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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임대통령제의 합의제적 권력구조로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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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위임대통령제의 합의제적 권력구조로의 전환

[정치개혁 강좌]<6> 권력구조 개편 어디로 가야 하나

<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글과 함께 하단에 있는 '강의 듣기' 서비스를 통해 생생한 육성 청취도 가능합니다. 첫번째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전편에서 우리는 합의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본편에서는 이른바 권력구조에 관하여 논한다. 합의제 민주주의에 합당한 권력구조는 어떤 것이며 그것을 갖추기 위한 조건이나 경로는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마침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권력구조에 초점이 맞춰진 개헌론 공방이 다시 일고 있다. 여와 야, 보수와 진보,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이들이 현행 위임대통령제의 문제점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공감하고 있는 듯하다. 다만 구체적인 개혁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선호가 나타나고 있다. 크게 볼 때 세 가지 대안이 대립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하에서는 우선 이 세 가지 개혁안을 하나씩 살펴보고 그것들이 각각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평가해본다. 말하자면 우리 사정에 적합한 합의제적 권력구조가 무엇인지를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 합의제 권력구조로의 전환 조건을 점검해본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분명히 해 둘 점이 있다.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권력구조 개혁의 핵심은 권력집중에서 권력분산 구조로의 전환인 것이지 단순히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대통령제가 반드시 권력집중형인 것도 아니며 의원내각제가 모두 권력분산형인 것도 아니다. 예컨대, 미국과 영국의 권력구조를 비교해보자. 미국의 대통령제는 3권분립의 발달로 인하여 (영국에 비하자면) 권력분산형에 가까운 권력구조인 반면, 영국의 의원내각제는 전형적인 다수제 민주주의 형태인 권력집중형이다. 한편, 한국의 대통령제는 같은 대통령제라고 불릴지라도 미국의 대통령제와는 전혀 다른, 즉 매우 강력한 권력집중형 권력구조에 속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위임대통령제라고 불리겠는가.

따라서 의원내각제는 합의제적 권력구조이며 대통령제는 그렇지 않다는 인식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대통령제도 그 디자인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합의제적 권력구조가 될 수 있다. 다만 <4>편에서 설명한대로 (행정부 수반 직과 국가 원수 직을 한 사람이 수행하는) 순수 대통령제는 다당제와 제도 간의 부조화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이 점에서 (온건)다당제를 원칙으로 하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권력구조는 분권형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가 합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권력구조 개혁 방향은 (온건)다당제와 결합하는 권력분산형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로 잡아야 할 것이다.

▲ 지난 3월 국회에서 미래한국헌법연구회 주최로 열린 개헌 세미나에서 토론을 벌이고 있는 임지봉 교수(가운데)와 국회의원들ⓒ프레시안

대통령제의 소폭 보완

현행 순수 대통령제를 유지하되 다만 그 운영상의 문제점만을 해결하자는 주장은 대통령제의 '소폭' 개혁안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다시 여러 주장으로 갈리지만 여기서는 그 중 비교적 잘 알려진 두 가지 안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아온 대통령제 개선안은 소위 '노무현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고치고 대선과 총선의 시기를 일치시켜야 대통령제가 원활히 작동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원포인트 개헌'을 통해 성사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이 제안은 폭 넓은 지지를 얻지는 못했다. 단임제 대통령은 대표-책임의 원리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클뿐더러 레임 덕 현상으로 인해 임기 후반기에는 소신 있는 국정운영을 펼치기 어렵다는 등의 이유로 4년 중임제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었지만 그것은 사실상 8년의 임기 보장과 같은 의미가 아니냐는 반론이 거셌다. 4년 중임제를 택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에서도 연임에 실패한 대통령은 별로 없다는 사실은 이 비판자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결국 4년 중임제는 그저 레임 덕 현상의 발생을 몇 년 연기시킬 뿐이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타당한 비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선과 총선을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여소야대 현상의 만연을 방지해보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견이 많았다. 물론 그 경우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이 의회의 다수당 지위를 차지할 가능성은 높아지겠으나 (그렇다고 확실한 보장책이 되는 것은 아닐뿐더러) 거기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따르리라는 우려가 컸다. <4>편에서 논의한대로 한국의 위임대통령제는 대통령 1인에게 제어가 어려울 정도의 막강한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 큰 문제인데 그나마 몇 안 되는 대권 견제 기제인 (대통령 임기 중의) 총선과 그 결과인 분점정부의 긍정적 효과마저 소멸된다면 대통령의 권력은 지금보다 오히려 더 막강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정확한 지적이었다.

