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2024년 11월 23일 1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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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적십자회담', 앞으로도 가능할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정권의 '전리품' 된 대한적십자사, 앞날 걱정된다
1863년 10월에 창설된 국제적십자사는 인도주의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국제기구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기구가 설립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적십자사의 성격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 여기에 '인도주의'란 이름을 붙여 제도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생겼는가?크리미아전쟁(1854~1856
김기협 역사학자
'북한붕괴' 믿었던 YS정부, 경수로 비용 부담 이유는?
[김기협의 냉전 이후]<50> 1994년 북미회담 지연이 남한 탓? 내막은 '돈 때문'
1994년 8월 12일 제3차 북미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합의 내용은 1년 전 제2차 회담에서 제시된 방향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미국은 경수로를 제공하고 북한은 핵 활동을 줄이고 공개한다는 것이 그 골자였다.이 빤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 왜 1년 넘는 시간이 걸렸을까? 북한이 남한 및 IAEA와의 관계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제3차 회담을 열지
스코틀랜드 독립, 과연 '실패'인가?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독립 할래, 안 할래? 참 쿨~하다!
영국 노동당은 1922년 자유당을 제치고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래 지금까지 보수당과 정권을 다투는 양대 정당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00년 2월 노동자대표위원회(Labour Representation Committee, LRC)의 이름으로 출범해 그해 10월 선거에서 2석을 진출시키고, 1906년 2월 총선에서 29석으로 약진하고 나서 지금의 당명
김정일은 광인(狂人)도 초인(超人)도 아니었다
[김기협의 냉전 이후]<48> 김일성 죽으면 북한 붕괴? 수구세력의 착각
김정일(1942-2011)은 1970년대 초 김일성 '1인 체제'의 후계자가 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공식적 제2인자의 위치에 나서고 1990년경부터 통치권을 분담하고 있다가 1994년 7월 김일성 사망 후 2011년 12월 자신의 사망까지 최고권력자 자리를 지켰다.1인 체제란 1인의 안위에 체제의 안위가 걸려있는 체제다. 김일성 1인 체제는 195
스미스 선장은 정말 타이타닉의 영웅이었을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영국 조사위원회는 왜 '세탁' 활동에 그쳤나
캘리포니안 호가 1912년 4월 5일 런던을 떠나 보스턴으로 항해하던 중 4월 14일 항로에 빙산이 너무 많이 떠 있어서 진행이 어려워지자 스탠리 로드 선장은 배를 멈추고 밤을 지낸 다음 날이 밝은 뒤 항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캘리포니안 호는 약간의 승객도 실을 수 있는 배였지만 그 운항에는 승객을 태우지 않고 있었다.그 무렵 북대서양 항로에는 비정상적
북한 붕괴론의 '확인 사살'이 아직도 필요한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46> 북한 붕괴론의 붕괴, 수구세력의 집착
1927년생의 셀리그 해리슨은 워싱턴포스트 도쿄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을 인터뷰하면서 북한 사정에 가장 정통한 서방 언론인의 하나로 꼽히게 되었다. 그 후 언론계를 떠나 국제관계 연구에 나서면서 최고급 북한 전문가가 되었다. 1994년 6월 사망 한 달 전의 김일성과의 세 시간에 걸친 면담으로 그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하는 미국
미국의 '종북주의자' 셀리그 해리슨
[김기협의 냉전 이후]<45>카터 방북에 대한 두 가지 시각
셀리그 해리슨(1927~ )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한반도 전문가의 한 사람이다. 워싱턴포스트 도쿄 지국장으로 있던 1972년 미국 언론인으로는 처음 북한을 방문한 이래 북한을 여러 차례 방문하며 변화를 살펴왔다.1994년 6월 카터-김일성의 만남에 관해서는 해리슨의 설명에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만남의 바로 며칠 전에 해리슨이 김일성을 만나 비슷한
'북핵 위기' 전환점 '카터 방북', 클린턴과의 교감은?
[김기협의 냉전 이후]<44> 카터와 클린턴의 '짜고 치기'?
2012년 9월 8일부로 카터(1924~ ) 전 미국 대통령이 한 가지 기록을 깨뜨린 것이 있다. 퇴임 미국 대통령으로서 31년 7개월 16일을 채움으로써 1964년 10월 20일 사망한 허버트 후버(1874~1964)의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긴 퇴임 기간의 내용이 충실하다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닮았다. 재임 중 인기가 폭락했다가 퇴임 후 되살아난 카터를
북한의 선군정치, '호전성'으로 이해한다면…
[김기협의 냉전 이후]<43> 北 선제공격론자들, 1994년 경험에서 배우라
남한과 미국의 대 북한 강경파가 북한에 대한 적대정책의 근거로 '호전성'을 내세워 왔다. 1950년의 남침을 비롯해 그런 주장의 근거를 북한이 만들어준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7.4 공동성명(1972) 이후로는 호전성의 수준이 크게 달라졌다. 그 후의 북한 도발은 아웅산 사건, 민항기 폭파 등 1회성 사건으로 나타나, 그 이전의 무장공비 파견처럼 지속적인
'소원수리' 낸 서O삼 병장을 '국가유공자'로!
[김기협의 페리스코프]군, 내부 고발자 보호없이 '뼈 깎는 반성' 말하지 말라
임 병장 사건 윤 일병 사건으로 심란하다 보니 근 40년 전 마주쳤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X사단 의무대에서 서O삼은 내 넉 달 위 고참이었는데, 나이는 몇 살 아래였다. 석사까지 마치고 늦게 군대를 가니 왕고참 중에도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는 묘하게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공고 졸업하고 직장 다니다가 왔다는데, 어찌 보면 무척 순진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