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좀 황당한 상상이긴 하다. 한국GM이 GM의 자회사인데 무엇 하러 이런 내부 거래를 하겠는가? 게다가 지금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아직까지는 산업은행이 한국GM의 지분 17.02%를 보유하고 있어서, 자산의 5% 이상을 매각할 경우 이를 거부할 수 있는 비토(veto)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황당한 일이 유럽에서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12월 20일, 독일의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보도에 따르면, GM의 유럽법인 오펠이 유럽의 생산시설을 포함한 6개 자산을 모기업인 GM 본사에 매각했다는 것이다.
▲ 오펠의 자산 매각 사실을 처음 보도한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기사.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 |
납득이 안 돼요~ : 자회사의 자산을 모기업에 매각?
게다가 매각된 6개 시설에는 오펠의 알짜 자산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폴란드의 글리비체 공장, 헝가리의 엔진 공장, 오스트리아의 변속기 공장에다 이탈리아의 연구개발 부서가 모두 미국 본사 직접 소유로 넘어간 것이다. 오펠이 매년 손실을 입는 핵심 부문이라 할 독일의 4개 공장은 모두 오펠에 남게 된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냉혹하리만큼 무서운 추정을 덧붙이고 있다. "이번 거래는, 가능성은 낮지만 그렇다고 전혀 불가능한 것도 아닌, 오펠 파산을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오펠이 파산하게 되더라도, GM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공장들은 자신의 소유로 남기게 된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이번 '내부 거래(매각)'의 이유에 대해, 오펠이 GM에 2014년에 만기가 도래하는 채무가 수억 달러에 달하기 때문에 이를 연장하는 차원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아울러 이번 매각 대금으로 2016년까지 오펠을 운영할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이유였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 어차피 오펠은 GM이 100% 지분을 소유한 자회사인데, 이번 매각을 통해 이익이 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를테면 GM이 갖고 있는 채권을 출자로 전환하거나, 혹은 단순히 GM 본사 차원에서 자회사 오펠에 운영자금을 지원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 독일 보쿰(Bochum) 공장 폐쇄 발표
이런 보도가 나오기 딱 열흘 전인 작년 12월 10일, 오펠 경영진은 독일의 4개 공장 중 보쿰 공장을 2016년에 폐쇄하겠다고 전격 발표하게 된다. 독일에서 완성차 공장이 폐쇄되는 것은 2차 대전 이후 처음이다. 독일 전역이 이 발표로 인해 충격에 휩싸였음은 물론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 발표는 보쿰 공장 설립 50주년 기념식을 일주일 앞두고 나온 것이었다. 결국 기념식은 취소되고 말았다. 보쿰 공장에서 일하는 3300명의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이 공장에 부품을 납품하는 부품사의 수만 노동자들은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이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1962년에 건설된 보쿰 공장은 오펠 카데트(Opel Kadett)를 처음 생산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1980년대만 해도 무려 2만20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일본 업체들과 경쟁하면서 실습생들이 투입되고, 퇴직자들의 자리는 신규 노동자로 채워지지 않았다.
2000년부터는 캐터필러, 파워트레인 등 주요 부품 생산이 외주화되며 노동자 수는 1만 명 수준으로 떨어진다. 2005년부터 최근까지 무려 70%에 달하는 노동자들을 쫓아내서 현재는 3300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이제 이들마저 공장 폐쇄로 모조리 일자리를 잃을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정말로 GM은 오펠의 파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GM은 차세대 오펠 아스트라 생산을 독일에서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는 등, 독일 공장에서 어떤 신차를 생산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도 내놓지 않고 있다. 대신 이번에 GM으로 매각한 폴란드 글리비체 공장에는 신차 물량을 배정하고 있다.