'노무현안' 다음으로 자주 거론돼온 소폭 개혁안은 삼권분립 강화안이다. 입법부와사법부의 권한을 확대하고 그 독립성을 확실하게 보장함으로써 대통령의 절대 권력을 견제하자는 것이다. 이 안에 따르면, 예컨대, 대법원장이나 헌법재판소장 등 주요 공직자의 인사 권한, 예산 작성 및 집행에 관한 권한, 통상 정책의 수립 및 집행 권한 등을 대통령으로부터 국회로 대폭 분산시키는 등의 변화를 가할 수 있다.

상당 부분 바람직한 개혁안임에는 분명하지만 이 대안 역시 그 한계가 너무 명확한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가령 현재와 같이 대통령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여당의 실질적 지도자인 상황에서 그 여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어 입법부까지 장악할 경우 입법부의 대통령 견제라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사법부의 권한 강화에 대해서도 반론이 만만치 않다. 자칫 잘못하면 '사법정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표-책임의 원리로부터 자유로운 사법부가 비대화질 경우 그 권력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인 것이다.

사실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개념은 미국의 대통령제를 평가하면서 나온 것이다. 대통령 한 사람이 국가원수인 동시에 행정부수반인 이상 아무리 삼권분립이 잘 돼있을지라도 그 대통령의 권력이란 결국 제왕적일 수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 있다. 최장집의 지적대로 (정당의 구조화로 담보할 수 있는) "사회적 견제와 균형이 뒷받침되지 않는 삼권분립은 헌법에 규정된 형식적 제도로는 존재할 수 있어도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의 독점과 자의성을 방지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운 것이다.(주1) 그렇다면 사회적 갈등구조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의 현 정당정치 상황에서 오직 삼권분립의 형식적 강화만으로 대통령 권력을 견제해보겠다는 생각은 연목구어격인지도 모른다.

이밖에도 다양한 소폭 개혁안들이 존재하지만, 그들 모두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라 할 수 있다. 순수 대통령제인 이상 아무리 대통령의 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한다할지라도 그것은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인 (온건)다당제와는 어차피 갈등 관계에 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논의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에서는 이러한 치명적 문제의 발생은 피할 수 있다.

대통령제의 대폭 보완: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직은 존치시키되 대통령의 (행정부)권력을 수상 혹은 총리에게 분산시키는 권력구조이다. 권력의 분산 정도와 범위 등에 따라 무수하게 많은 형태의 분권형 대통령제가 탄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가장 일반적인 분권형 대통령제는 국민의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은 국가원수직과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의회에서 뽑히는 수상 혹은 총리는 내정을 맡는 형태이다.

한국의 위임대통령제를 (일반적 형태의)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할 경우 그것의 개혁 효과는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무엇보다 '동거정부' 시 즉 의회의 다수파를 야당이 차지함으로써 야당 대표가 행정부를 총괄하는 수상 혹은 총리가 될 경우 대통령의 독주 방지 효과는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거기서는 기본적으로 대통령과 행정부 간의 연계가 차단 혹은 제한됨으로써 대통령의 행정부 장악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대통령 권력이란 '제한되고 분산된 대권'에 불과하므로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현행 위임대통령제에서와 같이 '절대 대권'을 놓고 벌이는 영합게임적인 사투 양상도 완화될 것이다. 따라서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지역감정이나 금권 등을 무차별적으로 활용하곤 하는 작금의 악행과 그에 따른 폐해는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가장 바람직한 개혁 효과는 아마도 정당정치의 활성화일 것이다. 이 효과는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에서와 거의 같은 원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설명은 후술하는 의원내각제에서 상세히 하기로 한다. 그 밖에 책임 정치가 강화된다든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힘의 균형이 잡힌다든가 하는 등의 개혁 효과 역시 의원내각제로의 전환 경우와 유사하게 발생하므로 이들에 대한 설명도 뒤로 미룬다.

