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글과 함께 하단에 있는 '강의 듣기' 서비스를 통해 생생한 육성 청취도 가능합니다. 이번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선학태 전남대 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
독일 연방사의 우여곡절과 전략적 선택
독일이 합의제 정치시스템을 작동시켜 민주주의가 모범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정당 간에 수평적으로 권력을 분점 공유(제1편 참조)하는 데만 연유하지 않는다. 독일 합의제 정치는 수직적으로도 국가권력을 분점 공유하는 연방제 및 상·하 양원제를 채택했다. 이게 전후 독일 여러 지역 간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제도적 인센티브로 작용했고 종국적으로 통일 드라마를 연출해 내는 동력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독일이 연방제 국가가 되기까지에는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독일은 1815년 비인의정서 성립 후에 역내에서 공간적 지배권을 행사하던 39개 주권적 제후국들로 구성된 매우 느슨한 '독일연합'으로 머무르다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최초의 연방국가 형태로 독일제국이 탄생했다. 이런 독일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분리주의 경향이 발생하자, 1918년 등장한 바이마르공화국은 이를 막기 위해 중앙집권적 국가 요소를 강화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나치정권(1933~45)은 철저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수립한 바 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다시금 연방제 국가로 부활했다.
독일은 강한 정체성을 갖는 단일 게르만민족의 연방제 사례이다. 독일은 미국, 스위스 및 캐나다 등에서처럼 문화적 사회적 정체성의 다양성을 통합하려는 수단으로 채택한 연방국가가 아니다. 앞서 지적한 과거 수많은 주권적 제후국들이 역내에서 상호 공간적 지배를 인정했던 것처럼 현행 독일 연방제도 각 지역이 역내에서 공간적 지배권 행사를 인정하는 성격을 갖는다. 독일 사회는 지역 간에 서로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독일 정치인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설계된 측면이 강한 연방제라는 얘기이다.
한마디로 독일 연방제는 정치인들의 전략적 선택에서 비롯된 작품이다. 이를 통해 그들은 다수 지역과 소수 지역을 동시에 배려하는 사회통합을 구축함으로써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협력적 연방제
독일 연방제는 옛 서독에 11개 주(州)가 있었으나 통일 후 동독지역의 5개 주가 추가됨으로써 현재 16개 주로 편성돼 있다.
연방정부는 입법영역에 중점을 두는 반면에, 주정부는 연방 수준에서 제정된 법안의 집행을 주로 담당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다. 국정 업무 가운데는 연방정부도 집행에 참여하는 영역이 있는 반면에, 주정부도 업무에 따라서는 입법을 담당하는 분야가 없지 않다. 그리고 주요 정책결정 과정에서 주(지역)와 연방(중앙)의 대등한 위치가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다.
연방정부 혹은 주정부가 제출하는 법안의 경우 연방만이 법을 제정할 수 있는 영역, 연방과 주가 경합적으로 입법할 수 있는 배타적인 영역, 연방이 원칙적 테두리를 정하고 구체적 사항은 주에 위임하는 위임입법 영역 등으로 나눠 있다. 연방고유의 입법사항은 외교, 국방, 통화, 관세와 통상, 국적과 이민, 철도와 항공, 우편, 전신과 전화, 통계 등이고, 주 고유의 입법사항은 교육, 경찰, 문화예술 등을 포함한다.
독일 헌법은 연방과 주 간에 이뤄지는 입법과 집행 과정이 기능적으로 상호의존 관계에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이에 기초하여 연방과 주 간은 말할 나위도 없고 주 간에도 정책협의와 협력이 유기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독일 연방제를 '협력적 연방주의'로 부르고 있다. 이는 연방과 주의 독자성이 강하고 업무영역이 비교적 뚜렷이 구분되는 미국의 '대립적 연방주의'와 대조를 보이고 있다.
실제 연방과 주 간에 협력에 기반을 둔 의사결정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우선 주정부는 연방상원을 통해 연방법률 제정에 참여하고 연방차원의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책결정의 결과에 책임을 공유한다. 둘째, 연방과 주 간 상호협상을 통해 결정된 안건들은 연방상원이나 주의회의 승인을 받도록 돼 있다. 셋째, 연방수상과 주지사 간,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행정부처 간 회동뿐만 아니라 연방·주합동위원회가 제도화돼 있다.
이 같은 협력적 의사결정 시스템은 특히 재정 부문에서 가시적으로 작동한다. 재정운영에서 연방정부-주정부 간의 배분뿐만 아니라 주정부 간의 배분에서도 엄격하게 균등주의 원칙이 고수되고 있다. 여기서 재정 균등주의 원칙이란 연방 재정 파이를 모든 주에 획일적 기계적으로 동일하게 배분한다는 게 아니라 상대적으로 부유한 주와 가난한 주 사이에 차등적으로 배분하여 독일 전 지역 간의 생활수준이 균등하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를 위해 지속적인 토론을 통해 타협을 끌어내는 재정균등화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소수 지역이라 하더라도 연방 재정 배분에서 일방적으로 소외받는 일은 당연히 사라진다.
