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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환상'…지금은 '각성'이 필요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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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환상'…지금은 '각성'이 필요한 때"

[해방60년 토론회] "남북 모두 60년간 파국 향해 달려왔다"

광복 60년, 우리는 진보하고 있는가?

23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광복60주년기념사업회가 주관하는 '광복60년 시련과 전진 학술 토론회'에서 박승옥 '시민발전' 대표는 "해방 후 남북한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제도만 달랐을 뿐 경제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는 근대 프로젝트를 수행해 왔다"며 "60년이 지난 지금 양쪽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사회 해체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라고 지적했다.

박 대표는 "이런 남북의 모습이 민주화운동이 지향했던 모습이냐"고 문제를 제기하며 "이제 진보는 '환상'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살아 있는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기 위한 '생태적 대전환'에 나서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프레시안>은 박승옥 대표의 발표문을 사전에 입수해 가능한 원문을 살려 핵심 내용을 요약해 싣는다. <편집자>

***진보는 환상이다**

진보는 환상이다. 진보사관, 발전사관은 허망한 희망일 뿐이다. 더더구나 보수는 더러운 욕망이거나 추악한 집착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역사는 발전한다는 생각, 역사는 진보한다는 이념에 대해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심각하게 재고해보아야 한다. 역사는 일직선이거 나선형이건 어쨌든 퇴행과 정체와 도약을 거듭하면서 발전 진보한다는 이른바 발전사관, 진보사관은 진화론을 사회이론과 역사이론에 잘못 적용한 이론이다. 정확히 말하면 진보사관은, 그리고 진보라는 개념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20세기 초 한국에서도 진화론과 함께 진보이론이 수입되었다. 주로 중국의 량치차오(梁啓超)나 일본의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등의 저서를 통해서였다. 물론 백인 우월주의의 인종편견도 함께 수입되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 이후 한 세기 동안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함께 진보는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이 되었다.

인류 역사는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향해 고속도로처럼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진보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선택과 변화의 역사일 뿐이다. 그리고 때로 역사는 단속(punctuation)과 도약과 추락을 거듭하는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는 환경과 사회의 끊임없는 대화와 적응, 선택과 변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진보사관, 발전사관은 허상에 기초한 신념의 산물일 뿐이다.

현대 인류문명은 약 1만 년 전 농업을 발명하면서 정착생활과 함께 시작된 것으로 이야기된다. 이후 도시를 형성하고 문자를 발명하여 역사를 기록함과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문명의 탑을 본격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백 년 전인 17세기에는 화석연료를 에너지원으로 하는 오늘날의 현대문명이 급속도로 인간과 사회와 지구환경을 뒤바꾸어 놓은 그야말로 산업혁명이 본격화됐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경제생활에서 잉여가 발생했을 때, 여유가 생겼을 때 비로소 진보가 이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일부만이 진실이다. 수렵채취 사회에서 어느 시점인가 잉여가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농경 사회가 나타났으며, 농업사회에서 비로소 잉여가 발생해서 풍요롭게 되었다고 산업사회로 변모되는 게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한 사회가 붕괴의 위기에 몰리고 극도의 결핍 상태가 되었을 때 이를 탈피하기 위한 필사의 수단을 찾아내는 과정이 바로 문명 발생과 발전의 역사였음은 우리가 조금만 깊이 조사해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문명은 처음부터 자원을 얻기 위한 식민지 침략과 착취의 문명이었다. 다른 지역과 종족에 대한 침략에서 다른 나라에 대한 침략과 착취로, 이윽고는 다른 생물종에 대한, 자연에 대한 침략과 착취로 바뀌어 온 역사가 다름 아닌 문명의 역사다.

