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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다시, 강우석을 말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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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다시, 강우석을 말한다 <3>

[특집] 강우석 감독의 영화, 사회상을 담다

국내 영화계가 부침을 계속할 수록 강우석 감독의 '화려한 부활'을 바라는 목소리가 높다. 강우석의 귀환이 꼭, 충무로 황금기의 또 다른 도래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거기엔 국내 영화계가 산업화 고도화 전문화의 규격에 묶이기 이전, 인간 네트워크로 진행되던 그 무엇의 시절에 대한 향수같은 것이 담겨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우석은 여전히 현재진행적 인물이다. 그는 최근 <백야행>을 제작배급하고 있고 <이끼>는 직접 연출중이다. 하지만 강우석에 대한 평가는 늘 조금씩 왜곡돼 왔거나 저평가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강우석의 '화려한 부활'을 원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비교적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가 선행돼야 한다. 이 글은 바로 그러한 작업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행하는 영문판 감독론 책자 <강우석>의 국문 원고를 일부 수정, 분재해서 싣는 것임을 밝힌다 – 편집자)

강우석의 영화를 통해 거꾸로 한국의 현대사, 지난 20년간의 사회사를 추론할 수가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에 속한다. 강우석이 영화를 만들 때마다 그때그때의 사회적 이슈를 작품 속에 심어놨기 때문이다.

1988년에 만든 데뷔작 <달콤한 신부>는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아이돌 스타급을 캐스팅해 그럴듯한 로맨스코미디처럼 포장해 놨지만 이 영화는 사실, 작품이 발표됐던 1988년의 사회상황을 고스란이 담아내고 있다. 20년전의 한국사회는 급격한 산업화로 계층간 양극화의 1차적 양태인 도시와 농촌간의 빈부격차가 극심하게 진행되고 있던 때였다. 1980년대 억압적인 전두환 군사독재 정부와 그의 뒤를 잇는 의사(疑似) 민주정부는 하층계급의 희생을 통해 소수 특정계층이 부를 축적하도록 보호하는데 주력했다. <달콤한 신부>는 없는 자, 없어서 배우지 못한 자, 그래서 사회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이 여자 (심지어 매춘부에 가까운 이미지의 여성일 정도로 하위 계층인 여성)를 얻는 일이 결코 '달콤한' 일이 될 수 없음을 역설하는 영화다.

▲ 달콤한 신부

<달콤한 신부>는 명백히, 이장호 감독이 1980년에 만든 <바람불어 좋은 날>의 정신적 유산에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 역시 시골에서 상경한 세 남자 덕배와 춘식, 길남이 각각 중국음식점의 종업원과 이발소 견습직원, 여관 종업원(한국에서 이들 직업은 여전히 하층계급으로 분류된다)으로 일하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그린다. 덕배는 중국음식을 배달하러 갔다가 만나게 되는 유부녀에게 연정을 느끼지만 물거품이 된다. 이들 셋은 어느 날 의기투합, 삶을 재충전한다며 근교에 놀러 갔다가 마침 같은 곳에 놀러 온 여대생들을 만나 어울리게 된다. 하지만 이들 셋은 장난삼아 이들을 갖고 놀겠다는 심사의 여대생들로부터 한껏 희롱만 당할 뿐이다. <바람불어 좋은 날>은 누구에게나 신분 상승의 평등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자본주의의 가치가 얼마나 허구적이며 악마적인 가, 그 과정에서 순수한 감성이 어떻게 짓밟히고 파괴되는 가를 코믹하면서도 우울한 터치로 그려 나간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1980년대 한국의 암울한 시대를 우회적으로 알리는 첫 작품이었다면 강우석의 데뷔작 <달콤한 신부>는 1980년대가 여전히 그렇게 저물고 있음을 정리해 낸 작품이었다.

강우석은 뒤의 인터뷰에서도 밝히지만 자신의 영화적 스승으로 이장호 감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유년기 시절부터 영화광이었던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극장을 자주 들락 거렸던 그는 삶에 대한 지식을 영화를 통해 얻었다. 그가 부조리한 한국사회에 대해 눈뜨게 된 것이 역시 영화를 통해서였다는 것은 따라서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강우석의 사회관, 정치관, 인생관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이장호의 <바람불어 좋은 날>이었으며 그가 이 영화를 본 것은 대학에 입학하기 한 해 전인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강우석은 <바람불어 좋은 날>을 통해 영화가 어떻게 사회적 발언의 기회를 확보할 수 있는가, 영화가 사회의 어떤 면을 얘기해야 하는 가를 배운 셈이다.

강우석은 한번도 이장호 감독의 연출부 일을 하거나 그의 밑에서 도제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한국영화계의 기준으로 볼 때 그건 좀 비정상적인 일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장호와 그의 영화 <바람불어 좋은 날>은 강우석의 영화와 그의 영화인생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이후 강우석이 1991년에 만든 자신의 또 다른 대표작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만들게 된 것은 이장호 감독의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는 강우석이 정통 정치영화에 대한 자신의 관심이 영화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입증한 영화였다. 그는 지난 20년동안 자신이 코미디 전문감독 쯤으로 불리우는 것에 대해 종종 불쾌한 반응을 보여 왔다. 그럴 때마다 그가 <실미도>나 <한반도>같은 극도로 정치색이 강한 영화를 만든 것은 과거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욕망때문이었다.

강우석과 그의 영화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종종 저널리스트의 기록처럼 느껴진다. 반정부 투쟁 등으로 들끓었던 1980년대 초반의 대학가를 경험하지 않은 채 대학을 일찍 중퇴했던 강우석은 자신의 산지식을 강의실이나 책,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는 등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라기 보다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에서 찾았다. 그의 영화적 소재의 많은 부분이 정치면보다 사회면에서 얻어진 것은 그때문인데 강우석이 영화를 만들던 초창기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한국신문의 정치면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적 진실은 상대적으로 정치면보다 사회면에 더 많았다. <달콤한 진실>의 모티프 역시 1980년대 후반, 농촌 젊은 남성들이 자신의 지역에서 배우자를 얻기가 어려운 환경과 그에 따른 자살 사건 등에서 구한 것이다.

강우석의 영화가 코미디를 기본 뼈대로 하면서도 종종 우울한 에피소드들을 많이 섞고 있는 것, 그럼으로써 블랙 코미디로서의 성향을 강하게 갖는 것은 그때문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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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강우석을 말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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