이 같은 협력적 의사결정 시스템 작동 과정은 비록 합의에 이르는 진입장벽은 높지만 협상과 협력에 의한 공동결정이 이뤄져 집행과정에서의 저항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즉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에 정책결정권의 분점 공유를 통해 중앙과 지역 간, 지역과 지역 간의 이해관계가 조정 관리되고 사회통합이 이뤄진다.
균형적인(?) 상·하 양원제
독일 연방제는 입법권을 분점하는 상·하 양원제와 조합돼 있다. 본시 연방제와 양원제는 제도적으로 친화성을 갖기 때문이다. 양원제에서 인민대표성은 하원에, 지역(주)대표성은 상원에 각각 부여하는데 상·하원의 권한은 거의 균형 상태에 근접한다.
ⓒ독일하원 |
우선 연방하원은 제1편에서 논의한 바 있는 '2표 연동형 혼합제'에 의해 선출된 약 656명으로 구성되고 전 국민을 대표하여 임기 4년 동안 입법 기능을 수행한다. 또한 연방하원은 연방대통령의 추천에 따라 연방수상을 선출하여 연방정부를 구성한다. 그리고 연방하원 의원은 내각 각료를 겸직함으로써 연방하원과 연방정부를 연결한다. 연방하원과 주의회의 정당 지도자 간, 연방하원 의장과 주의회 의장 간의 회동이 제도화돼 있다.
다음으로 연방상원 의원은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해서 주의회에 의해 추천되면 최종적으로 주정부에 의해 임면된다. 그들은 보통 주의원 혹은 주정부 행정 각료인 경우가 많다. 16개의 주를 대표하는 연방상원은 정원 68명 의원으로 구성되는데 그들의 임기는 정해져 있지 않고 회기에 따라 주의 대표자로 참석한다. 연방상원과 연방하원 간 정책 및 입법협의를 수행하는 양원조정위원회가 설치돼 있다.
여기서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연방상원이 연방(중앙)에 대한 주(지역)의 평등한 협상기회를 보장하는 헌법적 기구라는 점이다. 즉 연방상원은 주정부를 대표하여 연방정부의 행정부문,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뿐만 아니라 연방 차원의 입법기능에 참여하는 데 매개 역할을 수행한다. 특히 각 주의 이해관계와 관련되는 재정이나 행정권에 관련되는 법안 등 연방헌법에 규정된 일정한 법률은 반드시 연방상원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이를 통해 연방과 주 간, 주와 주 간의 이해관계가 조정 관리된다.
독일 연방상원 의원은 토론이나 표결과정에서 정당의 이익보다 자기 주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주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같은 정당이 집권한 주끼리 연합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다른 정당이 집권하는 주들과도 연합이 이뤄지곤 한다. 이 때문에 연방정부는 다른 정당이 집권한 주와는 말할 나위 없고, 같은 정당이 정권을 잡고 있는 주와도 사전에 긴밀히 정책협조를 구해야 안정정인 국정 수행이 가능하다. 이런 메커니즘은 자연스럽게 연방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운영을 막고 연방정부와 주정부 간의 협상과 타협을 이끌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특이한 점은 독일 연방상원 의원들은 표결과정에서 의원 개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게 아니고 소속 주정부의 위임이나 지시에 따른다는 사실이다. 이 때 연방상원에서 각 주는 주가 보유한 표결권 수를 일괄적(한 묶음)으로 행사한다. 이러한 투표 방식은 약간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독일 상원을 미국 상원(연방정부 및 주 대표기관)보다 더 강력한 주 대표기관으로 만드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연방상원의 결정사항에 대한 투표권은 각 주의 인구비례에 따라 차등을 두고 있다. 즉 인구 200만 명 이하인 주는 3표, 200만 명 이상인 주는 4표, 600만 명 이상은 5표, 700만 명 이상은 6표를 행사한다.
연방상원의 비토권: 주의 정치적 안전망
주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는 정치적 안전망은 연방상원의 비토권이다. 독일 상원의 비토권은 상원의 정당구성이 연방정부의 정당구성과 다를 때 그 진가를 발휘한다. 즉 연방내각에 참여하지 못한 야당이 상원의 과반수, 혹은 3분의 2를 장악하면 상원의 비토권 행사 때문에 연방정부는 상당히 어려운 정치적 난관에 봉착한다. 이 경우 연방정부를 구성하는 정당은 연방상원의 다수당인 야당과의 정치적 타협이 불가피해진다. 그렇지 않는다면 연방정부의 국정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정상적인 국정 수행을 위해서 연방 집권여당은 야당과 대화와 소통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연방상원의 거부권은 연방정부를 견제하면서 주정부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는 강력한 제도적 안전망이다. 이에 힘입어 총선으로 인해 하원의 정당 의석 분포가 급격하게 변하는 경우에도 연방차원의 의사결정 과정의 변동이 최소화돼 입법과정이 안정적으로 작동된다.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어 하원 의원수가 적은 주도 정치적 피해를 볼 개연성은 낮아진다.
