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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 조리 받을 형편이…? 1만 원이면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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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 조리 받을 형편이…? 1만 원이면 OK!"

[권은정의 'Social Job'] 서해출산육아돌봄센터 이상림 대표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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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림 서해출산육아돌봄센터 대표. ⓒ프레시안

서해출산육아돌봄센터는 인천시 동구 송림동 현대시장 바로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다. 대로변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위치에 있으니 찾는 사람들도 많을 것 같아 보였다. 2년 전에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은 센터는 작년에 이곳으로 사무실을 확장해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사무실이 널찍하여 교육이나 여러 행사를 하기에 손색이 없어보였다. 이 센터는 출산 후 조리 사업을 '나비잠 산후 관리'로 이름 붙이고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 간병 사업도 더해서 토탈케어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센터 직원 중에는 오는 9월에 출산을 앞둔 산모가 있었다. 나비잠 산후 관리에 대한 신뢰가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비잠 산후 관리 사업이 센터의 대표사업으로 정해지기까지 이상림(54) 대표의 특별한 의지가 있었다.

"제가 처음 인천에 와서 1년 반 동안 지역 주민 1000여 명을 상담했습니다. 그때 다들 어려운 분들이 각자 형편을 호소하셨는데 그중에서 특히 여성분들이 산후 조리를 못해서 몸이 아프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주위에 물어 보았지요. 여성의 몸이 아이 낳기 전 상태로 돌아가는데 얼마나 걸리느냐고 물었더니 6개월, 적어도 두 달은 몸조리를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형편이 어려워 맞벌이를 해야 하는 가정에서는 아이 낳았다고 두 달 간 누워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달 보다 더 적게, 최소한 몸조리를 해야 한다면 얼마나? 하고 물었더니 보름은 해야 한다고 다들 한목소리로 말하더라는 것이다.

"여성이 임신하고 아이 낳아서 키우고, 맞벌이로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면, 우리 여성의 몸이 바로 사회적 자산이라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면 특히 저소득층 여성들에게 최소한 2주일간의 산후조리 서비스를 정부가 무료로 서비스해주는 정책이 필요한 거 아닌가요? 제가 어디 다른 선진국에 그런 사례가 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것을 가지고 깨달음이라고 해도 되겠지요? 하하하…."

ⓒ프레시안
돌봄 서비스 산후조리 필요성을 느껴 사회적 일자리 10명을 신청한 게 2005년의 일이다. 그 일자리는 센터에서 같이하던 상조회 소속의 실업자 회원들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노동부에서 지원하는 사회적 일자리 인건비는 그 사업으로 수익을 발생시켜야한다는 조건이 따른다. 산후 조리 서비스 사업을 시작했다.

서비스 수혜자들은 소득 기준에 따라 다른 비용이 책정되었다.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무료에서 1만 원, 4만 원까지의 비용을 내면 산후조리 돌봄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도우미들이 파견 나가서 일하면 그들에 대한 인건비는 나라에서 내주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고객들은 해당되는 금액을 센터 통장으로 입금한다. 그 돈은 차곡차곡 쌓여 자활의 종잣돈으로 모이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해서 사회적 기업으로 인증을 받고 하는 사이 서해돌봄센터에서 시행하는 서비스 비용 단가 책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기초수급자 1만 원, 저렴형 3만 원, 시장가 5만 원이다.

"시장에는 자체로 형성된 임금 단가가 있습니다. 저희가 그것을 교란시켜서는 안 된다고 판단합니다. 업체마다 조금씩 가격이 다른데 요즘 유명 산후 관리 업체의 경우 산후 유아용품 판매 서비스까지 하면서 도우미를 한번 파견하는데 6만5000원을 받는 게 가장 최고액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하루에 1만 원씩 뗀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비율로 하는지 저희로서는 모르지요. 어쨌거나 회사를 이용할 경우 기본적으로 한 달 회비는 내야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우미 일을 나가든 안 나가든 간에 3만 원입니다. 그리고 파견 나갈 때마다 얼마씩 떼고. 고객들이 비용을 회사 통장으로 넣으면 회사에서 종사자에게 얼마를 주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얼마를 주는지는 모르지요."

이 대표는 돌봄 종사자들의 착취 고리를 끊어내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서해센터에서 하는 출산 산후 관리 사업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지만 전체 돌봄 노동 종사자들에 대한 인권을 지켜주는 일에 앞장설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돌봄 종사자들은 고용이 안정되지 않으니 소득도 안정되지 않습니다. 실제 노동자로서 어떤 것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지요. 하루에 일하는 시간도 다양합니다. 4시간 8시간, 종일도 있고요. 또 부당한 경우를 당하는 예도 많아요. 심지어 아이가 설사병이 낫는데 그게 도우미 탓이라면서 약값을 받으러 오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이 대표는 힘주어 말한다.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법적 노동자로 인정받게끔 하자는 것이지요. 사실 그게 아직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서 일단 사회적 기업으로 접근하기로 하고 나선 것이지만요."

