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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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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 방향

[정치개혁 강좌]<5> 선거제도 어떻게 바꿀 것인가

<희망정치연구회>가 진행 중인 정치개혁 특강을 연재합니다. <희망정치연구회>는 정치제도개혁에 관한 정치, 사회, 법률분야 전문가들의 의견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설립된 민간단체입니다. <프레시안>은 정치개혁, 제도개혁을 연구해 온 학자들의 전문적인 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구성해 게재합니다. 첫번째 정치개혁 특강을 맡은 최태욱 한림대 국제대학원교수의 강의는 8회에 걸쳐 연재될 예정입니다. <편집자>

<1>편에서 우리는 합의제 민주주의의 5대 특성을 살펴봤다. 그리고 그 5가지 제도적 특성들이 서로 정합성 혹은 친화성을 유지하며 연계되어있음도 확인했다. 이제 그 연계 고리의 시발점이 되는 선거제도의 개혁 방향에 대하여 논의하고자한다. 선거제도가 정당구도를, 정당구도가 행정부 형태를, 그리고 행정부 형태가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권력 관계를 상당 부분 결정한다는 등의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다수제에서 합의제로 바꾸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선거제도를 그에 합당한 것으로 개혁해야한다는 것이다.

앞서 보았듯이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합의제 민주주의를 운영하고 있으며, 그들은 모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점유율 간의 비례성이 매우 높은 선거제도를 택하고 있다. 따라서 거기서는 과소대표나 과다대표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표를 적게 얻은 정당이든 많이 얻은 정당이든 그들은 자신을 지지한 국민의 비율만큼 의석을 배분받는다. (사실 그래야 국민의 뜻이 제대로 반영된다.) 정당들은 그저 지지받은 만큼의 대표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사회에는 다양한 이익과 요구가 존재하므로 그들을 대표하고자하는 정당의 수는 여럿이기 마련이다. 비례성이 보장되는 선거제도 하에서는 설령 군소정당의 난립을 방지하기 위한 봉쇄조항이나 저지조항 등이 있더라도 그것이 요구하는 (대체로 2%에서 5% 정도의) 최소득표율 이상만 획득하면 어느 정당이나 자신의 득표율에 비례하는 의석을 배분받는다.(주1) 사회적 맥락에 부합하는 분명한 이념과 가치 그리고 현실성 있는 정책기조를 갖춘 정당이라면 이 정도로 자유로운 '정치시장'에서 상당 규모의 '고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여 원내 정당이 된다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 하에서 합의제 민주주의의 핵심 특성인 이념과 정책 중심의 다정당체계가 발전하는 까닭이다.

결국 합의제 민주주의를 위한 선거제도 개혁의 요체는 비례성의 확보이다. <3>편에서 지적했듯이 지역주의와 결합돼있는 한국의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이념/정책 정당의 과소대표와 지역/인물 정당의 과도대표 현상을 만연케 해왔다. 합의제 민주주의 발전의 기본 조건인 정당의 구조화를 오히려 억제해온 제도 환경이었던 것이다. 이 환경을 바꾸기 위해서는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를 도입해야한다. 다행인 것은 최근 선거제도의 개혁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다는 점이다. 크게 세 가지 정도의 개혁안이 주목받고 있다. 중대선거구제, 전면 비례대표제, 그리고 비례성이 보장된 혼합형 선거제도 등의 도입이 그것들이다. 간략하나마 하나씩 살펴보자.
ⓒ뉴시스

