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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직후, 참혹한 인권 현실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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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서울의 봄' 직후, 참혹한 인권 현실의 기록

[국제앰네스티 1981년 연례보고서] 28년 전 한국의 민주주의, 그리고 오늘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표가 아니라 당신의 행동을 헤아린다"는 말이 사무치는 시대이다. 아주 예전의 인권보고서를 찾아봤다. 고(故)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광주에서 학살이 벌어지던 시기의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AI)의 연례 인권보고서이다. 국제앰네스티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인권단체로 한국의 양심수 구명 운동에도 많은 노력을 했다. 국내외적으로 정보가 엄격히 통제되던 시기였기에 제한된 내용이 담겨있지만 많은 사람들의 고난으로 점철됐던 시기였음이 느껴지는 보고서이다.

1980~81년의 한국 인권상황을 2009년의 오늘과 비교하며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어 얻은 것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각해보려 한다. 옛날 보고서인 관계로 파일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복사본을 제공해 준 국제 앰네스티 한국지부에 감사드린다. <역자 주>

국제앰네스티(이하, AI)의 우려는 양심수의 구속과 투옥, 사법 절차의 잦고 심각한 변칙, 정치수에 대한 학대와 고문, 정치범과 형사범에 대한 사형이다.

1981년 3월 2일 AI는 한국에 대한 우려를 널리 알리고 정치적 투옥, 고문, 불공정 재판 및 사형의 이용을 당국이 중단하도록 하기 위해 세계적인 캠페인에 착수했다. 이러한 우려들은 캠페인 초기에 발간한 AI 보고서 <한국: 인권침해>에 기술돼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피살 후에 한국의 대부분에 계엄령이 적용됐다. 1980년 5월 17일 계엄령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계엄령은 긴급조치 10호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하고, 파업을 금지하고, 전·현직 대통령을 비판하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을 불법화했다. 긴급조치 10호를 위반하는 사람을 체포, 구금, 수색하는 것은 영장 없이 허용됐다. 전국적인 계엄령이 선포된 것은 정부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학생 지도자 등을 구금하고 수 시간 내에 뒤따른 조치였다. 수도 서울에서는 수백 명이 군사당국에 의해 구금됐고, 이들 중 일부는 AI가 양심수로 선정했던 사람들이었다. 광주에서는 5백여 명 이상이 구금됐고, 이 중 대다수는 군부가 5월 27일 광주지역 항쟁을 진압한 후에 이뤄졌다. 5월 18일 학생 데모는 공수부대의 개입으로 폭력적으로 끝났다. 이후 계속된 충돌은 시위대가 광주를 장악한 때 절정에 도달했다. 5월 27일 군부가 통제를 재장악했다.

1980년 7월 AI는 AI의 우려를 정부와 논의하고, 5월 17일 이후 대량 체포와 고문, 법적 상황, 5월 17일 이전에 구금된 수인들의 처우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다. 당국은 AI 대표단의 입국 허용을 거부했다. 도쿄의 한국 대사관은 AI 대표자에게 말하기를 인권 문제는 "현 시기 한국에서 너무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AI의 임무 수행 시기로는 곤란하다고 했다.

1980년 8월 15일 AI는 다수의 권고를 정부에 보냈다. 여기에 포함된 것은 1980년 5월 17일 전후로 구금된 양심수 석방에 대한 호소, 5월 17일 이후 구금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석방 또는 재판, 피구금자 모두의 명단 발표,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구금의 중단, 학대와 고문에 대한 수인들의 주장에 대해 독립적인 기구의 조사,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 특히 강압 하에서 취한 불리한 진술의 증거 배제, 유죄로 증명될 때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에 대한 존중이다.

AI는 표현과 결사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비폭력적으로 행사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구금하는 긴급조치를 비롯한 법률들의 적용에 우려를 가져왔다.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명목의 활동에 관해 1961년 반공법 조항으로(1981년 1월 폐지), "반국가단체"에 관해서는 1960년 국가보안법으로, 국가전복과 간첩행위에 관해서는 형법 87, 90, 98조에 의해, 예방 구금에 대해서는 1975년 사회안전법으로, 1980년 11월 개정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하에서 구금과 구속이 계속됐다.