다만 여소야대 현상의 발생과 그것이 해결되는 방식은 의원내각제에서와는 다소 다르다. 의원내각제에서는 통상 행정부가 의회의 다수파에 의하여 구성되므로 여소야대라는 문제 자체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 점은 분권형 대통령제의 (총리를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에도 마찬가지이다. 총리는 실질적으로 의회에서 선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는 여소야대 형국이라는 것이 상기한 동거정부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 대통령이 소속된 여당이 아니라 총리를 배출한 야당이 의회의 다수당 지위를 차지한 경우이다. 그러나 이 동거정부는 사실상 제도에 의해 "강제된" 대연정 상황인 것으로 볼 수 있다.(주2) 순수 대통령제에서라면 일어났을 여소야대의 교착상태가 여기서는 동거정부라는 제도적 기제에 의해 해소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당한 개혁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권력 배분의 어려움 때문이다. 흔히 외교안보 정책 영역은 대통령이 맡고 사회나 경제 등 국내 정책 영역은 총리가 맡는다고 하지만 그 영역 구분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예컨대, 세계화, 지역통합, FTA 등과 같은 대외경제정책은 형식상은 외교정책이라 할지라도 국내 정치경제에 끼치는 효과가 막대함을 고려할 때는 실질적인 국내정책에 해당한다. 안보도 이제는 경제 변수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포괄적 정책 영역에 속한다. 결국 대통령과 총리 간에 정책 영역의 분담 및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제도 성숙에 이르기까지는) 끊임없이 갈등이 생길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를 하나 더 든다면 형식만 권력분산형이지 실상은 권력집중형인 권력구조 상황이 종종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단일 정당이 의회의 다수당이 되고 그 정당이 대통령까지 배출한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때 대통령에게 프랑스 등에서와 같이 (결국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총리 임명권까지 있다면 여기서의 대통령은 사실상 순수 대통령제에서와 거의 마찬가지의 거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국가원수직은 물론 자신이 임명한 총리를 통해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직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역시 프랑스에서와 같이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킴으로써 여소야대의 생성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낮출 경우 분권형 대통령제의 의미는 거의 퇴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운영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합의제적 권력구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형식이 아니라 거기서 이루어지는 권력분산의 실질적인 양과 질에 있다.

의원내각제로의 전환

의원내각제에도 물론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 중 본고에서 대안으로 논의하는 의원내각제는 다음과 같은 일반적 형태의 것이다. 즉 행정부는 다정당체계에서의 연립내각 형태로 의회에서 구성되며, 그 행정부와 의회 간에는 힘의 관계가 균형을 이루는 한편, 수상 혹은 총리의 내각 리더십은 보장되는 유형이다.(주3) 의원내각제란 왕이나 대통령 등 상징적 국가원수의 존재 유무와는 무관한 권력구조라는 사실도 미리 짚어둔다.

현행 위임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로 전환할 경우 그 개혁효과는 실로 대단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개혁효과 몇 가지를 살펴보자. 첫째, 의원내각제의 성격상 당연히 행정부와 입법부 간에 힘의 균형이 잡힌다. 의원내각제의 행정부는 의회에서 구성되어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정부의 독주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진다. 많은 경우 의회는 내각 불신임권을 그리고 행정부는 의회 해산권을 갖는다. 내각 불신임권 등의 행정부 견제 기제를 거론하며 혹자는 다당제의 연립정부 형태로 구성되는 의원내각제의 행정부는 구조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지적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다. 주지하듯, 유럽의 많은 선진국들은 (형태의 차이는 물론 있지만) 의원내각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행정부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라는 없다. 각자 스스로들의 안정화 기제를 가동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들은 대부분 군소정당의 난립에 따른 행정부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비례대표 선거제도에 저지조항, 봉쇄조항, 혹은 문턱조항 등을 설치함으로써 유력 정당수가 3개내지 5개 정도인 온건 다당제를 유지한다. 독일의 경우 5%라는 높은 저지조항 외에도 후임 수상을 미리 선출해두지 않으면 불신임 권한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는 소위 '건설적 불신임제'를 통해 의회의 견제권한 남용을 방지한다.

둘째, 지역주의와 금권정치를 부추기는 위임대통령제의 부작용이 제거된다. <4>편에서 지적한대로 그 부작용은 바로 '대권' 쟁취를 위한 '대선'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곤 하였다. 그런데 의원내각제에서는 그 대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의원 선출 과정에서도 정당들은 지역감정의 활용과 같은 극한 자극은 상호 삼간다. 의원내각제는 합의제적 권력구조이므로 거기서는 서로 다른 여러 정당들 간의 협조와 타협이 지속적이고도 교차적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행정부는 의회에서 구성되므로 지금과 같이 대선에 투여되는 막대한 선거비용의 낭비가 방지된다. 의원내각제에서의 수상 선출이란 사실상 정당의 지도자 선출 문제에 해당한다. 정당 내에서 행해지는 선거 비용이 많이 들어야 얼마나 들겠는가.

