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용산은 '빈자의 권리'를 일깨운 '열사의 성지'입니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용산은 '빈자의 권리'를 일깨운 '열사의 성지'입니다"

[권은정의 WHO] '용산을 지키는 사제' 이강서 신부

"오늘은 용산 참사 200일하고도 하루가 지나는 날입니다. 오늘 미사는…."

이강서 신부의 간결하고 분명한 목소리가 미사 참례자들 사이로 울려 퍼진다. 용산거리 미사가 시작되는 7시. 여름 저녁이라 아직 하늘은 환한 빛이다. 서쪽 구름사이 붉은 기운이 해질녘임을 말해준다. 아이파크빌, 신용산역…. 주위에는 하늘 높이 빌딩이 솟아있다. 남루한 철거 지역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첨단고층빌딩, 그 먼 거리감 때문에 용산 4구역은 현실감 없는 거대한 영화세트 같다. 죽음도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이 스친다.

더운 오후 용산은 막막하고 서럽다. 인색하게 부는 바람에 약간씩 펄럭이는 깃발과 그림들, 얼기설기 함부로 막아놓은 건물 입구, 불에 탄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남일당 5층 건물, 오늘도 기다린 날에 하루를 더 보태야한다는 절망감이 용산을 지키는 이들의 목을 죈다.

그러나 슬픈 표정의 용산은 미사 시작 전부터 차츰 생기를 띤다. 먼지 일던 길가에 물을 뿌리고 청소한 다음 제대를 준비한다. 십자고상과 촛불이 날라져 오는 사이 사제들은 제의를 갈아입는다. 미사를 공동 집전하기 위해 전국 각 교구에서 사제들이 일정을 맞춰 용산으로 달려오고 있다. 어느 사이 플라스틱 의자며 돗자리로 마련된 자리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미사에 들고 온 촛불로 어둠이 내리는 주위는 밝아지고 평화로워진다. 상복을 입은 유가족들의 맨 앞줄에 앉아있다.

"요즘은 유가족들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기운이 유족들에게 힘을 주거든요."

▲ 이강서 신부. ⓒ박김형준
이강서 베드로 신부는 서울 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공식 직함을 가지고 용산 참사 현장에 나와 있다. 가톨릭에서 용산 참사 현장을 사목 현장으로 인정한 것이다. 서울 대교구 사회사목 분야에서 빈민사목이 시작된 지는 20여 년 된다. 빈민사목회는 개발 지역에서 핍박받는 도시 철거민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서울 시내에만 해도 200여 군데에 걸쳐 철거가 진행되고 있거나 예정되어 있다. 살던 터를 잃고 쫓겨나가는 사람들에게 교회가 힘이 되어주는 게 빈민사목위원회의 활동 목적이다. 가톨릭이 왜 용산에 나와 있는지 딱 한 가지 이유만 대라고 하면 바로 그것이다.

이 신부는 용산 사고 현장이 일어났던 날을 이렇게 떠올렸다.

"1월20일, 경악을 금치 못한 그 사고가 있던 날, 달려왔었지요. 말할 수 없는 심경이었어요. 그 상황을 보고 주교님께 보고했습니다. 그게 제 의무니까요."

하지만 곧장 가톨릭에서 이곳에 들어와야겠다고 판단한 것은 아니다.

"범대위가 결성되고 유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였고 국민들이 이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지만 풀어나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정부가 사과를 하고 또 적절한 수순을 거쳐서 해결할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렇게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용산 참사 희생자 추모 대회가 경찰의 불허로 막히고 범대위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면서 2월 초순쯤에 범대위와 유가족이 용산 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기 위해 명동성당에 들어오려고 했다. 그런데 명동성당이 교회 지침에 따라 남대문 경찰서에 시설 보호 요청을 하게 되면서 농성은 어렵게 되었다.