그러나 21세기의 초입에 들어선 오늘날 이제 현대문명은 침략하고 착취할 다른 지역이나 대상조차 없어져 버렸다. 현대문명을 떠받들고 있는 자원도 모두 고갈되어 가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억 년 동안 땅속 깊이 묻혀 있던 과거의 햇빛에너지를 단기간에 무분별하게 모두 지상으로 꺼내 놓아버림으로써 재앙을 불러오고야 말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초래하고 말았다. 게다가 수많은 화학물질을 지상으로 바다로 쏟아낸 결과 인간은 심각한 환경호르몬 질병에 노출되어버렸고 ,이제는 물을 비롯한 모든 음식물조차 농약과 화학물질과 호르몬제와 항생제 등에 뒤범벅으로 오염되어 먹을 수조차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이 진보와 진보된 산업문명의 실상인 것이다. 진보의 결과인 현대문명은 자연파괴와 자원고갈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기 파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다시 성찰하고, 다시 새롭게 해석해내고 거기서 심각하게 현재와 미래의 삶을 투영해보아야 할 까닭은 이 같은 현대 문명의 자기 파괴와 역사 자체의 종말에 대한 현실의 냉엄한 위기의식 때문이다. 필사의 탈출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는 자각 때문이다.

***해방 60년, 청산과 기념을 넘어선 역사 성찰**

해방 60주년이 되는 2005년 지금, 우리는 아직도 무엇을 청산하고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지 분명히 하지 못한 채 미래에 대한 뚜렷한 청사진 하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도대체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이루었고, 앞으로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럴듯한 주장과 구호는 난무해도 정작 차분히 미래를 책임지는 사회상과 전망은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60년 동안의 '시련과 전진', 반세기의 역사선택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자성해보는 거울을 한 번 비쳐보는 것은 그러므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에 들어선 오늘날 한국은 짧은 시간에 놀라운 경제개발과 민주화를 이룩한 나라로 평가되고 있다. 한국은 비록 1997년 IMF 체제라는 국가부도 사태를 겪긴 했지만 이제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선진 공업국가 반열에 우뚝 올라서 있다. 굳이 몇몇 지표를 들지 않아도 이를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1953년 한국전쟁의 폐허 위에서 굶주림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국민소득 67달러(북한 53달러) 수준과 견주면 60년 사이에 정말 천지가 개벽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 같은 장밋빛 통계 바로 밑 그늘에 또 다른 한국의 모습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오늘 현재 한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어떤 지점에 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게 된다.

2003년 '사회적 타살'이라고 지칭되는 빈곤자살자 수가 1157명에 이르렀다. 하루 3명 정도가 순전히 가난 때문에 자식을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몸을 던지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IMF가 터진 뒤인 1998년 처음으로 자살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앞지른 우리 사회가 이제는 어느새 교통사고 사망자 수보다 두 배나 많게 한 해 1만3000여 명의 자살자를 양산하는 자살공화국이 되어버렸다. 300만 명이 넘는 신용불량자 수, 100만에 이르는 단전단수 가구 수, 최대 600만~700만 명으로 추산하는 빈곤계층 등등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극단으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지표는 너무나 많다. 20 대 80의 사회가 아니라 IMF 이후 급격히 중산층이 무너지면서 지금은 소수의 상층을 제외하고는 온국민이 빈곤의 위협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지경이 되었다.

선진국을 향해 달려가는 개발과 성장의 길에서 망가지고 탈락한 것은 경쟁에서 뒤쳐진 사람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국토는, 한국의 자연은 개발과 성장이라는 괴물이 저지른 극심한 폭력과 착취에 만신창이가 된 지 오래이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우리나라의 환경지속가능성 지수(sustainability index)는 세계 122위에서 136위로 최하위권이다. 서울의 대기오염도는 세계 1위권이며, 농약과 화학비료로 인한 농업오염도도 1위권이다. 게다가 식량자급률은 26%로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그런 땅덩어리를 놓고 또 국민의 상위 1%가 국토의 40%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상위10%의 국민들이 74%의 땅을 가지고 투기놀음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양극화와 불평등, 건설족만을 살찌우는 부동산 거품과 투기를 바로잡아야 할 국가의 투명도(부정부패) 지수는 50위 정도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오늘날 한국 사회는 사람이 살만한 공동체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살벌한 사회가 되고 말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신자유주의와 IMF 때문인가. 물론 IMF를 통해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월가 투기자본이 미숙한 한국경제를 뒤흔들어 놓고 단기간에 국가의 부를 이전해 간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국제 금융자본이 주식회사 한국을 장악하면서 주주자본주의라는 미명 아래 막대한 이윤을 해외로 유출해가는 구조가 정착되었고 그 결과 한국 사회가 고용불안과 심각한 양극화에 시달리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히려 이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아무런 정책역량이나 미래에 대한 확고한 장기 전망 없이 무분별하고도 급속하게 도입한 역대 민주정부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확한 지적일 것이다. 군사독재정권을 국민의 힘으로 무너뜨리고 들어선 민주정부의 무능력과 무력함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심한 정도를 넘어서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가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지경이 되었다.

