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60년을 맞아 지난 60년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보는 토론회가 23일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해방 60년 한반도의 과거, 현재, 미래'란 주제로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최한 이 토론회는 우리사회의 내로라하는 학자, 시민사회활동가들이 참가해 각자의 견해를 밝힌다.
이날 토론회의 기조발제를 맡은 박원순 변호사는 '해방 60년의 회고와 전망'이란 주제로 거시적 차원에서 지난 60년의 세월을 요약하며 우리 사회의 명암을 짚었다. 나아가 미래를 열어갈 비전과 컨텐츠 마련의 절박함도 지적했다.
***"이제 숨을 고르고 지난 과거를 총체적으로 평가해보자"**
박 변호사는 발제 서두에서 과거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역사'를 지적하며 광복 60주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밝혔다.
그는 "지난 60년 동안 경천동지 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 정신이 얼떨떨한 상태"라며 "그러나 어느 사건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상태로 지나간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아무런 평가도 없이, 생각도 없이 과거를 흘려보낸다는 것은 그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라며 "올바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고 단언했다.
그는 "광복 60년을 맞아 조금은 숨을 고르고 앉아서 과거를 미시적이고 각론적으로 치밀하게 살피고 평가해야 한다"며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를 점검해보기 위한 시간과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경제발전'과 '민주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지만..."
박원순 변호사는 지난 60년의 시간을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던 시기"로 요약했다.
박 변호사는 "20세기는 국권상실, 분단과 전쟁, 독재와 빈곤 등 온갖 악조건과 고난을 뚫고 경제적 풍요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한 시기"라며 "남미, 동남아시아, 동구권 등을 비교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다 함께 성취하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고 지적했다.
박 변호사는 "그러나 급속한 경제성장은 재벌과 특권계층의 발호와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패구조를 낳았다"며 "경제성장주의는 금전만능주의의 사회적 악폐를 가져왔고 경제적 빈부격차를 가져왔다"며 지난 시간의 어두운 부분을 언급했다.
그는 나아가 "개발독재의 후유증은 단지 그 성장과정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후 지금까지 남아 있다"며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해 그만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덧붙였다.
요컨대 우리 사회가 빠른 시일 내에 외형상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성취했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안착과, 경제적 풍요를 달성에 이르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 박 변호사의 분석이다.
***우리 사회 갈등 해소를 위한 방안은 무엇?**
이같이 지난 60년을 진단한 박원순 변호사는 향후 우리가 극복해야 할 첫 번째 과제로 노사·지역·이념·세대 갈등 극복을 꼽았다.
박 변호사는 "민주주의는 다양성이 존중되고 사상의 자유시장이 형성됐지만, 우리의 갈등과 분열 양상은 좀 더 심각하다"며 "우리 사회는 구심력은 작고 원심력이 크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갈등과 분열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느 정도 당연하다"며 "문제는 이런 다른 의견을 통합·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로 이끌어가는 시스템이 취약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갈등 통합과 조정을 위해 강화하거나 새롭게 마련해야 할 제도적 장치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박 변호사에 따르면, 기존 사법부와 각종 중재·조정 기구들의 개혁은 물론, 대학 내 분쟁해결학과 설치와 관련 전문가 양성이 시급한 상황이다. 또한 정치권도 기존 당리당략적 태도로 갈등을 부추기던 악습을 버리고 기존 청문회 제도를 활용해 합리적 대안을 찾는 태도 변화도 갈등 통합을 위한 주요한 방편이다.
***"노조 부정은 곧 자본주의 부정"**
한편 박 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주요한 갈등 요소인 노사갈등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해 의견을 밝혔다.
