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에서 뛰(었다 쉬었다 하)느라 한참 바쁠 박지성이 당시 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에 '축구 꿈나무 위해 전자카드제 도입 철회돼야'라는 제목으로 '특별 기고문'을 올린 것이다.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 스포츠토토는 최소한 현행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에서 복권인 스포츠토토의 사행성을 줄이기 위해 전자카드를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는데 박지성은 "축구와 같은 스포츠가 로또나 카지노와 같은 사행 산업에 포함되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에 앞서 파급 효과에 대한 신중한 검토가 이뤄지지 않은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 축구의 미래를 위해서 스포츠토토는 최소한 현행대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본다"는 것이다.
박지성, '입' 되다
▲ 호주와의 평가전을 앞두고 지난달 31일 오후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중인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뉴시스 |
그런데 글 내용은 참 교묘(?)했다. "대표팀에 합류한 뒤 동료 선수들로부터 '스포츠토토 전자카드'를 도입하는 문제를 두고 이런 저런 얘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식으로 절묘(?)하게 말을 꺼내더니 전자카드가 도입되면 사람들의 토토 구매가 줄어들어서 축구 쪽으로 지원된 160억 원의 기금이 반토막 난다고 걱정들이라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모여 이런 이야기도 한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이 범상치 않은 기고문은 많은 기자들에 의해 기사화 됐다. 다들 박지성의 의견을 적극 지지한다. 손발이 척척 들어맞는다. 전자카드 도입이 시기상조이고 만약 도입되면 한국 축구는 물론 한국 스포츠의 근간이 흔들리데 된다는 결론 말이다. 그런데, 이거 박지성 의견인가, 축구협회 의견인가.
국가대표 주장은 축협 대변인?
최근 축구계가 아주 시끄럽다. 축구협회와 K리그를 관장하는 프로연맹 간 싸움인데 그 과정이 꽤 길고 다소 지저분하다. 프로연맹이 9월의 호주, 10월의 세네갈과의 대표팀 평가전이 K리그 일정과 겹친다며 소속된 대표선수 차출을 거부했고 문제가 커지자 양쪽은 타협을 하는 듯 했다. 이때까지는 축구협회가 약간 밀리는 듯했다. 축구협회가 무슨 약속을 안 지킨 거란다.
그런데 대 호주 전을 위해 박지성 등 해외파 선수들이 줄줄이 입국하면서 프로연맹을 맹비난하면서 전세는 역전(?)됐다. 특히 자기들은 먼 곳에서도 벌써 왔는데 국내파 선수들은 자기들보다도 뒤늦게 대표팀 훈련에 합류한다는 소식에 열이 받았나보다. 특히 박지성이 누군가. 세계 최고의 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일원으로 대표팀 주장이자 한국 축구의 지존 아닌가. 그런데 K리그 선수들이 자기보다 늦게 합류하다니.
박지성이 프로연맹을 비난하자 기자들은 연맹에 대한 '직격탄'이라며 이를 받아썼다. 역시 박지성의 위력은 대단하다. 과거 박찬호가 잘 나갈 때 국내 프로야구 8개 구단이 박찬호 하나를 당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딱 그 꼴이다. 축구팬들은 이제 연맹을 질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는 살아 생전 처음 보는 진풍경이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은 축구협회 대변인도 겸직하나. 물론 선수도 개인으로서 존중 받고 자신의 의견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박지성은 이번 갈등이 어떻게 촉발된 것인지 전후사정을 알아보기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한 건가.
축구협회는 똑바로 밝혀라
문제의 발단은 프로연맹과의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A매치 일정을 주말에 잡은 축구협회에 있다. 두 단체는 대표팀이 2010월드컵 본선에 진출하게 되면 이후 일정은 'K리그는 주말,' 'A매치는 주중'에 하기로 합의를 했는데 한국팀은 일찌감치 6월 본선 진출이 확정됐기 때문에 이 약속은 지켜져야 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축구협회는 돈에 눈이 멀어 약속을 내동댕이치고 주말에 A매치 일정을 꾸겨 넣었다. 참고로 축구협회는 연간 예산 700억 원에 빛나는 우리나라 최고의 부자 경기단체다.
변명도 치졸하다. 공문 못 받았다, A매치 주간엔 우리 마음대로다 등등 기도 안 차는 거짓말까지 섞어가며 목소리를 높인다. 특히 프로연맹의 반박에 대해 그건 '담당자가 바뀌어서 모르겠다'는 변명엔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우리나라 경기단체 중 가장 거대한 조직인 대한축구협회가 동네 철물점 수준만도 못 하나. 어떻게 직원 하나 바뀐다고 협회의 가장 중요한 행정인 A매치 일정이 이렇게 엉망이 되나. 참고로 그 '담당자'는 조중연 신임 회장이 들어서면서 직언 잘 하는 직원이라고 한직으로 밀려나게 되자 스스로 관뒀단다.