이제 이와 같은 경제발전과 고도 경제성장, 과거와 같은 노동력 착취와 자연착취의 개발과 진보가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계속 추구해야만 할 가치인가라는 점을 냉철하게 따져보자는 것이다.

1960년대로부터 채 반세기도 지나지 않은 오늘날 북한 주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북한 사회는 민주주의와는 담을 쌓은 독재 왕조국가로 전락해 버렸다. 기아로 사망한 주민들이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고, 탈북자들이 만주나 동남아까지 유랑하고 있으며, 5호담당제와 같은 극도의 감시와 폭력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그런 사회와 국가는 이미 사회 또는 국가로서의 정당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북한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아직도 풍요를 구가하는 남한도 마찬가지이다. 차상위계층까지 빈곤층이 700만이나 되는 그런 사회와 국가는 이미 공동체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해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해방 후 남북한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제도만 달랐을 뿐 공히 부국강병의 진보와 발전을 추구했고, 경제성장을 제일의 가치로 추구하는 근대 프로젝트를 지금까지 수행했다. 그런데 그 중 한쪽은 사회주의 몰락 후 사회주의 강국들의 경제 지원이 끊기자마자, 그중에서도 에너지 공급이 끊기자마자 모든 경제부문이 붕괴되면서 사회가 해체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한쪽은 급속한 경제성장의 열매와 풍요를 과시하다가 IMF를 통해 미국이 순식간에 코도 안 풀고 국부를 몽땅 가져가 버리는 파이프라인을 설치한 뒤에는 수많은 실업자와 빈곤자살자를 양산하면서 급속한 양극화와 함께 또한 사회 해체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북한은 주체의 사회주의 경제발전을 부르짖고 있으며, 남한은 여전히 세계화와 주가지수와 수출증가율과 연간 몇 %의 경제성장에 목을 매달고 있다. 지금은 연간 몇 %의 경제성장이 된다고 해서 비정규직이 줄어들거나 일반 시민들의 생활이 나아진다거나 하지 않음에도 아직도 이 같은 이데올로기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비자주성이라는 외부 제약을 깨고 한국민 스스로 한국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점이 한국 민주화운동의 가장 큰 의의이자 성과이다. 한국 민주화운동이야말로 비로소 한국민이 한국민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역사선택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민주화운동은 처음부터 민주주의의 본래 뜻대로 강한 평등주의를 지향하고 있었고, 때문에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자립경제, 민족경제라는 대안 이념을 제시하였다. 민주화운동은 그 자체 새로운 자주 자립의 민주사회를 추구하는 강한 이념을 형성하면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오랜 군사독재정권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막강한 국가권력에 맞서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며 싸워 왔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은 모든 억압과 착취로부터 자유로운 개인의 삶을 해방시키는 것과 함께 권력을 소수의 군부나 엘리트로부터 국민들에게 돌려주는 평등의 가치를 실현시키고자 했다. 그것은 비록 수많은 다양한 주장과 의견, 이데올로기가 착종하긴 했지만 단순히 체육관 선거를 직선제로 바꾸자는 프로젝트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경제성장의 과실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문제에서부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거나 완화시키고자 한 밑으로부터의 풀뿌리 운동이었다. 때문에 민주화운동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다.