그는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거부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며 "(노동조합을) 부정하는 기업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어 "어떤 기업들은 노동자들을 '일하는 기계'나 '머슴'쯤으로 생각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할 리가 만무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그는 "노동조합의 가장 큰 문제는 개별 단위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임금협상으로 해결되지 않는 점이 많아지고 있지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며 "서민과 중산층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주택·전세문제, 사교육비용 문제 등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과 개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실질적 민주주의 성취는 법치주의 완성에서부터"**
박원순 변호사는 법치주의와 '게임의 룰'이 쇠락해지고 있는 현 상황을 개탄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제도와 내용은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을 핵심 가치로 하는 '법치주의'"라며 "하지만 오늘날 법이 재벌과 권력, 언론 등 우리 사회의 가장 힘있는 자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기업들의 불법정치자금 제공, 가진 자들의 병역비리 등을 보면 우리 사회를 법치사회라고 말하기 어렵다"며 "따라서 일반 시민들조차 법에 대한 불신과 경시, '법대로 하면 손해'라는 견해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법 앞의 만인의 평등, 성역의 제거, 엄정한 법집행, 법에 대한 신뢰, 공정한 법의 제정과 운용이 어느 때보다 절박하다"고 덧붙였다.
***"미래를 열어갈 비전이 있는가?"**
박 변호사는 끝으로 새로운 시대를 전망하고 이끌어나갈 컨텐츠가 과연 사회 지도층에 있는지 의문을 표했다.
박 변호사는 "우리는 60여년 만에 OECD 회원국이 되고, 세계 10대 교역국이 됐다"며 "하지만 커진 몸집에 비해 커진 규모를 담담할 수 있는 전문성과 경륜, 기술을 갖추고 있는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각 정당들의 정책연구소는 활성화되지 못 하고, 집권세력 역시 국정 논의 과정이 정책적 논쟁으로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정책으로 무장되지 못하고 있다. 지방정부 또한 수만 명에 달하는 주민들과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계할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정작 충분한 비전과 정책을 갖고 있지 못하다.
박 변호사는 "결과적으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뤘지만, 앞으로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에 대한 큰 비전과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비전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전망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을 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비전 마련을 위해 "좀 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학습과 연구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 절박하다"며 "'공부하는 백성이 산다'는 말이 오늘날처럼 실감나는 때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박원순 변호사의 기조발제 '해방 60년의 회고와 전망'을 발췌 요약한 글이다
***1. 잠깐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
***- 전시대를 평가하고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광복 60주년이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도 숨 가쁘게 그 시대를 살아왔다. '격동의 세기'라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해방과 더불어 분단, 좌우갈등, 전쟁과 학살, 독재와 저항, 혁명과 쿠데타가 오갔다.
이렇듯 경천동지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 정신이 얼떨떨한 상태이다. 그러나 어느 사건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으련만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상태로 지나가곤 했다. 아무런 평가도 없이, 생각도 없이 과거를 흘려보낸다는 것은 그 과거로부터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이며 따라서 올바로 미래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동안 현대사에 대한 연구가 없지는 않았다. 역사학자 뿐만 아니라 정치학자, 사회학자 등 각 분야의 전문가들에 의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축적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진하다. 박정희시대의 공과에 대한 논쟁이 한참이지만 그 시대의 총체적 상황이 충분히 드러나고 검토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변변한 개관서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아닌가.
이제 좀 더 차분히 우리가 지내온 과거를 돌이켜 볼 때가 되었다. 미시적이고 각론적으로 지나온 역사를 치밀하게 살피고 연구하고 평가해야 한다. 동시에 그 바탕위에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각으로 우리 역사를 체계화해야 한다. 이제 조금은 숨을 고르고 앉아서 지나온 저 뒤를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를 점검해 보기 위한 시간과 기회를 가져야 한다. 광복 60주년 - 그것이 우리에게 오늘 요구하는 바이다.
***2. 고난의 20세기를 헤쳐나온 민족**
***-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
지난 세기는 우리 민족에게 가장 비극적인 시대였다. 국권상실|식민지하에서의 착취|학살|차별|민족말살, 분단과 전쟁, 독재와 빈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악조건과 고난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제 우리는 외형상 경제적 풍요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60년대 이후 시작된 경제발전전략은 많은 시행착오와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짧은 시간 안에 경제부흥을 이룩해냈다. 그 개발독재의 인권유린과 정치적 압제에 저항한 지식인과 민중의 저항은 그 이후 마침내 민주주의를 쟁취했다. 이로써 경제발전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토끼를 우리는 잡게 된 것이다.
