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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대"검색결과 (전체기사 중 40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
달 밝은 월출산은 그렇게 목 놓아 울어댔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다시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호남 지역의 지난 연재는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습니다. ☞지난연재 보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
2017.07.08 12:24:34
좌-우익 분풀이가 불러온 '광분의 집단학살'
2017.06.29 16:53:16
"왜 나는 전향서 대신 33년 감옥을 선택했나?"
1970년대 초 '떡봉이'를 아시나요? 1973년 8월 2일 법무부 예규 108조 '좌익 수형수 전향 공작 전담반 운영 지침' 시달과 함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가 전향 공작을 직접 통제, 관리하기 시작했다. 또 중정과 법무부 등이 합동 전담반을 꾸려 대대적인 공작을 전개하기도 했다. '떡봉이'가 생긴 것도 이즈음이다. 국가는 폭력배 출신의 강력범들로 하여금 강제 전향을 지시했다. 성과에 따라선 가출소 등의 특혜가 주어졌다. 일부 장기수에 따르면 전향 공작 담당 반원은 전향서 한 장당 얼마 만큼의 수고비가 따랐다고 전한다. 떡봉이는
2016.04.24 08:18:51
"'떡봉이'를 아시나요?"
임방규와 김창근, 병사(病舍)에서 만나다 대부분의 사상범이 그렇듯 정치적 상황에 따라 좌익수들의 생활은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주요 정치적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살기를 띠었고, 사상 전향 공작은 한층 간교해졌다. 장면 정부와 박정희 군사 정권에서 행해진 사상범에 대한 처우와 공안 탄압이 대표적인 예다. 이승만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1960년 4.19 혁명은 이들에게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줬다. 민주 정권인 장면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상범에 대한 처우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군법 회부자는 20년, 민
2016.03.31 10:27:00
"바늘로 온몸 찌르고, 걸핏하면 몽둥이질"
'무기수' 임방규, 푸른 죄수복을 입다 임방규를 포함해 무기수로 감형된 7명의 사형수들이 오후 늦게 대전교도소로 이감됐다. 사복을 벗고 푸른 죄수복으로 바꿔 입은 임방규는 그제야 '사형을 면했구나'라며 안도했다. 무기수 이하만 죄수복이 지급됐고, 곧 처형될 사형수는 사복을 입었기 때문이다. 임방규가 있는 동안 대전교도소에서는 총살 집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7사동에 교수대가 설치돼 있어 이곳에서 형이 집행됐다. 같은 사형이라도 군법이면 총살, 민사면 교수형에 처해진다. 결과적으로 군법에 의한 사형 집행은 적어도 이곳에서 만큼은
2016.03.18 15:14:47
일본 노학자 "한국 우경화, '친일파' 박정희가 뿌리"
"한일 일본군 위안부 회담을 보면서 아주아주 분했다. 아베는 사죄하지 않았고, 일본은 알량한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굉장히 절망스럽고 화가 났다" 일본인 역사학자 사토 쇼진(佐藤 正人·74세) 씨는 2일 인터뷰에서 친일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한국의 자화상을 지난해 12월 합의된 '최종적, 불가역적’ 한일회담에 빗대 설명했다. 또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에 대해서도 "일본이 한국을 정치·경제·사회적으로 재식민지화하는 조약이었다"고 평가한 뒤 "박정희 전 대통령 스스로 일제강점기 만주
2016.03.06 16:07:44
명당 집 자손이라서? "나는 결국 총살을 피했다!"
총살 집행 현장과 美고문의 확인 사살 빨치산 사형수들에게는 수정(手錠)을 채웠다. 대부분 앞 수정을 찬 것과 달리 일부는 뒤 수정을 찬 채 꽤나 불편하게 움직였다. 아마도 감방 내에서 사고를 친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임방규는 뒤늦게 광주교도소로 이감된 터라 수정이 부족해 손목을 채우지 않았다. 사형수들은 취침 시에도 수정을 찬 채 잠을 잤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돌아누울 때면 쇳소리가 잘그락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올무에 걸린 짐승처럼 느껴졌다. 수감 생활도 어느덧 일상이 됐고, 군피(군인 및 경찰 피고인)와도 스스럼없이 지낼 정
2016.02.26 11:32:00
"영양실조에 쥐 잡아먹었더니…"
포로수용소 내 변절자, 그리고 탈출 사건 하루는 미군이 먹던 통조림을 포로들에게 나눠준 적이 있다. 그런 날은 필시 상부의 검열이 있거나, 기념일 또는 광주 지역 유지들이 수용소를 찾은 날이다. 하지만 방문객이 가고나면 통조림은 모두 회수됐다. 천막 입구에 들어서면 좌우로 길게 잠자리가 들어서 있고, 막사 한가운데에는 흙을 고른 뒤 난로가 설치됐다. 하지만 이 역시도 검열이나 견학을 위한 것으로 불 한번 피우지 않는 보여주기 식이었다. 포로수용소는 군대식 편제였다. 연대 규모였던 남광주 수용소는 1수용소와 2수용소로 나뉘었고, 그
2016.02.12 11:17:58
"쥐까지 잡아먹었지만, 결국 굶어 죽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고통 조선대학교 정문 건너 편(광주 동구 서석동)에서부터 전남대학교병원(광주 동구 학동)까지 길게 늘어선 광주 포로수용소(남광주 수용소)에는 빨치산 패잔병으로 넘쳐났다. 나무 널빤지와 천막을 올려 엉성하게 늘어뜨린 막사에는 김창근을 비롯해 수많은 포로들이 곧 있을 죽음을 기다렸다. 차가운 맨바닥을 고른 뒤 그 위에 짚을 깔고, 다시 모포 한 장을 얹은 것이 이들 잠자리의 전부였다. 바닥에서 올라온 냉기는 물론 천막 곳곳에서 새나온 삭풍은 뼈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빨치산의 수감 생활은 인간이
2016.02.04 11:26:23
"빨치산에게 굶주림보다 무서운 건…"
한국전쟁의 애환이 묻어있는 '한정당' 김창근이 좌익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종형님의 영향이 컸다. 그의 사촌형인 김택근(전쟁 전 사망)은 왜정 때부터 공산당 조직원이었고, 김영근(당시 22세)은 전쟁 전부터 좌익 활동을 했다. 김영근은 전쟁 중 거제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뒤 본인의 뜻에 따라 북송된 이후 소식이 끊겼다. 방호산 부대(인민군 6사단)가 순창에 내려오던 시기인 1950년 7월, 의용군에 참여한 김창근이 곧바로 지도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사촌형 친구들이 지방좌익 간부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입산 후 그는 정치부소대
2016.01.30 08:13: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