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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겨울, 중국집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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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1992년 겨울, 중국집의 추억

[추모] 오호 통재라! 당대의 인걸이 가셨구나!

언제였던가. DJ랑 몇몇 글쟁이들이 서교동 아무개 중국집에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1992년 대선 직후였다. YS에게 패하고 나서 모든 정치 활동 포기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나는 그를 위로하고자 마련한 자리였다.

명분은 작가회의 주최 가난한 문인 돕기 일일 주막 행사 때 DJ가 바쁜 유세 일정 중에도 찾아와 준 것에 대한 답례였지만 때가 때이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분위기는 무겁고 침울할 수밖에 없었다. 술 좋아하고 말 좋아하는 것이 문인이라지만 그때만큼은 그저 의례적인 위로의 말밖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술이 몇 차례 돌고서, 차례로 한마디씩 하게 되었는데 나에게도 말할 기회가 왔다. 평소 워낙 말주변이 없는 터라 그냥 술김에 '이제 선생님은 현실 정치에 연연하지 마시고 남북한을 아우르는 재야 지도자로서 웅대한 정치철학을 펴나가시길 바란다'고 큰소리로 당부 아닌 당부를 했다.

그리고 곧바로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현재 인류의 당면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보느냐?'는 생뚱맞기 짝이 없고 자리에도 별로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드렸다. 그때 DJ는 마치 잘 준비된 학생처럼 다음과 같은 내용의 이야기를 장장 30분간에 걸쳐 특유의 열정적인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부근 올두바이 계곡에서 발생한 인류가 장구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수많은 사건과 부딪혀왔지만 그래도 인류가 진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준 것은 민주주의의 확장이라는 신념이었다. 민주주의야말로 지금까지 인류가 추구해 온 가장 높은 보편적 가치이다. 지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당면한 문제도 알고 보면 결국 그 나라 그 민족의 역사와 함께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은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기 위한 이러한 몸부림 아니겠느냐. 어떤 이념의 갈등이나 어떤 경제적 갈등도 잘 살펴보면 결국 민주주의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귀결될 수 있지 않겠느냐."

우스꽝스런 질문에는 진지하게 답변하라는 말이 있다. 우문현답이 그것이다. 사실 나는 그때 속으로 적지 않게 놀랐다. 첫째는 이 어리석은 서생의 질문에 그토록 열정적으로 답해주시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한 점이었고, 둘째는 갑작스러운 질문이었음에도 인류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숫자까지 열거하며 설명하는 그의 박학다식함 때문이었다.

술자리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내내 정치적 패배(대선)에도 불구하고 그를 여전히 위대한 정치 지도자로 기억 남게 해 주는 힘이 무엇일까, 하는 의문에 잠겼다. 그때 그는 분명히 패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패배의 아쉬움과 포기할 수 없는 집념 역시 감추지 않았다. 인간적인 외로움도 비쳤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공자가 이상사회의 꿈을 지닌 채 천하를 주유하던 것과 같이 자기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의 열정적인 답변 속에서 그가 당대 자신의 시대에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어떤 소명 같은 것을 가진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이는 그것을 정치적 야망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르고 어떤 이는 끈질긴 승부사의 기질이라고 표현할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 모든 표현을 다 포함하여 그때 그의 몸에선 어떤 비범한 운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은 더 많은 이웃과 권력을 나누는 민주주의를 시대가 자신에게 준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이야말로 그를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게 한 힘이었다. 1992년 12월 19일, 대선에 패배해 정계 은퇴 선언을 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면서 신순범 의원이 울음을 터뜨렸다. ⓒ연합뉴스

보통 사람들은 오랜 기다림에 패하게 마련이다. 수차례에 걸친 좌절과 시련. 이어진, 스스로 '인동초'라 불렀던 모진 기다림의 세월. 하지만 그는 끝내 패하지 않았다.

왜일까? 짐작건대 그것은 그의 기다림이 단지 그 자신만의 기다림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의 가슴에 한이 된 기다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대선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후유증을 앓아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도 패배를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은 구로구청으로 모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를 배경으로 나는 졸작 '포도나무집 풍경'이란 소설을 썼다.)

부정 투표의 혐의가 있는 투표함을 지키던 구로구청은 경찰들의 무자비한 공격으로 전쟁터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던 민주화의 선봉 김병곤 선배는 끝내 구속이 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밤거리를 걷다가 보면 술에 취한 늙은 아저씨가 담벼락에 기대 '김대중…씨팔!' 하며 울던 시절이었다. 김대중이란 이름은 단지 하나의 개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꿈과 한을 상징하는 표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포기할 수도 패배할 수도 없는 한 시대의 정신이었다.

그리하여 5년 후, 하나의 예감처럼 영국에서 돌아온 그는 자신의 꿈에 도전할 또 한 번의 기회를 맞아들였고, 마침내 승리하였다! 그것은 그의 승리이기도 하였지만, 해방 이후 그 오랜 피와 눈물, 수많은 고귀한 희생 이후에 얻어진 민주 진영의 승리이기도 했다.

