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의원의 명백한 헛발질이다. 6월항쟁을 전후한 시기에 노 전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로서 활동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인 노무현이 그 후 보인 모습에 공감하든 그렇지 않든, 사실은 사실이다.
그런데 김 전 의원의 발언 중 더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새누리당 안에 나 같은 민주화 세력이 있다. 우리는 6월항쟁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백골단의 폭력과 최루탄 가스에 굴하지 않고 거리에서 독재 타도를 외쳤던 이들에게는 기가 찰 노릇이겠지만, 김 전 의원만의 생각이 아니다. 새누리당으로 문패를 갈기 전 한나라당에서도 공공연하게 오간 이야기다.
"민주주의 만든 중심 세력은 한나라당" 거듭된 궤변
2011년 3월 4일 열린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 출판기념회가 대표적이다. 지은이는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담당 검사였던 안상수 당시 한나라당 대표다. 출판기념회에서는 "민주화 투쟁의 영웅이 바로 안상수 검사", "6월 민주화 항쟁은 안상수 대표의 양심적인 정의감이 이뤄낸 일"(박희태 당시 국회의장) 같은 듣기 민망한 말들이 넘쳐났다.
"안상수 대표가 박종철 열사의 죽음이 고문에 의한 것임을 밝혀냈다"(이재오 당시 특임장관)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1987년 당시 안 검사는 최초에 고문치사범으로 지목된 2명에게서 '주범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그 3명을 기소하지 않았다. 사실을 은폐하기로 한 관계기관대책회의 결정에 따른 것이다. 박종철 고문치사 및 사건 은폐·조작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은 안상수 검사가 아니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었다.
이뿐 아니라 박종철 고문치사 사실을 밝힌 주역은 안 검사가 아니라, 안 검사의 상관이던 최환 당시 서울지검 공안2부장이라는 증언도 있다. 안 전 대표가 고문치사 사건 은폐·조작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자신의 입신을 위해 이용하는 행위를 이제라도 중단하라"(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진실과 거리가 먼 찬가가 울려 퍼진 것은 안 전 대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속내는 민주화를 이룩한 핵심 세력이 한나라당이라고 강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다음 발언들에서 이 점은 잘 드러난다.
"일부 정당과 시민단체에서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말하는데, 한나라당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이었다는 점을 정확히 알고 역사에 분명히 기록해야 할 것이다." (김덕룡 대통령 특보)
"이재오 형님은 감옥에 다섯 번이나 갔고 저도 당시 안양교도소에 있었다. (…) 많은 분이 한나라당을 독재당, 민주주의 탄압당이라고 하는데 우리 한나라당에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일꾼들이 많다. 민주화 세력의 주류가 우리 한나라당에 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한나라당에는 민주화 시절 잘 먹고 잘살았던 사람만 있는 웰빙당 이미지가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재오 당시 특임장관)
흥미로운 건 세 사람 모두 한때 반정부 투사였다는 점이다. 김덕룡 특보는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추진에 맞서 '굴욕 회담' 반대 시위를 이끈 주역 중 하나다. 이재오 전 장관도 김덕룡 특보와 마찬가지로 6.3세대(6.3은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절정에 이르자 박정희 정권이 서울 전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1964년 6월 3일을 말한다)로, 1990년 만들어진 민중당의 주역이다. 김 지사는 급진적 노동운동의 대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투쟁 경력으로 소속 정당의 반(反)민주 전력을 일부 가리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중심 세력"으로 한나라당을 포장했다. 그렇게 재해석을 넘어 역사 창조를 시도했다.
이들의 논리는 역시 6.3세대이자 한때 운동권 학생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꺼내는 '나도 ○○ 해봤다'와 다를 바 없다. 물론 이재오·김문수 두 사람은 '한때'라는 말에 다 담기 어려울 정도의 민주화 투쟁 경력을 갖췄다. 그러나 과거의 경력을 내세워, 그 시기를 자신이 대표한다는 근거 없는 오만을 내뿜는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자신들의 정당이 5.18민주화운동을 피로 물들인 세력의 계승자라는 사실에 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다. "6월항쟁을 우리가 만들었다"고 강변하는 김무성 전 의원도 마찬가지다. 6월항쟁이 들불처럼 번진 바탕에는 '5월 광주'에 대한 분노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들에게 중요치 않다.
▲ 1987년 7월 9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 구름처럼 모여든 시민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되살린 6월항쟁의 주역은 바로 이들이었다. ⓒ연합뉴스 |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도 알고 보면 우리 것?
6월항쟁을 '탈취'하려는 건 한나라당·새누리당 정치인들만이 아니다. 학문의 외피를 쓰고 재해석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사의 '불편한 진실'을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은 뉴라이트 계열에서도 같은 시도를 했다. 5.16쿠데타를 '혁명'으로 표현하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유신 체제를 찬양하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펴냈던 교과서포럼도 그중 하나다.
교과서포럼 공동 대표인 박효종 서울대 교수는 6월항쟁 20주년이던 2007년 "6.10항쟁 못지않게 6.29선언도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6.29 민주화 선언 알고 있는가' 토론회). 1987년 6월 29일, 항쟁의 물결이 방방곡곡을 뒤덮자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는 직선제 요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6.29선언이 민주주의 이행에서 매우 중요했음에도 폄하되고 있다는 것이 박 교수의 판단이다. 박 교수는 "작은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되는 6.29선언을 6.10항쟁과 "하나의 패키지로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의 요구와 시대정신에 순응해 권위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던 의지와 선택이 돋보인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월항쟁의 성과 중 절반은 6.29선언을 결단한 군부 독재 세력의 것이라는 의미를 담은 주장이었다.