▲ 보쿰 공장 폐쇄 소식을 전한 <가디언> 기사. 사진 속 현수막은 독일 금속노조가 보쿰 공장 앞에 붙인 것이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주에만 4만5000개의 일자리가 걸려 있다. 우리는 보쿰에 남을 것이다."라는 내용이다. ⓒ<가디언> |
해소되지 않는 과잉 생산
지난해 유럽 자동차 내수시장은 7% 가까이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자동차를 아무리 많이 만들어내도 팔리지 않는 '과잉 생산' 상태가 된 것이다. 오펠은 올해 유럽에서 생산물량을 10%가량 줄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생산량이 줄어든다고? 그럼 또 공장을 폐쇄하거나 인력을 감축한다는 말인데 (…) 그럼 다음 차례는 어디인가?" 유럽 전역이 공포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글(☞바로 가기)에서 밝힌 것처럼, 우리는 올해 내내 이와 비슷한 소식들을 접하게 될 것이다. 어느 공장에 신차 물량이 간다더라, 어떤 공장은 폐쇄한다더라, 이 나라에서는 신규 채용을 하고 생산량을 늘린다더라, 저 나라는 인력을 몇 십 % 감축한다더라….
그런데 이상하다? '과잉 생산' 상태인데 도대체 어디에서 생산물량을 확보하고 늘린단 말인가?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벌이는 '도박판'이다. 다른 경쟁업체를 꺾을 수만 있다면, 그리고 각국 정부의 재정을 끌어다 수요를 창출할 수만 있다면, 생산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는 탐욕으로 너도나도 노동자들을 궁지로 내몰며 더 싼값에 차를 생산하기 위한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각국 정부들 역시 자동차 산업의 고용 효과가 엄청나기 때문에 노동자 혈세를 모아 뒷돈을 대주는 데 앞장서고 있다. 미국·유럽·일본은 아예 자국 화폐를 무한대로 찍어내는 방식으로 자본가들의 경쟁력 확보와 인위적인 수요 창출을 꾀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의 시간표에 따르면, 올해의 경쟁에서 누가 앞서느냐 하는 것이 2014년 이후 산업 재편의 패자(覇者)를 결정한다.
2014년부터 벌어질 세계 자동차 산업 재편을 앞두고, 2013년 한 해 내내 신차 물량을 어디에서 생산할 것인지를 놓고, 자동차 산업 자본가들은 "노조가 양보하면 생산물량을 보장하겠다"며 경쟁을 종용할 것이다. 누누이 얘기해 왔듯이, 차세대 크루즈 생산을 한국에서 하지 않겠다는 한국GM의 발표는 그저 신호탄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아주 사소해 보이는 변화까지도 놓치지 않고 추적하면서, 자본가들이 그리고 있는 산업 재편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해야 한다. 말하기 편해서 '지도'라고 표현할 뿐이지, 그림이 어떻게 그려지느냐에 따라 수천 명, 수만 명 노동자들의 생존권이 왔다 갔다 하는 판이니 말이다.
소형차? SUV? 한국? 유럽? 경계가 사라진다
당장 보쿰 공장 폐쇄 계획이 발표되자, 독일 금속노조 일각에서는 '오펠 모카(Opel Mokka)' 생산을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오펠 모카는 소형 SUV 차량인데, 애초에 벨기에 앤트워프 공장에서 생산될 예정이었으나, 2010년에 이 공장이 폐쇄되면서 한국GM의 부평공장으로 생산지가 바뀐 차종이다. 즉, 독일 금속노조 일각의 주장은 한국 생산물량을 유럽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오펠 모카가 갖고 있는 특별한 지위를 감안하면 더욱 복잡해진다. 자동차 산업 자본가들이 2014년 이후 산업 재편을 염두에 두느라, 전 세계적으로 올해까지는 '신차 가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의 상황에서, 오펠 모카는 몇 안 되는 신차종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차량의 기반이 된 플랫폼(뼈대)은 쉐보레 아베오가 사용하고 있는 감마(Gamma) 플랫폼이다. GM은 아베오가 만들어진 감마 플랫폼 기반으로 오펠 모카, 쉐보레 트랙스, 뷰익 앙코르를 설계했으며, 이 3가지 차종은 '형제자매' 또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감마 플랫폼을 사용한다 해서 GSUV(Gamma SUV)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에서 출시되고 있는 소형 SUV 차량들은 모두 최소한 배기량 2.0L 이상의 엔진을 탑재하고 있는 반면, 오펠 모카와 쉐보레 트랙스는 디젤 엔진의 경우 배기량 1.7L, 가솔린 엔진의 경우 1.4L 터보엔진을 탑재한다. 별도로 부를 이름이 없어서 '소형 SUV' 또는 '크로스오버 유틸리티(CUV)'라고 부를 뿐이지, 오펠 모카와 쉐보레 트랙스는 사실상 '소형차'나 다름없는 차량이다.
