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이 있는 EP(Extended Play, 미니앨범) [Plastic People](2002)로 인사를 건넨 플라스틱 피플(Plastic People)은 <오후3시>와 <대지의 시간>을 기록한 [Songbags of the Plastic People]과 <사거리의 연가>를 노래한 EP [Travelling in the Blue]를 차근차근 내놓았다. 그리고 [Folk, Ya!]에서 컨트리와 인디 록의 여러 샛길을 <공항남녀>와 함께 탐험했다. 60·70년대 포크를 발판으로 딛고 쟁글거리는 기타와 아기자기한 악기를 들고서 자신만의 (음악스타일로서의) 인디 팝을 그려왔다. 매번 '달'과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며 모두가 그렇듯이 봄을 여러 번 맞은 대가로 나이를 먹어온 그들이 테이블 위에 한 장의 음반을 더 올려놓는다.
도시의 여기저기, 차분하고 정감 있게
▲ ⓒ일렉트릭 뮤즈 |
플라스틱 피플의 노래가방(Songbag)은 오래된 밴드의 호흡마저 담아 돌아왔다. 소심한 드럼스틱이 네 번 마주치고 하모니카가 수줍게 웅얼거리며 창을 여는 [Snap](2009)은 작고 대수롭지 않은 순간들을 포착한다. 아마 가장 근사하고 '한심한' 여름노래일 <우리들의 여름>은 "달빛에 혹해 지어낸 얘기들/ 알면서 웃어주는 여름밤"을 오래된 팝의 코러스를 되살리며 끼적인다. 자기가 만들어낸 주인공을 이렇게 저렇게 괴롭히는 사람이 작가라지만 플라스틱 피플은 그들을 쓰다듬고, 전화를 먼저 받겠다고 다투다가 파리채로 종아리를 맞으며 어른이 되었을 이들을 골목으로 안내한다. 그 덕에 집안에만 있던 물건과 가구들이 밖에 나와 햇살을 맞는 것처럼 소소한 감정들이 맑은 빛 아래 놓여진다.
멀어진 시간과 가까운 공간에 대한 스케치는 소란스럽지 않다. 도시가 시끄러워질수록 조용한 소리가 잘 들리게 되고, 멀리 있을 때 아름다운 것이 있듯이 바로 옆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음을 깨닫는다. 모서리에 머리를 찧거나 보도블록에 걸려 휘청대는 친구를 "아직 세상이 낯설구나"라며 놀렸는데, 낮은 돌담까진 아니어도 도시의 골목은 정말로 너무 일상적이어서 낯선 풍경들로 빼곡하다. 거길 찾아가는 <그늘에 서서>와 <여기저기>는 가을볕 든 마루나 그늘나무가 되어준다. 그리고 40년 전의 체코 밴드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에서 이름을 가져온 이들의 노래는 도시체류민이 옛 음악과 일상을 여행하며 남기는 기록이다.
하지만 이 골목은 빌딩의 등짝과 광고판의 뒤통수가 보이는 도심 뒷골목은 아니다. 그래, 도시마저 앓고 있다. 지하철역이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인 사람들이 승객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려 애쓰며 빈자리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공간도 아니다. 아니, 상관없을지 모른다. 방금 자리를 뜬 그(녀)의 체온을 엉덩이로 느끼다가 철교 아래로 산업화와 희생을 함께 상징하는 한강의 흔적기관인 밤섬이 나타날 때 챙 넓은 예쁜 모자마저 미안해지기도 하니까. 고향을 찾아 산마루 위로 불쑥 솟아오른 아파트를 보기 전까진 과거를 납치당하고도 신고할 번호를 알지 못하는 것, 그 역시 문맹임을 플라스틱 피플은 화내지 않고 속삭인다.
남녀의 보컬 비중이 완전히 역전된 [Snap]에선 귀여움과 서늘함을 겸한 윤주미의 매력이 잘 발휘되었다. 두 가지 빛깔이 같은 노래 안에 담긴 <고대하던 일요일>도 있다. 이상적인 남녀듀엣이자 1980년대 인디 팝을 추억하는 <농담으로 충분한 하루>는 꽤 심각한 내용이지만 '사는 게 그런 거 아니겠어'라는 양 사뿐할 뿐이고, 밴드의 자전으로 읽히는 <그래>는 이들이 걷는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려준다. "두리둥실 노랠 불러 애쓰지 않아도 좋아/ 마음 속 새겨진 음을 부르면 그만일 뿐"이라면서 '너무 심각하지 않게, 하지만 정성스럽게'라고 쓰인 쪽지를 손에 쥔 모양이다. 호주머니에 넣어주는 손,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귀가하는 풋풋한 걸음,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을 바라봐주는 늙은 마음, 사랑도 그런 것이다.
