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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일해도 경력은 '제로', 실적은 동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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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일해도 경력은 '제로', 실적은 동료에게…"

[한국의 워킹푸어] 돈 만지지만 돈과 거리 먼 금융권 비정규직②

금융권의 계약직원들은 정규직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하면서 차별대우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성과급도 지급받지 못한다.

금영미(34, 가명) 씨의 사례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차별사회는, 금 씨의 학벌부터 따져 물었다. 능력은 평가 요소가 아니었다.

실적 제일주의

금 씨는 지난 1996년 부산은행 계약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상고를 나온 그가 첫 직장으로 선택하기에, 이만한 회사도 없다 싶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기에, 금 씨는 일찍 문 닫는 은행에서 야간대학 진학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처음 입사 광고를 보니 오후 4시 30분이면 일이 끝난다고 하더라고요. 공부는 계속하고 싶고, 돈은 벌어야 하고. '은행 밖에 없다' 싶었죠.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보니 은행 문 닫고 나서도 한참 일을 해야 하더라구요. 세상 물정을 너무 몰랐던 거죠."

계약기간 3년을 채운 후 더 이상 미뤄둘 수 없단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의 어려움으로 금 씨는 다시 부산은행의 문을 노크해야 했다. 이렇게 그는 은행에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그리고 2004년 10월, 그는 부산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의 조흥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다. 부산에는 일자리가 없었다. 신자유주의를 설파한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영원히 직장을 찾아 헤매는' 삶이 시작된 것이다.

조흥은행에서 그는 병원 파견업무에 투입됐다. 당시 병원 은행점포는 병원비 수납 업무와 일반 예·출금 업무를 한 곳에서 했다. 창구가 번잡하다는 항의가 빗발치자 병원은 병원비수납 전문 창구를 개설해주길 요구했고, 은행은 이를 수락했다. 그리고 금 씨는 병원비 창구로 업무를 옮겼다.

"은행은 실적이에요, 실적. 무조건 실적. 그런데 병원비 창구에 있으니 실적을 올릴 수가 없잖아요. 임금이 팍 떨어지더라고요. 결국 재계약을 못했죠. 실적 안 나왔다고. 병원으로 보낸 건 은행인데."

동일노동, 차별임금

금 씨의 세 번째 직장도 은행이었다. 일자리 정보를 찾던 중 하나은행이 낸 '빠창(빠른 창구)' 공고를 보고 그는 새 직장을 찾았다. 지난 10년 간의 경력은 전혀 인정되지 않았다. 공고는 빠른 창구 텔러에 대해 '시간당 8000원의 시급제며 간단한 입·출금과 동전교환 업무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때가 2007년 3월 26일이다.

당시 하나은행은 통합 후 은행창구를 간단한 업무를 보는 빠른 창구와 전문업무 창구로 세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행을 찾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동전교환을 하러 가서 공과금을 수납하고, 대출 상담을 받고, 신규 카드 가입을 할 수도 있다. 펀드 가입을 위해 갔다가 간단한 입·출금 업무를 같이 볼 수도 있다. 고객 입장에서 창구가 이처럼 세분화되면 오히려 불편함만 커진다.

불평이 줄을 이었다. 지점은 대책을 내놨다. 금 씨와 같은 계약직 텔러가 점점 더 많은 전문업무를 맡게 됐다. 애초의 계약 조건은 깨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은행 간 경쟁이 격화되자, 지점은 실적 판매(신규 카드가입, 보험 판매 등)까지 요구하기 시작했다. 실적 판매는 판매 실적에 따라 인센티브가 나오는 업무다. 정규직원만 하도록 돼 있다. 계약직원은 업무기록 시스템이 달라 실적을 올려도 인센티브를 어차피 받지도 못한다.

금 씨는 자신이 올린 실적을 옆 창구 정규직원 실적으로 계상했다. 그게 끝이었다. 금 씨가 시간당 8000원을 받으며 올린 실적 인센티브는 옆 자리 정규직원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다. 금 씨는 동일노동, 차별임금을 적용받았다.

"본사에서는 당연히 '빠창'에게 실적 주지말라고 하죠. 그런데 안 지켜져요. 당장 지점 실적이 다 체크되는 판이니, 지점장이 눈치를 줘요. 그러면 어쩔 도리가 없어요. 해야죠."

금 씨가 은행에 다니며 싫어한 날 중 하나는 명절이다. 원래 검정색으로 표시돼야 할 날짜가 빨간색으로 표시되면, 금 씨는 그날 임금을 받지 못했다. 출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중 사흘이 설 명절로 잡히고 단 이틀만 출근한다면, 금 씨는 이틀분의 임금만 받았다. 금 씨가 원해서 쉬는 게 아니지만 시간제라는 게 그랬다.

이렇게 일해서 금 씨는 평균 월 130~140만 원 정도를 벌었다. 그리고 작년 3월 25일, 계약이 만료됐다.

▲ 은행창구에서 당신의 자산 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는 그들. 이들 중 상당수는 계약직이다. 능력을 인정받을 가능성은 '제로'의. 차별은 보이지 않게 이뤄진다. ⓒ연합뉴스

고졸·계약직, 차별 꼬리표

그나마 그는 운이 좋은 케이스다. 작년 말, 한 자동차정비공장의 회계파트에 정규직으로 입사했다. 급여가 오르진 않았지만 떨어지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정규직이다. 누구나 선망하는 은행 창구직원의 생활이 끝나니 정규직이란 선물이 떨어졌다. 은행은 비정했다.

