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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마에'의 기적…"시각 장애인의 하모니 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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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마에'의 기적…"시각 장애인의 하모니 들어보세요"

[권은정의 'Social Job'] '하트-하트 실내악단' 이상재 감독

<프레시안>은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와 공동으로 최근 큰 관심을 모으는 '사회적 기업(social entrepreneur)'의 현주소를 확인하고 더 나은 모습을 찾는 새로운 인터뷰 연재를 마련한다.

전문 인터뷰어 권은정 씨가 직접 한국의 다양한 사회적 기업가를 찾아가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그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다. 이 연재는 총 20회에 걸쳐 매주 목요일 독자 여러분을 찾아간다.

이 연재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성공회대학교 사회적기업연구센터(소장 이영환 교수)는 사회적 기업가 인적 자원 개발 교육과 사회적 기업 발전을 위한 연구 활동을 하는 성공회대학교 부설 연구기관이다. (☞사회적기업연구센터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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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트-하트 실내악단 이상재 음악감독. 시각 장애인 이 감독은 국내 최고의 클라리네티스트이다. ⓒ프레시안

클라리네티스트 이상재(43) 교수는 오전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있었다. 오후에 다른 스케줄 때문에 시간을 봐가면서 인터뷰를 해야 했다.

그는 작년 3월부터 나자렛 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재직하고 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보따리' 시간강사 10여 년 만에 전임발령을 받은 그는 방학이라도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너무 좋다고 활짝 웃는다. 그가 요즘 학생을 가르치는 일만큼 그가 전념하고 있는 일은 하트-하트 실내악단 일이다.

주로 시각장애 음악인들로 구성된 실내관현악단인 이 악단은 올봄 4월부터 사회적 일자리 지원을 받고 있다. 시각장애인 11명, 비장애인 7명인데 그중 직업을 가진 4명을 제외하면, 음악을 공부했지만 직업을 갖지 못한 음악인들이 사회적 일자리 지원을 받으며 음악 활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 하트-하트 챔버 오케스트라가 활동을 시작한 것은 2007년 3월부터였지요. 사회복지재단인 하트-하트재단은 이미 발달장애 오케스트라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각장애인 오케스트라에도 관심을 가져준 덕분이지요. 제가 오케스트라를 구성하고 책임지기로 하고 재단에서 운영비를 지원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좀 한계가 있었지요. 연주 활동에만 지원이 되었기 때문에 연주가 없으면 몇 달간 한 푼도 수입이 없었어요. 그러던 중에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를 통해 오케스트라로 사회적 일자리를 제안할 수 있게 된 거지요. 매달 83만6000원. 직업이 없는 장애 음악인들이 음악을 통해 기본적인 생활을 하면서 연주력도 향상시킬 수 있게 된 거지요. 우리가 3년 동안 잘 키워서 나중에는 연주회만 해서 생활이 되도록 해 보자, 그렇게 얘기가 되어서 시작한 겁니다."

하트하트 실내악단은 연주가 없을 때라도 연습을 위해 매일 모인다. 이 연습이 단원들의 활동 내용에 들어간다. 실제 연주 활동을 통해 들어오는 연주료 수입은 수당으로 지급받고 있다. 이 실내악단은 기업과 연계된 지원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강남 장애인 복지관에서 무료로 연습실을 대여 받는 것과 전문기획사로부터 공연 기획을 지원받는 것이다.

그동안 이 실내악단은 많은 연주회를 가졌다. 전국에 있는 시각 장애인 도서관 건립을 위한 자선연주회, 여러 작은 지역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초청연주회, 또 문화순회사업 프로젝트를 맡아 연주 활동을 하기도 한다.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실시한 연주프로그램 공모에 응시하여 큰 건을 따냈다. '찾아가는 음악회', 즉 연주회에 오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연 계획이다. 이 감독은 교정시설 재소자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겠다는 계획서를 내서 당당히 최고 금액의 지원을 받아냈다.