도우미들을 모집하고 교육해서 파견하면서 이 대표는 늘 이렇게 말해왔다고 한다.

"우리 사업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분들에게 2주간 무료 산후조리 서비스를 해주는 정책요구를 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돌봄 노동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 문제를 정책적으로 풀어내자는 것입니다."

2주간의 산후조리 서비스는 복지부의 바우처 사업으로 시행되었다. 이 대표는 애초 산후관리는 사회적 기업시스템과 맞지 않는다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

"우리 돌봄 쪽 사업은 사회적 기업으로 하기 힘든 점이 많습니다. 사실 우리 시민단체에서는 사회적 기업을 인증제로 할 게 아니라 1년 정도 해보면서 지원법을 가다듬어 보자라고 했는데 무시당했지요. 돌봄 영역은 부가가치가 없는 사업이거든요. 그러니 업주가 분담해야하는 4대 보험 쪽을 하기가 힘들지요. 특례조항을 만들어야한다는 게 이쪽 사업을 하는 이들의 의견인데 말이지요."

현재 몇 개 단체를 중심으로 돌봄 네트워크가 만들어졌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전체 돌봄노동자들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돌봄사업과 사회적 기업법관계의 한계를 어떻게 풀어낼지가 관건이다. 최근 출산 바우처 사업도 예산을 줄이고 기준을 강화시키는 바람에 수혜 대상자들이 줄어들었다. 네트워크가 노동부에 요구하는 내용은 산후조리사업을 지속적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달라는 것이다. 파견 나가는 도우미들에 한해서 인건비 일정지원과, 비영리 단체인 사업단을 운영할 수 있도록 전담인력 인건비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여성 자신, 가족, 사회가 산후 조리가 꼭 필요하다는 인식을 하도록 사회 여론화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사도우미 서비스보다는 산모님들의 몸을 위해 케어를 받으라고 권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만삭이 된 여성들을 앞세워서 캠페인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는데 조심스러워서 아직 실행해보지는 못했어요."

ⓒ프레시안

요즘 우리나라 출산율이 낮아져서 사업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지 않으냐고 물어보았다.

"사실 그렇지요. 일거리가 줄어들었어요. 또 출산 바우처 사업이 시작되면서 우리 일거리가 줄어든 것도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좋은 일이지만요. 사회적 기업 내용 안에는 산후 관리 베이비시터 가사도우미까지 포함 되어있으니 요즘엔 홍보 활동도 많이 하러 다닙니다. 아파트, 병원, 보건소에 안내문을 돌리러 다니지요. 전에 산후 관리 받은 분들에게 아이보기도 한다고 하면 요청이 들어오기도 하고, 그런데 경쟁 업체들이 많아요.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가사관리 도우미는 안했는데 올해 넣었어요. 그래서 지금은 토탈 케어로 가지만 결국에는 베이비시터나 가사도우미는 떼어내고 산후 관리만 특화해서 원래 계획한대로 일하고 싶어요. 산후 조리 그 일을 하나 꾸준히 해나갈 작정입니다."

현재 센터에서 파견 나가는 도우미 인력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했다.

"처음에 사회적 일자리를 10명 신청한 것으로 시작해서 30명까지 했지요. 그러다가 사회적 기업이 되면서 작년에 일자리 지원을 68명이 받게 되었는데 출산율도 줄고 하는 바람에 35명 정도만 일을 나가게 되었지요. 나머지는 교육, 홍보 활동을 했는데, 작년 말에 고용조정을 당해버려서 올해는 40명 지원만 받고 있습니다. 나머지 분들에 대해서 많이 마음이 편하지 않은데 7월중에 정리한 분 중에서 16명을 재고용할 계획입니다. 우리 재정 형편이 12월까지 최저임금을 드리는 것으로 될 것 같아요."

나비잠 산후 관리 서비스는 사회적 기업으로 그 서비스 내용을 정했다. 서해출산센터는 분명 일반 돌봄 센터와의 차이점이 있을 것 같다. 무엇일까?