10년이 넘게 그의 청춘을 바친 일터를 나왔음에도, 그는 아쉬움은 없다고 했다.

"차라리 은행에 안 들어갔으면, 어릴 때 작은 중소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면 이제 어느 정도 경력도 인정받으면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해요. 은행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죠. 경력이 쌓이니 당연히 제가 정규직 신입사원보다 업무 능력도 더 뛰어나요. 그래도 전 절대 그분들 받는 월급을 못 받죠. '아, 내가 고졸이라서, 계약직이라서 이런 대우를 받는구나'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더라고요."

공부에 대한 미련은 직장생활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다. 계약이 만료되고 일자리를 찾으러 다닐 때 그는 제빵사 자격증까지 땄다. 어쨌든 경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그는 회계 업무를 하지만 사이버 강의로 자동차 관련 업무를 듣고 있다. 언젠가는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하는 거죠."

금 씨의 새 삶은, 이렇게 지난 십여 년을 따라다닌 꼬리표와의 싸움으로 시작했다.

늘어만 가는 금융권 비정규직

현재 국내 금융권의 계약직 노동자 수를 정확히 추산하기란 어렵다. 대략의 수치만 추산할 수 있을 뿐이다. 은행으로만 국한하면 전체 15만여 명의 은행 노동자 중 약 30%인 4만여 명이 비정규직 노동자일 것으로 추산된다.

금융권 노동자의 비정규직화는 90년대 말 외환위기 직후 본격 시작했다. 전국금융산업노동조합이 제공한 자료를 보면 외환위기가 발발했던 지난 1997년 말 전체 은행 직원 12만9000여 명 중 비정규직 노동자는 1만5000여 명(11.6%)이었다. 이 수치는 점차 늘어나 2007년 말에는 전체 행원 13만5000여 명 중 3만8000여 명(28.6%)이 비정규직 노동자로 채워졌다.

시중 은행들이 콜센터 등 수익으로 직결되지 않는 사업부문을 점차 아웃소싱화하는 경향이 늘어남을 감안하면 실제 은행과 관련된 계약직 노동자의 수는 드러나는 수치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급속한 비정규직화는 우선 텔러 업무 등 정규직 업무의 비정규직 대체로 이어졌다. 금 씨의 사례는 대표적이다. 기존에도 계약직이 많았던 용역청경, 기사 등은 아웃소싱으로 전환됐다. 창구업무로 대표되는 수익사업 이외 상당 부분 업무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욱 급속히 진행되는 게 현 추세다.

사회적으로 이 문제가 이슈화되자 은행은 대응책을 내놨다. 무기계약직이 널리 알려진 사례다. 고용의 안정은 보장하되, 정규직과 임금, 복리 등에서 차별을 두는 방법이다. KB국민은행 등 대부분 은행이 이 제도를 도입했다. 금융노조에 따르면 지난 2007~2009년 상반기 사이 1만3817명의 비정규 노동자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했다.

반면 이 기간 비정규 노동자의 정규직 전환 사례는 6862명으로 무기계약직에 비하면 그 수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이들 정규직 전환도 엄밀히 말해 완전한 정규직화로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시중 은행들이 실시한 정규직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기존 6단계 직급체계 하위에 새로운 직급(7급)을 신설해 비정규직 노동자를 흡수하는 방법이다. 부산은행(683명), 대구은행(650명), 경남은행(580명) 등이 이러한 방법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화했다고 언론에 밝혔다.

다른 하나는 작년 말 우리은행이 "3076명의 비정규 노동자를 일괄 정규직 전환했다"며 강력히 홍보한 방법으로, 기존 비정규 노동자들이 일하던 직군을 정규 직군화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은행 창구 업무, 마케팅, 고객상담 업무 등을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계속 그 일을 하게 하고 이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해주는 방법이다.

우리은행 모델은 현재 시중 은행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도입을 고려 중인 방식이다. 국민은행은 기존 Level 1~6로 나뉜 직급제에 Level 0를 새로 추가하는 식으로 이 방식 도입을 고려중이다. 신한은행도 일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추진 중인 가운데, 우리은행 방식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윤석 금융노조 비정규직지부 위원장은 "하위직급 신설은 엄밀히 말해 오랜 기간 일한 비정규 노동자를 최말단 직원인 6급 직원보다 못한 직원으로 재편하는 방식이라 차별"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또 "새 직군을 신설하는 우리은행 방식은 결국 승진, 임금에 차별을 두고 고용안정만을 보장하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차 위원장은 "은행업이 변호사나 의사처럼 국가자격증을 가져야 취업하는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입사해서 일정 기간의 연수를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이렇게 차별 방식만 공고히 한다면 결국 사회적 차별로 강화된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차원의 인식 제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차 위원장은 비정규직의 만연화를 일종의 러시안 룰렛으로 비유했다. 언젠가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닥칠 현상이라는 뜻이다.

"비단 금융권만 놓고 얘기하고 싶지 않다. 모든 직군에서 비정규직화가 심각해지고 있다. 지금은 '내 일이 아니'라고 신경을 끄고 있다간, 언젠가 사회 구성원 모두가 비정규직화의 대상이 된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비정규직화를 막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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