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하게도 두고두고 원성을 살 배역을 맡은 심사위원들이 배석한 TV프로그램에 정말 애들 같은 복장으로 '출현'했을 때만 해도 '서태지와 아이들'은 작은 신인이었다. 주연과 조연이 바뀌는 시간은 며칠로 족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서태지의 위상과 움직임은 커져, 걸어 다니는 대형 회사가 되었다. 컴백을 하면 으레 특별방송을 따로 녹화하고, 앨범 콘셉트에 맞춰 구조물을 만들고, 잘 빠진 비디오를 제작하며, 큰 규모의 페스티벌까지 연다. 반면 작업실에 모여 수공업으로 음반을 조립한 '장기하와 얼굴들'의 뮤직비디오는 공연영상이 대신한다.
경로가 달랐다. 서태지를 팬덤이 밀어 올려준 것마저 당시 절정의 위력을 발휘한 TV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태지는 음악과 대중을 연결시키는 재간과 이슈를 만들어내는 영리함을 발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가족 중 누가 나온다고 온 친지들이 TV 앞에 둘러앉지 않는다. TV출연이 모종의 지위를 부여하고 자격을 인증하는 세태는 여전하지만, 경로는 훨씬 다양해졌다. 장기하와 얼굴들은 수개월의 시간이 필요하긴 했지만 작은 클럽에서 시작하여 페스티벌과 인터넷으로 충분히 알려졌다. 서태지가 위에서 덮쳐와 해변을 휩쓴 해일이었다면, 장기하는 아래에서 솟아나 조금씩 수량을 키워낸 작은 샘이었다.
규모와 경로는 이미지를 만든다. 영화를 큼지막한 스크린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볼 때와 방바닥에 낙지처럼 들러붙어 비디오로 볼 때가 다르다. 음악 스타일을 바꿔가며 발해를 꿈꾸고 국악과 록을 접목하고 부당한 검열에 반항까지 한 서태지는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영웅이 되었으며, 은퇴선언은 문화대통령의 퇴임기자회견이었다. 출생의 비밀이나 신분의 한계, 모험과 고난을 통한 성숙, 악당에 맞서 이룬 성취와 장렬한 산화는 영웅스토리의 패턴이다. 서태지는 이 중 여럿을 갖추었거나 부여받았다. 역시 스타는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대중스타의 상은 이미 변하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국내외에선 큰 무대와 신비의 장막 너머의 영웅 대신 친구 같은 음악인들이 사랑받고 있었다. 더구나 여성의 사회진출과 문화발언권 확대와 맞물려 대중문화의 감성화가 정착하면서 그들의 감성에 맞는 친근함이 스타의 미덕이 되었다. 교주는 카리스마의 화신이 아니라 익살맞은 장난꾸러기를 칭하게 되었고, 미미 시스터즈가 보여주듯이 신비주의 역시 엉뚱하게 뒤집힌 농담으로 쓰인다. 그리고 학업보다 꿈을 중시하는 신세대로 소개된 서태지가 바닥에서 정상까지 올라간 것과 달리, 명문대 출신이란 문구가 종종 기사에 쓰인 장기하는 여전히 어디 언저리 근처에 있다.
▲서태지의 신비주의는 장기하와 다르다. 그는 여전히 대중과의 접속 창구를 풀어놓지 않았다. ⓒ뉴시스 |
짜여짐 vs 느슨함
시대의 흐름은 음악스타일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1990년대 초반의 음악인들에겐 가요의 극복과 해외 팝 수준의 완성도 달성이 지상과제였다. 기술적 발달에 힘입어 최소한의 인력으로 앨범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건에서 새로운 레코딩 방식과 세션을 적극 활용했고, 전과 다른 표현기법과 활동방식을 시도했다. 과거를 부정하는 듯하여 의아하지만 신해철은 뛰어난 결과물인 [Myself]를 혼자 만들어내며 '삐딱한 소년감성'의 대변자가 되었으며, 'O15B'와 '푸른하늘'처럼 2인 체제 밴드들이 붐을 이루기도 했다. 구도자 같은 음악인과 브라운관 인기스타로 분리되었던 이전과 달리 뮤지션 겸 스타라는 새로운 모델들이 나타났다.