"일부는 성당에 들어와 있고 일부는 밖에 있는 안타까운 형국이었어요. 범대위 측은 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시한부로 농성을 하겠다고 했지요. 성당 측에서는 농성이란 게 늘 장기화되는 특색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려워했는데 그 약속을 믿어달라고 제가 나섰어요. 우리빈민사목 위원회가 보증을 서겠다, 그랬지요. 교회도 전격 수락했고 범대위도 시간을 지켰고, 그렇게 범대위와 우리 사이에 신뢰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때 그렇게 중재 역할을 했던 게 제가 여기 이렇게 있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이강서 신부는 벌써 반 년 전의 일이 되어버린 그 때를 일지를 넘기듯 또박또박 이야기해주었다.

지금 이 신부와 문정현 신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기도 천막, 그렇게 다 같이 용산을 지키고 있다. 다른 종교단체와 시민단체가 힘을 보태고 있지만 용산 현장에서 가톨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된 연유를 더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사고가 난 지 두어 달이 지나도록 시신은 영안실에, 철거민들은 유치장에, 유가족들은 철거지역에 갇혀 있을 뿐,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던 3월 즈음이었다.

"부활축일이 4월12일이었어요. 저희 빈민사목에서는 해마다 부활축일이면 가난한 현장에서 미사를 드리는 전통이 있는데 올해는 부활축일미사를 용산에서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유가족에 대한 위로를 우리 교회가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정부나 사회가 해주지 않으니까요.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 이름으로 정식으로 교회의 재가와 승인을 받아서 하기로 했습니다. 용산 희생자와 유가족을 사회적 약자로 선택한다는 교회 메시지를 선포하고 미사로써 실행에 옮긴다는 계획이었지요."

사제가 어디서 어떻게 미사를 올리는가에 대한 정당성은 주교가 교회법으로 승인한다. 용산 거리에서 성스런 미사 의식을 위해서는 교회의 '승인과 재가'가 매우 중요한 절차이다.

그런데 용산 미사 실행이 좀 당겨지게 되었다. 3월말에 문정현 신부가 현장에 참배차 왔다가 그냥 자리를 잡고 앉아버린 것이다. 그날부터 미사가 시작되었다.

"사제가 할 수 있는 게 미사밖에 더 있느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시작된 거지요. 원래 계획보다 일정이 좀 앞당겨진 셈이 되었지요."

부활 축일미사부터 이 신부가 맡게 되면서 매일미사에 대한 교회의 재가도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얼마지 않아 용산을 바라보는 가톨릭 사제의 입장이 더욱 공고해졌다. 이 신부 자신이 사제 연례피정을 용산 현장에서 하기로 한 것이다. 천주교회에서는 사제들의 영전인 재충전을 위해 1년에 8일간 기도와 묵상으로 수련 기간을 갖는 전통이 있다. 일반적으로 피정을 하는 사제들은 세속의 소음이나 부산스러움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찾아간다. 그런데 이 신부는 여드레 날 동안 용산 사고 현장에서 부대끼며 하느님과 지냈다.

"세상이 교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마 광야에서 40일을 지낸 예수의 고행을 떠올리며 피정을 보냈을 것이다. 기도와 묵상은 핍박받는 이웃과 함께 하는 가운데 가장 진실하게 이뤄진다는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아예 용산에서 눌러 앉았다.

"피정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를 해야 하는데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남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주교님께 유가족을 뒤에 두고 차마 나올 수가 없으니 장례를 치를 때까지 지내겠다, 빈민사목위원장으로 남아 있겠다, 말씀드렸지요. 유가족을 돌보라고 승인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든 장례를 치루겠지 했는데, 어떻게든 장례를 쉽게 치룰 것 같지가 않습니다. 장례를 치룰 때까지 우리는 공동 운명체입니다."