뿐만 아니라 연방하원에서 다뤄지는 법안 논의는 연방상원의 거부권을 의식해 무리하게 진행되는 일이 없고 '날치기 통과'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연방 입법과정에서 상원의 승인을 요구하는 입법 분야의 비율이 약 40% 정도에 달하기 때문에 연방상원의 거부권은 하원의 입법과정에 제동을 걸 수 있으며 따라서 연방정부의 국정운영은 연방상원, 그리고 이에 의해 대표되는 주정부의 동의와 협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독일에서 연방정부의 일방통행식 국정 드라이브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연방정부에 대한 연방상원의 거부권 행사 가능성은 지역, 특히 소수지역의 이해관계를 보호해 지역갈등을 조정하는 독일 합의제 정치의 안정 망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상원 비토권 축소 vs 주 입법권 확대
연방상원의 과도한 거부권 행사로 말미암아 때때로 연방정부 국정수행이 어려움에 봉착하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06년 이를 불식하기 위한 독일 기본법 개정이 있었다. 그 핵심은 연방 입법과정에서 상원의 승인을 요구하는 입법 영역(상원의 비토권 대상)을 55%에서 약 40%로의 축소하는 데 있다. 즉 주가 연방상원의 입법과정을 통해 연방정부의 정책결정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여 주 이해를 관철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축소시킴으로써 연방정부의 권한이 부분적으로 강화된 셈이다.
대신 독일 개정 기본법은 주에 일정 부분의 입법권을 허용하는 조치를 담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연방과 주의 입법권은 배타적인 입법권과 경쟁적 입법권으로 구분되는데 독일 헌법은 연방에게 입법권이 부여되지 않는 경우 주가 입법권을 갖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연방의 입법권 독점을 시정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연방과 주 간 입법권 분점을 목표로 하였던 2006년 연방개혁에서는 환경법과 공공서비스법의 일부를 포함한 16개 입법권 영역이 주 의회로 이양했다.
결국 2006년 연방개혁은 연방 입법과정에서의 상원의 영향력을 축소하고자 했던 연방과 주 의회의 입법권을 확대하려는 주 사이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이뤄진 것이다. 이 점에서 독일 연방제는 한편으로 중앙을 중심으로 결집하려는 구심력, 다른 한편으로 중앙에서 일정한 독자성과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원심력이 평형점을 찾아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은 지역이해 조정과 통독의 내적 동력
독일 정치는 연방과 주 간에 권력분점(독자적 정책결정권)과 권력공유(공동 정책결정권)라는 연방제와 양원제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지역의 이해관계를 조율 관리한다. 이런 국정 운영의 틀을 활용하여 독일은 사회통합과 화합을 다져나가면서 민주주의를 모범적으로 발전시키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옛 서독 합의제 정치시스템이 독일 통일의 내적 동력이 됐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서독이 치열한 경쟁과 수적 우위로 정치적 승부를 가리는 다수제 정치시스템을 작동시켰더라면 독일통일은 이뤄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주시하다시피 옛 동독은 서독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구분포에서나 지역적 경제적으로 열세에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 승자독식을 강제하는 다수제 정치시스템, 즉 토착 동서독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국회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절차를 밟았다면 옛 서독에 지지기반을 둔 정치세력이 통일국가권력을 거의 싹쓸이하는 시나리오가 현실화 됐을 것이다.
옛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런 사태를 그대로 좌시하고 감내할 수 있었을까? 그들에게는 다수제 정치시스템에 의한 동서독 통일이 곧 자신들의 정치적 사형선고로 인식되는 두려움과 공포심 그 자체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아마도 피를 뿌리는 필사적인 군사적 대결을 불사해서라도 통일을 저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독 합의제 정치시스템에는 공산당까지도 법적 정치적 이념적 공간을 허용하고 정치적 소수파도 연립정부에 연정 파트너로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열려 있었다(제1편 참조). 게다가 지역의 정치적 경제사회적 차별을 제거하기 위해 연방정부에 대한 모든 주(지역)의 평등한 협상기회와 영향력을 보장하는 협력적 연방제, 지역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상원의 강력한 비토권 등 정치적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동독 공산당은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동독 공산주의자들은 통일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유혈 저항을 감행하지 않고 서독 합의제 정치시스템이 허용하는 합법적 정치적 공간 속에서 미래를 기약하는 무저항의 차선책을 택한 것이다. 동독은 서독에 흡수되지 않고 스스로의 선택으로 서독 연방을 구성하는 주로 편입되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와 같이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은 독일 사회의 지역 간 이해를 조율하고 독일 통일의 제도적 인센티브로 작용한 것이다.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분단체제로 고뇌와 번민을 거듭하는 한국 정치가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영남과 호남 간, 수도권과 지방 간 그리고 남과 북 간에 도도히 흐르는 갈등과 분열의 강(江)에 화합과 통합의 오작교(烏鵲橋)를 놓는 데 독일 합의제 정치시스템이 시사하는 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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