셋째, 정당정치가 활성화된다. '대권'의 정치적 구심력은 이념이나 정책 기조를 뛰어넘을 정도로 막대하며, 따라서 한국의 정당(정치인)들은 대권의 보유자 혹은 보유후보자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을 거듭해왔다는 사실은 <4>편에서 본 대로이다. 정치의 핵심 주체는 인물이지 정당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당이 주체가 된다. 총리나 수상, 그리고 각료들은 각각 그들이 속한 정당의 내부규율은 물론 내각전체의 집단적 의사결정과정, 그리고 무엇보다 의회의 견제에 의해 제도적으로 구속된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정당과 의회의 일원임을 잊을 수 없으며, 그들의 정치행위는 정당의 이름으로, 정당의 책임 하에 수행된다. 따라서 여기에 위임대통령제에서와 같은 반정당적, 반의회적 정치행태가 자리 잡을 틈은 거의 없다. 이렇게 정당은 정치의 중심에 서게 되는 것이다.

넷째, 다정당체계의 대통령제에서 상시적으로 문제가 되는 대통령의 정당권력 부족으로 인한 행정부와 의회간의 교착, 그리고 그로 인한 정부의 수행능력 장애 상태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선 의원내각제에서는 의회만이 유일하게 선거를 통해 국민으로부터 직접 정통성을 부여받으므로 <4>편에서 논의했던 이원적 정통성의 문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연립)내각의 구성 자체가 의회에서 실질적 다수를 차지하는 정당(들)에 의해 이뤄지므로 (돌발변수가 개입하지 않는 한) 수상 혹은 총리가 의회 내에서의 정당권력 부족 문제로 고생하는 일은 애초부터 생기지 않는다. 더구나 내각제에서의 권력은 정당 간에 서로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대통령제 하의 정당연합과는 달리 연립정부의 참여 정당들 사이에는 상호간에 제도적인 유인요인이 존재한다. 연립내각의 정치적 안정성이 외부는 물론 내부로부터도 유지된다는 것이다. 의원내각제의 연립정부가 안정적인 수행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까닭이다.

다섯째, 정부의 민주적 책임성이 높아진다. <4>편에서 지적한대로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한국적 정치 현실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책임 묻기를 정당을 통해서도 하기 어려웠다. 정당들의 정체성과 제도적 지속성이 미흡하므로 '회고적 투표'를 통한 책임 추궁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의 정부는 다르다. 상기한대로 의원내각제 정치의 주체는 정당이다. 대표-책임의 민주주의 원리가 인물이 아닌 정당 차원에서 철저히 구현될 수 있는 시스템인 것이다. 정당의 책임성은 정치 지도자의 검증 과정에서부터 담보된다. 수상이나 각료 등 의원내각제에서의 정치 지도자들은 소속 정당의 위계구조를 따라 능력 검증의 과정을 장기간에 걸쳐 철저히 받아 탄생한다. 그러한 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정당의 이름으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국정을 운영해가는 것이다.

여섯째, 장기적 측면에서 볼 때 대통령제에서보다 다정당체계의 의원내각제에서 국가 정책의 연속성이나 안정성(policy stability)이 더 향상된다.(주4) 대통령제에서는 물론이고 양대정당체계의 의원내각제에서도 선거 이후 정권이 바뀌게 되면 국가의 이념이나 정책들이 일시에 전환되는 경우는 자주 목격되는 일이다. 양자 모두 승자독식의 권력집중형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온건)다당제에 기초한 의원내각제에서는 승자독식이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연립정부가 일반적인 정부형태이므로 국가정책은 기본적으로 특정 정당의 독주에 의해서가 아니라 다수 정당간의 협조와 타협에 의해 결정된다. 서로의 정책과 이념 차이가 심하게 나는 정당들간의 연립은 애당초 이뤄지지도 않으며, 연립이 구성되면 그것은 중도를 중심으로 하여 그 최근거리의 좌파 혹은 우파 경향 정당들 사이에 이뤄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것도 일단 연립정부가 세워지면 참가정당들간의 견제와 균형 노력을 통한 일정한 정책 수렴화 현상이 지속적으로 일어난다. 설령 선거를 통하여 참가 정당 중 일부가 교체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크게 다르지 않은 그들간의 수렴 노력은 계속된다. 따라서 온건 다당제 하의 연립정부의 경우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국가의 이념과 정책기조가 커다란 변화 없이 상당 기간 지속되는 경향을 보인다. 2차대전 이후의 독일에서 좌우파 경향의 정부가 번갈아 교체되면서도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기간 정책의 중도적 연속성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주도세력이 기민당이든 사회당이든 간에 그간의 모든 연립정부에 중도정당인 자민당이 참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타당한 것이다.(주5)