그러니 자극과 거리를 둬온 건 당연하다. 반전을 주제로 했다는 영화들이 선사하는 폭력과 살육의 스펙터클과 영웅들의 통쾌한 테러분자 제압 덕에 대리만족으로 폭력성이 해소되어 줄었는지, 반대로 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히려 악당을 괴물로 단순화하여 징악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있진 않을까. 하지만 [Snap]은 극적으로 과장하지도, 연설하지도 않는다. 소박한 악기들 역시 연주력을 과시하는 기구가 아니라 소심하게 장식된 리본들이다. 김원구(굴소년단)의 일렉트릭 기타가 제법 힘차게 앞장서는 <비상>은 [클럽 빵 컴필레이션 3](2007)의 <Morning After>만큼이나 로킹(Rocking)하지만 딱히 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플라스틱 피플의 남다른 특색들 중 하나인 동요 혹은 동화 분위기가 자연스레 설명된다. 단출한 편성과 귀여운 선율의 <노래하는 달>은 마루 깔린 교실에서 선생님의 풍금 반주에 맞춰 불러도 좋을 듯 하다. 쉬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극사실적인 묘사가 진보적인 표현은 아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손그림이 향수의 매개가 아니라 현재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며 아이와 어른, 자연과 문명, 신비와 과학을 만나게 했다. 플라스틱 피플의 감성과 기법과도 통하는 이야기다. 그래서 아이들도 좋아할 수 있는 노래들이 여럿 태어나고 있는 것이다. 김민규의 첫 밴드인 '메리고라운드'부터 정감어린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옛날'을 외면하지 않고 자신에게 솔직한 태도
▲플라스틱 피플 3집 [Snap] ⓒ일렉트릭 뮤즈 |
이러한 배경에는 옛날에 대한 애정이 있다. 시침이 빠르게 움직이자 기억을 빠르게 상실하는 새로운 능력을 얻었다. 타자수가 잊혀졌고 프로젝터 없는 극장에도 곧 익숙해질 것이다. 이젠 몰라도 되는 모스부호라든지 세일즈맨이란 단어는 그 시절에만 볼 수 있는 상징이 되었다. 문제는 기술과 세련미의 추구가 과거에 대한 오만을 만들고 찬란한 도시문명의 빛이 마음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예술과 지성이 발전했으리란 오해는 멀리 갈 것도 없이 20세기 전반의 무성영화들과 60년대의 음악들만 보아도 무색해진다. 플라스틱 피플은 그 유산을 거두어들여 "향을 켜고 풀을 태워 세월 흔적을" 잇는 <역사>로 가져온다. 자신들의 다리가 그 웅덩이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단계를 거치는 것, 이별과 사별을 포함한 체험들에서 생겨난 주름과 계단은 겪어봐야만 안다. 줄어드는 브루스 윌리스의 머리숱으로 세월을 가늠한다든지, 해마다 바뀌어 매번 다시 셈해야 하는 나이에 대한 수다가 아니다. 음악의 나이를 껴안을 정도로 성장한 뮤지션들이 음악이 껴안은 경험이 시간에 침식되지 않게 한다. 물론 역사가 된 과거는 재현되지 않아서 당대의 도구와 조건으로 레코딩을 해도 똑같아질 수는 없다. 대신 역사는 (죽은 자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만남으로 계속될 수 있다. 플라스틱 피플은 오래된 포크와 로큰롤을 오늘의 인디 록에 중계했다.
또 다른 배경은 솔직함이다. 우리 음악계에는 외부의 시선과 결과를 의식하여 스스로를 제한하는 것이 미덕이라 쓰인 액자가 걸려 있다. 개성을 강조하려다 개성이 사라지는 창조적이고 기발한 실수가 목격되고, 음반은 계속 나오고 있는데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음반이 늘어난다. 입을 떼기도 전에 "예·아니오"라고 말할 준비를 해둔 얼굴로 거울 앞에서 어떤 옷이 어울리는가 보는 대신 얼마짜리가 어울리는지 신경 쓴다. 유용하긴 해도 기억되지 않을 종합선물세트를 들고 오는 길에는 빵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을 뿐이다. 재치 있기로 유명했다는 미국의 언론인처럼 자신이 자신의 부고기사를 전한다. 덕분에 깔끔하고 세련되고 화려하고 멋진 노래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이런 호들갑 뒤에 남는 의문, 도대체 뭘 한 거지?
플라스틱 피플은 지지층을 의식해서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같은 생각과 취향을 가진 이들의 지지를 받았다. 리스너(애호가)의 성향으로 하는 음악은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해서 개중에는 관심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정리하거나 심화하는 편이 나았을 경우가 없진 있다. 그런데 취향의 세련된 표현에 성공한 예들도 많다. '굴소년단'의 [Tiger Soul](2009)은 어떤 편견을 민망하게 한다. "세련됨≒매력반감" 천만에! 고유한 매력과 섹시함을 세련되게 증폭시켰다. 이런 앨범들이 나온 레이블이 플라스틱 피플이 있는 '일렉트릭 뮤즈'이다.
