는 순탄치 않았다. 지난 총·대선을 거치며 강성 시장 보수들은 김종인 전 장관으로 상징되는 중도 보수와 '혈투'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고, 새누리당 내에서 경제민주화 방안이 거론될 때마다 당내 시장주의자와 재계, 보수언론이 강하게 반발하며 협공을 퍼부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대선을 두어 달 앞두고 인혁당, 정수장학회 등 과거사 논란으로 지지율이 휘청거리자 오른쪽으로 점차 시선을 틀었다. 중도층에 공을 들였던 기존의 전략에서 선회해 그의 입장에선 '더 손쉬운' 보수층 결집에 나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점차 경제민주화보다 '성장'을 주로 언급하기 시작하면서, 경제민주화가 용도폐기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고개를 들었다.
▲ 박근혜 대통령은 '보수진영의 압박'을 이기고 자신의 '소신'을 밀어 붙일 수 있을까? 지난 21일 발표된 새 정부의 5대 국정과제 및 국정목표를 보면, 이런 가능성은 요원해 보인다. ⓒ뉴시스 |
당선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 안팎에서 공약 수정론이 매일같이 제기됐고, 박 대통령은 이때마다 "(공약 수정은) 국민께 도리가 아니다"라며 반격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지난 21일 발표된 새 정부의 국정 과제는 이런 보수진영의 '내전'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었다. 일단 경제민주화라는 용어 자체가 폐기됐다. 200쪽에 달하는 국정과제 자료집에 경제민주화라는 표현은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았고, 새 정부 경제정책의 방점 역시 성장 중심의 '창조경제'에 찍혔다.
앞서 박 대통령은 지난해 7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경제민주화를 '국민행복을 위한 3대 핵심과제' 중 가장 첫 번째로 제시했지만, 정작 경제민주화는 5대 국정목표에서 제외돼 경제분야의 하위 전략으로 밀려났다. 경제민주화처럼 재계 등이 조직적으로 반발하는 사안일수록 국정 목표부터 강하게 밀어붙어야 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이미 그럴 의지를 상실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새 정부에 경제민주화의 추진 동력이 없다는 점도 중도 보수의 '판정패'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 사령탑을 맡게 될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그간 "'대기업은 나쁘다'는 식으로 정서적인 차원에서 경제민주화를 풀어서는 안 된다"(2012년12월 <세계일보> 인터뷰), "기업형 슈퍼마켓의 진입을 규제하는 것은 시장 왜곡을 초래한다. 우선은 시장에 맡겨야 한다"(2011년 6월 <매일경제> 좌담회)는 등 경제민주화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해 왔다. 조원동 신임 청와대 경제수석도 경제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성장 우선주의' 관료 출신이다.
위기의 경제민주화…朴, '보수의 역습' 이겨낼까?
이미 복지 공약을 중심으로 한 차례 '공약 수정' 논란이 일었지만, 집권 뒤 더 후퇴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19일 '박근혜 정부 경제정책 전망' 토론회에서 "당초 포괄적이고 원칙적인 경제개혁 방향만 제시했기 때문에, 전경련·경총 등에 의해 공약이 엉뚱한 방향으로 수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향후 5년 임기 내내 이해관계가 얽힌 시장보수 진영은 박 대통령에게 지속적인 '우클릭'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존립 기반이 보수인 만큼, 그에게 다른 버팀목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계속되는 보수 진영의 압박에 휘둘릴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때문에 야권에서 오히려 '박근혜 공약 사수'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여당 일각에선 공약 수정론을 제기하고, 야당 일각에선 공약 이행을 요구하는 정반대의 상황이 발생한 셈이다. 민주통합당 민병두 의원은 지난달 16일 "박근혜 정부가 복지국가로 가기 위한 노력에 대해선 아낌없이 지원하고 오히려 선도적으로 당론 발의까지 하는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보수의 압력'에 밀려 투항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약속을 지킬 것을 압박해 그가 대선 전 보여준 개혁적인 의제를 견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야권을 '우군' 삼아 집권 초 공세적으로 경제민주화를 추진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현재까지는 '성장주의 노선'과 '경제민주화 노선'이 애매한 동거 상태를 유지해왔지만, 내각 인선에서 드러나듯 점차 전자로 힘이 쏠리는 분위기다. 야권 내부에서도 새 정부의 실패를 반사이익으로 삼으려는 관성이 부활해 '협조 모드'에서 '공세 모드'로 방향을 틀 가능성이 높다. 한 새누리당 재선 의원은 "결국엔 추진 동력이 핵심인데, 현재로선 그런 동력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며 "다만 박근혜 대통령이 수 차례 경제민주화를 약속한 만큼, 이를 지키지 않으면 누구보다 대통령 자신에게 가장 큰 타격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인 전 장관은 새 정부의 국정과제 발표 다음날인 22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주최 강연회에서 "복지는 보수가 보수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일갈했다. 경제민주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보수가 '공화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모습으로 혁신할지, 아니면 '성장' 프레임에만 갇혀 스스로의 덫에 빠질지, 성패는 결국 새 대통령에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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