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장르의 종사자들은 문화예술에 대한 비전과 정책에 관심을 갖고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직간접으로 개입하고 있다. 그런데 대중음악은 소외되어 있어서 심지어 '음악'으로 분류되지도 않고 시장의 '콘텐츠'로 다뤄진다. 종사자들 역시 극히 일부만이 작은 규모의 지원제도를 인지하고, 또 그 중 일부가 '다원예술' 혹은 '기타'에 배정된 지원금을 가져가는 실정이다.
자율성은 의존도에 반비례하기에 애초에 수혜를 기대하지 않고 일정 거리를 둔 채 자생력을 중시해온 대중음악이 다른 부문처럼 정책변화에 일희일비하며 휩쓸리지 않게 된 것은 일면 다행이다. 하지만 무관심이 무배려와 몰이해를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안타깝다. 양식을 설명하는 대중음악이란 말이 목적까지 규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은 수익만을 우선순위로 두지 않고 활동하는 대중음악인들의 수가 적지 않다.
▲지방자치제도는 문화예술 진전에 가능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전시이벤트를 통한 치적 생산과 유권자 호객행위를 위한 지역축제 양산이라는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연합뉴스 |
문화예술동네의 일원으로서 지켜보는 지역문화예술정책
물론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이 선거에서 주요하게 다뤄진 적은 거의 없다. 그간 후보들이 노출해온 문화예술정책들은 대개 구체성이 약했기 때문에 정책방향을 정확하게 판별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강조점을 통하여 현안과의 접근도와 문화예술계와의 네트워크 가능성을 예측해볼 수 있었을 뿐이다. 현장의 목소리에 접근하고자 하는가, 또는 접근하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가를 어렴풋이 가늠해보는 정도였다. 그나마 지방선거에선 구체적이고 소박한 아이디어가 상대적으로 눈에 더 띄는 편이다.
지방자치제도는 문화예술의 진전에 가능성을 부여했다. 민주주의 선행사회에서 지역공동체와 지역문화예술의 성장은 함께 이루어졌으며, 사회적 네트워크와 지역사회의 형성에 기여해왔다. 한국에서도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에 문화예술 향유를 지역민의 여가선용 서비스로 인식하고 있으나, 전시이벤트를 통한 치적 생산과 유권자 호객행위를 위한 지역축제의 양산이라는 부작용도 없지 않은 상황이다. 지역문화예술이 행정용어화했음에도 지자체 단위에서 철학을 전제로 한 공공서비스 개념은 약한 편이고, 체감할 수 있는 기회도 산발적이다.
그런데 지역 주민들, 특히 지역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며 커뮤니티에도 속해 있는 이들 다수가 문화적 욕구를 강하게 느끼고 있다. 어떤 강연에서 구체적이고 치열한 고민에서 나왔을 법한 질문을 받고 음악계에서 일하느냐고 되물은 적이 있는데, 그 반문이 얼마나 멍청했는지를 말하는 도중에 벌써 깨달았다. 많은 이들이 소파에 누워 TV보기와 가끔 극장가기 말고도 경험 여하에 따라 다른 체험이 제공되길 원하고 있지만 접촉도가 낮다. 지금까지는 대체로 교회 등의 종교단체가 이러한 욕구를 해소해주며 주민을 흡수해왔다.