중대선거구제의 도입

현재 우리 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중대선거구제'의 도입은 현행 상대다수대표제를 유지하되 선거구의 크기 즉 한 선거구에서 선출되는 국회의원의 수만을 늘리자는 이른바 '소폭 개혁론'이다. 지금과 같이 각 지역구에서 단 1명만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지역구에 따라 2명 이상의 다수 의원을 득표 순서에 의해 즉 상대다수제로 선출하자는 것이다.(주2) 2인 선거구제라면 지역구 득표순위 2등까지, 5인 선거구제라면 5등까지, 그리고 8인 선거구제라면 8등까지를 국회에 보내는 방식이다. 이 경우 (물론 비례대표제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다수대표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보다는 분명 비례성이 높아진다. 특히 선거구의 크기를 크게 잡을수록 과소대표 현상은 더욱 줄어든다.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을 선출할수록 소수정당이나 신생정당의 후보들이 당선 순위에 들어갈 가능성은 커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5~6인 선거구제를 도입한다면 호남권에서는 한나라당 그리고 영남권에서는 민주당 후보의 당선율이 지금보다는 훨씬 높아질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역시 양 지역에서 나름대로 유의미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중대선거구제에는 몇 가지 문제들이 있다. 이 문제들은 중대선거구제가 비례성을 높여준다고는 해도 그것의 전격 도입에는 선뜻 찬성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심각한 것들이다. 그리고 사실 중대선거구제가 보장하는 비례성의 정도는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 그리 높은 것도 아니다. 1996년의 중의원 선거 이전까지 일본이 택해왔던 단기비이양식 중선거구제가 그 사실을 입증한다. 36개국의 민주주의를 대상으로 한 레입하트의 실증 분석에 의하면 1945년에서 1996년 사이 일본 선거결과의 비례성 정도는 (물론 다수제 민주주의 국가들보다는 높았지만) 합의제 민주주의 국가 중에서는 최하위에 속했다.(주3) 중대선거구제 도입의 개혁효과가 대단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부작용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두 가지만 짚어보자.

하나는 소수대표의 문제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서보다 오히려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특히 비례성을 높이기 위해 선거구의 크기를 크게 할 경우 매우 빈번히 발생하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난 <3편>의 <표 1>을 보자. 그 표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의 15대 총선 결과를 사례로 들어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하에서의 소수대표의 문제를 보여주었다. 거기서 문제된 것은 1, 2, 3위가 각각 28.5%, 28.2%, 28.0%로라는 엇비슷한 득표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근소한 차이로 2위와 3위를 앞선 1위 후보만이 소수대표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는 것이었다. 만약 당시의 만안구가 5인 선거구제였다면 어땠을까? 그 경우 1위와의 표 차이가 크지 않은 2위와 3위는 물론이고 상당한 차이가 나는 4위와 5위까지도 선출된다. 그런데 4위의 득표율은 7.9%였고 5위는 겨우 3.1%였다. 결국 선거구 유권자의 3% 정도의 지지만으로도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라면 그 국회의원의 대표자격을 의심할 정도라고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이와 같이 지나친 소수대표의 문제가 여러 선거구에서 발생한다면 국회 자체의 대표성에도 의문이 가게 된다.

중대선거구제의 또 다른 문제는 정당투표가 아닌 인물투표 경향이 강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 경우는 명백히 개악에 해당한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는 '1당 1후보' 원칙에 의한다. 모든 정당이 한 지역구에 (자기 정당의 대표 격으로) 한 후보만을 세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인물 변수 못지않게 정당 변수의 중요성도 상당하다. 그런데 중대선거구제에서는 한 정당이 한 지역구에 복수의 후보를 공천할 수 있다. 이 경우 후보들은 다른 정당은 물론 같은 정당 소속끼리도 득표 경쟁을 치러야한다. 동일 정당 후보들 간의 경쟁은 특히 자기 정당에 대한 지지가 강한 지역구에서 치열해진다. 이런 곳에서는 소위 '정당프리미엄'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에서라면 영남권 지역구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끼리, 그리고 호남권 지역구에서는 민주당 후보들끼리의 경쟁이 (타당 후보들과의 경쟁보다 더) 치열하게 벌어질 것이다. 이 경쟁은 어차피 정당의 차이로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므로 개별 후보들은 유권자들에게 어떻게든 자기 개인을 부각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정당 변수는 상수(常數)에 불과한 이 상황에서의 투표는 결국 인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인물투표 경향이 강해지면 선거정치 과정에서 수많은 부작용이 일어난다. 소속 정당의 이념이나 지향 혹은 정책기조가 아니라면 각 후보들은 대체 무엇으로 지역구민들의 개인적 지지를 획득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개인후원회와 같은 사조직을 지역 내에 많이 거느리려 들 것이고, 그러한 자기 조직에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지지자들을 안정적으로 확보해놓기 위하여 그들에게 끊임없이 물질적 혹은 정책적 혜택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토양에서 금권부패정치나 '사익(私益)제공정치'(pork barrel politics)가 만연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이것은 선거제도 개혁 이전의 일본 정치가 그대로 보여준 현실이기도 하다. 집권 자민당 후보들끼리의 격한 선거경쟁이 금권정치와 파벌정치를 고착화시켰으며 그 와중에 지역 사익집단들의 정치적 영향력은 과도한 정도가 되었고, 그것들이 결국 일본을 1990년대 초반까지도 부패한 신중상주의 국가로 머물게 했다는 반성이 선거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은 정확하다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대선거구제는 실로 치명적인 문제들을 안고 있다.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 비해 비례성이 높은 선거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나 대만 등의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제도를 택한 민주국가가 거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1994년 그리고 대만은 2004년의 선거제도 개혁을 통해 이 문제 많은 선거제도를 폐기하고 새로운 혼합형 선거제도를 도입하였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 정치 개혁이란 이름으로 (중선거구제가) 다시 거론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 할 것이다.(주4)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