하트-하트 실내악단의 공연은 이제 음악애호가들 사이에 유명해졌다. 이들의 연주가 점점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를 '시각 장애인 음악인'이라는데 강조점을 둔다면 그것은 큰 오해일 것이다. 그들의 연주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특히 사람들은 음악감독인 이상재 교수에게 주목한다. 그는 세상이 인정한 실력 있는 클라리넷 연주가다. 그는 줄리어드, 커티스와 더불어 미국 최고 음악학교로 꼽히는 피버디(Peabody) 음악대학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대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가 미국에서 6년 만에 학위를 받아 고국으로 금의환향했을 때 참 뿌듯했다. 시각 장애인으로서가 아니라 음악가로서 대단한 성공을 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당시 국내에서 장애인 비장애인 다 포함해서 클라리넷을 전공한 박사는 그가 유일했다.

"한국에 오면 바로 교수가 될 줄 알았지요. 그렇게 순진했던 거지요. 시간을 주겠다는 데도 없었는데 말이지요."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그해 여름은 끔찍했다. 더 이상 어둠은 없으리라 기대했지만 그는 다시 방안에 틀어박혀 있어야했다. 그 시간 동안 그를 지켜준 것은 소설 <영웅문> 테이프 수십 개와 클라리넷 연습이었다. 소설을 듣다가 지치면 클라리넷을 불었다. '폭발하지 않기 위해서'그는 자신을 몹시 다스렸으리라.

"인생에서 가장 괴로웠던 시간이 둘 다 한국에 있을 때였네요. 한번은 대학 졸업하고 미국 가기 전까지였는데 종일 집에서 틀어박혀 있었어요. 우리는 아르바이트도 못하잖아요. 벌이가 전혀 없으니 커피 값도 없고, 나갈 수가 없으니 하루 종일 가만히 집에 있는 거지요."

그는 미국유학을 혼자서 준비했다. 동생이 유일하게 도와준 원군이었다. 음악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해봐야 갈 데가 없었다. 그에게 손을 내미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맹학교 다닐 때 음악을 하겠다고 하자 담임선생님이 밀대 걸레로 때리며 말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딴따라해서 육교에서 악기 불거냐, 너같이 공부 잘하는 놈은 그대로 하면 이 학교 교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는데 왜 고생길로 못가서 난리냐!'

살아갈 길이 막막했지만 안마원에 들어가 인생을 보내기는 싫었다. 미국에 있던 친구에게 음악대학 지원서를 부탁했다. 한영사전을 뒤지며 원서를 썼고 카세트 녹음기로 클라리넷 소리를 녹음하고 캠코더로 연주 모습을 동생한테 찍게 했다. 그렇게 해서 원서를 보냈더니 놀랍게도 지원한 학교에서 모두 합격 통지서를 보내주었다. 그중에서 그는 피버디를 선택했고 피버디를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잘 안아 주었다.

그가 피버디 대학교에 처음 도착하던 날을 그는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한다. 그가 기숙사 엘리베이터에 타려는 순간 누군가 말을 걸었단다.

'네가 혹시 한국에서 온 그 학생이냐? 학교에서 시각 장애를 가진 너를 위해 캠퍼스 건물마다 점자 표시를 붙이기로 결정했단다. 내가 지금 그 작업을 하는 중인데 마침 잘 만났구나. 이렇게 하면 편리하게 된 것인지 한번 직접 만져봐 줄래?'

1990년 초 미국 교육은 한국과 많이 달랐다. 그는 한국의 대학 입학 직후 학교에서 내민 서류를 기억했다. 시각 장애인인 그를 받아주겠다는 대학은 거의 없었다. 입학을 허가한 대학도 그에게 약속하라고 했다. 학교 생활에서 예상되는 불상사에 대해 어떤 책임도 지지 않을 것이며 학습에 관련해 학교에 어떤 요구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서류에 그는 당연히! 서명을 했었단다.