새 헌법이 1980년 10월 27일 공표됐고, 이는 고문으로부터의 자유, 언론과 출판, 집회 및 결사의 자유, 강제 자백의 법정에서의 증거배제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권리들은 "국가안보, 법과 질서의 유지 또는 공공복지를 위해 필요할 때"는 헌법적으로 제한될 수 있었으며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위반에 속했다. 계엄령은 1980년 9월 일부 해제되고 1981년 1월 25일 완전히 해제됐지만 계엄법정은 사건을 1981년 2월 24일까지 계속 다뤘다. 3월 3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으로 대통령 사면이 5221명의 범죄자와 정치수들에게 취해졌다. 또 다른 대통령 사면은 4월 3일에 있었는데 광주항쟁과 관련 실형을 선고받은 83명에 대해서였다. 이 사면으로 AI가 양심수로 지정한 13명이 석방됐다.

1981년 2월 27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AI는 계엄령 해제를 환영하고 시민·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의 비준을 권고했다. AI는 또한 이전 정권에서 투옥된 사람들을 포함하여 모든 정치적 구금자의 사건을 재고할 것을 촉구했다. 많은 이들이 강압 또는 때론 고문에 의해 확보된 자백에 기초해서 유죄가 확정된 것으로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
1980년 5월 19일 AI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에게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석방을 호소하고, 5월 17일에 체포된 다른 43명에게 법적 보호를 완전히 보장할 것과 즉각 석방되지 않을 경우 혐의내용을 공표할 것을 촉구하는 국제전신을 보냈다.

김대중과 그와 함께 재판정에 선 23명은 재판이 시작되기 며칠 전까지 외부와의 연락이 두절된 채 구금돼 있었다. 7월 31일 김대중은 정부가 생각건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연설을 하고 정부를 전복하고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로 1980년 5월 19일에서 27일, 광주에서의 학생 봉기를 선동하고 자금을 댄 혐의로 기소됐다.

그와 함께 공동 피고인으로 기소된 12명은 계엄령의 긴급조치에 따라 불법이었던 모임에 참석하고 형법하의 국가전복 음모로 기소됐다. 다른 사람들도 긴급조치를 위반한 혐의로 기속됐다. 8월 14일 군사법정에서의 재판이 시작됐고 9월 17일 전원의 유죄가 확정됐다. 김대중에겐 사형이 선고됐고 나머지는 2년에서 20년 사이의 구금형이었다. AI는 이들에 대한 재판이 국제적으로 인정된 법적 기준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한 명을 제외한 피고인 전원이 혐의를 부인했고, 자백을 위해 구타와 협박을 당하고 수면을 박탈당했다고 주장했다. 변호에도 심각한 제한이 있었다. 피고인들은 변호인을 선택할 수 없었다. 다수의 민권 변호사들이 체포됐고 또 어떤 이들은 변호를 맡지 말라는 협박을 당했다.

