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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환제에 대한 두 가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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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소환제에 대한 두 가지 오해

[의제27 '시선'] 지금 필요한 것은 제도의 숙성

지난 달 26일 제주도지사에 대한 주민소환 투표가 투표함도 열어보지 못한 채 종료되었다. 현행 법률은 투표권자의 3분의 1 투표와 투표의 과반수 찬성으로 소환을 확정하기 때문에 투표율 미달(11%)로 개표 없이 끝났고 국가안보에 긴요한 국책사업의 명분으로 일방적으로 제주 해군기지 사업을 추진하였던 김태환 제주도지사는 직무에 복귀하였다. 선거 이후 시민운동과 집권 여당 양측 모두로부터 주민소환제를 재검토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시민운동의 주장, 일리는 있지만 본질적 성찰이 부족하다.

이번 소환선거를 추진하였던 '주민소환운동본부'측에서는 '관권에 의해 자유로운 투표행위가 원천 봉쇄된 채 이뤄진 관제투표'였으며, 투표율 기준을 정해 놓고 소환 여부를 판단토록 한 지금의 제도는 민의를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에 향후 소환제 개정, 헌법소원 등에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아마 소환 선거가 이루어지는 전 과정을 현장에서 관찰하였을 제주대학교의 하승수 교수 역시 이번 선거 결과의 '부결'이 아니라 '불(不)개표'로 규정하고 관권개입 의혹과 선관위의 직무 유기를 비판하고 있다.

시민운동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민소환제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은 향후 사회적 공론화를 통해 적극 논의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지적들이다. 그러나 투표 결과를 승복하지 않는 듯한 그들의 태도와 논리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 주민소환투표가 끝난 직후 입장을 밝히고 있는 김태환 지사. ⓒ뉴시스

현행 주민소환제는 누가 만들었을까? 시민운동의 자기 부정의 모순

현행 주민소환제도는 한나라당의 극렬한 반대속에 당시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주노동당만이 참여하였던 국회본회의에서 2006년 5월 2일 통과하였다. 당초 여야 정당 모두 지방부패 척결에 동의해 4월 임시국회에 주민소환제 입법을 적극 약속하였지만 한나라당은 막상 법안 심의 과정에서는 4월 임시국회 처리를 반대하며 상임위 공청회와 심사를 보이콧하고 법사위에서 논의되는 것조차 봉쇄하는 등 실질적 반대로 선회하였다. 강창일, 최순영 등 일부 개혁적 의원들이 적극 입안하였고 시민운동의 전폭적 지지 속에 어렵사리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주민소환제도이다. 주민소환제의 통과 직후 민주노동당의 박용진 대변인은 "민주노동당이 의회진출 이후에 제대로 역할하지 못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들어온 보람을 이제야 제대로 알 것 같다"고 소회를 밝혔다. 또한 대구참여연대 역시 "풀뿌리 민주주의 발전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환영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정리하자면, 현행 주민소환제는 시민운동과 진보개혁 정당이 모처럼 의기투합하여 일궈낸 값진 성과이다. 운영상의 절차를 빌미로 평가절하하고 일부 문제점을 논거로 비판한다면 그것은 자기부정의 모순에 놓이게 된다.

추세는 소환제의 확대와 엄격한 요건이다

투표율 요건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찬반 개표가 되지 않아 승복하기 어렵다는 주장도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모든 국가에서 주민소환제는 보궐선거와 달리 청구와 투표율 조건을 엄격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는 주민소환의 행위가 이미 합법적 선거라는 민주 절차를 통해 주권의 위임이 이루어진 현행 선출직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만들어진 타당한 규정이다. 미국의 경우 주민소환제는 36개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데, 대략 유권자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이상의 투표율을 규정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2003년도의 캘리포니아 주지사 소환선거 당시 55.4%(441만 5천 341명) 소환 찬성으로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가 해임되었다. 당시 소환선거는 바로 전년도에 있었던 주지사 선거의 50.7%를 훨씬 상회하는 투표율인 60%를 기록해 미국 전역을 놀라게 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소환을 예상하여 동시에 대안 후보를 미리 결정하는 캘리포니아 방식이 작용하였지만 가장 큰 원인은 찬반 양측의 뜨거운 선거운동과 심각한 재정 적자에 대한 시민들의 높은 관심이었다. 주민참여와 직접민주주의를 적극 반영하여 주민소환제는 점차 확대되고 있지만 그 요건은 오히려 보다 엄격하게 규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세계적 추세이다.

