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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고사 작전, 대통령에게 '아니오' 말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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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고사 작전, 대통령에게 '아니오' 말할 수 있나?"

[곽노현 칼럼] 신임 국가인권위원장의 인선 기준과 절차

안경환 위원장의 중도 사퇴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직이 공석이 된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국가인권위원회 수장직의 장기 공백 상태는 인권위 조직은 물론 일반 시민의 관점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권한 대행 체제로는 중요 업무에 대한 신속하고 책임있는 의사 결정을 내리기가 몹시 어렵기 때문이다.

중도 사퇴한 두 전임 위원장과 달리 자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임기 중에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것임을 취임 당일부터 되풀이 공언했던 안 위원장이었다. 그는 임기 중 사퇴는 소임 완수와 조직 안정을 위해 결코 할 짓이 못 된다는 판단 아래 어떻게든 임기를 명예롭게 마칠 생각을 가졌었다.

안 위원장이 딱 맞는 사퇴 시점을 놓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는 지난 3월 30일 인권위의 직제와 인력을 일방적으로 축소한 대통령령이 국무회의를 통과했을 때 미련 없이 직을 내던졌어야 했다. 자신의 철학과 의지에 반하는 일방적 직제 개편과 인력 축소를 손수 집행까지 해줄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인권위 조직의 조기 안정을 바라는 내부의 뜻에 순응하여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인력 감축과 직제 축소를 총지휘하며 손에 피 묻히는 악역도 감당했다. 이랬던 안 위원장이 결국 정부의 소통 및 협력 부재를 원망하며 사직한 사실은 인권위에 대한 현 정권의 관점과 행태가 얼마나 왜곡됐는지를 웅변한다.

▲ 안경환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프레시안
한 언론과 가진 전격 인터뷰에서 안 위원장은 명색이 국가인권위원장이 청와대와 한번 연락하는 데 열흘이나 걸리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의 최근 신세를 "식물위원장"에 비유하며 이런 상태로 "4개월 더 해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소통 거부 정권을 원망했다.

굳이 정치적 성향을 따지자면 안 위원장은 "사랑과 사색의 중간쯤"을 추구하며 진보주의나 행동주의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둬 온 문인(文人)풍 자유주의자이자 문화적 보수주의자에 가깝다. 인간의 슬픔을 이해하는 문인답게 나름대로 여유와 여백을 가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를 탈이념적 회색인간으로 규정해왔다.

미국 헌법 연구자인 안 위원장이 오랫동안 존경하고 매료된 인물은 미국 대법관 중 가장 진보적이고 열정적이었던 윌리엄 더글라스. 하지만 그는 나이가 들면서 젊은 시절의 우상에 대한 사랑이 식었노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그 자신도 자연스레 보수화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2007년 12월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었을 때, 안 위원장을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정권 교체기의 인권위를 무난하게 이끌어갈 최적임자가 마침 앉아 있다며 안도했었다. 안 위원장 본인도 자신의 실용주의적이고 중도주의적 접근 방식에 비춰볼 때 이명박 정부와 큰 충돌이 빚어질 것으로 예상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예측은 모두 빗나갔다. 현 정권은 중도 성향의 안 위원장에 대해서도 존재를 부정하며 소통을 거부했다. 지금까지 대통령을 한 번도 못 만났을 정도다. 참다못한 안 위원장은 굴욕적 처우에 대한 항의와 분노를 중도 사퇴로 표출한다. 안 위원장마저 사퇴의 외길로 내몬 이명박 정권은 참으로 속 좁은 '불통'정권이다.

무책임한 현행 선임 방식, 개정 이전에 좋은 관행을 발전시킬 수 없을까?

