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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보'가 그렇게 부러운가?

[손호철 칼럼] 극우도, 자유주의도 진보를 자칭하는 기이한 대한민국

2004년 10월. 탄핵의 역풍으로 4월 총선에서 차지한 다수의석을 기반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은 역사적인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신문을 펴보자 "자유주의연대 출범"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 자유주의자, 즉 자유민주주의자들이 국보법 폐지를 위해 새로 단체를 만들었거나 자유주의적 정치성향을 갖는 노무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제2의 노사모가 떴나보다고 생각해 매우 반가웠다. 그러나 기사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니 이것은 개인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이 아니라 "때려잡자, 공산당!"의 극우반공세력들의 모임인 '반공주의연대'였다.

물론 자유주의란 민주주의의 최소조건인 보통선거권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등 원래 반민주주의였다. 인류의 다수는 무산자이기 때문에 보통 선거권을 주면 당연히 사회주의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진보적인 자유주의였던 존 스튜어트 밀조차도 보통선거권을 무서워해 자본가가 노동자보다 지적으로 우수하기 때문에 자본가는 1명당 투표권을 4표씩 주자는 차등선거제를 주장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자유주의는 진화를 해 자유민주주의로 발전했고 이제 사상, 표현, 언론, 집회의 자유와 같은 '자유권'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상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자유주의를 단순히 반공주의로 호도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이름아래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사상의 자유 등을 억압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를 압살해왔다. 또 자유주의연대처럼 자유주의를 극우반공주의로 착각하는 무식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가 먼 곳에 와서 고생이 많다!

그런데 얼마 전에는 더욱 기이한 광고가 언론에 나타났다. '자유주의진보연합'이라는 단체가 출범했다는 광고였다. 그래서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세력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세력이 연합한 반MB연합이 떴다 싶었다. 그런데 내용을 읽어보니 "자유주의가 진정한 진보다"라는 구호가 나타났다. 그리고 내용적으로는 자유주의연대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와는 거리가 한참 먼 극우반공주의연대였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이들이 민주노총, 전교조 등 흔히 진보세력이라고 불러온 세력은 '수구세력'이며 자신들이 진짜 진보라고 진보를 자청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 자유주의진보연합 신문광고

이 문제를 살펴보기에 앞서 주목할 것은 냉전적 보수세력만이 아니라 자유주의세력도 진보를 자처하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는 노무현 전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진보를 자임했고 이를 계승한 민주당도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좌파정권이라고 떼를 쓴 극우세력이 아니더라도 여러 언론과 학자들까지도 이같은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

결국 우리가 전통적으로 진보세력이라고 불러온 민중조직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같은 진보정당만이 아니라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세력, 나아가 극우냉전세력까지 모두 자신들이 진보세력이라니,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이 진보세력인 셈이다!!! 진보의 천국, 대한민국, 만만세다!!!

이 같은 난맥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으로 손호철, <해방 60년의 한국정치>, 2006, 365-367쪽 등 여러 곳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진보와 보수를 이해하는 다양한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방식은 변화에 대한 태도로 변화에 찬성하면 진보, 변화에 저항하면 보수로 보는 것이다. 서구언론 등에서 소련 동구몰락 당시 공산당을 보수파로 부른 것이 이 같은 이해에 기초한 것이다. 한국의 냉전적 보수세력이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이같은 용법에 기초한 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같은 용법은 변화의 방향, 변화의 이념적 내용과 상관없이 변화에 대한 태도만으로 보수, 진보를 논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용법이다. 예를 들어, 전두환 일당의 12.12 쿠테타나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무너트린 피노체트의 쿠테타가 단순히 기존질서의 변화를 가져오려는 것이라는 이유로 진보인가?

두 번째 용법은 가장 널리 유포된 용법으로 진보, 보수를 상대적인 정도의 차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대선후보들의 입장을 점수로 환산해 노무현 후보가 가장 진보적이었다고 평가한 것이 그 한 예다. 이 같은 용법에 따르면 미국의 민주당, 김대중, 노무현 정부, 민주당은 진보이고 미국의 공화당은 보수이다.

그러나 이 같은 용법역시 문제가 많다. 이 기준에 따르면 히틀러와 뭇솔리니 중 뭇솔리니가 상대적으로 덜 보수적이니까 진보라는 주장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미국의 민주당과 한국의 민주당이 진보라는 주장은 미국과 한국이 사회당, 사회민주당 등 노동자계급 정당 내지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유럽과 달리 보수양당제를 기본틀로 한다는 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

세 번째 용법은 이념의 내용을 기준으로 한 절대주의적인 용법이다. 즉 시장과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중심으로 이에 우호적이면 보수, 이에 비판적이면 진보로 보는 것이다. 즉 최소한 사회민주주의 이상의 입장(사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이 진보라는 용법이다.