2009년 한국의 유권자와 시민은 집단지성인가 아니면 관권선거의 동원 대상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제주지사 소환운동과 선거 좌절의 본질적 원인은 관권선거나 제도 미비와 같은 외부적 요인이 아니라 소통과 참여를 통해 의제를 확장시키는데 한계를 보인 내부적 요인에서 찾는 것이 향후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위해 보다 생산적이라는 것이다. 시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부결인지 불개표인지는 일차적 관심사가 아니다. 또한 11%가 참여하였던 투표의 결과를 공표하는 것이 소환결정이나 민의의 해석에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늘 얼굴을 마주보고 생활하는 대면(對面)사회적 요소가 강한 제주도의 특성상 투표 행위 자체가 반대표로 간주되고, 행정관청이 불참 압력을 행사할 개연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러나 소환투표가 중앙의 국가단위보다는 지방의 자치단체에서 일반화된 제도이며, 관 주도의 행정국가 전통이 강한 사회에서 그러한 개연성은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할 과제이다.

유신체제하에서 두 차례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75년 2월에 실시된 유신헌법의 신임 투표에서는 유권자의 79.8%가 참가하여 73.1%의 찬성을 얻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어떤 비판과 이의제기도 처벌되었던 당시의 상황은 관권선거의 전형적 사례이다. 우리는 얼마 전까지도 광화문의 촛불 시민들을 직접민주주의와 집단지성을 상징하는 다중(multitude)으로 높게 평가하였다. 최근 소환제에 대한 비판들은 자칫 지역주민들을 관권선거의 유혹과 압력에 굴복한 무기력한 시민으로 비하할 여지가 있다. 최근의 논란은 자칫 광화문의 촛불은 위대한 민주시민으로, 지역주민들은 관권선거에 굴복한 신민(臣民)으로 대비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관권선거 시비를 넘어선 진짜 원인에 대한 성찰이 요구되는 이유이다.

한나라당의 치졸한 계략과 민중주의의 역설(the Populist Paradox)

하남과 제주에서 두 차례 주민소환제가 무산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나라당의 안상수 원내대표는 주민소환제가 법치주의에 위배된다며 청구 사유를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관련 법 개정에 착수할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는 이미 하승수 교수가 잘 정리하였다(오마이뉴스. 8.27). 주민소환제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서는 이를 반대하는 보수 세력과 역사적 시간으로부터의 도전을 감당할 제도적 성숙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미국에서 주민입법 제도가 시행되자 민중주의의 역설이라는 담론이 주목을 끌기 시작하였다. 이 말은 원래 기업과 관료 등 기득권층을 제어하기 위해 고안된 직접 입법(direct legislation)이 시간이 경과하면서 대기업과 전문가 협회 등 부유한 이익집단이 자신이 선호하는 정책을 관철하는 수단으로 전락되었음을 꼬집고 있다. 이 문제에 정통한 거버(Elizabeth R. Gerber)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민중주의의 역설은 크게 보아 기우이다. 기득 세력들은 엄청난 재원과 유명 로비스트를 통해 신규입법을 저지하는 데는 성공적이었지만 다수 시민의 참여와 공적 관심을 일으켜 신규나 대체입법을 제정하는 데는 시민단체를 따라갈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즉 동원할 자원이 다르기 때문에 기득 세력들은 현상유지를 선호하는 반면 시민단체들은 현상 타파의 공세 전략을 취한다는 것이다.

주민소환제든 주민입법이든 직접민주주의의 제도들은 그것을 둘러싼 정당 사이의 정책경쟁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공론화를 촉발함으로써 정치발전과 참여민주주의에 기여한다. 또한 직접 민주주의 제도들이 발전한 스위스와 미국은 정당정치와 시민사회운동이 균형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생생한 사례이다.

어떤 제도도 정착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제 시행된 지 채 3년도 안된 주민소환제를 좌우에서 흔들기보다는 차분하게 발전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청구요건과 투표율 기준을 완화하기 보다는 이러한 진입문턱을 넘어설 창의적 운동방식과 풀뿌리 네트워크의 확장을 고민하는 것이 건설적이다.

이 나라를 아름답게 만든 일등 공신인 제주에 해군기지를 두겠다는 시대착오적 발상과 독단적 행정에 대해서는 전국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며, 얼마 남지 않은 내년의 지방선거에서 현명한 제주도민들이 제대로 심판 해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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