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대선을 한 달 앞둔 11월, 황 씨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등 진보 진영의 원로 16인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반한나라당 후보 단일화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대선을 한 달 앞두고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세력이 기세등등한 반면 민주개혁을 주도해 온 사람들은 패배의 위기에 몰리고 있다 (…) 우리 사회에는 아직껏 상식과 몰상식의 대립 구도가 유효한지도 모른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사회악과 냉전적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그 동안 한국의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많은 이들이 열정적으로 헌신해왔고, 이만큼이나마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만들어 냈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우리는 절감한다. 지금이야말로 민주개혁 세력이 한번 더 분발하여 상식의 지배 영역이 넓어지는 미래를 확정 지을 때다." 한 마디로, 이명박 후보는 "역사를 퇴행시키려는 반민주수구냉전세력이자 말이 안 되는 몰상식"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정책으로 민생문제가 첨예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반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아직도 낡은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 매달려 있는 잘못된 개입이라고 비판했다. 구체적으로 이 지면에 2007년 12월 20일 쓴 칼럼(☞관련 기사 : "낡은 87년 체제는 가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정동영으로 대변되는 자유주의진영이 그나마 선거에서 살아남는 길은 그간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발본적으로 자기비판을 하고 문국현 후보처럼 반신자유주의적 대안을 제시하며 다시 민심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자유주의진영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느니 "개성동영"이라는 구호 아래 대북정책을 중심으로 수구 대 개혁의 구도에 매달려 있었고 시민사회의 원로들 역시 철 지난 반수구 반한나라당 로고송이나 부르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역시 낡은 주사파와 민족해방파의 논리에 의해 코리아연방 운운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이제 이번 대선을 계기로 자유주의 진영과 진보 진영이 얼마나 자기개혁을 하고 새롭게 태어나느냐는 것이다. 자유주의진영은 지금이라도 그간의 신자유주의정책에 대해 발본적인 자기비판을 하고 새로운 정체성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위기를 다시 한 번 봉합하려 할 것이 아니라 재창당수준의 대수술을 해야 한다. (중략) 확실한 것은 이명박 정권 역시 신자유주의 정권, 아니 노무현 정부보다 더한 신자유주의 정권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가 현대시절의 신화를 되살려 총량기준으로 경제를 되살려 낼지는 몰라도 사회적 양극화와 민심파탄을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지지한 많은 민초들은 무엇이 문제였는가를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한나라당의 집권에 따라 예상되는 일정한 민주주의의 후퇴에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이 금강산 총격사건 후 급격히 대북강경책으로 돌아서고, 촛불 집회가 사그라진 뒤 돌격전, 속도전을 내세우며 민주주의를 공격하자 입장이 다소 변화했다. 즉 2007년 대선이 신자유주의와 민생문제가 핵심 쟁점이었다는 점은 여전히 맞으며 이명박 정부 하에서도 반신자유주의전선이 가장 중요한 전선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집권 후, 특히 촛불 집회 이후 행각은 내 예상보다 '반민주적'이었다. 이같은 반민주성이 촛불 집회, 금강산 총격 사건 등의 '상황적 산물'(김영삼 정부의 수구화가 남북정상회담 직전의 김일성 주석의 사망이라는 우발적 사건의 결과이듯이)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그 '수구성'과 '반민주성'을 다소 과소평가했던 것 아닌가 하는 자성을 했다. 나아가 죽어가는 민주 대 반민주 전선을 다시 기사회생시키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 정책을 보면서 반MB 전선의 타당성(반신자유주의 전선의 중심성을 전제로 한)을 부분적으로 인정하게 댔다. 예를 들어, 올 초에 쓴 한 글('이명박정부의 속도전과 진보진영의 대응', <진보평론> 39호, 2009년 봄)에서 이같이 주장한 바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보수적 정치인이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으로 대표되는 한나라당 내의 냉전적 보수세력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중도적이고 극우적 이념노선보다는 실용주의를 주장해 왔다. 따라서 이명박 정부가 집권 후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이념공세로 나가리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의 행태는 놀랍다. 국가정체성 운운하며 사실상 전면적인 이념전쟁을 선포하고 나섰고 대북정책 등에서도 실용주의를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 대통령이 그동안 내세웠던 실용주의는 일종의 위장에 불과했던 것인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상황적 산물'처럼 보인다.
이 대통령은 임기 초기에 촛불시위라는 예상하지 않은 복병을 만나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고 임기 초기의 대통령으로는 유례없이 낮은 지지율을 기록해야 했다. 성공신화에 익숙한 이 대통령으로서는 이는 자존심이 심히 상하는 일이었고 그것이 결국 이 모두가 좌파의 음모라는 식의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 아닌가 싶다. 그 같은 인식이 기이한 마녀사냥과 이념전쟁으로 발전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신들이 추진해온 정책의 차질이 좌파적 고위공직자의 저항 탓이라는 기이한 마녀사냥이다. 대북정책도 금강산 총격이라는 우발적 사건이 있었는데다가 사건 직후 행한 국회연설에서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은 유화적 입장을 취한 것이 일종의 족쇄가 되어 이후 강경노선으로 나가게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 이 지면에 2009년 2월 23일 쓴 글(☞관련 기사 : "박근혜 차기 선거운동에 올인한 MB 집권 1년?" 2009년 2월 23일)에서는 이대통령의 첫 일년은 '이명박=중도실용주의, 박근혜=꼴보수'라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신이 꼴보수와 '무대포'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박근혜 의원을 민주적 지도자로 만들어준 한 해"였고 그 결과 이명박=꼴보수, 박근혜=중도실용이라는 식으로 '선수교체'가 일어나고 있다고 풍자한 바 있다
▲ 소설가 황석영 씨와 이명박 대통령. ⓒ연합뉴스 |
황 씨는 이 대통령과 이명박 정부를 중도실용으로 보는 이유로 "스스로 중도실용이라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 또 파문이 커진 뒤 이명박 정부를 진짜 중도실용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이 대통령이 "중도실용을 들고 나와서 당선됐잖냐"고 답했다. 이는 우리가 한 정치 세력의 성격을 그들의 구체적인 정책이나 실천이 아니라 말로 주장하는 것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기이한 논리이다. 그렇다면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정권과 민정당(민주정의당)은 학살세력이 아니라 '민주정의세력'이다!! 민정당, 만만세다!!
황석영 씨가 개인적 인연이든, 노벨문학상에 대한 욕심이든, 어떠한 동기에서든 이 대통령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뭐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유라시아 평화열차'프로젝트처럼 민족의 미래에 대한 '대붕'의 통 큰 기획을 가지고 이 대통령을 현재의 극우적 노선으로부터 공약했던 중도실용노선으로 유도하기 위해 이 대통령을 돕고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현 노선이 중도노선이라는 식으로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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