ⓒ박김형준
유가족들이 이 신부로부터 큰 위로를 받겠다고 말하자 그가 잠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문 신부님이 오셨고 6월 중순부터는 신부님들께서 기도 천막을 펼치고 함께 기도하면서 현장을 지켜주시니 분명 큰 위로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신부는 그간 긴 시간동안 현장을 지켜보았다. 지금, 용산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 각별한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변화'로 설명했다.

"일상의 변화, 이해의 변화, 그리고 의미의 변화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난 3월말이나 4월초순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었어요."

이 신부는 그때를 유가족들이 '말도 안 되는 형편에 처해있었다'고 표현했다. 그와 문 신부가 자리를 지키기 전 용산은, 사람이 죽어나갔지만 누구에게도 애도의 분위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희생자 유가족, 전철연 식구들, 순천향병원 영안실에서 투쟁하는 이들, 모두가 벼랑 끝에 내몰린 형국이었다. 용역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철거를 강행했고 경찰은 철거민을 범법자로 취급하였다. 쫓겨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저항하는 유가족들과 철거민들, 그들을 억압하는 용역과 경찰, 충돌은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났고 폭행은 일상이 되어버렸다.

"매일 싸움판이었어요. 유족들이 겪는 수모란 어이가 없었지요. 극단적이고 극한의 감정으로 치달아갈 수밖에요. 절망감과 좌절, 그들이 그것을 분출하는 유일한 길은 분노였어요. 그게 너무 딱했어요. 눈물이 날 정도로…. 우리 교회가 제일 먼저 할 일은 유가족들과 철거민들을 옹호하는 것이었어요. 이들의 요구는 정당하다! 우리도 목소리를 함께 냈지요."

그때 문정현, 이강서 두 사제가 아니었으면 용산은 벌써 끝났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미사가 시작되면서 달라진 것이다. 경찰도 미사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미사 이외에 모든 것은 불법, 언제든 연행이 가능했다. 분향소와 농성장은 불법시설 점거였다. 틈만 나면 경찰은 분향소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였고 구청직원들은 낫과 망치를 들고 와서 농성 텐트를 때려 부쉈다.

지난 6월 15일 정의구현사제단의 기도 천막이 용산에 들어서면서 감시와 협박은 더욱 드세졌고 충돌은 피하기 힘들었다. 그 가운데 사제들이 폭행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교회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찰은 교구청까지 가서 공개적으로 사과하고 주교 명의의 유감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경찰이 곤욕을 치루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곳은 일종의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경찰이 예전처럼 유가족을 압박하거나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는 일이 거의 없는, 그런 변화가 생긴 거지요. 유가족이 오늘은 아무 일이 없이 지나갔다, 이렇게 말하는 그런 일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일, 그 완충장치를 저희가 해낸 것입니다."

결국 두 사제가 온몸으로 그 완충의 언덕을 쌓아올렸다는 말로 들린다. 그리고 진정한 변화가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박김형준
이 신부가 말하는 현장에 대한 해석의 변화를 들어보자.

"이곳은 끔직한 참사 현장, 외면하고 싶은 곳이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에둘러 가지요. 재수 없는 곳, 사람이 죽은 곳, 투쟁가만 터져 나오고 유가족들의 성난 표정이 보이는 곳이니까요. 범대위 단체 활동가들 소수만 와있고 사회문제에 대해 그리 예민해 하지 않는 이들이 오기 어려워하던 곳이었지요. 그런데 사제 둘이나 와서 살고 있으니 알고 있던 신자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에요. 전문 운동가들만 오던 곳에 일반 시민들이 오기 시작한 것이지요.

같이 애도하고 아파할 수 있는 곳, 그런 자리로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엄마손 잡고 아이들이 미사오고 꽃이나 초를 들고 분향소를 찾는 게 어렵지 않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유가족들의 경직된 표정에 웃음이 생기고 여유가 생겨났습니다. 지금 학살의 현장은 그대로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아픔, 우리가 끌어 안아야할 우리 사회의 슬픔이 폭넓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변화가 지난 6개월 간 있어 온 거지요."