다시 말해 소형차 기반 플랫폼으로 글로벌 GM이 전략적으로 출시한 야심작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소비자들에게 소형차가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SUV 차량에 대한 소비가 주춤했는데, GM은 발상을 바꿔서 차급은 소형차이되 실용성을 높인 SUV를 내놓은 것이다. 아마도 GSUV를 선두로 해서 세계 주요 메이커들 또한 이와 유사한 차량을 내놓지 않을까 예측되는 대목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GSUV 생산물량을 놓고 관심이 쏠리는 것이 당연하다. 본래 유럽에서 생산되기로 했던 차종이 현재 부평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으니, 유럽 노동자들의 마음도 복잡하지 않겠는가. 그런 와중에 차세대 크루즈 생산을 한국에서 하지 않겠다는 발표가 나왔고, 대신 유럽에서 생산될 것이라는 추측성 보도가 줄을 잇기 시작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미 글로벌 GM은 유럽과 한국 노동자들을 물량 경쟁으로 내몰고 있다.
▲ 소형 SUV 쉐보레 트랙스. ⓒ연합뉴스 |
다시 한 번 '민생(민중 생존권)'으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가 부평의 제너럴모터스, GM 공장에 생산 중단 사태가 오지 않도록 잘 챙기겠다고 강조했습니다. 박 후보는 오늘(17일) 저녁 7시쯤 인천 부평역에서 열린 유세에서 "군산 공장에 이어 부평 공장도 어려움을 겪지 않을까 걱정하시는 심정을 잘 알고 있다"며, "힘든 일 없도록 잘 챙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MBN 뉴스, 2012년 12월 17일자)
지난해 대선 투표를 이틀 앞두고 박근혜 후보가 부평역을 찾았다. 그곳에서 한 얘기들을 보라. 정말 구체적이지 않은가?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한국GM의 쟁점을 야무지게 언급하고 있다. 경쟁자였던 문재인 후보와 민주통합당이 "정권 교체냐 연장이냐"를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하는 동안, 박근혜 후보와 새누리당은 '먹고사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기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공세가 수많은 노동자와 민중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점을 강조하면서, 획기적인 대안과 정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언급을 쉬지 않고 지속했다. 이번 대선의 승패가 어디에서 갈렸는가 하는 지점에 대해, 민주통합당 정동영 전 의원의 언급은 주목할 만하다.
"50대는 (19)97년 IMF 위기가 닥쳤을 때 35-45세로 구조조정과 경제위기의 피해를 고스란히 온몸으로 겪었던 세대 … 이들은 IMF 5년 뒤인 2002년 대선에서 40대로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걸었지만 이 시기 비정규직은 급증했고 먹고살기는 더 힘들어졌으며 양극화는 더 깊어졌으므로 50대에게 민주정부 10년은 경제적으로 어두운 시절이었던 셈 … 50대는 그들이 만든 자유주의 정부 아래서 경제적 자유주의(신자유주의)의 대표적 피해자가 된 셈 …… 민주당은 신자유주의의 피해자들인 50대에게 대선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는 데 실패했으며, 상대방(박근혜)은 야당 후보를 참여정부의 틀 안에 가두기 위해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일정 부분 성공했다." (정동영 전 의원 e-mail 신년사 중에서)
2013년, 올 한 해는 정말 '먹고사는 문제'에 집중하고 또 집중해야 한다. <인사이드 경제>는 "경제란 먹고사는 문제에 다름 아니며, 그게 바로 민생"이라는 가설을 갖고 지난 3년 동안 <프레시안>에서 세계 경제의 다양한 쟁점들을 다뤄왔다. 이제 정말로 '먹고사는 문제'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구현할 수 없는 세상이 왔다. 그렇다면 더 분발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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