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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한"검색결과 (전체기사 중 231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
미국은 왜 '반기문 경쟁자'를 무서워했나?
(☞관련 기사 : 샤시 타루르와의 대화 : 팍스 인디카 ① 반기문 아니라 이 사람이 유엔 사무총장 됐다면…) 서아시아 : Look West 이병한 : 인도가 유라시아 지정학에서 중요한 것은 서아시아와도 긴밀하기 때문입니다. 한국서는 Look East가 널리 알려졌지만, 정작 더 활발한 것은 Look West 정책 같더군요. 여기서의 'West' 또한 구미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요. 서아시아, 아랍 세계, 이슬람 세계를 일컫습니다. 타루르 : 서아시아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아프리카도 포함합니다. 아라비아 해와 인도양이 아프리카와 서인
이병한 역사학자
2016.08.17 07:10:05
반기문 아니라 이 사람이 유엔 사무총장 됐다면…
비동맹과 다동맹 2010년 인도에서 발간한 국가 안보 보고서가 흥미롭다. 인도를 세계 5대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다음이다. 식민모국 영국은 물론, 유럽의 최강국 독일보다도 앞에 두었다. 갸우뚱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종합 국력을 산출하는 기준에 시비를 걸어볼 수도 있겠다. 중요한 것은 자의식의 변화이다. 객관적 지표 이상으로 세계 속 인도의 위치와 위상에 대한 자기 인식이 극적으로 변하고 있다. 내가 보태고 싶은 점도 하나 있다. 이 다섯 나라들 가운데 인도가 가장 젊은 국가라는 점이다. 국민
2016.08.16 08:27:54
핵을 꿈꿨던 지도자, 미국이 처단했나?
재출발 1971년은 1947년보다 더한 충격이었다. 심리적, 감정적 동요가 엄청났다. 인도의 대분할은 파키스탄이 주도한 것이었다. 이슬람 국가의 분리 독립을 간절히 바랐다. 반면 파키스탄의 분할은 기필코 피하고 싶은 것이었다. 군사력을 통해서라도 방글라데시의 분리 독립을 저지코자 했다. 그러나 무산되었다. 나라의 동쪽 날개가 떨어져나갔다. 적대적 경쟁국 인도에 군사적으로 완패했을 뿐만이 아니라, 영토와 인구의 절반마저 잃어버렸다. 파키스탄의 존립 자체가 휘청거렸다. 정체성과 정당성 모두 흔들렸다. 고립감도 증폭되었다. 방글라데시는
이병한 역사학자(=라호르)
2016.08.09 08:29:23
방글라데시는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다카 : 혁명 도시 방글라데시는 혁명 국가였다. 68 혁명이 산출한 유일한 현실 권력이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표방했다. 일괄 '인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국명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이라 했다. 더불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였다. 종교적인 근대 국가를 표방한 파키스탄과 척을 졌다. 종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신생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파키스탄 건국이 1947년이고, 이스라엘은 1948년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는 성/속 분리, 정/교 분리를 공식화했다. 이슬람이라는 보편 문명 대신 민족 문화를 앞
이병한 역사학자(=치타공)
2016.08.02 09:43:23
68 혁명이 낳은 나라, 방글라데시
벵골 르네상스 다카 공항의 출구를 나오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열기와 습기가 동시에 덮쳐온다. 40도 더위는 이미 익숙해졌다. 30도만 되어도 청량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북인도 내륙부의 그 타는 듯한 더위가 아니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다. 괴롭기로는 후자가 훨씬 더하다. 매번 새 도시에 가면 하염없이 마냥 걸어 다니는 습관이 있다. 사전 정보 없이, 선입견 없이, 그곳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보는 의례이다. 부러 저녁나절에 서너 시간을 걸었는데도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깔끔한 성격이 아님에도 두세 차례 씩 속옷과 티셔츠를 갈
이병한 역사학자(=다카)
2016.07.26 09:28:36
1962년, 중국이 인도를 먹다 뱉다
갤브레이스의 '인도견문록' 이곳저곳 다니며 남들이 쓴 여행기도 종종 읽는다. 잠들기 전 침실용 독서로 딱이다. 인도만큼 여행기가 많은 나라도 없지 싶다. 방랑벽을 자극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멀리로는 러디어드 키플링부터 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원형과 전형을 확인시켜준다. 키플링을 전복시킨 영국인도 있었다. 조지 오웰이다. 글로써 모국 대영제국의 허위를 서늘하게 까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없지 않았다. 영국과 인도, 유럽과 아시아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다. 오카쿠라 덴신의 인도 여행기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
이병한 역사학자(=카슈미르)
2016.07.19 07:31:2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 카슈미르
비대칭적 분할 체제 펀자브와 이웃한 카슈미르도 쪼개졌다. 분할의 양상은 한층 복잡한 것이었다. 기층과 상층이 크게 어긋났다. 종교와 국가를 균질화하는 '두 민족' 이론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슬림이 다수임에도 인도에 편입된 영토가 훨씬 넓었다. 카슈미르의 3분의 2를 인도가 차지했다. 파키스탄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미수복된 '이슬람의 땅'을 되찾고자 했다. '자유 카슈미르'로 해방하려고 했다. 인도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카슈미르는 초대 총리 네루의 고향이기도 했다. 세속주의 인도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보루였다. 결국, 분
이병한 역사학자(=스리나가르)
2016.07.12 08:06:32
강간하고 또 강간하고…1947 '지옥열차'
붉은 강 파키스탄의 라호르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국경을 넘었다는 실감이 덜했다.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렸을 뿐이다. 시차는 고작 30분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가깝되, 거리감은 적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지 두 번의 항공편만 있을 뿐이다. 연결망이 뜸한 것이다. 그런데도 방금 비행기를 타고 떠나왔던 델리와 몹시 흡사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 외양부터 비슷했다. 시장 풍경도 어딘가 친숙했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부터 흘러나오는 노래까지 내가 석 달을 살았던 마유르 비하르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인도의
2016.06.28 07:23:21
20세기 최대의 분단 국가, 인도와 파키스탄
파열 20세기 최대의 분단 국가는 남/북한도, 남/북베트남도, 동/서독도 아니다. 단연 인도/파키스탄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경험을 공유하는 형제국이자, 세 차례나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기도 하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인도는 13억, 파키스탄은 2억이다. 두 나라 모두 대국인데다, 핵무장 국가이기도 하다. 富國(부국)은 아닐지언정, 强大國(강대국)에는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파키스탄에서 떨어져 나온 방글라데시도 1억을 넘는다. 남아시아가 대분할되지 않았다면, 인도는 진작 중국보다 훨씬 큰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
2016.06.21 07:26:53
인도의 진짜 독립 영웅은 간디가 아니다
도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대영제국의 위신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다고 인도인의 마음이 국민회의로 쏠렸던 것도 아니다. 1942년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 이후 국민회의는 유명무실했다. 간디와 네루 등 지도부가 수감되면서, 사실상 활동 중지 상태였다. 종전 당시 인도인들의 영웅은 국민회의가 아니라 인도국민군이었다. 대영제국에 협력하며 유라시아를 동분서주했던 그 인도군(Indian Army)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군(India National Army)'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에
2016.06.14 09:1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