한국에서 레이블을 운영하는 주역들은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해외음반의 라이선스와 수입 전문점으로 출발하여 점차 국내 뮤지션을 발굴하게 된 경우로 음악에 대한 추억과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책임감과 보람을 느끼게 된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기성 음악업계의 속성을 체감한 음악인들이 노선을 지키기 위해 직접 제작자로 나선 경우이다. 일렉트릭 뮤즈는 모두에 해당한다. 이들의 레이블 공연을 본 친구는 "저마다 색깔을 가진 팀들이 모여 하나의 그림을 이룬 점묘화"라고 말했다. 이 말은 [Snap]에도 적용된다.
▲ ⓒ일렉트릭 뮤즈 |
선율과 노랫말, 사운드의 손깍지가 만들어낸 '결정적 순간'
아톰북(Atombook)과 드린지오(Dringe Augh)의 앨범에 엔니지어로 관여한 김민규는 값싸지 않은 어쿠스틱 사운드를 뽑아내는 감각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런데 정작 [Snap]의 후반작업은 다른 이(이소림)에게 맡겼다. 그렇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 나았으리란 확신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빙판 위에 스케이트가 미끄러지듯 모든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맑은 사운드와 목판인쇄물 같은 정감이 함께 살아있게 되었다. 이 소리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인공하천의 세공된 깔끔함이 아니라 계곡물의 맑음에 가깝다. 음반과 오디오로 들을 때와 파일과 컴퓨터로 들을 때 음감은 물론 평가마저 달라지곤 한다. 대개 앞의 경우가 더 좋게 들리고 음악인의 의도를 잘 이해할 수 있는 반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반대인 경우도 꽤 있다. [Snap]은 명백히 음반 혹은 말끔한 시스템으로 들을 때에 그 가치가 제대로 전달되는 경우이다.
사운드 말고도 미세한 변화들이 있다. [Folk, Ya!]의 가사집도 작은 시집이었지만 [Snap]의 노랫말은 보다 성공적이다. 단지 가사쓰기 때문만이 아니다. 지금까진 완결성보다 일상의 순간처럼 소박한 멜로디와 느낌을 중시하는 짤막한 곡들이 많았다면, 이번엔 안정적인 구성과 충분히 반복되는 코러스에 의해 일반적인 '노래'로 인식되는 곡들이 늘어났다. 또한 <여백>과 <대지의 시간>, <기우제>처럼 앨범마다 끝자락 즈음에 배치된 선선한 곡들이 공기를 가라앉히며 여운을 줬다면, 지금은 그런 곡들이 추신이 아니라 서명이 된다. 이렇게 선율과 노랫말, 사운드와 무드가 만나면서 만들어진 '결정적 순간'은 결코 미세하지 않다.
한 쌍 같은 <커피와 담배>의 "저 문을 열면…"과 <흑백사진>의 "겨울이 오는 소리…"에 감정 변화를 유도하는 코드 전환과 사운드 증폭이 겹쳐진다. 사진작가를 꿈꿨던 음악인과 동반자가 오래된 사진에서 노래가 흘러나오게 한 <흑백사진>은 "지상의 소리가 하늘로 올라가네"에 이르러 다시 영상이 되면서 순환한다. 슬로코어 스타일의 연주와 한국적인 음성이 강화된 밴드 사운드 위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숯 공장 마을"의 "아이들"과 "검정 시냇물"처럼 작고 약하고 잊혀지는 것들을 향한 마음이 느낌(感)을 흔들어놓으며(動) 앨범의 막을 내릴 때, 플라스틱 피플은 어떤 경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이런 노래를 원했다.
앓고 있는 거리에 생긴 틈이 점점 커진 골목은 안전성을 해치기는커녕 도시를 건강하게 한다. 기념촬영지가 되어버린 고궁과 관광지, 그리고 광장처럼 자기감정을 구경하는 데에 익숙해진 우리에겐 대로가 아니라 골목 같은 사람과 음악이 약간의 위로를 건넬 수 있다. 벌써 하고 있다. 알지 못할 뿐. 그래서 페이지마다 빛나는 책과 같은 [Snap]은 골목을 만들어가는 한 장의 벽돌이다. 그리고 정겨운 여름노래와 서늘한 겨울노래를 중심으로 문과 창과 다락과 벽장과 지하실과 굴뚝이 있는 집을 짓는다. 그 안에서 소곤거리는 노래가방을 열어보고 예전에 덮어버린 책처럼 감춰둔 기억 속에서 자라난 어린 숲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 플라스틱 피플은 8월 29일에 부평 콜텍공장 부지를 찾아가는 '써머 모던록 페스티벌' 등에 참여한 후, 9월 5일에 홍대 앞 '클럽 빵'에서 앨범발매를 기념하는 콘서트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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