민주정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이 같은 민주화운동의 만인 평등 추구와 성장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세력의 일부가 정권을 3번이나 잡았는데도 오히려 불평등은 더욱더 심화되었고 여전히 개발독재의 광풍이 전국토를 휩쓸고 있으며, 여전히 성장지상주의만이 판을 치고 있다. 박정희 시대보다도 더한 양극화가 진행되면서 박정희가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지목되고 박정희를 미화하는 주장들이 난무하는 전도된 역사의 역설이 진행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에 이르기까지 역대 민주정부의 무능과 역사의식의 부재를 드러내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런 민주화운동의 시대는 갔다. 그와 함께 개발독재의 미친 시대를 거역하던 강력한 비판자도 사라져 버렸다. 자립경제와 민족경제론이라는 대안 이념은 흔적도 없이 낡은 사회주의 이론의 변종으로 폐기처분되고 말았다. 우리는 지난 60년 동안 성장하고 발전하고 진보했는가. 남한만 보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과 사회, 우리의 국토와 자연의 실상을 돌이켜 살펴보고 새로운 생태공동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오히려 전혀 다른 측면이 보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진보와 발전과 성장은 사상누각의 환상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북한의 사례는 단순히 자립경제의 실패 교훈만이 아니다. 에너지 자원 공급이 끊길 경우 진보고 근대화고 경제성장이고 한순간에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 수도 있다는 실증의 사례이기도 하다. 당장 식량만 해도 그렇다. 여전히 화학농법을 고수하고 있는 북한과 달리 그래도 쿠바는 구소연방의 석유공급이 끊기고나 서 유기농으로 전환해 적어도 식량만큼은 자급자족한 성공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 남한의 세계화된 경제도 그것이 자원착취의 무한성장을 추구하는 한 자원공급이 부족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아노미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의 경우는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선택할 수 있는가**

우리는 진보의 환상에서 빠르게 깨어날 필요가 있다.

모든 문명의 중심에는 에너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수메르문명은 에너지원인 숲을 마구잡이로 파헤친 결과 마침내 멸망으로 치달았다. 마찬가지로 현대문명도 에너지원인 석유를 단 몇 백년 만에 미친 듯이 마구잡이로 퍼다 써버려 이제 석유재앙 5분전의 파국 상황으로 치닫고 있음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특히 나무를 소비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석유를 비롯한 자원 낭비는 예측불가능한 기후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유독성 화학물질 또한 사람뿐만 아니라 지구 생명체 모두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태평양의 이스터섬 사람들은 섬에 있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있었기에 200여개나 되는 모아이 거석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마구잡이로 소나무 숲을 베어낸 결과는 참혹했다. 마침내 소나무 숲이 사라지자 섬의 생태계는 교란되었고 동물들도 사라져 버렸고, 새들도 사라져 버렸다. 자연히 남는 것은 식량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전쟁과 그리고 끔찍한 카니발리즘(식인풍습)이었다. 우리는 이스터섬의 교훈을 아예 모르거나 잊고 지낸다. 이제 우리에게는 이스터 섬의 소나무숲이 얼마 남아 있지도 않다. 화전민들처럼 몇 해 농사를 짓다가 다른 숲으로 이동할 그런 숲은 이제 아예 없다. 그러기에는 인류는 지구상에 너무나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채취할 자원도 이제 거의 거덜나 버렸다.