비례성이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는 선거제도는 역시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이다. 물론 비례대표제도 선거구의 크기, 최소(득표)조건, 투표 및 입후보방법 등에 따라 다양한 종류로 나뉘고 그들 간에는 어느 정도의 비례성 차이도 존재한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비례대표제의 여러 형태를 개별적으로 논하지는 않는다. 단지 진정한 비례대표제라면 그들 모두가 공유하는 비례성 보장이라는 핵심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전면 비례대표제의 도입 필요성과 그 효과를 개괄적으로 살펴본다.

한국의 현행 소선거구 일위대표제 중심의 선거제도를 전면 비례대표제로 개혁한다면 우선 이념 및 정책 정당들에 대한 정치시장의 진입장벽이 크게 낮아질 것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서는 투표가 통상 광역 선거구 혹은 전국구에서 인물이 아닌 정당에 대하여 행해지므로 각 당이 내세우고 있는 이념이나 정책은 매우 중요한 선거변수로 작용하게 된다. 특정 지역이나 인물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보편적인 이념이나 정책에 기반하여 성장하고자 하는 개혁정당들에게는 당연히 보다 유리한 환경이 제공되는 것이다. 또한 의석의 배분이 각 당의 득표율에 비례하여 이뤄지기 때문에 신생정당들은 적은 득표율로도 (선거구에서 반드시 1위 할 필요 없이) 그에 비례한 의석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사표가 발생되지 않는 까닭에 유권자들은 전략적 투표를 할 필요 없이 자신의 정당 선호를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것이 이념 및 정책 정당들의 득표와 의회 진출에 도움이 되는 것임은 물론이다. 신생 정당들의 진입 증대 현상만이 아니다. 비례대표제의 도입으로 선거 환경이 바뀌면 기존 정당들도 이제 생존을 위해서라도 인물이나 지역이 아닌 이념이나 정책으로 승부하려 들 것이다. 결국 비례대표제가 한국의 정당체계를 구조화된 다당제로 개혁해가리라는 것이다.