ⓒ프레시안

그는 귀국 후 모교 대학에서 1주일에 두 시간 시간을 맡는 것으로 시간강사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가 받은 첫 월급이 19만2800원. 부모님 속옷 사 드리고 친구들한테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사고 나니 4000원이 남더란다. 그리고 1주일에 19시간씩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기까지, 그리고 대학에서 전임발령을 받기까지 그는 수많은 시간을 견디어 냈다.

그가 박사학위를 받기까지 그는 자신의 노력도 있었지만 주위도움도 컸노라고, 자기는 행운아라고 한다. 해군 대령으로 예편해서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과로로 조기퇴직을 한 그의 부친은 큰아들을 공부시킨다고 정수기까지 팔러 다녔다. 피버디에서 주는 장학금과 삼성복지재단의 도움도 공부에 큰 힘이 되었다.

시간강사로 이 학교 저 학교를 다니면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시각 장애인 음악 단체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클라리넷은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야 제대로 역할을 하는 악기다. 그러나 시각 장애인은 오케스트라에 합류할 수가 없다. 지휘를 볼 수 없고 나눠주는 악보를 따라 같이 읽을 수도 없다. 그러나 실내악은 꿈꿔볼 만한 것이었다.

전문으로 실내악을 할 사람을 찾아보았지만 그 당시에는 쉽게 찾아지지 않았다. 1998년부터 자선음악회를 하면서 함께 할 수 있는 음악인들을 만나게 되었다. 같이 모여서 하면 좀 더 큰 힘, 음악적으로 더 큰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굳게 믿었다. 오늘의 하트-하트 실내악단은 그의 믿음이 구현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음악적인 사치를 부리며 컸노라고 한다. 월남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집에 오실 때 손에 들고 온 것은 달랑 전축과 클래식 음반이 전부였다. 당시 가정집에 전축은 굉장한 사치품이었다.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누가 작곡한지도 모르면서 베토벤과 모차르트 음악을 귀에 달고 자랐다.

일곱 살 때 교통사고로 눈을 다친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 완전히 시력을 잃고 말았다. 4학년 때부터 학교 현악합주단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중학교 들어가 밴드부에서 클라리넷하면서 평생친구가 된 것이다. 그는 눈을 다치면서 바로 맹학교로 들어가 초중고시절을 공부했다.

아시다시피 맹학교 수업은 안마와 침이 전부다. 그러나 그는 대학에 가서 음악을 공부하고 싶었다. 역사상 가장 많은 과목을 시험 봐야 했던 학번에 걸려있었고 좋은 내신 성적을 위해서는 안마와 침도 열심히 해야 했다. 거기다가 악기 연습까지. 그 시기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지요."

그런데 그는 피버디에서 박사학위 논문 쓸 때도 역시 그랬단다.

"6개월간 매일 두 시간 반만 잤어요. 알람을 3개 맞춰 놓고 일어나면 찬물을 뒤집어쓰곤 했어요. 매일 커피 10잔에 홍자를 25잔씩 마시면서 견디어냈지요."

ⓒ프레시안
피버디 음대 140년 역사상 시각 장애인 박사는 그가 처음이다. 졸업 때 그는 최우수 졸업자상을 수상했다. 머리가 부서져라, 위에 구멍이 나라 죽도록 공부한 보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 교수는 불행한 인생에서 음악을 선택한 것을 행운이라고 말한다. 거기다가 음악을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 뭘 더 바랄게 있냐는 말이다.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혼자 악기를 불며 연습하고, 무대에 올라 연주하고 공연이 끝나면 그에게 감사를 전하는 팬들이 있고…. 그는 음악인으로 더없이 만족한단다.

그런데 독주 연주자로서 살아온 그가 요즘 좀 혼란스럽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전에는 공연문의가 오면 독주 연주 개런티에 대해서 별로 주고받을 말이 필요 없었었다. 그런데 요즘은 항상 덧붙이게 된단다.

'나 혼자 독주 하는 것 말고 우리 단원이 전부 같이 가서 연주하면 어떨까요? 멋진 공연이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연주료가 좀 높아져야 하는데요?'