박 교수의 주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6.29선언은 궁지에 몰린 군부 정권의 집권 연장 술책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독재에 맞선 항쟁과 같은 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은 독재 정권을 미화하는 것이라는 비판이었다. 박 교수는 얼마 전부터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서 박근혜 후보를 위해 일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화 운동의 역사를 자기들 것으로 만들려는 일련의 시도엔 맥락이 있다. 6월항쟁 이후, 특히 1990년대 들어 보수를 자임하는 이들이 심심찮게 한 이야기가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협력'이다. 민주화가 대세로 떠오르자, 자신들의 과거 중 독재에 빌붙었던 부분은 슬쩍 가리고 산업화를 상징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와 동시에 반대편에게는 '그래, 너희들의 민주화 공로는 인정하마'라는 태도를 보였다.
이들이 상징으로 내세운 '산업화'를 온전히 이들의 업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견디며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낸 노동자들을 빼놓고 산업화를 논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을 '수출 역군'이라 부르며 혹독하게 일을 시켰던 자칭 '산업화 세력'은 1990년대 들어 김문수 같은 과거의 노동운동가를 개별적으로 흡수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는 '전태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와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산업화'라는 상징을 확보한 이 세력은 어느 순간부터 '민주화'의 역사마저 가져가려 시도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협력'이라는 표현을 여전히 쓰면서도 '산업화는 당연히 우리 것, 민주화(의 일부)도 알고 보면 우리 것'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긴 것이다. 자신들이 민주화를 이룬 주역이라는 한나라당·새누리당 정치인들, 이를 지원하는 뉴라이트 인사 등의 행보는 모두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6월항쟁을 비롯한 현대사는 자신들의 헤게모니를 더 공고하게 하는 데 쓰이는 소모품에 불과하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분명한 건, 6월항쟁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주물럭거려도 되는 노리개가 아니라는 점이다.
▲ 6.29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당시 민정당 대표. ⓒ연합뉴스 |
짓밟힌 '인간다운 삶'의 꿈, 서서히 박제가 돼 가는 6월항쟁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이 있다. 6월항쟁이 이들의 것이 아니라면, 1980년대 운동권 총학생회장 출신들이 즐비한 야권의 것일까? 물론 '아니올시다'이다.
야권에서 6월항쟁과 직접적으로 닿아 있는 이들은 이른바 386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해 '젊은 피'로 수혈됐다. 이재오·김문수와 마찬가지로 투쟁 경력은 이들이 정치권에 입문할 때 커다란 자산이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인 후에도 이들은 그것을 자산으로 활용했다.
군부 독재를 몰아내는 데 앞장섰다는 자부심은 인정할 만하다. 그들에게 그것은 젊음을 바치고 때로는 목숨마저 걸어 쟁취한 자랑스러운 훈장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25년의 세월 동안 이들이 현실 정치에서 6월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잘 구현했는지는 의문이다.
기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2007년 6월, CBS라디오가 리얼미터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386 정치인들이 한국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고 평가한 응답자는 16.5%에 불과했다. 그와 반대로 실망스러운 점이 많았다고 답한 이는 68.5%에 달했다. 인상적인 것은 같은 386세대인 40대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그나마 가장 적었는데, 이들 중 62.1%도 동년배 정치인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응답자 중 일부는 1987년 6월의 거리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 이들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대목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6.10항쟁과 6.29선언이 하나의 패키지라는 박효종 교수의 주장과 달리, 6월항쟁과 패키지로 묶여야 할 것은 '7·8·9월 노동자 대투쟁'(6월항쟁에 이어 전국적으로 펼쳐진 노동자들의 '인간 선언')이다. 그러나 386 정치인들을 비롯한 야권은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경제 분야로 민주주의를 심화·확대한다는 '노동자 대투쟁'의 과제를 대부분 저버렸다. 지금의 야권이 연이어 집권하고 386 정치인들이 목소리를 높이던 때,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드러났던 인간다운 삶을 향한 꿈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면서 6월항쟁은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낡은 틀에 갇혀 서서히 박제가 돼 가고 있다. 이른바 '민주정부' 10년의 치적에만 눈길이 가는 이들에게는 불편하게 들리겠지만, 6월항쟁을 탈취하려는 이들에게 빌미를 준 건 386 정치인들을 포함한 야권이었다. 이런 지난날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한때 자랑스러웠던 훈장은 꼴사나운 완장으로 바뀔 수도 있다.
6월항쟁은 새누리당 정치인들의 것도, 386으로 대표되는 야권 정치인들의 것도 아니다.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해 죽이는 정권을 더는 참고 볼 수 없어 거리로 나선 수많은 시민들의 것이다. 질식당한 민주공화국을 살려낸 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한때 ○○ 했다' 식으로 정치적 목적 달성 혹은 입신양명을 위해 6월의 기억을 우려먹지 않았다. 많은 이들은 이름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갔다. 역사를 만든 건 이들이다. 6월항쟁을 노리개쯤으로 여기거나 정치적 자산으로 써먹기 전에, 이런 이들에게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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