그날 우리는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돌아가신 문학 평론가 김병걸 선생이 어디론가 전화를 하시고 나서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래도 DJ가 된 것 같소' 하던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DJ가 대통령이었던 시절, 무엇이 달라졌던가를 여기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론하자면 수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혁명적으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지금의 이명박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DJ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IMF라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그는 많은 점에서 타협하였다.

재벌과도 만나고 반대자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박정희 기념관을 지어주겠다고 하여 오랜 신념적 동지들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민주주의와 민족의 화해라는 대원칙에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지닌 보기 드문 정치가였다. 분명한 것은 같은 정치적 이상을 가졌다 하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상주의자였다면 DJ는 철저히 현실주의자였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이상주의는 결국 자신의 진영에서조차 자신을 고립시켰고, 죽음에 의해 반전되기 전까지 그는 외롭게 포위된 채 자신의 꿈을 혼자 가져갈 수밖에 없었다. 역설적으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없었다면 끝내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조롱과 야유의 벽을 넘어갈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DJ는 태생적으로 타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유진산이 이끄는 야당에서 정치적 수련을 해야 했던 그는 곧 박정희라는 거대한 산과 만나야 했고, 민주주의라는 절체절명의 시대적 과제와도 마주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저 야비했던 군사정권의 온갖 정치 공작과 협박, 고문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였고, 둘째는 강력한 군사정권과 맞서 싸우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여야 하였을 것이다.

연대할 힘은 모두 연대해야 했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산술에 따라 때로는 과거의 적과도 손을 맞잡아야 하였을 것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5·16 군사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JP와 손을 잡고 대선에서 마침내 승리를 하였을 때 그를 오랫동안 지지해왔던 대중들조차 그것을 야합이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의 승리는 한국 정치사의 기적이었고, 오랜 보수 기득권 세력에겐 하나의 혁명과 같은 충격이었다. 사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서민의 꿈을 안고 기적적으로 당선된 사실보다 그때 그 시절 김대중 대통령의 당선이 훨씬 더 기적에 가깝고 그래서 더 충격적이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쨌거나 중국집의 그날 이후, 나는 다시 그를 가까이 만날 기회가 없었다. 글쟁이란 게 어려울 때나 외로울 때 그저 말벗으로야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바쁘고 잘 나갈 때야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섭섭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의 당선으로 나 역시 여러모로 보이지 않은 혜택을 입었는데 그 하나는 더 이상 언제 어디선가 잡혀가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점이고, (고문 후유증으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곤 했는가.) 둘째는 살아생전 금강산 구경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세계 어디를 여행하든 더 이상 야만적인 국가에서 온 국민이 아니라 민주화된 사회에서 온 시민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뿌듯한 자부심을 품게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민주사회로 가는 긴 장정에는 필연적으로 보수반동의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민주주의란 백 미터 달리기처럼 도달할 수 있는 결승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살아있는 제도로서 끊임없는 도전과 응전을 통해 스스로 진화해나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는 보다 많이 소유하고 싶고, 보다 더 지배하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과도 싸워나가야 한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도 따지고 보면 더 이상 민주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사회 전체가 관료화되고, 관료화된 특권층이 부패하면서 벌어진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지금 그런 필연적인 보수반동의 시기를 지나가고 있다. 민주주의란 말에 본능적 거부감을 지닌 보수 세력은 또다시 해묵은 반공을 기치로 내걸고 나라 전체를 10년 전의 부패한 군사정권 시절로 되돌려 놓기 위해 쿠데타적 상황을 연출하고 있지 않은가.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폭력적으로 미디어법을 통과시키고, 공장에는 구사대가, 재개발 단지에는 철거단원과 경찰이 무자비한 살인적 폭력을 휘두르고, 기무사는 또다시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까지 서슴지 않는, 그 옛날 그 어둡던 기억을 되살리는 일들이 연일 터져 나오고 있지 않은가.

이런 시대에 이 모든 숙제를 남겨둔 채 자연의 생을 마감해야 했던 그의 심정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민주주의도 남북 관계도 모두 후퇴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 나는 이제 늙어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부디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의 마지막 말이 남아있는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참으로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깨어 있는 정치인, 아니 깨어 있는 인간의 목소리다. 깨어서 슬프다. 늙지 않은 정신과 늙어갈 수밖에 없는 육신. 그와 함께 10여 년 전 어느 날, 중국집에서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시던 그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평생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나라를 위해 일관된 하나의 철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며 또한 행복한 일일까. 이제 그는 비운의 풍운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우리의 역사 속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하나의 신화가 되었고 별이 되었다. 그분과 함께 한 시대를 살았고, 잠시나마 한자리에 앉아 같이 술잔을 기울일 기회가 있었다는 기억만으로도 내 생애 무한히 감사하고 영광스러울 뿐이다.

오호 통재라! 당대의 인걸이 가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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