진보의 가장 위험한 환상은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맹신이다. 과학기술자들은 오로지 무한의 이윤만을 추구하는 기업들과 국가라는 공룡의 지원을 받아 마치 우주 행성개발이 대안인 것처럼 헛된 꿈을 일반인들에게까지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지구는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한 행성이며 대체불가능하다는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또한 과학자들은 에너지 문제는 수소혁명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소는 자연상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수소를 생산하고 이동하고 이용하는데 더 많은 에너지가 든다는 너무도 간단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생명공학자들은 마치 유전공학이 식량문제의 해결책이자 질병을 극복하고 인간의 불로장수를 가능하게 하는 마법램프인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이것은 극단에 다다른 과학기술과 진보의 이념, 진보의 인간관과 생명관을 적나라하게 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한국의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교묘한 과학민족주의를 이용해 생명을 이윤창출의 도구로 만들어버리는, 731부대의 마루타 실험을 감행하고 있는 지극히 위험천만한 시도임을 깨달아야 한다. 지상의 생명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신비이며 대체불가능한 것이다. 도대체 14일 이전의 미성숙 수정란이 생명이 아니라면 그것은 돌덩이나 쇠붙이란 말인가. 생명을 인공으로 키워 다른 생명의 치료용으로 마구 잘라다 쓴다는 그 끔찍한 발상에 열광하는 이 전도된 현실이 바로 진보의 모습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 사회나 집단, 개인의 현명한 적응과 깨어 있는 선택이다. 그것이야말로 역사를 능동의 창조력으로 변화시키고 역사를 결정하는 핵심 요인이다. 전도된 가치관과 과학기술과 진보에 대한 맹신에서 깨어나는 길은 결국 이 같은 현실에 대한 자각뿐이다. 무슨 근대화니 근대성이니 근대의 담론이니 하는 말들은 따지고 보면 산업화의 방향은 피할 수가 없는 역사의 법칙이 아니냐는 인식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이 배경에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은 지극히 자연스런 자연의 법칙이며 인간은 진화의 맨 꼭대기에, 인류의 문명, 특히 서양문명은 진보의 최첨단에 있다는 신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같은 근대화나 진보는 환상임이 드러나고 있다. 근대화와 진보는 몇 백만 년 인류 역사상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 아주 짧은 몇 백 년 동안 수억 년 동안 지구가 비축해 놓았던 햇빛에너지를 그야말로 단기간에 약탈해서 마구잡이로 낭비한 결과로 얻어진 예금통장 까먹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예금통장이 이제 바닥이 나버리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는 불가피하게 삶의 방식을 전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나마 지금 이 순간 하루라도 빨리 전환하는 것이 파산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다. 현대 문명의 위기를 찬찬히 살펴보면 그 바닥에는 사람의 삶의 방식 자체에, 사회가 움직여지는 그 방식 자체에 위기의 가장 큰 핵심 요인이 있다. 모든 문제는 사람 그 자체에 있다. 사람이야말로 지구에서 가장 위험한 생명체이자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범죄자이다. 그리고 모든 대안과 해결책 또한 사람 자체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계몽이 필요한 시기가 아니다. 물론 계몽이 완전히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각성이 필요한 때이다. 우리의 각성과 삶의 방식 전환은 자율과 자치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생태적 전환과 각성은 저항의 민주주의와 참여의 민주주의를 넘어서 자립과 자치의 민주주의를 필요로 한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이제 진보의 이름으로, 당위나 법칙으로 환원해오던 낡은 습관과 낡은 구호를 버릴 때가 왔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이제 새로운 자립과 자치의 민주주의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1960년대부터 간난신고를 헤치고 나온 1970년대, 1980년대의 그 숱한 민주화운동 투쟁과 사건들을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하지도 못한다. 민주화운동 하면 와이에스나 디제이, 좀 더 나아가봤자 몇몇 유명한 이름들을 거론하고 고난에 찬 투쟁이라는 상투어 몇 마디 던지는 것으로 끝나기 일쑤이다. 그러나 1970, 80년대에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걸고 민주주의를 위해, 더 나은 삶을 위해, 비리와 부패와 독재를 없애고 더불어 살 수 있는 사회 정의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싸웠다. 그 당시에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한 행위와 사회 정의를 위한 행위는 동일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민주화운동이란 곧 새로운 대안의 인간관계, 새로운 대안의 사회정의와 평등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역사선택의 무대 전면에 이 같은 일반 민중의 삶의 숨결을, 그 생생한 삶의 육성을 되살려 내야 한다. 그것이 역사를 지배자, 강자 중심의, 죽어가는 그들의 진보하는 역사가 아니라 오늘 살아 있는 우리들의 역사, 생태적 전환과 각성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 선택의 어쩌면 유일한 길일 수 있다. 그것이 오늘날 숱한 혼돈 속에서 도무지 밝게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전망을 그나마 세워 볼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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