따져 보자. 협회가 K리그 일정 잡을 때와 결정할 때 이상호 국장, 김진국 전무가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나. 그리고 다른 것 다 제쳐두고 말이다, K리그 일정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곳이 어딘가. 바로 대한축구협회 아닌가. 자기들이 승인해 놓고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그 심보는 도대체 어디서 수입해먹은 심보인가.
그래놓고는 고작 한 달도 안 남겨 놓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너희가 바꿔'라며 통보하며 '우리는 절대 못 바꿔' 그런다. 적반하장이다. 그것도 모자라 마침 입국하는 해외파 선수들 부추겨 연맹을 공격한다. 이건 손바닥으로 뒤통수를 치는 정도가 아니라 면상을 내리찍는 거다.
K리그에 비수를 꽂은 해외파
영국에 있던 '박지성 대변인'이 먼저 한 마디 하니까 다른 해외파도 입국하면서 줄줄이 한 마디씩 했다. 가장 먼저 입국한 해외파 맏형 이영표는 "프로연맹은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고, 이어 입국한 박지성은 "대외적으로 창피한 일이다 (…)이런 축구 행정에서 축구를 하는 건 슬픈 일"이라며 프로연맹을 비난했다. 박지성은 K리그가 창피해서 유럽 가서 뛰나보다.
우리나라 프로선수들 중 최고액의 연봉을 받는 두 선수가, 한국 축구의 두 간판스타가, 한국의 운동 선수 중 가장 복 받고 특혜를 받는 두 선수가 국내 리그를 비난했다. 이들이 하니까 뒤따라 귀국하는 박주영, 이근호도 한 마디씩 거든다. 허정무 대표팀 감독까지 슬쩍 한 마디 했다. 이들은 K리그에 침 뱉은 것이다. 패거리로 달려들어 한국 축구의 가슴도 아닌 등짝에 비수를 꽂은 것이다.
그런데 말을 너무 잘 들어도 탈이다. 이들이 마치 로봇마냥 들어오는 순서대로 한마디씩 하는 바람에, 그것도 '운동 선수'가 아니라 '운동권 선수'처럼 너무 세게 연맹을 비난하는 바람에 너무 시끄러워졌다. 축구협회는 '좀 심했나' 싶었나보다. 선수들을 자제시키겠단다. 협회의 '사주설'이 제기되자 협회는 절대 그건 아니란다. 협회가 시킨다고 박지성이 그랬겠냐는 거다. 그럼 자제하란 말은 듣나?
정말 축구협회의 말을 믿을 수 없다. 축구협회는 가만히 있었다는 이야기를 누가 믿을까. 해외파 축구선수들이 언제 이렇게 민주투사처럼 할 말 다하고 살았던가. 역사상 우리나라 운동 선수 중에 이처럼 대놓고 경기단체를 비난한 선수가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슬픈 건 박지성이 아니라 프로축구 구단들
재밌다. 이영표는 프로연맹을 비난하며 '한국 축구에 대한 사랑'도 언급했다. 이영표는 한국 축구를 아는가. 외국 축구를 이야기 하던데 우리나라는 축구 선수가 2만2000명이고 일본은 축구클럽이 2만2000개인 것도 아는가. 관중석의 사람 수와 파리 수가 비슷하다는 K리그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는가. 프로리그인데 중계방송도 안 해준다는 K리그를 들어본 적 없는가.
박지성은 우리나라 축구가 대표팀만 챙겨주는 '가분수구조'인 것을 아는가. 2002년 이후 K리그의 피를 빨아 대표팀 배를 불리는 현실을 아는가. 한국 축구엔 '유럽 축구'와 '국가대표축구'만 존재한다는 현실을 아는가. 2002년 한국이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루고 이영표, 박지성 선수가 돈벼락, 칙사대접에 군면제까지 받으며 환호성을 지를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차경복 전 성남 감독이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했던 이유를 아는가.
박지성과 이영표는 (이영표는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리그로 옮겼지만) 자신들이 유럽서 뛰는 날이면 한국의 축구팬들은 밤잠을 설쳐 가며 축구를 본다는 사실을 익히 알 것이다. '결장'할지도 모르지만 밤새 기다린다는 것도 알 것이다. 그런데 그 축구팬들은 K리그를 안 본다. 낮에 해도 안 본다. 심심해도 안 본다. 사실 볼 수도 없다. 중계를 안 해 주니까. 그러면서 한국의 축구 시장은 사실상 유럽 축구가 지배하게 됐다.
