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면 영화진흥위원회의 지난 10년은 한마디로 누더기 역사였다. 갈가리 찢겨진 남북분단의 역사도 차라리 이보다는 정리하기가 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1999년 5월 28일 출범한 제1기 영진위(1999년~2002년)는 김지미, 윤일봉, 조희문 위원 등을 한 축으로 하는 보수적 인사들과 문성근, 안정숙, 정지영 위원 등을 또 한 축으로 하는 개혁적 인사들 사이에서 파행에 파행을 거듭하게 된다. 급기야는 2000년 1월 27일 유길촌 위원장–조희문 부위원장 체제가 들어서고 나서는 위원들 사이에서 부위원장 불신임안이 결의되기까지에 이른다. 결국 조희문 부위원장 대신 이용관 부위원장(현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바뀌게 되는 것. 하지만 얘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희문 전 부위원장은 위원들의 불신임 결의에 법적으로 고소하고 이용관 부위원장에 대해서는 업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게 된다. 조희문 전 부위원장은 2001년 7월 원고 승소 판결을 받게 되지만 동시에 부위원장으로서의 복귀는 타당하지 않다는 판결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조희문이든 이용관이든 부위원장직을 맡지 말라는 것이었다.
▲ 영화진흥위원회 |
그로부터 8년이 지났다. 조희문 전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장이 이번엔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친형인 유길촌 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시절 때의 파동을 가장 잘 아는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으로부터였다. 이런 걸 두고 역사의 아리러니라고 하던가. 혹자는 사필귀정이라고도 한다. 조희문 위원장이 와신상담하던 끝에 지금에서야 그 결실을 맺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쪽에서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한탄하는 사람들도 있다. 결국 이번 인사는 넓은 의미의 보복성 인사라는 것이다.
사필귀정인지 보복성 인사인지, 어떤 것이 옳은지는 아직 판단할 때가 아니다. 다만, 조희문 위원장이 임명장을 받은 직후 출입기자들과의 간담회에서 한 말에 주목할 뿐이다. 영화계 내부에 만연해 있는 상호불신과 소통부재의 문제에 대해 조희문 신임위원장은 "영화인들이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많이 하면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원론적인 답변을 하는데 그쳤다. 그 정도면 될까? 그 정도 생각만으로도 영화계의 화합과 대타협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일까? 만약 조희문 위원장이 이렇게 얘기했으면 얼마나 멋있었을까 싶다. '예전에 나를 불신임했던 위원들, 나를 쫓아내고 부위원장이 됐던 이용관 씨 등을 제일 먼저 위원장 집무실로 불러 차 한잔을 마시겠다. 아니면 곧 열리게 될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가장 먼저 도착해 이용관 집행위원장과 나란히 개막작을 보겠다'고. 다음 날 신문 지면이나 인터넷을 통해 그런 사진이 실리게 되는 것은 한낱 상상에 불과한 일인 것일까.
영화진흥위원회 내부에서는 이번 위원장 인사 결과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다고 한다. 그간 3배수로 거론됐던 위원장 후보들 가운데 나머지 두명에 비해 조희문 위원장은 비교적 예측가능한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만 하다. 조 위원장은 인하대 연극영화학과 교수이자 뉴라이트 계열 문화미래포럼의 핵심 멤버로 영화계 안과 밖에서 공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펴왔기 때문이다. 스크린쿼터 축소를 거의 유일하게 찬성해 왔을 만큼 철저한 시장주의자라는 점도 익히 알려진 면 가운데 하나다.
조희문 위원장이 부디 영진위를 잘 이끌었으면 좋겠다. 조 위원장은 전임인 강한섭 위원장이 불필요한 언행으로 자초했던 결과를 의식한 듯 "말은 적게 하고 실행에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다. 최소한 반면교사의 뜻은 알고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2.
영화진흥위원회의 최근 인선을 들여다 보면 마치 한편의 깜짝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조희문 신임 위원장 임명 이후 6명의 위원들 얘기다. 그중 이덕화, 이대현, 정초신 위원 등은 뜻밖의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김형수, 김동률 위원 등은 그간 영화산업이나 정책분야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김형수, 김동률 두 사람은 각각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와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직을 맡고 있다. 높은 학식의 미디어 이론가들이겠지만 난마처럼 얽혀있는 국내 영화산업의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남아있는 잔여 임기는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비상임이다. 의욕과 의지가 있더라도 영화계 네트워크가 그리 많지 않을 터라 위원 활동의 성과를 기대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이덕화, 이대현, 정초신 위원들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평가하기에 좀 이른 감이 있다. 선입견을 가져서도 안될 터이다. 세 사람 모두 국내 영화계에 대한 식견이 남다른 터라 자질에 대해 운운하는 건 결례일 수 있다. 그런데 왠지 신선하지가 않다. 마치 2기와 3기, 그러니까 과거 10년의 영진위 구성을 그대로 따라하는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이덕화 씨는 현재 충무로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라는 점에서 과거 이용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위원으로 임명했던 일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대항마적인 성격마저 느껴진다. 과거의 영진위가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해 친화적 성격을 띠었다면 이번 영진위는 충무로국제영화제를 더 가깝게 두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내친 김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리없는 소문으로 떠돌고 있는, '충무로영화제의 서울국제영화제化'를 위한 단계적 수순밟기가 아닐까라는 의문마저 든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최근 영화계에서는 중구청 주최의 충무로영화제를 서울시 주최로 확장시켜 부산영화제를 제치고 국내를 대표하는 국제영화제로 만들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대현 한국일보 논설위원 및 영화전문기자를 위원으로 임명한 것 역시 과거 안정숙 한겨레 기자가 위원이 됐던 것과 대칭된다. 안정숙 기자는 위원장까지 역임했다. 그렇다면 이대현 기자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냐는 뜻으로 읽힌다. 정초신 감독 역시 과거 이은 감독 등 영화업계 종사자가 위원회 활동을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신선하지 않다고 한 것은, 우리사회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잃어버린 과거 10년'의 슬로건을 내세우면서도 바로 거기서 사용했던 인선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좀 다른 방식은 없었을까. 영진위 위원 구성은 늘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저울추가 왔다갔다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으며 거기서 탈피할 수 있는 방법론을 개발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래 가지고서는 영진위가 국내 영화산업의 각종 현안들을 앞장서서 풀어나가는, 명실공히 정책기구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 임명된 영진위원들과 위원장은 할 일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당장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250억 중형펀드 결성을 위해 창투사를 선정해야 한다. 10개 가까운 업체가 공모를 한 가운데 이중에서 단 한 개사만을 선정하게 돼있다. 깔끔하고 공정한 심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강한섭 위원장이 전격 사퇴하고 새 위원장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영진위는 영화인들로부터 많은 부분 기대를 잃은 것이 사실이다. 그 와중에 영진위 예산으로 한나라당과 친박연대 국회의원 4명을 베니스영화제에 외유케 해 비난을 사기도 했다. 신뢰회복이야말로 영진위의 가장 큰 당면과제일 것이다. 부디 조속한 시일 안에 믿음을 주기를 바랄 뿐이다.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395,396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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