이와 같이 권력분산형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은 여러 가지 훌륭한 개혁 효과를 기대케 한다. 다만 여기에도 유의할 점이 있다. 한국과 같이 입헌군주국이 아닌 나라가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경우,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초당파적 국가원수 혹은 '권위중심체'의 부재로 인해 국가나 사회통합의 안정적인 구심점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주6) 이것이 아마도 군주국이 아닌 유럽의 공화국들 대부분이 의원내각제 대신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만약 의원내각제를 택하면서 이 난점을 해결하고자한다면 독일이 그랬듯이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의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을 따로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대통령에게는 한국적 맥락에서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 정도의 지위 및 권한이 주어져야할 것이다.

합의제적 권력구조로의 전환 조건: 정당의 구조화

마지막으로 합의제적 권력구조, 즉 명실상부한 분권형 대통령제나 권력분산형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은 정당의 구조화라는 전제 조건의 충족을 필요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며 본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누차 언급해왔듯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현은 정당의 구조화로서만 가능하다. 자기만의 분명한 이념과 정책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사회의 균열과 이익을 안정적으로 대표하고, 선거 정치의 주체로 나서며, 정부의 정책에 영향을 미치거나 결정하는 역할을 하는 정당이 제도화되지 않은 조건에서는 어떠한 권력구조도 대의제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러한 조건 하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초 원리인 대표-책임의 연계 실현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당의 역할이 허약할 때는 백약이 무효"라는 진단은 정확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주7)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정당의 구조화가 안 된 상태에서의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의 도입은 무익한 정도를 넘어 자칫 권력구조의 개악이 될 수도 있다. 지역정당 중심의 한국 정당구도는 계속 다정당체계를 유지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 예상된다.(주8) 그러므로 기존 조건 하에서의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책임내각제의 도입은 결국 비구조화된 다당제와 내각제를 결합시킨다는 것인데, 거기에는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 같은 정치구도에서는 군소 지역정당(들)일지라도 지역 지지기반을 잘 관리하여 필요최소한의 의원 수만 확보할 수 있다면 심지어 연립정부에도 참여할 수 있다. 그리되면 (지역) 명망가나 소지역 중심의 지역할거주의는 오히려 더욱 창궐하게 될 것이다. 지역정당들 혹은 그 보스들 간의 정권 나눠먹기 양상이 만연되면서 권력구조는 결국 정치엘리트들 간의 '과두체제'로 개악돼갈 수 있다. 이렇게 된다면 국민의 뜻과는 상관없는 불안정한 연립정부의 구성과 (중심 이념이나 정책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잦은 정권교체 등으로 인해 정부의 효율성과 수행능력은 크게 저하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는 또한 내각제의 장점인 타협과 합의의 정치가 정책과 이념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인물이나 지역이익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노동이나 중소상공인 등과 같은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이익이 정책과정에 체계적으로 반영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정당 및 정치가들은 정책이나 이념에 근거한 신념보다는 정치적 보스의 사적 필요성이나 "지역 이기주의적 요구에 타협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주9) 결국 보수와 진보 등의 복수 정당이 있어 이들이 여러 계층과 계급 그리고 사회집단들이 표출한 다양한 이익을 적절히 집약하여 대의정치과정에 반영한다는, 그리하여 사회통합을 유지한다는 정당정치 본연의 기능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적 정치 상황에서는 내각제로의 전환보다는 선거제도의 개혁이 우선돼야한다. <3>편과 <5>편에서 설명한대로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의 도입이 정당의 구조화를 견인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선(先)선거제도 개혁, 후(後)권력구조 전환'의 원칙에 따라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제도 개혁 작업을 수행해 가야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권력구조의 개편은 개헌을 요구하는 지난한 과제이지만 선거제도의 개혁은 법률 개정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적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개헌을 무리하게 시도하기 보다는 당장은 선거제도의 개혁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도 합당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으로 정당의 구조화 작업이 진행되어 이념과 정책을 기반으로 하는 (온건)다당제가 구축되면 권력구조의 개편 작업은 그때에 이르러 정당 간 합의에 의해 자연스레 진행될 것이다. <4>편에서 언급한 대로, 다당제와 대통령제의 결합은 여소야대라고 하는 제도 간의 부조화 문제를 발생시킨다. 그것은 정당의 구조화 여부와는 관계없이 일어나는 문제이다. 비구조화된 다정당체계 국가인 한국에서는 그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록 부작용이 심하긴 했어도) 합당, 정당연합, 의원 빼내기, 연정 등의 미봉책을 실제로 활용하거나 시도하곤 했다. 그런데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정당의 구조화가 이루어지면 과거의 그러한 미봉책마저도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이념 및 정책적 차이가 뚜렷한 정당들 간에는 의원들의 당적 이동도 매우 어려운 일일뿐더러 (나눠가지기도 힘든 대권을 놓고) 합당, 연합, 연정 등과 같은 엘리트 주도의 정계개편이 (비구조화된 정당들 사이에서처럼) 쉽게 합의될 리도 없기 때문이다. 여소야대로 인한 정부의 정책수행과 국정운영의 어려움은 지금보다 더해지리라는 것이다.(주10)