후임 인권위원장에는 어떤 인물이 적합한가? 국가인권위원장 임명은 대통령의 법적 권한에 속한다. 따라서 지금쯤 청와대 인사팀은 유력 후보군에 대해 활발하게 인사 검증 작업을 벌이며 최종 낙점을 향해 나가고 있을 것이다. 대통령의 유럽 순방 때문에 임명이 늦춰질지 아니면 출발 직전 단행할지는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인권위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은 7일 오전 기자회견을 열고 후임 인권위원장이 갖춰야 할 자격 기준을 제시했다. 오랜 인권 옹호 이력, 시민사회 친화성, 청렴성과 인품, 국제 감각과 역량, 조직 운영 능력 등이 그것이다. 법학교수들이 제시한 제반 자격 요건을 갖춘 훌륭한 분들도 머리를 맞대고 찾아보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인권위 수호천사를 자임한 일군의 법학교수들은 판·검사와 변호사 등 법조인 이력을 무조건 인권 옹호 이력으로 쳐주는 것은 불합리하며 마찬가지로 북한 인권 옹호 활동을 조금 한 걸로 인권 옹호 이력 요건이 자동 충족되는 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친정권적인 인물로 널리 알려진 인사도 인권위원장감은 아니다.

국가인권위원장은 누구의 추천과 임명을 받았건 상관없이, 힘없는 민중의 호민관으로서 집행부를 견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맞서는 일이 고유 업무다. 이 고유 업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인권위원장에 가장 필요한 덕목은 권력의 잘못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권위원(장)이 공석이 되면 국가와 시민사회의 대표적 인권 관계자들로 선임위원회를 구성해 공개적으로 후보자들을 추천받고 일차적으로 걸러낸 후 국회 표결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 것 같다. 현재 북아일랜드와 인도네시아 등이 채택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아주 낯선 방식이다.

우리나라에선 지명권자(대통령, 여야정당, 대법원장) 각각이 사전 조율이나 상호 협의 없이 각자의 밀실에서 제몫의 인권위원(장)을 선임한다. 선임 과정이 극도로 불투명한 것은 물론이고 자격 유무를 검증할 장치가 전무하다. 공석 광고도, 자천타천도, 자격 심사도 없이 그저 지명권자의 재량 판단에 맡겨져 있는 셈이다.

이런 무책임한 방식은 법개정을 통해 바꿔야 마땅하다. 하지만 법개정 이전에라도 지명권자들이 좋은 관행을 발전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예컨대, 대통령 등 지명권자 각자가 인권관계자들로 선임위원회를 구성해서 자격 기준과 심사 원칙을 정한 후 공개 추천과 엄격 심사를 거쳐 인권위원을 선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권위원장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는 현행 방식에선 인권위원장의 정치적 중립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여야 정당의 추천을 받아 국회 선출을 거친 더 정치색 짙은 인권위원이 위원장을 맡는 것은 더 곤란하다. 그렇다고 국민 대표성이 없는 대법원장이 위원장을 임명하게 하는 것도 어딘지 어색하다.

현행법상의 인권위 구성은 정권적 차원에서 중요한 인권 사안에서 정부여당의 견해를 쫒아가도록 설계돼 있다. 대통령과 여당이 총11인의 인권위원 중 과반수인 6인, 특히 인권위원장과 상임위원 2인이 포함된 총6인을 선임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대통령은 인권위원장, 상임위원 1인, 비상임위원 2인, 총4인을 선임한다.

인도 등 서남아시아 국가들은 대법원장, 국무총리, 야당대표 등으로 구성된 선임위에서 인권위원을 선임하되 인권위원장 자격으로 전직 대법원장을 명시해 이런 딜레마를 해결한다. 어떻게 보면 국가인권위원장의 위상을 한껏 높여놓은 셈인데 다른 한편으로는 인권위를 법원인양 딱딱하고 엄격하게 운영하는 폐단이 있다.

인권위원(장) 선임 절차는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그럼에도 선임위 구성, 공개 추천, 인터뷰 등 심사 과정, 국회 선출의 순으로 진행되는 민주적 선임 절차가 선진적 관행으로 널리 인정된다. 선임위에는 국가 공직자 외에 시민사회 대표자가 과반수 포함되고 사회적 다양성과 정치적 다원성도 반영돼야 바람직하다.