"일반 업체들도 각자 자기 사업이니까 분명히 열심히 할 겁니다. 산후 조리 사업인 만큼 산모의 몸, 여성의 몸을 소중히 하는 것도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는 이일에 종사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습니다. 종사자들의 처우 문제에 신경을 쓴다는 것이 다른 점이 될 것입니다. 보통 기업에는 노동조합 같은 게 있지만 돌봄 노동 쪽에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프레시안
돌봄 종사자들의 입장에서보자면 다들 서해출산센터에 와서 일하고 싶을 것 같다. 혹시 신청자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홍보도 하고 또 알음알음 소개로 오는 경우가 많은데요. 와서 일하다보면 너무 대우받고 존중받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세상에 이런 데가 다 있느냐, 이제야 알았다, 그러지요. 그렇지만 그것도 올 12월이면 사회적 일자리 인건비 지원이 끊겨지게 되었으니. 제가 더 열심히 뛰어다녀보는 수밖에요. 하하하!"

이 대표는 이일을 하면서 신기한 경험을 했다고 전한다. 산후 관리 하는 일이 산모에게 스트레스를 받기도하고 신생아 돌보기와 산모 마사지까지 일 자체가 노동 강도가 높아 처음에는 다들 표정이 우중충하다고 한다. 그래서 웃는 훈련까지 할 정도인데 점차 도우미들의 얼굴 표정이 밝아지더라는 것이다.

"신생아를 보면서 삶의 기운을 얻는다고 해요. 일이 힘들어도 아기를 보면 힘든 게 싹 씻겨버린다고 해요. 또 간병하는 분들도 그래요. 힘들 것 같은데 그 일이 적성에 맞다고, 자기 천직인 듯 하다며, 보람을 느낀다고, 열심히 하지요. 모두 밝은 얼굴로 일을 하고 있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고향이 전북 익산인 이 대표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서 활동을 주로 하다가 80년말쯤에 인천으로 와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그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시기에 재가 무료 간병 사업을 최초로 시도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1999년에 인천시 민간 위탁 사업으로 재가 간병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간호사를 실무자로 채용하는 등 당시 40명의 규모로 찾아가는 간병 사업을 시작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어릴 적부터 유난히 남을 돕는 일에 앞장 서 별명이 테레사 수녀였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사랑을 실천할 때 자기에게 쏟아지던 칭찬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고 웃으며 고백한다. 70년대 중반에 직장을 다니면서 신학대학을 마친 그는 목요기도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비로소 그전에 알던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힘 있는 이, 국가권력을 가진 이가 누구인가에 따라 우리 사회가 너무나 달라진다는 사실에 놀랐지요."

젊은 그가 분노와 공포를 가슴에 안은 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탐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서울에서 일반 직장에 다니다가 나중에 노동 현장에 들어갔다. 처음 청계 피복 공장 쪽에 들어갔지만 노동자 신분으로서 간게 아니었다. 어린 시다들의 든든한 맏언니 역할을 하라는 어느 목사님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15세 전후의 어린 소녀 시다들을 돌보는 일을 2년간 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마치면서 어린 나이에 공장에 들어와 고생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괴로웠어요. 그냥 두고 보면 내가 벌 받을 것 같았지요."

그래서 그는 나이 서른에 미싱 시다로 들어갔다. 동생들이 미싱사로 앉아있는 그 앞에 시다로 들어가 일을 했단다. 어린 후배들은 '언니, 이틀만 견뎌봐. 그러면 내가 손에 장을 지진다'하면서 놀려댔지만 그는 장장 2년이나 버텼다. 미싱 바늘에 찔리고 눈이 천근으로 내려앉고 약 힘으로 몸을 견딜지언정 주저앉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미싱사가 도와주지 않으면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는 참아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미싱사의 꿈은 접어야했다. 후배들이 안타까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단다. '언니는 미싱은 무서워 못타고 시다 손은 갈수록 더 느려지니 이만하는 게 좋겠어. 쯔쯔쯔….'

ⓒ프레시안

이 대표는 자신이 초지일관한 삶을 살아온 것 같지 않다고 말한다. 노동자로 살 수밖에 없어서 노동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학생으로서 학생운동에 매진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는 사회 현상을 보면서 가만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숨죽이고 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결국 찾아낸 길이 노동자를 돕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인천으로! 외치며 이 지역에 발을 디딘 해가 1988년. 그 이후 그는 지역주민들 속에서 자신을 녹여 일해 왔다. 자활후견기관, 자활지원센터, 주민 센터 등등 그 이름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이 대표의 결심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그는 한결같이 주민들 틈에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죽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이 대표가 팔을 걷고 산모들, 산모를 돕는 여성들을 돕겠노라고 나섰다. 모든 어머니들을 돕겠다는 그의 마음은 결국 우리 사회를 돌보겠다는 마음과 같은 것이라는 그런 믿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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