서태지는 이러한 방식과 함께 기교를 중시하며 아이디어의 조합과 적용에 집중한다. 음향실험가에 가까운 장인기질이 드러난 [Atomos]는 너무 두껍고 무거운 포장지만 아니라면 열성적인 사운드디자이너의 괜찮은 음반이다. 전형적인 실험기법인 섞음에 매달리면 조화보다 충돌에 머물러 헐겁고 허술한 틈새를 노출하는데, 서태지는 조화에 성공한 편이다. 꼭 필요하지 않은 소품들을 잘 활용하는 사람을 멋쟁이라 칭한다면, 서태지는 멋쟁이다. 음악은 약속과 확장이란 이중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서태지는 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잠기고 왼쪽으로 돌리면 풀리는 식의 약속에 충실하다. 'Replica'를 정교하게 조립하면서 '아침의 눈'에선 대중적인 감성을 잊지 않는다. 나머지 곡들은 이상과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 합주로 만들어지지 않고 멤버들이 수련하듯 익혀야 하는 곡들은 어딘지 갑갑하다. 기발하지만 설계도로나 봐야했던 건축물을 대중음악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게 되자 오히려 채우고 다듬어선 채우지 못하는 부분이 인식되었다. 비장하게 "주사위가 던져졌다"고 말한 카이사르가 조그마한 도랑을 건너는 외국 드라마는 왠지 장엄하게 그려야 할 것 같은 루비콘 강을 현실 속으로 불러들였다. 엄청난 스케일에 집착하는 중국형 블록버스터보다 병자년에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오는 청나라 '대군' 30여명이 나왔던 옛날 TV드라마에 정겨운 맛이 있음을 음악 팬들도 알게 되었다. 애초부터 침묵과 쉼박은 음악의 일부였다.
▲장기하의 촌스러움은, "저거는 뭔가 자연스럽다기에는 뭔가 절도 있는,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다. ⓒ뉴시스 |
서태지와 장기하 모두 소스를 재해석하여 몽타주처럼 조립한 건 비슷하지만 방향은 다르다. 음악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주체적으로 발견해낸 것을 자기 것, 혹은 옳은 것으로 인정하려는 심리가 있어서 아이디어들을 숨겨놓는 숨은그림찾기는 유용하다. 그런데 서태지는 세밀한 윤곽선을 복잡하게 드러내고, 장기하는 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닌, 장난이 아니지만 장난 같은 노래들로 윤곽이 절로 만들어지게 한다. 미미 시스터즈 역시 철저하게 짜여진 안무에 식상한 이들에게 군대의 제식훈련과 동네잔치 군무의 차이를 보여준 셈이다. "안무라고 하기에는 뭔가 어설프게, 조금만 뛰어도 선글라스가 꽁하고 벗겨질 것" 같은 재미 말이다.
최신 트렌드 vs 복고풍, 전달 vs 계승
지향한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여느 자리에서건 서태지는 새로운 음악형식을 시도해왔다고 말해지는 것에 대해 분명히 해둘 부분이 있다. '시커먼스(장두석·이봉원)'가 "한국 최초의 랩 음악"이란 카피를 달고 1988년에 음반을 낸 이후, 1989년에서 1990년 사이에 홍서범의 '김삿갓', 신해철의 '안녕', '현진영과 와와'의 '슬픈 마네킹', 또 나미와 붐붐 등이 랩을 선보였다. 1991년에는 공일오비(015B)와 이현우도 시도한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서영춘의 '서울구경'과 서수남·하청일의 '팔도유람'이 언급되지만, 그 노래들은 컨트리송이다.) 하지만 대개 리듬을 타는 내레이션에 가까운 양념에 불과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이 본격화했다. 서태지의 작법은 최초라기보다는 새로운 유행의 본격화를 통하여 차별화된다.