마침 아시아의 주요 인권단체들로 구성된 아시아국가인권기구감시단(ANNI)도 7일 오전 아시아 인권 공동체의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는 공식 서한을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송하며, "신임 위원장은 인권단체 등으로 선임위를 구성한 후 시민사회와 본격적인 협의를 거쳐 선임해 줄 것"을 정식으로 요청한 상태다.

일방적 인권위 축소 조치 승인한다면 '인권수장 자격' 없다

그나저나 안 위원장의 사퇴 결심을 재촉한 한국의 ICC의장국 선임에는 빨간 불이 켜진 상태다. 아태 지역의 국가 인권 기구 동향에 정통한 한 소식통에 따르면, 한국의 ICC 의장국 진출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한다는 이상기류가 아태 지역은 물론 유럽 지역의 국가 인권 기구들 가운데서도 감지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기류 변화는 물론 지난 3월말 정부의 일방적 인력 감축 조치 탓이다.

국제 인권 공동체는 인권위의 독립성은 안중에도 없이 일방적으로 직제 개편과 인력 감축을 밀어붙인 정부가 임명한 새 인권위원장의 정치적 독립성을 도대체 무얼 보고 믿느냐고 우려섞인 표정으로 묻는다. 국제사회는 나아가서 새 인권위원장이 과연 필레이 유엔인권최고대표와 린치 ICC의장이 개진한 '일방적 인력감축=독립성 침해' 입장을 견지하는지 묻고 싶다.

다시 말해서 새 인권위원장의 입장 중 국내외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지난 3월말의 직제 개편과 인력 감축에 대한 것이다. 만약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입장이라면 인권위의 권한쟁의심판청구나 국제사회의 항의서한 봇물과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3월말의 직제령 통과가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면 권한쟁의심판청구 취하를 지시할 수도 있고 국제사회와 대립각을 세울 수도 있다.

▲ 지난 3월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 후문 앞에서 인권위 축소 철회 인권시민사회 공투단이 '국가인권위원회 축소안 국무회의 통과 저지' 기자회견을 마친뒤 청와대로 이동하려하자 경찰이 이를 막아서고 있다. ⓒ뉴시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신임위원장의 자격 요건으로 단 하나만 제시하고 싶다. 그것은 그가 과연 지난 3월말 단행된 인권위 고사(枯死) 조치에 대해 대통령과 청와대에 단호하게 '아니오'를 말할 수 있는지 여부다. 아태국가인권기구포럼(APF)등 국제사회도 같은 기준을 들이댈 것이다. 신임위원장이 오는 8월 3일의 APF 총회에서 이 단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ICC 의장직은 100% 물 건너가는 것으로 보면 된다.

만에 하나, 신임위원장이 지난 3월말의 일방적 인권위 축소 조치를 법적으로 승인하는 인물이라면 그는 앞으로 인권위의 독립성을 말할 자격이 없다. 물론 정부의 일방적 조치에 헌법 재판을 청구하며 반발해 온 국가인권위의 수장이 될 자격도 없다. 그런 인물이 지휘하는 국가인권위는 나아가서 전 세계 국가 인권 기구의 독립성과 실효성의 대변자 노릇을 해야 할 국가인권기구 세계조직(ICC)의 의장직을 수행할 자격이 없다.

청와대가 현재 밀실에서 분주하게 준비 중인 후임위원장은 과연 이 운명의 질문에 어떤 답변을 내놓을지 궁금하다. 미리 못박아 두지만 개인의 판단과 견해를 묻는 질문이라 답변을 회피할 명분이 없고, 답변은 결국 '합법으로 본다'와 '불법으로 본다' 중 하나다. '헌재 판결에 따르겠다'는 하나마나한 무소신 답변은 유엔 인권 기구와 국내외 인권 공동체의 '독립성 침해 확신'과는 100% 배치되는 비호감 답변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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