비례대표제의 도입 등을 통한 정당의 구조화 작업은 특히 양극화의 심화 등으로 사회통합의 위기를 우려하고 있는 우리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대안 체제를 마련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켜 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완수해야할 개혁사업이다. 비례대표제가 세계화시대의 '개방소국'들에게 적합한 선거제도라는 것은 소위 '유럽소국들'(small European states)의 경우를 분석한 카첸스타인이나, 상기한 레입하트 등의 연구에 의해 이미 오래 전부터 입증돼온 사실이다.(주5) 여기서 개방소국이란 반드시 인구나 영토의 규모가 작은 국가들만을 포함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화나 경제통합을 주도할 정도의 힘과 영향력을 가진 '대국'이 아닌 오히려 그것이 부여하는 조건과 환경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야한다는 의미의 '소국'인 자유무역국가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나라 역시 개방소국에 해당한다. 이 개방소국들은 세계화 시대의 생존 요건인 국가 경쟁력의 유지 혹은 제고를 위하여 상시적으로 적극적인 구조조정을 추진해 가야만 한다. 이 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과정 중에 파생할 수 있는 사회통합의 위기를 어떻게 미연에 방지하느냐이다. 대의제 민주주의 국가의 타당한 해법은 당연히 사회경제적 약자들이나 소외집단들의 이익표출과 집약이 제도권 정치 안에서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정당체계의 구축인 바, 비례대표제는 바로 그러한 정당구도의 형성에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는 선거제도라는 것이다. 비례성의 보장 덕분에 노동, 농민, 중소기업 등과 같은 세계화시대의 경제적 소수자 그룹들이 그들 나름의 정당 기제를 확보하여 정치 혹은 정책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례대표제를 도입할 경우 한국의 정당정치에서도 소수파 정당의 부상 가능성이 커지며 정당구도 역시 이념 및 정책 중심의 다당제로 가게 될 것임은 시뮬레이션을 통한 기존의 여러 연구에서도 이미 밝혀진 바 있다.(주6) <3>편에서 언급했던 15대 총선 당시 11.2%의 득표율로 고작 3.6%(9석)의 지역구 의석을 차지했던 통합민주당의 경우도 만약 전면 비례대표제나 아래에서 설명할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택하였더라면 9석이 아닌 31석이나 32석 정도를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주7) 헌정사상 최초의 중견 정책정당이 이때 이미 부상했을 지도 모를 일이었던 것이다.

2004년 총선부터 부분적으로 도입된 1인2표제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향후 한국 정당구도의 개혁 가능성에 희망을 주는 것이기는 하다. 비록 총 299석 중 불과 56석 만이 비례대표의석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이념 정당인 민주노동당이 10석이나(?) 얻어 국회에 진출하는 한국 정치사에서 보기 드문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비례대표의석이 유의미한 정도로 확대되거나 전면 비례대표제 혹은 독일식 비례대표제 등으로의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한국의 현 정당구도가 이념과 정책을 기준으로 구조화될 것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비례성이 보장된 혼합형 선거제도의 도입

비례성 확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네덜란드나 이스라엘 등이 택하고 있는)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는 전면 비례대표제보다 더 우수한 선거제도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대안인 혼합형 선거제도의 도입 주장에 주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전면 비례대표제로는 지역대표성의 보장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일반 유권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대표자를 직접 선출하여 의회에 보내고 싶기도 하겠거니와, 그리하는 것이 대표-책임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가 가장 투명하게 실천되는 길이기도 하다. 대의제 민주주의의 완성 조건 중의 하나는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을 동시에 제공하는 선거제도의 채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대안으로 받아들일만한 혼합형 선거제도는 이 조건을 (적어도 상당 정도) 충족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혼합형 선거제도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우선 현재 일본이 취하고 있는 단순 병립제를 평가해보자. 1994년에 단행된 일본 정치개혁의 핵심 내용은 총 500석의 중의원 의석 중 300석은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로 200석은 비례대표제로 따로 선출하는 병립형 선거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1996년의 중의원 선거는 이 내용 그대로 치러졌으나, 2000년 선거부터는 비례대표 의석은 180석으로 줄이고 소선거구 의석은 300석 그대로 유지한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현행 선거제도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로 총 의석의 62.5%를 선출하는 만큼 지역대표성은 충분히 보장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례성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통계를 보면 선거제도 개혁 이후 일본 선거의 비례성은 과거에 비해 거의 반 이하로 떨어졌다.(주8) 자민당 등 거대 정당의 과다대표와 사민당 등 소수 정당의 과소대표 현상이 크게 두드러졌다. 이 점에 관한 한 일본의 단순 병립제 도입은 오히려 개악임에 분명하다. 다른 문제가 상당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단기비이양식 중선거구제는 소선거구 일위대표제에 비해 적어도 비례성 제공 측면에서는 우수한 제도였다. 그러나 그것이 소선거구 일위대표제로 전환되면서 비례성이 크게 감소한 것이다. 그렇다고 비례대표 의석이 그 비례성 감소분을 메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선 전국을 11개 권역으로 나누어 권역별로 비례대표를 선출하는 일본의 비례대표제는 충분한 비례성을 창출하기에는 선거구의 크기가 너무 작다.(주9) 소수정당의 과소대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180석이라는 비례대표 의석도 소선거구 일위대표 의석에 비해 그 비중이 너무 낮다. 37.5%로는 62.5%에서 발생하는 비비례성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일본식 단순 병립제를 대안으로 취한다면 적어도 다음 두 가지 사항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하나는 비례대표 의석을 그 비중이 최소한 50% 이상이 되도록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그래야 유의미한 비례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현재 299석 중 54석만이 비례대표 의석이다. 일본의 경우에도 크게 못 미치는 불과 18.1%인 것이다. 다만 의원정수를 지금 그대로 유지한 채 비례대표의 비중만을 50% 이상으로 증대시킬 경우 자신들의 지역구가 사라질 것을 우려하는 현직 지역대표 의원들과 지역위원장들의 저항이 매우 거셀 것임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반대가 심할수록 개혁은 더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원정수를 최대한 늘림으로써 소선거구의 감소를 최소화시키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실 한국의 의원수는 다른 민주국가들에 비교하여 상당히 적은 편이기도 하다.(주10)