더구나 문화예술을 절박한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관심을 가져볼 후순위로 보는 경향과 달리 사정은 그렇지 않다. 예술인 대다수가 소득불규칙성 속에 놓여진 경제적 소외계층에 가깝다. 인권영화의 스태프들이 가장 열악한 인권상황에 처해있다는 농담은 뼈아픈 한탄이다. 그래서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은 생산자와 그들을 지지하는 수용자에게 의미 있는 신호가 된다. 한동안 유행한 창조도시 개념은 원래 예술가들을 받아들여 역량을 강화하고 이미지도 개선하자는 것이었는데, 이는 제 정당과 각 지역, 다양한 커뮤니티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래서 선진적인 지역문화예술정책은 예술가에게 일거리를 제공하는 고용창출이면서 그 성과를 지역사회의 자산으로 가져와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데에 초점이 맞춰진다. 지역특성과 주민욕구를 반영한 지역밀착형 프로그램은 예술(인)과 지역(민)이 결합하여 만든 성과를 공동체의 자산으로 삼게 하는 조건이다. 지역 단위의 장기 계획은 고용창출과 지역사회의 활력이라는 효과를 수반한다. 이 개념은 진보정치세력이 성장한 국가일수록 강하다. 케네디부터 국가차원에서 예술지원정책에 대한 논의를 시작한 미국 같은 보수국가에서도 오바마 정부가 지역사회의 발전을 목적으로 한 예술프로젝트 지원책을 결정해놓았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들을 위한 음악교육(베네수엘라 '엘 시스테마')과 예술인을 학생들의 음악·연극 워크숍에 연결해주는 사례(일본 '도쿄 문화발신프로젝트')는 해외의 예증들이다. 한국에도 시민의 바람과 지역 아티스트의 역량을 연결시키려는 기획이 시도되었으며, 독립예술가들을 통해 소외계층에게 예술향유의 기회를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도 나왔다. 그 결과로 문화예술인들은 소극적이나마 사회적 일자리를 제공받고 소외계층을 위한 문화 나눔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 로컬라디오 지원을 비롯하여 지역특성에 맞는 아이디어와 네트워크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할 여지가 있다.
이를 위해선 문화공간의 건설보다는 활용이, 개별 생산보다는 네트워크의 가동이 더 현실적이다. 번듯한 센터를 지어놓고 활용 못하는 것은 명검으로 쥐 잡는 격이다. (으리으리한 건물 안에서 도무지 무얼 하는지 태반의 주민들은 모르고 있다.) 주민참여프로그램을 활성화하여 문화예술동아리에 계기와 장소를 지원하며 아마추어 예술활동을 장려하는 기획이 가능하다. 문화센터를 동네놀이터 개념으로 접근하여 영화교실과 음악감상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시도도 있다. 동네에서 독립영화와 참신한 음악공연을 볼 수 있다면 멋진 일이다. 특히 근래엔 아동과 학생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이 인기를 끄는데, 실제로는 젊은 부모세대가 호응하기 때문이다. 또한 밴드음악을 경험하고픈 욕구도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선거는 문화예술의 중매쟁이를 뽑는 과정이기도
지역단위의 몇몇 문화재단과 문예회관들 중 일부가 유사한 프로그램을 가동하고 있다. 기시행 지역에선 지자체 선출직이 관심을 가지고 연계를 도모할 수 있고, 미시행 지역에선 사후 공조할 수 있는 차별화된 정책으로 삼을 수 있다. 새로운 프로그램의 실행에 있어 지역 문화원과의 관계도 장애가 되거나 득이 된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문화원들이 보수적인 집단이긴 하지만 동시에 거점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와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자치단체가 문화예술을 중매하거나 최소한 환기해주는 것은 거창하게는 시대의 흐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지금, 예술정책의 화두는 연결이다.
문화예술은 도구이기 이전에 자체로 목적이며, 미래를 위한 투자이다. 납득할만한 성과를 낸다면 해당 정치세력의 이미지 제고와 역량 강화에 득이 된다. 도시지역에선 필수일 뿐만 아니라 도농지역에선 공방활동과 창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으로 적용할 수 있다. 지방선거는 이러한 문화예술공공시스템 구축의 일선에 있는 지자체의 정책결정자(제안자, 지원자)를 뽑는 과정이기도 하다. 드물게 보이는 '건강한 인식'과 현실화 의지를 지닌 정당과 후보를 향한 독려는 생활예술의 동력이 된다. 문화예술은 여흥이 아니라 모두의 생활이자 작지 않은 집단의 생계이고, 삶과 사회의 일부이다. '문화예술'을 '음악'으로 바꿔 읽어도 마찬가지다.
※ 언급한 개념과 사례의 일부는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발간한 《@예술경영2009》에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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