확실히 용산 미사는 힘이 있었다. 세상의 미움과 분쟁을 소거해주고 잠시나마 사람들은 평화안으로 들어앉을 수 있었다. 퇴근길 지나가던 행인들도 저녁미사에 동의의 눈길을 던지는 듯했다.

물리적으로 강력한 공권력에 대항하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저항도 한계가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사는 제3의 길이었다. 미사 시간만큼은 경찰이 불법 시위라고 마이크를 대고 소리치지 않는다. 그리고 미사에는 누구든지 올 수 있지 않은가. 평소 사회 운동에 관심이 없는 이들조차도 희생자와 남은 가족들에게 작은 위로와 지지의 마음을 보태줄 수 있다.미사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모인 마음들이 어떤 날은 수십 명, 어떤 날은 100명, 200명, 반년이 된 날에는 2000명이 넘어서기도 했다.

"우리는 결의대회, 추모집회라는 명분이 아니라 미사로도 사람을 모을 수 있고, 외치지 않아도 지지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 것이지요. 미사 자체가 그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미사도 사회운동에 일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용산미사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미사는 거룩한 장소에서 드려져야한다. 천주교회에서는 미사가 거행되는 성전을 특히 거룩하게 여긴다. 용산은 그 거룩한 미사가 드려지고 있으니 이제 거룩한 장소가 된 셈이다. 이 신부의 말대로 현장의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졌다.

이 신부가 자신이 발견한 변화를 계속해서 설명해준다.

"의미의 변화인데요. 우리 사회에서 철거민은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용산 희생자들에 대한 태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죽은 이들에 대한 예의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생존권을 위해 저항하는 이들이 적으로 취급받는 현실입니다. 이곳에 상주하면서 용산 문제가 여러 의미를 잉태하는 것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두드러지는 사실이, 우리 사회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지요. 우리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지고 있다고 믿었지요. 그런데 용산의 현실은 존엄한 취급을 받는 인간은 따로 있다는 것, 그 보편가치가 보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도록 해줍니다. 인권 신장은 허위, 인권은 권력에 밀착된 이들에게 한정되었다는 사실, 용산은 돈이나 학벌, 지위가 없으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 단적으로 암시해주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헌법이 명시한 국민의 기본권-생명권, 건강권, 노동권, 교육권, 재산권-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산권이고 나머지는 전부 부차적인 권리일 뿐이라고 말하는 나라에 우리가 살고 있구나, 우리의 기반이 탄탄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현실을 용산 참사 현장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더욱 골 깊어지는 양극화, 화해하기 점점 어려워지는 민족 공동체, 소비 만능주의로 치닫는 사회풍조…. 이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모든 질문을 용산이 던지고 있다고 이 신부는 목청을 높였다. 평화로운 사회, 기회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용산에 오면 누구든 그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될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이 신부는 용산 희생자들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열사인 이유를 이렇게 강조한다.

"처음엔 참사의 현장이었으나 지금은 가치를 되묻게 하고 가치를 회복하는 시발점, 가난한 이들이 주거권, 생존권을 회복한 역사적 성지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시대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인권, 기본권, 상생의 민족 공동체를 향한 발전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게 될지도 모르지요. 이런 식으로 의미가 진화, 승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섯 분의 죽음이 이런 의미를 선물로 남겨주었다는 점에서 이분들은 참사의 희생자가 아니라 열사라고 불리어져야 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신부는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해 둔 성명서를 읽어 내리듯 자신이 바라본 용산을 세밀하게 보여주었다. 용산 문제는 요즘 그의 매일 묵상 한가운데에 있다. 오래전부터 빈민사목활동을 해온 이 신부에게 용산의 고통과 상처는 새삼스럽지 않다. 우리사회의 아픔에 그는 단련되어온 사람이다.