그는 탐험가이자 개척자였고, 지금도 그를 넘볼만한 음악인은 없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계속 새로움을 추구함에도 솔로활동 이후가 제자리걸음처럼 보이는 이유는 무얼까? 대개 뮤지션들은 장르의 틀 안에 갇히길 거부하지만 즐겨 사용하는 라인과 코드진행 패턴이 있어서 어떤 곡을 동일 뮤지션의 것으로 감지할 수 있다. 서태지는 이것을 외부의 자극으로 갱신해왔다. [울트라맨이야]가 나왔을 때 해외 음악에 귀 밝은 이들은 스타일은 물론 무대매너까지 유명밴드들과 흡사한 서태지를 보며 자기들끼리 민망해 했다. 서태지는 사람판 신간 진열대처럼 장르를 갈아타면서 판갈이로 선도자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Atomos]가 비교적 호평을 받는 이유는 이런 강박에서 벗어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기하는 테이프가 풀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다가 고요해지는 순간, 첫 곡이 흐를법한 음반 안에서 고색창연하게 너스레를 떤다. 젊은 세대를 대표한 구경꾼인양 옛 시절을 탐방하고 목례한다. 물론 주류 가요의 복고 선풍과는 맥이 다르다. 메이저에선 비즈니스적 목적에서 트렌드의 향방을 캐치하여 과거를 소스로 활용했지만, 인디에는 자신의 취향에 방점을 찍고 자연스러운 소화와 재창조에 나선 이들이 많다. 해외의 인디 신(Scene)에서도 지난 수년간 오래된 음악과 현재의 감성이 만나는 조류가 형성되었던 터다. 그래서 인디의 복고는 과거의 재활용이라기보다는 현재의 음악적 반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육로가 가로막혀 사실상의 섬나라인 한국에서 서태지는 바다건너 음악의 전달자를 자임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행가'에 자조적 의미가 담겼던 시절을 지나 '가요'를 자연스레 수용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방화'로 불렸던 한국영화에 부득이 드러나곤 했던 구질구질한 실생활과 거리풍경도 이제는 의도적으로 묘사된다. 비둘기란 생물의 이미지가 변해버렸듯이 같은 단어의 이미지는 변한다. 어휘인상이 전염되면서 부정적 어감이 강해지면 다른 말로 대체되거나 갱신된다. 트로트의 이미지가 좋지 않을 때에 전통가요란 말을 쓰자고 했던 의견이 트로트에 대한 부정적 인상이 약해지자 함께 약해진 것처럼, 단계를 거친 자신감과 여유는 젊은 세대가 '가요필'과 '뽕끼'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외국이 아닌 한국의 음악을 계승하는 음악인들의 복고는 사실 발견에 의한 복권에 가깝다. 마이크 선을 동그랗게 감싸 쥐고 차렷 자세로 부른 노래들이 다시 평가받고 있다. 기묘하고 현대적인 모양새의 악기를 들고 신들린 듯 몸을 흔드는 연주가 촌스럽게 보이고, 헐렁한 노래와 오래된 악기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시대이다. 하기야 열일곱 김완선의 눈빛을 능가한 여자가수가 지금껏 얼마나 될까. 90년대에 밖으로 향한 개방성이 열등감의 극복을 위해서였다면, 지금 안으로의 개방성은 자신감에서 왔다. 이랬기에 장기하처럼 인디음악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한국음악을 계승하고 번역하는 세대가 나왔다.
그들은 바깥보다 안에서, 오늘보다 어제에서 양분을 빨아들이고 낭만을 캐낸다. 경험하지 않았으면서도 전부터 알았던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 즉 압축수용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의도적인 재현과 토속성에 가까운 어떤 느낌은 서먹하기도 하고 정겹기도 하다. 물론 퇴행성이 다분하긴 하지만, 장기하는 나름대로 시치미를 달아둔다. 장기하와 얼굴들과 산울림이 분위기보다 역할이란 면에서는 통해도 파급력은 훨씬 작은 이유는 그만큼 음악동네란 호수가 넓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한들 집에 라면물 올려놓고 나온 사람처럼 바쁠 이유는 없다.