다른 하나는 비례대표 선거구의 크기를 가능한 한 크게 잡아야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같이 그것을 작게 잡을 경우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바람직하기로는 물론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렵다면 최소한 저지저항이나 봉쇄조항 등이 요구하는 최소득표율의 획득만으로도 모든 정당이 어느 선거구에서나 비례대표 1명 이상을 확보할 수 있을 정도의 선거구 크기는 돼야한다. 예컨대, 최소득표율이 1%라면 모든 선거구에서는 100명 이상을 선출해야하며, 2%라면 50명, 3%라면 34명, 5%라면 20명 이상이어야 한다. 그래야 소수정당의 과소대표 현상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혼합형 선거제도의 다른 유형인 흔히 독일식 비례대표제라고 불리는 소선거구-비례대표 연동제를 살펴보자. 이 제도는 전 세계의 많은 이들로부터 최고의 선거제도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무엇보다 비례성과 지역대표성이 동시에 그리고 충분히 확보되는 선거제도이기 때문이다.

운영 원칙은 간단하다.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하는 비례대표제로 일단 의회의 총 의석을 각 정당에게 배분하나, 그렇게 배분되는 의석의 50%는 소선거구 몫으로 지정해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총 100석 의회의 경우를 상정해보자. 이때 선거구는 비례대표제의 작동을 위한 전국구 하나와 지역대표 선출을 위한 소선거구 50개로 이원화된다. 그리고 투표는 1인 2표제로 실시된다. 여기서 각 유권자들은 한 표는 (전국구의) 선호 정당에게, 다른 한 표는 (자기가 속한 소선거구의) 선호 후보에게 던진다. 개표는 우선 전국구의 정당투표에 대하여 이루어진다. 그 결과에 따라 의회의 총 의석은 각 정당들의 득표율에 비례하여 배분된다. 만약 A정당의 득표율이 40%라면 그 정당은 의회의 40석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각 소선거구의 선거 결과를 셈한다. 만약 전국 50개 소선거구 중의 20곳에서 A정당의 후보가 일위에 올랐다면 그 20명은 물론 지역대표 의석을 차지하게 된다. A당이 확보한 총 40석 중 20석이 이렇게 확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20석은 정당명부에서 순서대로 뽑아 전체인 40석을 채운다.(주11)