ⓒ박김형준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남일당 본당신부라고 한다. 처음엔 문 신부가 그렇게 불리어졌지만 은퇴한 문 신부가 자신은 보좌신부로 남겠다며 주임신부자리를 넘겨주었다고 이 신부가 웃으며 말한다. 사제서품 받은 지 19년이 되었다. 빈민사목활동은 신학대학을 다닐 때부터 관심을 둔 분야다.

"빈민 활동 하시는 선배 신부님들, 특히 정일우 신부님을 보면서 아, 나도 사제가 되면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서울 상계동 철거민들과 함께 했던 정일우 신부와 고 제정구 의원을 보면서, 가난한 영혼으로 평생을 사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더 복되게 사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자부심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신부가 처음 활동을 시작한 곳은 서울의 개발지 삼양동 달동네였다. 너무도 가난하여 사람이 죽어도 예를 갖춰 묻어줄 수조차 없었다. 그냥 거적에 말아서 쓰레기장에 버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한탄이 나올 정도였다.

빈민사목으로 달동네에서 시작한 그의 걸음이 오늘 용산에 이르렀다. 가난한 사제로서, 더욱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이 힘들지 않을까? 그가 별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가난을 궁핍하고 남루하게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닙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고 덜 갖는 삶이지요. 우리는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안달이지요. 덜 가지려고 하는 삶, 그 방향으로 가야하는 거 아닌가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마태오복음 19장 21-22절)'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르고자 애쓰면서 살아온 지 십수 년이 되어간다. 빈민사목위원회 위원장으로 일한지는 4년째다. 그는 현재 서울시내 4개의 선교본당 중에 장위1동을 맡고 있다. 천주교에서 선교본당은 지역 중심의 본당 개념과 좀 다른 성격의 공동체 정신을 가진 본당이다. 가난하고 소박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 미사와 기도를 드린다. 그는 선교본당 교우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행복하다고 고백한다.

이 신부는 언제나 생활한복 차림이다. 사제복을 제쳐두고 한복만 고집하는 그가 좀 까다롭게 보이기도 하지만 탓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한복은 원래 우리 옷이고 사제의 로만칼라는 너무 권위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란다. 교우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데는 한복이 더 편하고 좋단다. 김대건 신부가 로만칼라를 하고 있느냐고 그가 웃으며 되묻는 데는 할 말이 없어진다.

이 신부는 미사를 진행하면서 때로 자신의 역할이 낯설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길게, 때로는 목청을 높여 말하는 게 익숙하진 않지만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이니 주저 없이 따르고 있다. 용산이 주는 시대의 메시지를 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을 장사지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 모두의 것이다. 요즘 용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런 인사를 많이들 한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 이제 찾아와 면목이 없다. 유가족의 손을 잡아주는 그들이 이 신부는 너무 고맙다. 미사 때 언제나 자리를 채워주는 그들이 든든하기만 하다.
"사실 평일미사에 신자들이 많이 모이기 어려운데 많이 오시니 좋지요. 또 신부님들도 많이 참석하시니 더 좋고요. 유가족들에게 이보다 더 큰 힘이 되는 게 없어요."

그런데 이 거리 미사에 비가 내리면 어떻게 하는가? 비가 드센 날이 많은데.

"비가 오면 미사가 더 애틋해져요. 그건 비가 올 때 같이 미사를 드려봐야 알 수 있는 건데요."

이기심 없이 한마음으로 모였을 때, 그 곧고 아름다운 힘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어내는지 이 신부는 전하고 싶어하는 듯했다.

용산의 가톨릭을 종교적 의미 그 너머의 잣대로 해석하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건 그들의 방식일 뿐이다. 이강서 신부에게 용산은 지붕이 아주 넓은 교회이다. 그리고 그는 그 교회를 지켜야하는 착한 목자, 조금은 강단이 센 목자일 뿐이다.

* 이 인터뷰는 <세상을 두드리는 사람> 9~10월호 용산 특집 기획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