▲장기하는 지난 수년 간 인디신에서 쌓인 음악적 성과가 어떻게 한국의 음악을 계승하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물이다. ⓒ붕가붕가레코드 |
담론 vs 일상, 세련미 vs 발랄한 꿀꿀함
잔이 다르면 술도 다르다. 서태지는 통통하게 살찐 목소리가 아니라 얄미울 정도로 날렵하게 노래하고, 장기하도 우물쭈물 말을 뱉으려다 도로 삼키려는 듯 노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다르다. '시대공감'형 메시지와 통속적인 사랑가를 적절히 섞어 센세이션과 대중성을 함께 취해온 서태지의 가사는 다소 관념적으로 흘렀다. 저항보다 SF에, 생태보다 '환경'에 가까워 벽 위에 붕 떠있는 비상구 표시등처럼 보인다. 강을 긁어 파내는 사업에 동조하면서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것이나 자전거도로를 만든다며 산등성이와 녹지를 깎아내는 것보다야 낫지만, 친환경 소재로 지은 호화주택처럼 어쩐지 세련된 옛날이야기가 되었다.
[별일 없이 산다]에는 장기하의 코 옆 매력점인 의고체 가사가 그려낸 가상의 과거와 낭만적인 냉소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아직 겨울은 멀었는데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지난 직후의 장식물처럼 취급받는 기분인 젊은 세대가 동질감을 느낄 코드가 있다.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더 눈에 띄기 마련이다. 임산부가 되어 지하철을 타보면 세상에 임산부가 얼마나 많은지를 알게 된다고들 하지 않던가. 그러나 자기를 거부한 두꺼운 창문을 향해 고작 손수건을 세차게 던지곤 분을 삭이는 처절함 대신, '타바코 쥬스'의 "근데 우린 열심히 안하잖아. 우린 안될꺼야, 아마"를 가지고 낄낄대고 키득대는 것이 요즘의 정서이다.
이 속에서 장기하의 무표정과 극단적인 진지함은 곧잘 코믹함과 통한다. 물론 루저(looser) 유행은 타칭이 아니라 자칭의 브랜드처럼 팔리고 있긴 하다. 특이한 증상이나 근사한 질병을 기대하는 자기연민과 룸펜의 허영처럼 자발적 소외와 단절을 선택하고 즐기는 풍조가 있다. 하지만 실어증보다는 절망에 대한 유희가 그나마 낫다. 징후는 오류를 고발하고, 언어는 사회와 권력과 정치를 드러낸다. 대리만족의 쾌감을 선사했다가 지금은 어딘가로 부유하는 서태지와 달리, 이렇게 장기하는 비교적 현실적인 유머와 공감을 매개하고 있는 셈이다.
그 결과, 서태지의 가사는 내러티브보다 억양을 통한 운율이 부각되고, 장기하는 한국어의 "쩍 하고 달라붙는" 어감을 살리며 어색함과 불일치로 점철된 '스토리텔링'이 되었다. 실생활에선 있을 리 없는 대화가 쓰인 소설과 드라마는 민망할 따름이지만, 장기하는 그걸 노래로 만든다. 음악을 논하며 가사를 말하는 건 문학성 추구 때문이 아니다. 가사와 멜로디가 만나 임팩트를 만들어내는 순간을 전제로 한다. 장기하는 서부극 음악 분위기의 '오늘도 무사히'로 기묘한 긴장감과 불길함을 자아내고, '아무것도 없잖어'의 소동극과 '삼거리에서 만난 사람'의 예스러운 낭만으로 짠한 뒷맛을 남기면서 꿀꿀해도 발랄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ETP페스트 2008. 도심 페스티벌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이 페스티벌은 서태지가 대중들과 직접 만나는 몇 안 되는 통로 중 하나다. 서태지 측은 뫼비우스 투어 중이라 아직 올해 ETP페스티벌 참여를 확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뉴시스 |
전격공개와 은둔 vs 늘 거기 있음, 개인의 성취 vs 신의 결과
그렇다면 그들의 의자는 어디에 놓여있을까. 서태지는 자신이 만들어낸 흐름을 지키기보다는 뛰쳐나가길 반복했다. 장르 이탈은 차별화된 독자성과 함께 음악적 고립이란 서로 다른 대가로 돌아왔고, '버뮤다' 어디에 있는 섬에서 그네들만의 축제를 열게 되었다. 특정 팬들과 함께 늙어가며 수명이 끝나는 것과 음악사의 거장들처럼 여러 세대에 걸쳐 음악으로 수용되는 것 중 전자를 택했다. 최신 경향을 수용하며 웅장한 사운드와 감성적인 노랫말로 대중적인 록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서태지와 비교 가능한 후배는 문희준 정도이다. 누구를 욕보이려는 말이 아니다. 비록 노래하다가 로커의 모션이 아니라 짜여진 안무를 보여주며 출신성분을 확인시키긴 하지만, 문희준의 [Last Cry](2009)는 나쁘지 않은 앨범이다.