이 같은 방식으로 이 선거제도는 전면 비례대표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비례성을 제공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지역대표성까지도 보장한다. 세계 최고의 선거제도라는 찬사를 받는 이유이다. 비록 채택되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학계와 시민단체 인사들도 약 5년간에 걸친 선거제도 개혁 공방 과정에서 독일식 비례대표제를 가장 우수한 선거제도라며 그 도입을 주장했었다. 비슷한 과정을 거친 뉴질랜드에서는 다행히 독일식 제도의 도입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 이 제도로의 개혁이 심도 있게 논의됐었다. 아무리 봐도 이 보다 더 나은 대안은 없는 것 같다. 이제 다시, 그러나 과거보다 더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도입 전략과 방안을 모색해볼 때가 아닌가 싶다.
주1) 비례대표제의 원칙 그대로 즉 모든 정당에게 그들의 득표율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할 경우 군소정당의 난립 현상에 따른 정치적 무질서 혹은 혼란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비례대표제를 택하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저지조항이나 봉쇄조항이라고도 불리는 문턱(threshold) 조항을 도입하여 이 문제를 해결한다. 예컨대, 2%, 3%, 혹은 5% 이상의 득표율을 확보한 정당들에게만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되면 국회를 구성하는 정당의 수가 과도하게 많아지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다. 즉 정당의 수가 6~8개에 이르는 극단 다당제가 아니라 3~5개 정도인 온건 다당제가 일반적인 형태가 된다.

주2) 사실 중대선거구제를 택하고 있는 민주국가에서 상대다수제로 지역 대표를 선출하는 것은 매우 드문 경우에 해당한다. 유럽에서는 중대선거구제라고 하면 으레 쿼터 방식에 의한 '단기이양식 선거제도'(single transferable voting system, STV)나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로 지역 의원 다수를 동시에 선출하는 제도인 것으로 여긴다. 중대선거구제와 상대다수제가 결합한 선거제도는 '단기비이양식 선거제도'(single non-transferable voting system, SNTV)라고 불리는데 이는 선거제도 개혁 이전의 일본과 대만이 취했던 특이한 제도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 SNTV를 중대선거구제로 지칭하므로 본고에서도 그 통칭을 따르기로 한다.

주3) Arend Lijphart(1999, 163-164)

주4) 강원택, 『한국의 정치개혁과 민주주의』 (서울: 인간사랑, 2005), p.65

주5) Peter Katzentein, Small States in World Markets: Industrial Policy in Europe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1985); Lijphart(1999).

주6) 시뮬레이션 분석들은 공히 어떤 형태의 비례대표제를 도입할지라도 현행 소선거구제에서 보다 의석의 지역편중경향, 즉 지역할거주의 현상이 감소될 것이고 소규모나 신생정당들의 의석율 확보가 용이해질 것임을 보여준다. 조기숙, "합리적 유권자 모델과 한국의 선거분석," 이남영 편, 『한국의 선거 I』(서울: 나남, 1993); 김용호·강원택,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의 기본 조건과 대안의 검토," 한국정치학회편, 『21세기 한국의 국가전략 학술회의』(1998); 신명순·김재호·정상화, "시뮬레이션을 통한 한국의 선거제도 개선방안," 『한국정치학회보』 33집 4호 (한국정치학회, 1999); 강원택(2005) 등을 참조.

주7) 신명순·김재호·정상화(1999), p.176 <표 2>



주8) 김형철, "혼합식 선거제도로의 변화와 정치적 효과: 뉴질랜드, 일본, 그리고 한국을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5권 1호 (2007), p. 227-228.



주9) 총 180명의 비례대표는 11개 권역에서 권역 당 평균 16명 정도를 개별적으로 선출하여 구성된다. 모든 권역이 16명을 선출하고 A라는 정당은 각 권역에서 득표율 5%를 기록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경우 (최대잔여제 등과 같은 소수정당 배려 기제가 '운 좋게' 작동되지 않는 한) 그 정당은 어느 권역에서도 비례대표 의원을 배출하지 못하게 된다. 16명의 5%는 0.8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전국을 단일 선거구로 했다면 그 정당은 180명의 5%인 9명의 비례대표 의원을 확보한다. 비례대표제의 선거구 크기가 작을수록 소수정당은 과소대표된다는 현실을 보여준다.



주10) 강원택(2005), pp. 88-95



주11) 참고로,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겠지만, 만약 A정당 후보 42명이 소선거구에서 승리한다면, 비록 A정당의 득표율을 초과하는 의석 배분이지만, 그 42명 전원은 A정당의 국회의원으로 인정된다. 이것을 '초과의석 인정'이라고 한다. 이 경우 A정당의 비례대표의원은 당연히 0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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