▲ 1980년 군사법원에서 열린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과 관련, 재판받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사진 맨 앞 오른쪽). 바로 옆이 고(故) 문익환 목사다. ⓒ연합뉴스
피고인의 법정 증언에도 제약이 가해졌다. 계엄령 위반에 관련해서만 기소된 이들의 경우에는 어떤 증인도 요청되지 않았고,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증인들은 협박당했고, 피고인을 위한 증인은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부적절하게 취득했다는 피고인들의 주장이나 그 유효성에 대한 적절한 검토 없이 자백은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AI는 1980년 9월 24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국제전신을 보내 항소 법원에서 확정되지 않는다면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할 것을 촉구했다. AI는 김대중과 그의 공동 피고인들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석방 또는 완전한 법적 보호가 되는 개방된 법정에서의 재심을 되풀이해서 호소했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육군형무소에서 형이 확정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수 신분으로 청주교도소에 이송된 후 1981년 1월경 입소절차를 밟는 과정에서 머리를 깍고 촬영한 모습. ⓒ연합뉴스
1980년 12월 2일, AI는 김대중의 처형을 막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유엔인권위원회의 43개 회원국 정부 대표에게 호소했다. 1981년 1월 23일 김대중과 공동피고인 중 일부에 대한 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에 대한 세계적인 우려의 표시가 있은 후 사형선고는 대통령에 의해 종신형으로 감형됐고 11명의 공동 피고인에 대한 형은 5년에서 15년으로 감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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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1980년 5월 서울과 지방도시에서의 데모 후에 체포된 다수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 데모들은 주로 평화적이었고 AI는 학생들이 폭력을 사용하거나 옹호했다고 하는 어떤 정보도 받은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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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폭력적인 혼란과 관련하여 구금된 사람들에 대한 학대와 고문의 보고에 대해 우려한다. 몇 사람의 수인(囚人)은 조사를 받는 동안에 사망한 것으로 보고됐다. 수인들은 전해진 바에 따르면 구타당하고 수면을 박탈당하고 자백을 위해 장기간 지속되는 조사를 받았다. AI는 김대중과 관계가 있다는 것과 반란을 시도했다는 혐의로 광주 계엄 법정에서 1980년 10월 25일 390명의 사람들에게 형을 선고한 절차의 변칙성에 대해서도 우려한다. 피고인들에게는 변호사 선택이 허용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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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홈페이지에 실린 홍보 이미지

AI는 한 해 동안 37명의 언론인이 구금됐다고 알고 있다. AI는 한국언론인협회의 의장을 포함해 3명의 회원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1980년 5월 17일 이 협회는 검열과 일을 중단하라는 위협에 대해 군사 당국에 항의했다. 이 협회의 의장 김태홍은 몇 개월의 도피 끝에 8월 27일 체포됐다. 그에 대한 재판과 선고의 세부 사항은 알려지지 않았다. 긴급조치 10호의 언론 검열 강화에 항의한 8명의 언론인들은 반공법과 긴급조치 10호에 의해 광주 항쟁 기간 동안 군대의 행위에 대해 "거짓되고 악의적인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AI는 이들을 양심수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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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는 1981년 3월과 4월, 몇 개 대학에서의 시위 후에 학생들의 체포를 조사했다. 이들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이다. 받은 정보에 따르면 이들은 폭력을 사용하지도 옹호하지도 않았다. AI는 이들의 석방을 촉구했다.

AI는 오랫동안 구금된 양심수들의 석방 호소를 계속했다. 이들 중에는 1974년 "인혁당"사건으로 재판받은 16명의 수인이 있다. 1980년 8월에 AI는 1971년부터 구금돼 온 서준식과 서승의 석방을 위한 특별 호소에 착수했다. 서승은 종신형을 치르고 있고, 서준식에 대한 형은 1978년 5월에 끝났으나 그는 사회안전법 하에서 여전히 구금돼있다.
(…)
한 해 동안 AI는 140명의 양심수와 여타 정치수들을 위해 활동했고 그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에 대해 공정한 재판을 촉구했다.

AI는 정치수와 형사범에 대한 사형선고의 감형을 위해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한 해 동안 정치수에 대해 10건의 사형선고가 부과됐고, 그들 중 여덟은 나중에 대통령에 의해 감형됐다. AI가 아는바에 따르면, 7명의 정치수가 사형수 감방에 있다. 이들 중 2명에 대한 형이 1980년 12월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다른 5명의 재심청구는 1980년 7월 25일 기각됐다. 1981년 1월 23일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AI는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한 결정을 환영했고, 부당한 재판 후에 형이 확정됐다고 여겨지는 4명의 수인에 대한 사형선고를 감형할 것을 촉구했다. 1979년 12월 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유죄가 확정되고 사형이 선고된 5인에 대해서는 1980년 5월 24일 사형이 집행됐다.

(이 글은 주간인권신문 <인권오름>에도 실렸습니다. <인권오름>기사들은 정보공유라이선스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정보공유라이선스에 대해 알려면, http://www.freeuse.or.kr 을 찾아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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