마지막으로 해체주의적인 방식으로 진보 대 보수가 하나가 아니라 젠더,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다르게 해체된다는 입장이다. 몇 년 전 한 페미니즘 잡지 편집장이 여성운동의 입장에서는 박근혜가 여성운동이 지지해야 할 가장 진보적인 후보라는 주장을 해 파장을 일으킨 바 있는데 그 주장이 바로 이같은 시각에 의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용법 중 세 번째 용법과 네 번째 용법을 결합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용법이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가 중심에 있지만 이로 환원되는 것은 아니고 젠더, 환경 등 다양한 의제들에 대한 태도도 결합시켜 진보 대 보수를 이해해야 한다. ㅣ

이 같은 기준에 따르면 한나라당과 같은 골수 보수세력 만이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민주당도 진보가 아니라 '보수정당'이다. 구체적으로, 보수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진보도 아닌 자유주의세력, 개혁세력이다. 다시 말해, 한국의 정치세력은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고 1) 한나라당과 같은 냉전적 보수(예전의 수구), 2)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 개혁세력, 3)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같은 진보세력이라는 삼분법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아니, 한국정치를 넘어서 세계적으로도 보수(the conservative), 자유주의(the liberal), 진보(the progressive)의 세 세력이 현대정치의 기본구도이다. 이중 미국은 진보는 없고 보수 대 자유주의가 대립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이에 달리 진보가 존재하는 양상이다. 노무현 정부시절, 노무현 정부 핵심인물이었던 유시민 장관이 노무현 정부가 좌파라는 비판에 대해 유럽적 기준에 따르면 중도우파정부라고 지적한 것도 바로 이같은 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위에서 지적했듯이 두 번째 용법에 기초해 자신들도 진보라고 주장해 왔다. 다시 말해, 노무현 전 대통령 등이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은 실현불가능한 관념적 진보이고 자신들은 실현가능한 현실적 진보, "유연한 진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개인적으로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등 신자유주의정책, 나아가 한미 FTA를 추진하는 정권이 자유주의정권이지 어떻게 진보일 수 있느냐는 비판의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한겨레>, 2007년 2월 26일자). 그러자 홍보수석이었던 조기숙 교수가 직접 반론을 쓰기도 했다(<한겨레>, 2007년 3월 5일자). 그런데 주목할 것은 조기숙 교수가 얼마 뒤 정치평론집을 내면서 이 주장을 발전시켰는데 노무현 정부가 진보라며 "진보(liberal)"이라고 쓴 것이었다.

그렇다. 그간의 모든 의문이 풀린 것이다! 노무현 정부와 조교수, 그리고 민주당 관계자들이 말하는 진보는 진보의 원어인 '(the) progressive'가 아니라 '(the) liberal'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노무현 정부가 진보(progressive)가 아니라 자유주의(liberal)라고 주장해 왔는데 자신들이 liberal이라고 하니 나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다.

다만 문제는 liberal을 자유주의가 아니고 진보라고 번역한 뒤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progressive가 진보지, 어떻게 liberal이 진보인가? 영어단어 공부부터 다시 할 필요가 있다. 한마디로, 'shit'을 '똥'이 아니라 '빵'이라고 번역한 뒤 '똥'을 보고 '빵'이라고 우기는 꼴이다. 자신들이 진보세력이라고 주장하는 민주당 지지자들, 노무현 정부 참여 지식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progressive인가? 이에 대해서는 progressive는 아니고 liberal이라고 꼬리를 내릴 것이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진보주의가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왔고 아직도 완전한 시민권조차 획득하지 못한 정치적 진보주의의 불모지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적 진보주의와 정반대에 서 있는 냉전적 보수세력까지 모두들 진보를 자임하고 나서고 있는 이유이다. 다른 나라라면 극우세력이나 자유주의세력에게 당신들이 진보(the progressive)냐고 물으면 무슨 소리라며 난리를 쳤을 것이다.

이는 아마도 진보라는 단어가 한국어에서 갖는 좋은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영어에서도 진보라는 뜻의 progress는 좋은 의미이다. 결국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한국의 냉전적 보수세력과 자유주의세력이 잊고 있는 것은 발전을 의미하는 진보(progress)와 정치적 성향을 지칭하는 진보(the progressive)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케네디정부는 '진보를 위한 동맹'(Alliance for Progress)을 주장하는 등 미국의 민주당 정부는 첫 번째 의미를 진보를 자주 자신들의 목표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자신들이 두 번째 의미에서 진보세력(the progressive)이라고 주장한 적은 없다. 사실 정치적 노선으로서의 진보주의란 미국정치에서 나쁜 의미이다. 이처럼 자유주의세력, 극우적 보수 세력이 자신들이 정치적 노선으로서의 진보주의라고 주창하고 나서는 경우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진보세력을 부를 때 지칭하는 '진보'라는 명칭을 두 번째 의미(정치노선으로서의 진보주의, the progressive)가 아니라 첫 번째 의미의 진보(progress)로 오해하고 이 같은 용어에 질투하고 이를 빼앗기 위한 촌극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발전'을 의미하며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전통적으로 진보세력이라고 부르는 세력은 '발전'이 아니라 '퇴행'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그러한지는 따져 보아야 할 문제이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이 같은 주장은 일상적의 의미의 진보(progress)와 정치적 노선으로서의 진보(the progressive)를 구별하지 못한 무지의 발로에 불과하다.

이 같은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진보연대와 같은 냉전적 보수세력의 문제제기 중 의미 있는 것도 있다. 물론 정치노선으로서의 진보를 첫 번째 의미의 진보(progress)로 이해하고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자신들이 진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촌극이다. 그러나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이 진보입니까"라는 그들의 질문을 두 번째 의미로 자문해 볼 필요는 있다. 즉 정치노선으로서의 진보주의(the progressive)의 입장에서 진보신당,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소위 '진보세력'이 정말 진보인가 하는 자기반성이다.

예를 들어 이들의 비판처럼 "3대 권력세습을 꾀하고 있는 김정일 집단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것, 북한의 핵실험 등에 대해 자위권이라고 옹호하는 것이 정치적 진보노선일 수 있는 것인가 자성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진보(the progressive)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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