결국 이 심각해진 제도 간의 부조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제를 의원내각제나 책임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정당들 간에 형성될 것이다. 어느 정당이 대통령을 배출하든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조화된 온건다당제는 대통령제보다는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와 결합할 때 정부의 수행능력 제고와 정치사회적 안정에 보다 유리한 제도가 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경험적 혹은 이론적으로 증명된 바 있다.(주11) 유럽의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들이 예외 없이 이러한 제도 결합을 택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주1) 최장집 외 (2007), p.169

주2) 황태연, 2005. "유럽 분권형 대통령제에 관한 고찰" 『한국정치학회보』 39집 2호

주3) 안순철(2001, 9-10)은 이러한 형태의 의원내각제가 한국적 현실에도 적합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주4) 대통령제에 비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의원내각제의 정책 안정성이 더 높은 이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Ronald Rogowski, "Trade and the variety of democratic institutions," International Organization, vol.41, no.2 (1987); Arend Lijphart(1999) 등 참조

주5) 안순철(1998), p.280

주6) 황태연(2005)

주7) 최장집 외(2007), p.176

주8) 장의관, "선거제도의 쟁점, 사례 및 제도화의 방향," 국제평화전략연구원 엮음, 『한국의 권력구조 논쟁 II』 (서울: 풀빛. 2000), p.129; 안순철(2001), pp.6-7.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양대정당체계를 낳는다는 뒤베르제의 법칙을 깨고 한국에서는 유신정권기간 등과 같은 특수상황 하를 제외하고는 줄곧 다정당체계가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한국정치의 특수 변수인 지역할거주의와 인물중심주의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주9) 정준표(1997), p.159.

주10) 이 같은 상황에 대해서는 라틴 아메리카의 여러 나라가 이미 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비례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이들 남미국가에서는 이념 지향적이고 당 규율이 강한 정당들이 발전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구성된 의회가 대통령과의 견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구조화된 다당제와 대통령제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혹자는 남미국가들에서의 이 결합을 최악의 결합으로 평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러한 결합구조 하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행정부와 의회간의 풀기 어려운 교착 상태, 그리고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경제적 비효율성의 만연 때문이다. Joe Foweraker, "Review Article: Institutional Design, Party Systems and Governability: Differentiating the Presidential Regimes of Latin America," Journal of Political Science, vol.28 (1998) 참조.

주11) 대표적 연구에는 Scott Mainwaring, "Presidentialism in Latin America: A review Essay," Latin American Research Review, vol.25, no.1 (1989); Juan Linz,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 Journal of Democracy, vol.1, no.1 (1990); Juan Linz, "대통령제와 내각제: 과연 다른 것인가?," 린쯔·바렌주엘라 저, 신명순·조정관 공역, 『내각제와 대통령제』 (서울: 나남출판, 1995); Arturo Valenzuel, "Latin America : Presidentialism in Crisis," Journal of Democracy, vol.4, no.4 (1993); Alfred Stepan and Cindy Skach, "대통령제와 내각제: 비교적 시각," 린쯔·바렌주엘라 저, 신명순·조정관 공역, 『내각제와 대통령제』 (서울: 나남출판, 199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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