상대적으로 보면 지난 60년 동안 한국인들이 이룩한 이 두 가지 성취는 자랑할만한 일이다.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남미나 동남아시아, 동구권과 러시아 등을 비교하면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다함께 성취하고 있는 나라는 드물다.
물론 이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급속한 경제성장은 재벌과 특권계층의 발호와 정경유착을 비롯한 부패구조를 낳았다. 경제성장주의는 금전만능주의의 사회적 악폐를 가져왔음은 물론 경제적 빈부격차와 그 갈등을 불렀다. 이러한 후유증은 단지 그 성장과정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남아있다. 급속한 경제성장에 대해 그만큼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른바 '개발독재'론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인권과 자유, 배분과 형평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경제발전은 개방이후의 동구권과 중국, 여러 제3세계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갈등, 성장의 후유증을 생각하면 과연 이들 나라의 올바른 모델이 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우리가 좀 더 인권과 자유, 분배와 사회정의라는 가치와 경제성장을 조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성장이 조금은 둔화되었을지 몰라도 그러한 균형성장이 이루어졌다면 그토록 심각한 사회갈등과 대량인권의 침해와 부정부패 등의 후유증이 훨씬 경감되지 않았을까.
***3. 갈갈이 찢겨진 나라**
***- 노사갈등|지역감정|이념갈등|세대갈등을 극복해야**
자세히 우리사회를 들여다보면 온통 갈등과 분열로 나라가 시끄럽다. 갈등과 분열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느 정도는 당연한 일이다.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중시되는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이러한 의견의 차이는 있을 수밖에 없다. 의견이 일치되는 나라가 오히려 권위주의 국가이다.
문제는 이러한 다른 의견을 어떻게 통합|조정하고 사회적 합의로 이루어 가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른바 분쟁해결(Dispute Resolution)의 방안은 다양하다. 보다 더 권위있고 신뢰있는 분쟁해결기관의 설치, 기존의 사법부와 각종 중재|조정기구들의 개혁, 대학 내 분쟁해결학과 설치와 분쟁해결전문가들의 양성, ADR(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연구와 해결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런 실무적인 방법 외에도 국회나 지방의회가 이러한 분쟁과 갈등조정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내야 한다.
정당들은 불행히도 분쟁과 갈등을 조정하려는 노력보다는 오히려 부추기는 역할을 더 하고 있다. 이러한 당리당략적인 태도를 버리고 보다 높은 차원의 국가이익을 도모하고 국민들의 다양한 이해관계의 상충을 조정해 내려면 기존의 청문회제도를 활용하여 이익단체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그 가운데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구나 이 과정에서 언론과 시민단체들 역시 구체적 사실에 입각한 보도와 논의를 해 내고 그것에 기초한 최선의 대안들을 찾아내려 한다면 이 사회의 갈등과 분쟁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노사갈등 역시 아직 우리가 갈등해결에 미숙한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가장 기초적인 제도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아예 거부하고 있는 기업도 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약자의 집단적인 권리로서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부정하는 기업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주나 경영진은 노동조합을 적법하고도 적절한 파트너로 간주하지 않아왔다. 오만하고도 고압적인 자세로 노동자들을 '일하는 기계'나 '머슴' 쯤으로나 생각하였으니 노동자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할 리가 만무하다.
노동조합 역시 사회 전반적인 환경과 조건을 무시하고 지나친 요구를 하면서 합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고 더 나아가 기업의 생존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사실 오늘날 대기업의 임금수준은 이미 선진국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화와 타협을 부정하는 강경일변도의 협상태도는 실질적인 협상을 어렵게 한다. 더 큰 문제는 개별 단위 사업장에서 벌어지는 임금협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오늘날 이 나라 서민과 중산층에 큰 부담이 되고 있는 주택|전세문제, 사교육비용 문제 등은 사회전체가 해결해야 할 문제로서 마땅히 노동조합이 이에 관심을 갖고 개입하여야 함에도 이런 문제에 큰 관심과 개입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아무리 임금인상에 성공하여도 생활형편이 크게 좋아질 수가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노사분쟁을 해결하고 산업평화를 이룩하는 데는 기업지배구조의 개선, 회계와 경영의 투명성과 책임성, 경영진의 도덕적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필요할 때 사회적 대타협을 이루고 함께 윈윈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4. 민주주의, 아직도 더 가야 할 먼 길**
***- 법치주의와 '게임의 룰'이 사라진 사회**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제도와 내용은 법치주의다. '법 앞에 만인의 평등'이라는 내용을 핵심가치로 하는 법치주의가 과연 우리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고 있을까. 법은 진정으로 재벌과 권력, 언론 등 우리 사회의 가장 힘있는 자들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있는가. 대답은 부정적이다.