또 우리나라 선수 한 두명 뛰는 거 보겠다고 유럽리그에 건네야 하는 엄청난 액수의 TV중계권료도 있으니 이건 '국부 유출'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볼 때 두 선수는 한국 축구의 유럽 종속을 이끄는 첨병, 국내리그 침체의 1등 공신이라는 것을 똑바로 알기 바란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말이다, 그렇게 한국 축구를 사랑하고 걱정스러우면 한국에서 뛰어라. 아님 말을 말던가.
▲ "관중석의 사람 수와 파리 수가 비슷하다는 K리그라고 혹시 들어본 적 있는가. 프로리그인데 중계방송도 안 해준다는 K리그를 들어본 적 없는가." 지난 7월 12일 울산 문수축구장에서 열린 K리그 울산현대와 대구FC와의 경기. ⓒ뉴시스 |
경거망동한 선수들, 반성하고 자숙하라
대표팀이 고깃국에 '뜨슨 밥' 먹을 때 K리그는 김치에 물 말아 먹었다. 슬픈 당사자는 박지성이 아니라 K리그 구단들이다. 이들은 전세계 프로구단들 가운데 가장 슬픈 구단이다. '이수일과 심순애'보다 더 슬프다. 대표팀 선수들 연봉은 구단에서 주건만 재미를 보는 건 축구협회다. 이런 봉이 김선달은 다시 없다. 그러다 선수가 다치기라도 하면 그 뒷감당은 역시 구단 몫이다. A매치 뛰다가 다쳐 '시즌아웃' 되는 선수들을 우리는 부지기수로 봐왔다. 그럼 구단은 돈만 날리는 건데 수술에서 재활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면 협회는 뭘 할까. 다른 선수 찾는다.
축구 대표선수들은 한국 스포츠에서 가장 특혜를 받는 선수들이다. 아시안게임, 올림픽에 가도 축구 선수들은 선수촌 밖 특급호텔에서 지내며 따로 다닌다. 미국 농구 '드림팀'쯤 되는가보다. 그 중에서도 박지성, 이영표, 박주영은 특급 특혜를 받는다. 그런데 한국에서 몇 번 뛰지도 않는 이들이 한국땅에 발을 딛자마자 가뜩이나 힘든 국내리그 비난부터 한다. 부탁이 있다. 앞으로는 해외에서 성공해서 거기서 특혜 많이 받기 바란다. 자꾸 여기 와서 특혜 받을 생각들 마시고.
축구협회의 '알박기' 전략
축구협회는 올해 조중연 회장 체제로 바뀌었는데 내년이 월드컵이니 몸이 달았을 것이다. 지금 프로연맹과 각 구단들 군기를 잡아야 대회준비가 편하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 첫 번째가 바로 K리그 무시하고 마음대로 A매치 일정 잡는 거다. 사실상 '알박기'다. '알박기'는 원래 부동산 용어로 인터넷 포털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는 단어다. 이게 축구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이번에 축구협회가 보여준 것이다.
"알박기란 축구 신조어다. 축구협회가 K리그 일정에서 가장 중요한 주말에 A매치를 잡아 K리그를 방해하며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광고와 스폰서십을 파는 행위."
프로연맹을 무력화 시키기 위해 선택한 두 번째 전략은 바로 과감한 언론플레이이고 그 핵심은 바로 '박지성 대변인'이다.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게 먹힌 것이다. 그런데 먹혀도 너무 먹혔다. 해외파 선수들이 심했다는 여론이 들썩이는 지금 분위기를 보면 뒷수습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나는 한국축구의 진정한 발전을 위한다면 월드컵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축구협회의 무능과 독단과 일방적 행정의 면죄부가 돼버린 월드컵이 존재하는 한 한국 축구의 근간인 K리그는 다시 살아나기 힘들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국 축구가 온통 대표팀 축구로 쏠리는데 크게 기여한 붉은악마라는 국가주의자들도 같이 없어지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축구협회와 박지성, 사과해라
개인적 생각이지만 축구협회가 이번 사태와 관련해 프로연맹과 K리그팬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지 않으면 프로연맹은 협회의 월드컵 선수차출과 관련해 일절 협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월드컵? 월드컵이 K리그 밥 먹여줬나? 밥, 반찬 다 빼앗아 갔다. 프로팀은 이제 빨 손가락도 없지 않은가. 물러서지 말기 바란다.
그리고 대표팀 주장으로서 경거망동한 박지성도 사과해야 한다. 슬픈 건 K리그지 박지성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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