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빨갱이', '집안 말아먹을 년' 고함 오가던 시절, 그 분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빨갱이', '집안 말아먹을 년' 고함 오가던 시절, 그 분은…"

[현장] 이소선 여사 떠나기 전날 열린 '추모의 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세월은 가고 너도 또 가고
나만 혼자 외로이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 잊어 내가 운다


배은심 여사는 나직한 목소리로 손인호 씨의 '해운대 엘레지'를 불렀다. 이 노래는 이소선 여사가 생전 콧노래로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배 여사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 "이제 나 혼자 남았네 하는 생각도 든다"며 고인이 떠난 것을 애석해했다.

배은심 여사는 "유가협 방에서 어머니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오늘은 이 마이크를 빌려 어머니에게 이야기한다"며 "여러분에게 어머니의 모습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막막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고(故) 이소선 여사를 떠나 보내기에 앞서 7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주차장에서는 고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렸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추모의 밤-희망은 꺼지지 않는다' 사회를 맡은 최광기 씨는 "세상의 모든 이의 어머니였던 그분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자리"라고 추모 행사의 취지를 설명했다.

▲ 추모의 밤이 6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진행됐다. ⓒ프레시안(허환주)

▲ 이날 추모의 밤 행사에는 시민 500여 명이 참석했다. ⓒ프레시안(허환주)

"지금 어머니를 뵙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서…"

그의 말대로 생전 고인과 관계를 맺고, 그의 영향을 받은 사회 각계 인사가 이날 추모의 밤에 함께 하며 고인과의 추억을 되새겼다.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한걸음에 달려온 문정현 신부는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도 밤하늘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며 "지금 어머니를 뵙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 같아 서울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문 신부는 고인을 회상하며 자신에게 늘 큰 용기를 준 분이라고 설명했다. 문 신부는 "최근 용산까지 찾아와 함께 울고, 위로를 해줬다"며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 받기만 했다. 감사밖에 드릴 게 없다"고 말끝을 흐렸다.

박순희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 전 대표는 "70년대 여공을 품어주는 분이 어머니였다"며 "당시 일하고도 수당을 받지 못하고, 월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만 죽으라 하던 우리에게 도움을 주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고 설명했다. 박 전 대표는1982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부지부장으로 일했다.

박 전 대표는 "어려운 현실을 바꿔보려고 노력을 하면 '빨갱이'라고 욕먹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도 당했다"며 "여공의 아버지, 어머니는 호미 자루를 던지며 '딸'을 '집안 말아먹을 년'이라고 질타하던 시대였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는 "이소선 어머니는 그런 현실에서 피붙이 아버지, 어머니도 하지 못했던 것을 우리에게 베풀었다"며 "우린 그의 가르침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7일 오전 8시 서울대병원에서는 발인식이 진행되고 오전 10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 도로에서는 영결식이 열린다. 이후 오후 1시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가 진행된 뒤, 오후 4시께 마석 모란공원 민주열사모역에서 하관식이 진행된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