재벌의 회장은 상식적으로 누가 보아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 대량의 불법적인 정치자금제공이나 불법적 기업 활동에도 소환조차 되지 않기가 일쑤이다. 대규모의 분식회계가 빈발하고 그때마다 소극적인 수사와 전문경영인의 구속으로 끝나기가 보통이다. 검찰과 사법부의 판|검사나 직원은 "손이 안으로 굽기" 일쑤여서 제대로 엄벌되는 경우가 없다. 사건이 커지고 사회적으로 비난이 가중되면 그때서야 '옷 벗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러한 사회를 평등한 사회, 법치사회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적게는 수천만 원에서 크게는 수백|수천억까지 커지는 부정부패와 비리의 뉴스를 들으며 이 나라 민중들의 가슴에는 절망과 분노가 자란다. 재벌기업, 고급관료, 정치인들이 벌이는 정경유착과 부패의 고리는 끝이 없어 보인다. 이러다 보니 일반 시민들조차 법에 대한 불신과 경시에 익숙해졌다. "법대로 하면 손해"라는 견해가 조사시기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90%까지 나온다. 이쯤이면 법치주의라는 말이 무색해진다.
사실 이 사회에는 사기꾼이 판치는 사회이다. 어디를 둘러보나 가짜이고 허위|과장광고가 판친다. 음식이나 식품에까지 가짜 고춧가루, 발암물질을 넣기 일쑤이다. 광고를 믿고 샀다가는 낭패하기 쉽다. 평생 모아 집을 샀는데 중간에 준공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건설회사나 그 하도급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이미 낸 계약금 중도금 날리는 사태나 설사 입주하는데 성공했더라도 비새고 벽에 금가고 하자가 발생하는 사례가 숱하다. 총체적 부실사회 - 그것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불러왔다. 법 앞의 만인의 평등, 성역의 제거, 엄정한 법집행, 법에 대한 신뢰, 공정한 법의 제정과 운용이 절박하다.
***5. 우리의 미래를 붙잡는 과거**
***- 청산해야만 할 과거**
최근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정부하에서 각종 과거사청산위원회들이 생겨나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고 부분적으로 사과, 명예회복, 배상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그 진전은 지지부진하고 불완전하기만 하다. 철저한 진상조사, 정부와 관련자의 진실된 사죄, 가해자와 불법행위자에 대한 처벌과 응징, 피해자와 희생자에 대한 배상과 보상 그리고 원상회복,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적 개혁과 조치 등이 필요하다. 섬세한 눈으로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새로운 사회를 설계하는 일이 절박하다.
실상 더 한심한 일은 일제하의 민족반역자들의 과거가 제대로 응징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독립된 조국의 중요 직책을 독차지함으로써 민족의 정체성과 주체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에 의해 유린된 주권을 회복한 새로운 광복 조국에서 당연히 과거 친일행각을 벌임으로써 민족을 배반한 사람들이 처벌 또는 배제되고 주권회복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건설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이 주체가 됨으로써 민족정체성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이다. 이들은 역대정권의 수족이 되어 인권탄압에 앞장섬으로써 친일의 죄과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죄악을 계속해서 저질렀던 것이다.
우리 해방 60년의 역사가 왜곡되고 파행으로 치달은 것은 전적으로 친일부역자 청산이라는 첫 번째 단추를 잘못 꿴 일로부터 시작되었다. 한참 늦은 일이지만 이 일은 여전히 현재의 과제로서 중요한 일이다.