하나 더. 어느 라디오 방송의 특집프로그램 인터뷰를 음성파일로 대체하고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다른 페스티벌에선 거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서태지와 음악계의 통로는 좁기만 하다. 대중은 그가 말을 건네기 전까지 '내부수리 중'이란 푯말만 바라봐야 한다. 예전엔 득이 된 전략이 장기적으로 분리를 초래했다. 너무 밝은 빛은 주변의 빛들을 삼켜버린다. 그의 전성기가 다른 음악인들에겐 암흑기였다는 회고는 의미하는 바가 있다. 서태지에게 불만이 있다면 음악이 어때서가 아니라 신과 스스로를 분리시키고, 개인의 성취를 동네의 성취로 확산시키지 못한 것이다. 그를 아름답게 비춰준 호수에는 고고하지만 외로운 수선화가 피었다.
근래 인디음악이 주목받는 이유는 산불 후에 고사리만 무성한 현상과는 다르다. 황무지가 아니라 숲이었고, 흙덩이뿐인 화분들만 늘어서 있지 않았다. 홍대 앞은 어느덧 사람들로 하여금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나이 먹었으며, 음악인들이 집결하여 인적 풀을 형성했고, 유희열 이소라 박지윤 엄정화의 앨범에서처럼 활동영역을 넘나드는 교류가 활발하다. 독자적 가치가 강조되던 단계에서 동등하게 대우받는 단계가 되었다. 인디음악을 다루는 지면이 크게 늘고 만장 단위로 팔리는 앨범들도 적지 않다. 수영장에서 혼자 옷 다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누워있는 건 공평치 않은 일, 장기하는 근처에 같이 있다. 비슷한 높이에서 팬들과 만나며, 아직까진 떴다고 오버로 가버린 자들과는 다른 행보를 취하고 있다.
인디 르네상스? 물론 분리해서 봐야 한다. 좋은 작품들이 쏟아지고 다양성이 형성되면서 몇몇 히트아이템까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음악적으로는 부흥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주목과 이슈는 몇몇 타깃에만 집중하고 트렌드를 타는 경향이 있으며, 산업적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편이다. 그러므로 음악적 성과가 큰 틀의 르네상스로 이어지는가는 더 지켜봐야 한다. 장기하와 얼굴들 역시 벌판에 홀로 나타났더라면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동네에 주민들이 모여 있었기에 발견되었다. 개별적인 성공이라기보다는 신과 결합된 성과이며, 원인이 아니라 결과이다. 이것이 서태지와 장기하의 결정적인 차이다.
2009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다면 큰 반향을 얻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1992년에 장기하와 얼굴들이 출현했다면 빈축만 샀을지 모른다. 서태지와 장기하가 아니었대도 누군가가 활기를 불어넣었겠지만, 그들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가진 많은 것들을 얻지 못했으리란 사실도 분명하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의미가 있다. 웰메이드 무용론과 인디를 통한 돈벌이와 판갈이가 아니라 가치가 공존하는 시대라는 말이다. 가깝지만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철길을 안타깝게 그리곤 한다. 그런데 욕심 부려 두 평행선이 합쳐지기라도 한다면 기차를 실어 나를 수 없다. 이렇게 음악 역시 발전이 아니라 조화를, 통합이 아니라 공존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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