그렇게 해서 실내악단이 가서 연주를 한다. 실제로 그가 받는 연주료는 전에 받던 것의 10분의 1정도 밖에 안 된다. 예쁜 두 딸을 키우는 아내 입장에서 보자면 그런 남편이 좀 안타깝게 보일 것이다. 자신에게 들어오는 공연을 늘 오케스트라로 돌려 버리니까 말이다.

"제가 무슨 자선 마인드가 있거나, 노블리즈 오블리제 그런 거 아닙니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그런 의미도 아닙니다. 그저 오케스트라에 대한 애착이 크기 때문이지요. 오케스트라 연주와 독주는 비교 대상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일반 대중에게는 제가 혼자 연주하는 전문음악보다는 '사랑의 인사'같은 그런 따뜻한 음악이 더 어필한다고 봐요. 또 우리 실내악단은 악보도 없이 지휘자도 없이 연주하잖아요. 때로는 불도 끈 채 연주하기도 합니다. 그런 것들이 다른 음악인들의 연주와 다르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우리 오케스트라가 가진 힘이 아주 커요. 그러니 제가 오케스트라, 오케스트라 하는 것이지요. 하하하…."

그는 또 말을 이어간다.

"저는 우리가 아주 뛰어난 연주자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국내에서 음악을 공부했지요. 그런데 음정 박자가 정확하다고 해서 그 노래가 꼭 차트 1위에 오르지는 않잖아요? 연주력은 뛰어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음악을 만들기까지의 노력을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화음을 만들기 위해 서로 얼마나 애를 썼는지 그게 사람들 눈에 보이는 거지요."

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연주자인데 다른 이들과 같이 하면 실력이 잠기는 듯해서 안타깝지 않을까?

"미국에서 공부할 때 피아니스트 선생님이 저더러 남의 소리에 너무 예민하다, 남을 너무 배려하는 것 같다고 걱정해주셨어요. 근데 제가 음악 감독이잖아요. 제가 잠긴다기보다는 저를 통해서 단원들이 향상되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니 그게 기쁘지요. 그렇다고 제 연주 생활을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올해 12월에 독주회도 준비하고 있고 또 음반 작업도 하고 있습니다."

이상재 교수는 막힘없이 힘차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는 어려운 인생길도 힘차게 걸어 나왔다. 무엇이었나? 무엇이 그를 이렇게 힘 있게 버티게 하는가?

"제가 자존심이 세요. 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남들이 못한다, 할 수 없을 걸, 그렇게 말하면 몸이 근질근질해져요. 근성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남들이 못하는 것을 하기로 결정하고 나면 두려워져요. 못하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서 잠도 안 올 때도 많았어요. 박사논문 쓸 때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 사람들이 그거 안 된다고 했잖아, 안 되는 것을 우기더니 힘들지, 그런 말이 귀에 쟁쟁했어요. 남에게 보여주려고 게 아니고 나 스스로에게 빚지고 싶지 않은 거,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어서, 그것 때문에 치열하게 산다고 말하고 싶어요."

ⓒ프레시안

음악감독으로서 그는 챔버 오케스트라 멤버들에 대한 책임감이 아주 크다.

"음악을 10년 이상 해온 사람들입니다. 음악이 꿈인 친구들이지요. 이제 와서 음악이 아닌 것으로 먹고 살아야한다면 꿈을 버리는 일이지요. 안마를 하거나 침을 놓거나 복지관에 들어가 일한다면 불행할 겁니다. 지금은 월급이 적어서 미안하지요. 제가 열심히 더 뛰어다니면서 연주를 더 많이 따오면 됩니다. 공연을 더 다니도록 하는 것, 그게 저의 가장 큰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월급이 수당보다 더 많은 사회적 일자리가 되게 하는 것, 우리 단원모두가 음악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도록 하는 게 제 소망입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다. 이상재, 그가 마음을 먹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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