***6. 통일의 비원**
***- 분단된 반쪽을 극복해야**
통일을 이루지 않고서는 민족사의 온전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없다. 분단된 상태로서는 언제나 과도기이며 기형적일 수밖에 없다. 수천 년 동안 단일국가로 살아온 한 민족이, 한 국가가 분단민족, 분단국가로서 살아갈 수는 없다. 지난 60년 동안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감으로써 이미 서로 다른 체제가 성립되었지만 여전히 그것은 불합리하고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더구나 수백만의 가족이 강제로 이산되고 상호간에 만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접촉하고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이 비인간적 상황은 하루빨리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지원과 태도를 놓고 논란이 많다. 이른바 '남남갈등'은 깊어져만 간다. 상호 적대와 전쟁의 당연한 부산물이다. 그러나 통일과 공존과 협력의 길은 피할 수 없는 역사의 대세이다. 2차세계대전의 결과 생겨난 분단국가들로서 통일되지 않은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다행히 최근 남북관계는 핵문제와 6자회담의 교착상태에도 불구하고 착실한 교류와 화해를 이루어왔다. 햇볕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의 결과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평화조약으로의 전환, 상호 대표부 교환, 군축의 실시, 대규모 교류와 협력이 절실하다. 이러한 확고한 평화체제 위에 통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7. 우리는 어떤 나라를 꿈꾸는가**
***- 비전과 컨텐츠가 없다**
이제 OECD회원국이 되었고 세계 10대 교역국이 되었다. 4천8백만의 인구로 보더라도 적은 나라가 아니다. 그럼에도 최근 벌어지는 온갖 사건과 사고를 보면서 과연 우리 스스로가 우리사회체제의 운용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정당들은 막대한 국고보조금까지 받고 그 가운데 일정비율로 정책연구에 쓰도록 법제화되어있지만 실질적으로 정책연구소는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다. 국정의 논의과정이 정책의 생산과 정책적 논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집권세력은 정책으로 무장되어 있지 못하다. 3개월간의 인수위원회의 구상만으로는 한 나라를 온전히 이끌어갈 다양한 정책의 생산과 조정을 하기 어렵다.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정부는 더 한심하다. 적어도 수천억 원씩의 예산을 가진 일선 기초자치단체장 역시 수만 명에서 수십만 명의 주민들과 그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설계하고 이를 실행할 책임과 권한을 가진다. 그러나 이들에게 그 책임과 권한을 맡길 만큼의 충분한 비전과 정책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 동시대인들이 피땀 흘려 번 혈세들이 낭비되기 마련이다.
결국 산업화와 민주화의 일정 정도를 이룬 우리로서 과연 앞으로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하는지 큰 비전과 그 비전을 구체적으로 채워낼 컨텐츠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비전은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고 전망할 수 있는 통찰력이 있을 때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다.
막연한 부국강병론이 우리의 새로운 시대의 비전이 될 수는 없다. 예컨대, 독일의 경우 2030년까지 원자력발전을 완전히 포기하는 대신 그때까지 20% 이상의 대체에너지 개발에 집중하기로 정부가 결정했다. 여기에 집중되는 정부의 예산과 노력, 시민들의 힘을 끌어내는 조치 등으로 말미암아 독일은 이미 대체에너지 분야의 최고 선진국이 되었다. 독일은 친환경적인 사회를 이룩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성장동력을 하나 개발한 것이다. 새로운 접근과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각론으로 들어가서 어떤 문제에 대해 천착하고 치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거 구한말 서유견문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밀려오는 서구문명을 따라잡으려는 일부 선각자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그 시간부족 때문에 결국 식민지의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기초역량은 있는 상태에서 좀 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학습과 연구가 우리 사회 모든 분야에서 절박하다. 오늘날 선진 서양제국에서 이루어지는 평생학습의 예를 우리도 본받을 필요가 있다. '공부하는 백성이 산다'는 말이 오늘날처럼 실감나는 때는 미처 없었다.
해방 60주년. 이제야말로 새로이 출발할 때가 되었다. 진정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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